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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35화 (35/132)

35화

“꺅!”

자신을 부축해 주던 이가 사라지자, 카트리나는 그대로 다시 모래사장 위에 대자로 풀썩 쓰러졌다.

“리,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낯선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당황해 하는 리시언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답장은 나중에 줄게.”

리시언은 뒤돌아선 채로 레스티아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카트리나 님, 리시언 님께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레스티아가 모래사장에 쓰러진 카트리나를 다시 부축하며 물었다.

“응? 그 소년이 리시언이었어?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넷째? 으흠~ 그랬구나.”

하지만 카트리나는 딴청을 피울 뿐, 레스티아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 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라르가 해변에 나타났다.

“쓰러진 건 리시언이라 들었는데.”

어느 상황에서든 완벽한 제복 차림새를 고집하던 제라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얇은 실내복만 입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공작님,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리시언 님이 쓰러졌다고 생각한 건 제 착각이었어요. 쓰러져 있던 건…….”

레스티아가 우물쭈물 말했다.

하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카트리나가 제라르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꺅! 제라르! 정말 오랜만이야!”

“카트리나.”

제라르의 목에 매달린 카트리나는 막 피어난 꽃처럼 생기로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앓는 소리를 내며 해변에 쓰러져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제라르는 카트리나만큼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이동 마법을 써서 왔나.”

그저 환영 인사라고 하기도 모호한 말을 건넬 뿐이었다.

두 사람의 온도차가 너무나도 커서 지켜보는 레스티아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엄. 네가 불렀는데, 빨리 와야 하지 않겠어? 이동 마법은 불안정해서 위험하지만, 나는 널 위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

카트리나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제라르를 바라봤다.

하지만 제라르는 따스한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카트리나가 툴툴거렸다.

“어휴, 그래, 제라르. 너를 만족시키려면 네가 시키는 일이나 충실하게 해야겠지. 그럼 어디 보자.”

그리고 다시 레스티아를 향해 등을 돌렸다.

흐릿한 초점을 가진 오팔 색 눈동자가 다시 레스티아를 향했다.

“나를 찾아와 준 이 꼬마 아가씨가 제라르, 네가 말한 막냇동생이야?”

“그래.”

“그럼 바로 확인해 줄게.”

카트리나가 레스티아의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시선을 고정했다.

레스티아는 주춤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머, 꼬마 아가씨, 무서워하지 말아요. 이제부터 아가씨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진실을 알려 줄 테니까.”

“진실……이요?”

“그래요. 자, 내게 질문하세요. 그럼 내 마안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려 줄 테니.”

레스티아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카트리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카트리나가 설명했다.

“간단해요. 아가씨의 질문에 내 눈이 녹색으로 변하면 진실. 붉은색으로 변하면 거짓이야.”

그것이 록베스트 가문의 마안이 가진 힘이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는데도 신기해.’

지난날 레스티아는 서재를 뒤져 록베스트에 대해 알아보았다.

록베스트 백작가.

마안이 대답하는 절대적인 진실.

타인도 그 진실을 함께 볼 수 있기에 막강한 공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레스티아가 품고 있는 의문점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제라르가 선택한 방법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이었다.

레스티아는 두려웠다.

카트리나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자, 어서. 궁금하지 않나요?”

카트리나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레스티아는 결심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대로 영원히 의심을 반복하면서 베르체스터로 살 수는 없는걸.’

두어 번의 심호흡 끝에 레스티아는 카트리나를 향해 질문했다.

“제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피를 이은 진짜 공녀가 맞는지 궁금해요.”

“잘했어.”

카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제 내 눈을 잘 봐.”

오팔 색 눈동자에 자리 잡은 동공이 다시 한번 고양이의 눈처럼 가로로 확 좁아졌다.

그리고 홍채가 짙은 무지개색으로 물들었다.

레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신비로운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켜봤다.

짧은 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어둑한 바다가 레스티아를 삼키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가르며 카트리나가 눈꼬리를 곱게 접었다.

마안이 진실을 뜻하는 진녹색으로 변한 것이다.

“자, 진실이네요. 그렇지?”

그동안 레스티아가 걱정했던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온갖 복잡한 기분이 레스티아를 휘감았다.

“제가 정말로…….”

“그래요, 베르체스터의 꼬마 아가씨. 내 마안은 어떤 질문에도 진실만을 대답한답니다. 믿어도 좋아.”

“진짜…… 진짜로 제가 베르체스터였군요.”

카트리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는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제라르, 딱딱하게 서 있지 말고 동생한테 뭐라도 말해 줘. 꼬마 아가씨가 많이 놀랐잖아.”

그제야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제라르가 짧게 말을 꺼냈다.

“확인이 끝났군. 그럼 집으로 돌아가지.”

카트리나는 제라르가 너무 무뚝뚝하다며 핀잔을 줬다.

그러나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말에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네, 제라르 오라버니.”

레스티아는 제라르를 더 이상 공작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 변화에 제라르는 흡족한 듯 양 입꼬리를 작게 말아 올렸다.

“어머, 제라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제라르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카트리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 * *

카트리나는 베르체스터 성에 도착하자마자 제라르의 집무실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털썩 몸을 뉘었다.

“휴, 뼈가 쑤시네. 허공에서 뚝 떨어지다니. 모래사장이 아니었음 죽을 뻔했어.”

그리고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제라르를 힐끗 쳐다봤다.

“제라르, 여동생 귀엽더라. 똘똘하고 착해 보여.”

“…….”

제라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제라르가 동생을 칭찬하는 말을 좋아하고 있다 여겼다.

‘늘 무표정하지. 하지만.’

그 무표정은 매 상황마다 미묘하게 달랐다.

“그나저나, 제라르. 황태자가 너한테 잔뜩 화가 났던데.”

“…….”

방금 전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무표정과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무표정이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무리한 거 아니야?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조엘에게 전해 들었어.”

“화가 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제라르는 살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자가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

“으흠, 그건 그렇지.”

카트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리히엔이 레스티아를 납치했던 일에 조금의 증거라도 남겼다면, 제라르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제라르 베르체스터는 전쟁 영웅이었고,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냉혈한으로 악명 높았다.

‘푸른 눈의 사신, 이라고들 불렀지.’

그런 잔혹한 모습도 멋지고 말이지.

카트리나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제라르를 응시했다.

흐릿한 시야에도 이렇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남자라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라르를 처음 본 어린 나이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줄곧.

그래서 카트리나는 항상 제라르의 곁을 맴돌았다.

“그럼 할 말은 끝났나, 카트리나.”

하지만 제라르는 카트리나가 곁에 있는 것이 피로하다는 듯 굴 뿐이었다.

“아니야!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카트리나는 제라르와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 들었다.

“아까 보니까 네 여동생 곁에 남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

“리시언이라고 했나?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넷째. 그 아이. 참 묘하던걸? 꽁꽁 숨겨 두는 이유가 있었네.”

리시언이 언급되자 제라르의 눈매가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개의치 않고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지만, 신기한 마력을 가진 아이였어. 저기, 그 아이는 아무래도 -일까?”

제라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겨울처럼 차갑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카트리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으흠, 내가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아 버린 이상, 당장이라도 내 숨통을 끊어 버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비롭네, 제라르.”

그리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 쓸모가 많아서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걸까. 아니면 너도 약간은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카트리나는 제라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마안을 발동시켜 제라르에게 진실을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채, 눈을 꼬옥 감았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서 휘청휘청 제라르를 향해 걸어갔다.

“제라르, 걱정 마.”

카트리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더듬더듬 제라르의 뺨을 쓸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력보다 손끝의 감각으로 사물을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내 입을 막는 건 간단해. 키스하게 해 줘. 늘 그랬던 것처럼.”

제라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제라르를 끌어당겨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그리고 쓰게 미소 지었다.

“나쁜 남자, 나를 이렇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제라르 베르체스터.”

* * *

다음 날부터 레스티아에게는 선생님이 한 명 더 생겼다.

“안녕! 꼬마 아가씨. 아가씨에게 오늘부터 마도서 응용법을 알려 주기로 한 카트리나 록베스트예요.”

“네? 마도서를요?”

“그래요. 나는 마안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마도서를 연구했거든. 뭐든 물어봐도 좋아요!”

제라르가 카트리나에게 부탁한 일 중 하나였다.

-레스티아는 ‘해석하는 자’다. 그 힘이 위험하지 않도록 네가 기본적인 교육을 해 주었으면 한다.

‘뻔뻔한 남자. 키스 한 번에 동생 교육까지 맡겨 버리다니. 하아아, 정말 나쁜 남자야.’

카트리나는 툴툴거렸으나, 내심 이 상황이 즐거웠다.

어차피 아카데미는 방학 중이었고.

베르체스터 성에 머무를수록 제라르를 오래오래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꼬마 아가씨가 200년 만에 나타난 ‘해석하는 자’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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