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레스티아는 리시언에게 몇 번이고 꼭 와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리시언이 만들어 준 불나비를 따라서 방으로 돌아갔다.
“…….”
리시언은 팔짱을 낀 채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레스티아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신중하게 자박자박 걸어가는 걸음새가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의 글자체를 떠올리게끔 했다.
편지에는 레스티아가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가득했다.
-리시언 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최근에 조엘 오라버니와 마티어스 오라버니와 함께 서재에서 공부를 하곤 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리시언 님도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아, 공부를 봐 달라거나 하는 귀찮은 부탁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조엘 오라버니가 해 주시고 계시거든요.
그냥, 리시언 님께서 책을 읽는 걸 좋아하시니까, 읽는 김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싫으시면 답장을 주세요.
제가 이 편지를 제대로 잘 썼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요.
이 편지가 마음에 안 드셨다면, 첨삭도 환영합니다.
못 썼다고 화를 내셔도 좋아요.
‘……화를 내도 좋다니. 결국 싫으나 좋으나, 반응을 해 달라 이거잖아.’
리시언은 레스티아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래서 바쁘다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레스티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하고 있었다.
‘용감한 줄 알았더니, 영악하기까지 하네.’
불쌍한 토끼 한 마리를 잠시 임시 보호했을 뿐인데, 그 토끼가 이렇게 꾀까지 써서 제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레스티아가 마냥 순진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한번에 멀어지는 것보다는 천천히 멀어지는 게 좋을지도. 답장 정도는 써 줘도 되겠지.’
어차피 레스티아와는 필히 멀어지게 되어 있으니,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오늘은 바쁘겠어.”
레스티아와 약속한 대로, 그녀가 잠들기 전까지 베르체스터 성으로 돌아오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리시언은 검술 수련을 끝마치자마자, 홀로 말을 타고 베르체스터 성 밖으로 나섰다.
수도에서는 외출을 삼가며 각별히 몸을 사려야 했다.
하지만 베르체스터 공작령에서는 그렇게까지 몸을 사릴 필요가 없었다.
긴 로브로 몸을 가리는 정도면 충분했다.
* * *
리시언이 도착한 곳은 무역항의 가장 후미진 골목이었다.
골목은 대낮인데도 빛 한 점 없이 어두웠고, 사람 하나, 쥐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꺼림칙한 곳이었으나 리시언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다른 이가 리시언을 보았다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의 틈새로 그것을 집어넣었다.
쿠구궁-.
은화를 날름 받아먹은 담벼락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하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만들어 냈다.
리시언은 조금의 거리낌도 내비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리시언 님. 날이 갈수록 그분의 용모를 닮아 가는 것 같군요.”
음산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며 리시언을 반겼다.
리시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어둠 속에서 창백한 손이 뻗어 나와, 리시언의 앞으로 공손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지시하신 대로 ‘진실의 계승자’들에 대해 현존하는 모든 정보를 모았습니다. 모르카티움 황족에 의해 와해된 지 오래된 단체지만 명맥은 남아 있었습니다.”
리시언은 봉투를 주저 없이 북 뜯었다.
그리고 불나비를 만들어 내어 어둠을 밝힌 채,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리시언의 눈이 조금 놀란 듯 커졌다가 이내 다시 좁혀졌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리시언이 들고 있던 봉투는 화르륵 타올라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하시는 것을 얻으셨습니까?”
“그래.”
리시언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들어왔던 그대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음산한 목소리가 리시언을 막아섰다.
“리시언 님, 준비가 끝나갑니다.”
“…….”
“부디, 언제든 명령을.”
리시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로브를 눌러쓴 채 자리를 떴다.
* * *
레스티아는 하루 종일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 왜 이렇게 늦으시는 거지? 리시언 님이 허튼 말을 할 분은 아닌데.’
벌써 밖은 어둑해졌는데, 리시언이 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하루 종일 바쁘게 보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아.’
레스티아는 초조하게 방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여기, 이쯤에서 보면 성문 밖 길이 잘 보였던 것 같은데.’
리시언이 어디까지 왔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길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레스티아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시선을 돌려 바닷가를 바라봤다.
하얀 백사장은 밤하늘 아래에서도 유독 빛을 발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잠이 안 올 때면, 창문에 매달려서 해변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해변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건…… 뭐지?”
자세히 보니, 긴 로브를 입은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세상에, 설마!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자기도 모르게 리시언의 이름을 외치며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호위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레스티아의 뒤를 쫓았다.
“아무래도 리시언 님이 해변에 쓰러져 계신 것 같아요!”
“예?”
“어떡해! 또 마력 중화석이 깨진 건 아니겠죠?”
“이런! 혹시 모르니 저는 공작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스티아의 말에 호위 기사 한 명은 제라르에게 달려가고, 나머지 둘은 레스티아를 따라나섰다.
“어떡해. 어쩜 좋아.”
레스티아는 치마를 양손으로 꼭 쥔 채 성문으로 달려나갔다.
“아가씨! 그렇게 뛰시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조심하세요.”
호위 기사들이 충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급하게 달려가는 레스티아의 왼쪽 손목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레스티아는 그게 자신을 걱정하는 호위 기사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괜찮아요! 나는 걱정하지 말아요! 이 정도는 뛸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손목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손목을 잡아챈 이는 그대로 레스티아의 오른 손목까지 잡았다.
레스티아는 결국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자신을 막아선 이와 마주해야 했다.
“야,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나를 마중 나온 것치고는 소란스럽잖아.”
익숙한 목소리와 금빛 눈동자.
뜻밖에도 자신을 막아선 이는 리시언이었다.
레스티아는 놀라서 입을 벙긋거렸다.
“어? 리시언 님? 분명 해변가에 쓰러져 계셨잖아요……?”
그 말에 리시언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무슨 헛소리야. 너, 나를 너무 약하게 보는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있을 사람으로 보여?”
“그게…….”
레스티아는 곤란해졌다.
지난번 저택에서 불이 났을 때, 리시언이 잘못될까 봐 걱정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리시언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퐁퐁 솟았다.
레스티아는 슬쩍 리시언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파란 마력 중화석이 제대로 손가락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지금 리시언은 위험하지 않았다.
되려 조금 화가 난 듯한 리시언을 상대해야 하는 자신이 더 위험해 보였다.
“그게요……. 해변에 긴 로브를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그랬어요.”
그래도 리시언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레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네, 리시언 님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에요.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살펴보러 가야겠어요.”
레스티아는 다시 해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리시언도 ‘하여간 쓸데없이 착해.’라고 말하곤 그 뒤를 따랐다.
레스티아의 말대로, 해변에는 긴 로브를 입은 여인이 엎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떨어져 있었다.
레스티아가 후다닥 달려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으으…….”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리시언이 쓰러진 여인을 부축해 앉혔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기다란 로브가 벗겨지며, 풍성한 흑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 누군지 몰라도 고마워요. 이동 마법이 잘못돼서 엄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지 뭐야. 으윽, 아파라.”
여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와아…….”
여인을 정면에서 마주한 레스티아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고아한 매력을 가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목구비보다 그녀의 눈동자에 더 시선이 갔다.
홍채가 오팔 보석처럼 무지갯빛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느껴지는 마력.
레스티아는 그녀가 마법사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후, 하고 호흡을 가다듬더니만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레스티아에게 질문했다.
“저기, 꼬마 아가씨. 아? 꼬마가 맞겠지? 내가 눈이 안 좋아서. 아무튼 미안한데, 여기가 베르체스터 공작령이 맞나요?”
기묘한 시선이었다.
여인은 레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으나, 묘하게 초점이 어긋나 있었다.
“아, 네. 맞아요. 베르체스터 공작령이에요.”
“다행이다. 그래도 엄한 데 떨어진 건 아닌 것 같네. 저기, 미안한데 나를 공작가로 데려다주겠어요?”
“네?”
“카트리나 록베스트가 왔다고 하면 공작님께서 두둑하게 금화를 챙겨 줄 거예요.”
카트리나 록베스트.
제라르가 초대하겠다던,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마안을 가진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아! 당신이……!”
레스티아가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려 할 때였다.
“어라, 그런데 내 뒤에 있는 소년. 너는 누구지? 마력이 정말 오묘한데? 익숙하고 말이야.”
카트리나가 저를 부축하고 있는 리시언의 팔을 꽈악 잡았다.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던 오팔색 눈동자를 리시언에게 고정했다.
그러자 카트리나의 동공이 고양이의 동공처럼 확 좁아졌다가 더욱 짙은 무지개색으로 물들었다.
“말해 봐, 소년. 당신은 누구지? 스스로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레스티아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모래사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리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신경질적으로 로브를 턱 끝까지 내리더니, 카트리나를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