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제 보니 작은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군.”
제라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뻗어서 그대로 그녀의 둥그런 이마를 한 번 툭- 건드렸다.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 커다랗게 눈을 뜨고 제라르를 올려다보았다.
제라르의 표정은 변함없이 딱딱했으나, 전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보다 더 정확한 방법으로 알려 주마.”
“말보다 더 정확한 방법이요?”
“그래. 그러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쉬어라.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그 후, 제라르는 레스티아를 그대로 지나쳐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호칭 문제는 딱 그때까지만 유예하도록 하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겨 둔 채로.
레스티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조엘과 마티어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리시언이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제라르의 화법이 너무나도 간략했기에 해석이 필요했다.
“저…… 오라버니들,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정확한 방법이라는 게 뭘까요?”
“으윽. 분명 그 여자를 부를 생각이겠지.”
마티어스가 소름 돋는다는 듯, 제 양팔을 한 번 쓸어내렸다.
“네? 그 여자요?”
레스티아가 되물었으나, 마티어스는 답하기가 곤란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답지 않은 모습에 레스티아는 더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었다.
조엘이 피식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카트리나 록베스트를 말하는 거야. 아카데미에서 마티어스의 담당 교수님이기도 했지.”
“으윽. 그래, 리티. 정말…… 무시무시한 여자야.”
레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마티어스의 교수님이 베르체스터 공작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조엘이 첨언했다.
“카트리나는 마법사거든. 진실을 볼 수 있는 마안의 소유자지. 그래서 마티어스가 아카데미에서 사고치고 얼버무릴 때마다 거짓말을 숨길 수 없었단다.”
“야! 조엘! 그걸 리티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마티어스는 민망한 듯 레스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 갈수록 ‘최고로 멋진 오라버니’의 위치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카트리나 록베스트가 가진 마안에 더 흥미를 보였다.
“마법으로 진실을 볼 수 있다니.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한가요?”
“그래. 정말 신기하지? 곧 볼 수 있을 거야.”
조엘이 우아한 동작으로 눈앞에 놓인 와인 글라스를 들어 입을 축이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레스티아, 너는 내 동생이 맞아. 형님께서 카트리나를 초대할 정도로 확신하시니까.”
“……네.”
레스티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렴.”
조엘은 빙그레 웃으며 레스티아의 앞으로 후식을 더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 * *
제라르의 말대로 레스티아는 다음 날부터 정신없이 바빠졌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공녀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정말로 많았다.
예법은 기본이요, 역사와 문학, 산술을 비롯한 각종 학문은 물론 기본적인 체술에 검술까지 익혀야 했다.
“세상에, 아가씨. 아무래도 공작님께서는 아가씨를 철인으로 만드실 생각이신가 봐요.”
레스티아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도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작되는 레스티아의 일정은 도라가 보기에도 가히 살인적이었다.
“진짜 말도 안 돼요. 밥 먹는 시간만 빼고는 계속 공부만 하고 계신 거잖아요!”
“도라, 저는 괜찮아요. 헤일록 집사님이 말하길, 오라버니들도 어렸을 때 이 정도는 배웠다고 하셨는걸요.”
“어휴! 그건 도련님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요! 아가씨는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요령껏 해야 하는 거 아시죠?”
호위 기사들 역시 도라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라의 말이 맞습니다. 아가씨! 힘드시면 체술이나 검술 정도는 설렁설렁하십시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되는 건데! 왜 그런 걸 배우셔야 하는 건지!”
레스티아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다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결코 요령을 피우거나,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것은 매번 즐거웠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과거에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꽃을 팔던 시절에 비하면 크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레스티아의 모습을 마티어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리티, 리티, 벌써 며칠째야. 나랑 놀아 주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고 있잖아?”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의 책상 앞에 턱을 괸 채, 자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반짝반짝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
“오늘 일정은 끝난 거지? 그럼 해 지기 전에 빨리 나가자! 바닷가에 놀러 가기로 했잖아.”
하지만 레스티아는 곤란한 듯 손에 들고 있는 두툼한 책을 고쳐 잡았다.
“어쩌죠, 마티어스 오라버니. 저는 오늘 복습할 것이 남아 있는걸요. 이걸 끝내야 해요.”
“으윽, 불쌍한 리티. 큰형 때문에 억지로 재미없는 걸 계속해야 한다니.”
“네? 아니에요. 정말 재미있어요.”
“으악! 리티! 공부가 재미있다니. 너도 베르체스터에 물들었어! 이게 다 큰형 때문이야!”
마티어스는 소중한 놀이 상대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마티어스, 동생 괴롭히지 마.”
조엘이 우아한 걸음으로 레스티아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스티아, 힘들지? 간식 먹으면서 하렴.”
조엘의 뒤편으로 하녀들이 트롤리를 밀고 나타났다.
트롤리 위에는 보기만 해도 달콤한 조각 케이크들과 과일, 쿠키들이 종류별로 가득했다.
“공부를 할 때 단것을 먹으면 좋거든. 나도 늘 챙겨 둔단다.”
“와, 정말 맛있겠어요. 고맙습니다, 조엘 오라버니.”
레스티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마티어스가 조엘을 노려봤다.
“조엘, 치사해. 또 간식으로 리티를 꾀어내다니.”
“꾀어내다니 무슨. 이게 바로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챙기는 방법이란다, 마티어스.”
조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레스티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레스티아가 익히기 시작한 초급 서적들 사이로 제법 어려워 보이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음, 내 동생. 벌써 이런 것까지 읽고 대단한데?”
“아, 그 책은 아직 읽을 수 없지만 그냥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네에…… 목표로 두고 싶어서요.”
레스티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조엘이 가리킨 책은 일전에 리시언이 읽던 책 중 하나였다.
언젠가 자신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목표 삼아 책상 위에 올려 둔 것이었다.
“으흠. 그래, 레스티아. 혹시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내게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아, 정말로 그래도 될까요?”
“그럼, 물론이지. 그래, 내친김에 함께 공부하는 것도 좋겠어. 나도 다음 학기 수업 내용을 미리 봐 두는 게 좋을 테니까. 괜찮을까, 레스티아?”
“저, 저는 좋아요!”
레스티아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마티어스가 투정을 부렸다.
“리티, 너무해! 나랑은 안 놀아 주고, 조엘이랑만 놀겠다고?”
“아! 그럼 마티어스 오라버니도 함께 공부하실래요?”
“뭐, 뭣?”
레스티아의 말에 마티어스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리티, 지금 나보고 공부하자고 한 거야?”
“네! 마티어스 오라버니도 조엘 오라버니처럼 다음 학기 수업을 준비하셔야 하잖아요!”
“어? 그…… 그건.”
마티어스가 곤란함을 숨기지 못하자, 조엘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핫! 하하, 레스티아. 마티어스는 1년 전에 아카데미를 자퇴했단다. 공부할 필요가 없지.”
“네? 자퇴요? 마티어스 오라버니, 그게 정말인가요?”
레스티아는 마티어스가 아카데미를 자퇴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무척 어렵다고 들었는데…….”
레스티아는 가정교사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황립 아카데미는 모르카티움 제국의 젊은 인재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입학도, 졸업도, 무척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자제들은 대대로 황립 아카데미에서 학위를 수료했으니, 레스티아도 입학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곳에 입학했는데 자퇴했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티, 왜? 너도 내가 한심한 거야?”
“네? 한심하다니요! 아니에요! 마티어스 오라버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으신 거잖아요! 그렇죠?”
“아니, 그건 말이지…….”
마티어스는 곤란해졌다.
믿어주는 레스티아에게 정말 미안하게도…… 아카데미 자퇴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형에 대한 반항심이 전부였을 뿐.
분명 때려치울 때는 앞으로 후회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레스티아가 이렇게 자신을 신뢰하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해 버리면 못난 오라버니가 되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아니야, 리티. 나는 그냥…… 인생을 즐기기 위해 잠깐 쉰 거야. 완전히 때려치우지 않았어. 다시 다닐 거야.”
“아? 그러셨군요!”
레스티아는 활짝 웃으며 너무나도 쉽게 납득했다.
그리고 곧바로 예의 제안을 다시 꺼냈다.
“그럼 마티어스 오라버니도 저랑 조엘 오라버니와 함께 공부해도 되겠어요!”
“어……?”
“아, 싫으신가요? 같이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어. 그래! 나도 리티가 모르는 거 알려 줄게! 나만 믿어, 리티!”
그렇게 예기치도 못하게 마티어스의 아카데미 복학이 결정되었다.
“하하하!”
조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손 놓은 망나니 하나를 개과천선시키고 있는 막냇동생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뭐야, 조엘. 너 왜 그렇게 웃어. 어디 아파?”
마티어스 또한 당황했다.
조엘이 이렇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베르체스터 공작가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공작님, 마티어스 도련님께서 요즘 조엘 도련님과 레스티아 아가씨와 함께 서재에서 공부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 녀석이?”
항상 무심하게 동생들에 대한 보고를 전달받던 제라르가 다시 한번 되물어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 심지어 다음 학기에는 아카데미에 복학하신다고 합니다.”
“뭐? 복학?”
“외람되오나…… 혹시 모르니 의원을 불러 마티어스 도련님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제라르는 짧게 답했다.
“그렇게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