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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31화 (31/132)

31화

“왔군.”

식당에는 뜻밖에도 제라르가 있었다.

그는 넓은 식탁에 홀로 앉아 권태로운 듯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동생들을 맞이했다.

“뭐야. 형도 같이 식당에서 먹기로 한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빵긋빵긋 웃던 마티어스의 얼굴이 제라르를 마주하자마자 순식간에 와락 구겨져 버렸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전처럼 큰소리로 제라르와 대립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레스티아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히 서 있을 뿐이었다.

‘으흠. 신기한 풍경인걸.’

조엘은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봤다.

어린 시절부터 마티어스는 제라르와 마주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녀석을 저지하기 위해 얼마나 진을 뺐던가.

설득, 회유, 협박 등등 안 해 본 것이 없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마티어스가 이렇게 온순하게 변할 줄이야.

가출도 안 하고 집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특한데 말이다.

‘내 막냇동생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네.’

마티어스뿐만이 아니었다.

제라르의 태도도 낯설었다.

독선적인 맏형이 이렇게 친히 동생들과 함께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 또한 처음 있는 기행이었다.

조엘은 이런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 낸 레스티아의 존재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사람 하나 새로 들어왔다고, 이렇게 변할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조엘은 레스티아에게 정을 줄 생각이 없었다.

같은 아버지를 둔 사이로 적당히 의무만 행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레스티아는 점점 더 베르체스터에 없으면 아쉬운 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자신이 이룩해 낸 이 엄청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지? 공작님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레스티아는 불시에 마주하게 된 제라르가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또다시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무서웠다.

‘…아니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자. 드디어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잖아. 좋은 일인걸.’

레스티아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리면서 떨리는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리시언 님께서 분명 공작님은 말수가 없을 뿐,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

레스티아는 눈동자를 슬쩍 굴려 리시언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식당에는 리시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리시언 도련님께서는 방에서 따로 식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레스티아가 리시언을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집사 헤일록이 낮은 목소리로 레스티아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렇군요. 하긴, 피곤하실 테니까요.”

레스티아는 실망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헤일록이 빼내 준 의자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널찍한 식탁 위로 만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형님과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 말입니다.”

조엘이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제라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마티어스는 “잘나셨어, 정말” 하고는 빵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레스티아는 속으로 식사 인사를 전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일전에 연습했던 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침묵 속에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은 베르체스터 남매들 모두에게 낯설고 어색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깨질 것 같지 않던 침묵은 디저트가 나온 후에 깨졌다.

시종일관 레스티아에게는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던 제라르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이다.

“의외로 식사 예법은 나쁘지 않군.”

갑작스러운 말에 레스티아는 놀랐으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헤일록 집사님께 배웠어요. 식사 정도는 스스로 하고 싶어서요.”

레스티아의 말에 조엘과 마티어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완벽에 가까울 만큼 식사 예법을 익힌 레스티아가 기특했다.

하지만 제라르의 평가는 냉혹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너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겠지.”

그 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레스티아의 손이 살며시 떨렸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수긍했다.

“……노력하겠습니다.”

탕.

마티어스가 불만스레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형, 그냥 칭찬해 주면 안 돼? 리티가 얼마나 힘들게 익힌 건데, 거기다 대고 부족하다 그래?”

레스티아가 재빨리 만류했다.

“아니에요, 마티어스 오라버니. 공작님께서는 제가 베르체스터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하신 걸 거예요.”

“뭐? 리티, 그렇게까지 큰형을 두둔할 필요 없어.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쁘다고 말해야 해. 네가 전부 맞춰 줄 필요 없단 말이야.”

“기분 나쁘지 않아요. 공작님 말씀이 맞는걸요. 저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으로서 한참 부족해요.”

“무슨! 리티, 그렇지 않아.”

“아니에요.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예법도 어색하기만 한걸요. 하지만 저는 공작님 말씀처럼 더 잘하고 싶어요.”

그 말에 모두의 이목이 레스티아에게 집중됐다. 레스티아는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했다.

“그동안 제게 충성을 맹세한 호위 기사가 세 명이나 생겼어요. 저는 제 부족한 점을 채워서 그들의 충성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베르체스터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퍽 어른스러운 대꾸였다.

레스티아를 마냥 어린아이로만 생각하고 있던 조엘과 마티어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제라르는 한쪽 입꼬리를 아주 살짝 말아 올렸다.

“좋다. 내일부터 네게 이것저것 알려 줄 수 있는 선생을 붙여 줄 생각이다. 정진하거라.”

“고맙습니다, 공작님.”

레스티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라르는 레스티아가 자신을 공작님이라고 부르자마자 미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를 곧장 아래로 내려 버렸다.

“하지만 나를 칭하는 호칭은 지금 당장 고치도록.”

“네? 그게 무슨.”

레스티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나 싶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제라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레스티아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나도 오라버니라 부르란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게 맞는 호칭이다.”

“그렇지만…….”

레스티아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주인을 오라버니라 스스럼없이 부를 만큼의 확신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제라르는 그 망설임을 조용히 지켜보다 질문했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너는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네……?”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다면 대답을 주저할 필요가 없지. 방금 전에 호위 기사들을 생각하던 모습처럼 말이다.”

“아.”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라르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로 당연하다고 여겼다면, 자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오라버니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계속 친동생임을 의심하고 있다는 속내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건 레스티아의 신분을 보증해 준 제라르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 같았다.

이 고민을 눈치챈 조엘이 대신 말을 꺼냈다.

“형님, 레스티아에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해 주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저라도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군.”

제라르가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너는 내 아버지의 딸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서에 너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유서라는 말에 레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제라르를 바라봤다.

조엘과 마티어스 역시 맏형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배다른 막냇동생의 출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제라르만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서를 읽을 수 있는 권한이 가문의 후계자에게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제라르가 어떤 말을 꺼낼지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는 코르티잔이었다. 아버지와는 수도에서 만나 너를 낳았다고 하더군.”

레스티아는 자신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자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저, 죄송하지만…… 코르티잔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제라르가 간략히 답했다.

“고급 창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형! 진짜!”

마티어스가 불만을 숨기지 않고 제라르에게 항의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레스티아는 이제 11살밖에 안 됐어. 어린애한테 그런 식으로 전부 말해야 해?”

마티어스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르에게 덤벼들 것처럼 살벌한 기운을 내비쳤다.

그러나 레스티아의 눈치를 살피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저 제라르를 노려보며, 레스티아가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맏형의 화법에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마티어스의 걱정과는 다르게 초연했다.

“마티어스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제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삼촌에게 줄곧 들어왔는걸요.”

“리티…….”

레스티아의 차분함에 마티어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조엘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창부라거나 코르티잔 같은 단어는 더 나이 먹은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이런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오빠라는 역할에 몰입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채 맏형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라르는 마티어스와 조엘의 불만 섞인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리더라도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야, 의심이 사라질 테지.”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레스티아에게 올곧게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는 너를 낳자마자 사망했다. 아버지는 네가 마법사로서의 자질이 보이지 않아 거두지 않고 여자 쪽 가족에게 맡겼다고 하더군.”

“……그게 삼촌이었군요.”

“그래. 아버지는 그자에게 충분한 양육비를 지급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네?”

“원석을 진창에 던져두어서는 안 될 일이지. 너는 베르체스터의 피를 이은 아이니까. 우리 대에 형제가 많이 태어나긴 했으나, 원래 손이 귀한 집안이다. 그리고 그 핏줄은 이은 자는 중에 모자람을 보인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치맛자락을 꼭 쥔 채, 고민에 빠진 눈초리였다.

“질문할 게 많은 모양이군.”

제라르가 채근했다.

“묻거라.”

레스티아는 그제야, 눈을 질끈 감고 제 생각을 말로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제가 전대 공작님의 피를 이었다고 확신하시나요? 저는 속성 마법도 쓰지 못하는걸요. 게다가 제 어머니는 아시다시피 신뢰하기가…….”

삼촌이 매일같이 말했다.

네 엄마는 몸을 팔다 객사한 여자라고.

그래서 네 아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거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꽃을 사 가는 남자들 중에 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르니 잘 찾아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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