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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28화 (28/132)

28화

“……공작님.”

레스티아는 제라르와 마주하자마자 바짝 긴장했다.

확실히 제라르는 등장만으로도 공간을 차갑게 얼려 버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굴하지 않고 인사를 건네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레스티아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제라르가 먼저 레스티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부터, 거슬리는군.”

“네……?”

뜻밖의 말에 레스티아의 혀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도대체 레스티아의 무엇이 제라르에게 거슬린 걸까?

레스티아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공작님…… 제가…….”

“뭐야, 형!”

하지만 레스티아가 무어라 말도 꺼내기 전에, 마티어스가 먼저 제라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왔으면 조용히 들어가지, 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리티한테 시비를 거는 건데?”

마티어스의 등장에 제라르는 피로한 듯 미간을 좁혔다.

“마티어스, 네게 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형이 내뱉는 막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으라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무례하구나, 마티어스.”

“무례한 건 형이야.”

마티어스는 당장이라도 제라르에게 덤빌 기세였다.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서 마티어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마, 마티어스 오라버니! 싸우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마티어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레스티아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섰다.

잔뜩 겁을 먹은 레스티아가 커다란 눈을 마티어스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어어……? 리티, 놀랐어? 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잔뜩 긴장한 레스티아는 누가 봐도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리시언이 단걸음에 걸어와 레스티아를 덥석 품 안으로 안아 들었다.

“이리 와. 바보들끼리 벌이는 신경전에 네가 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성큼성큼 배 안의 선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리,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리시언이 입고 있는 로브를 그러당겨 움켜잡았다.

그 탓에 리시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가 흘러내리며 잘생긴 이목구비가 전부 드러났다.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결국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

레스티아는 잠시 말없이 리시언의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보니, 유독 더 신비롭고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리시언의 말에 레스티아는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예쁘다고 너무 대놓고 구경한 것이 민망했다.

“아, 아니에요. 저어…… 내려 주세요. 지금은 다친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걸요.”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품 안에 움켜쥐고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됐어. 네 걸음 속도에 맞춰 걷는 건 답답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돌처럼 굳은 채로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어?”

“아.”

그러고 보니, 놀라서 굳은 근육들이 아직 경직된 채였다.

하지만 역시, 제라르와 마티어스를 두고 온 것이 신경 쓰였다.

“리시언 님, 그래도 역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공작님께서 거슬리신다고 하는 걸 보면, 제가 뭔가 잘못한 게 분명해요. 사과드려야…….”

하지만 리시언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 네 탓이 아니야. 제라르가 이상하게 말했지만 너한테 화가 난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네?”

“정말로 화가 났다면, 우리가 탄 범선이 이대로 있을 리가 없겠지. 사방이 물이니까, 제라르의 감정에 반응했을 거야.”

레스티아는 단박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택이 불에 탔을 때, 사방에서 내리던 비.

제라르가 사용한 물의 마법이라지만, 그 마법에서 어렴풋이 분노가 느껴졌던 것이 기억났다.

“속성 마법은 마법사의 감정에 반응할 때가 많아. 제라르가 유독 심한 편이지.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걱정 마.”

“그, 그래도 저 때문에 마티어스 오라버니와 공작님이 다투신걸요.”

리시언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네?”

“제라르와 마티어스는 만나기만 하면 저렇게 싸워 대니까. 한 명은 너무 과묵하고, 한 명은 너무 시끄럽지. 그래서 둘이 마주치면 항상 불필요한 문제가 생기곤 해.”

“그럼…….”

“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뜻이야. 내버려 둬. 서로 죽이지는 않으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어.”

서로 죽이지는 않으니 괜찮다, 라.

그 말이 지독하게 살벌하게 느껴졌다.

보통 형제끼리는 이런 말을 하고 지내는 걸까.

오랫동안 형제가 없었던 레스티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였다.

하지만 리시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객실의 침대로 레스티아를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더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네가 원한다면 전부 태워 버릴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리시언 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뭐,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넌 착하니까.”

“서, 설마. 저를 놀리신 거예요?”

“용케 그건 알아차렸네? 둔한 줄 알았더니.”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허둥거리자, 리시언이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베르체스터 영지에는 반나절 후면 도착할 거야. 그동안 여기서 쉬면 돼. 혹시 뱃멀미가 나면 말하고. 누가 귀찮게 굴면 더더욱 말해.”

“그러면 태워 버리실 거잖아요!”

“어라? 잘 아네.”

리시언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쉬어.”

그제야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자신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농담을 건넨 것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리시언 님.”

“고맙긴 무슨.”

레스티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리시언이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는 여전히 레스티아가 불길을 걸어와 손수 전달해 준 마력 중화석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맙다는 말을 못했네.”

“네?”

리시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 반지 말이야. 정말 고마워.”

그 말에 레스티아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 벼, 별거 아니었어요. 애초에 저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된 거니까…….”

“아니,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여기 없었을 거야. 네가 나를 살렸어. 하지만.”

리시언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 또렷하게 레스티아를 응시했다. 어느새 리시언의 눈빛에는 단호한 충고가 담겨 있었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 네가 나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으니까.”

“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말에 울컥 화가 났다.

리시언을 향한 레스티아의 마음은 아무리 리시언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던 그 순간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누군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필사적이었던 그 감각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 마음이 헛된 것이었다며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싫어요. 저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리시언 님을 구하러 갈 거예요.”

작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반항했다. 리시언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집부리지 마.”

“고집부리는 게 아니에요!”

“고집부리는 거 맞아.”

레스티아는 자신의 주장이 고집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리시언 님은 제게 소중한 사람인걸요. 그런데 제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요?”

소중한 사람, 이라는 말에 리시언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성큼 앞으로 다가가 침대에 앉아 있는 레스티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너.”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위협하는 것 같아서, 레스티아는 커다란 눈을 치켜뜨고는 리시언을 올려다봤다.

“왜요?”

리시언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무슨 말을 하든 맞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누군가를 위하는 감정이 부정당하거든 배짱이 두둑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상 리시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질문이었다.

“내가 너에게 소중해? 왜?”

리시언의 질문에 레스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왜 소중하냐니.

그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그 순간, 그때의 감정을 이제 와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건…….

말 못할 만큼 낯설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왜, 왜긴요.”

그래서 가장 보편적이고 편한 문장을 골랐다.

“리시언 님과 저는 베르체스터잖아요? 그러니까, 가족이니까. 소중한 거잖아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베르체스터니까.

가족이니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것이 가장 편하고 쉬운 인과관계였다.

하지만 그 말에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다가섰던 만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하. 베르체스터. 그렇지. 그러니까…… 더욱 그러지 마.”

담담한 어투였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 담담한 어투가 어둡다는 생각을 했다.

“너, 명심해. 조엘, 마티어스, 제라르를 위해서라면 너의 그 용기와 뛰어난 재능을 마음껏 써도 돼.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야.”

“네? 그게 무슨…….”

“그리고 앞으로는 남자 손가락에 함부로 반지 끼워 주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리시언은 냉담하게 뒤돌아서 객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차가움에 낯섦을 느끼며 풀썩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이상해. 리시언 님은…… 항상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작님보다 더 차가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그 해석할 수 없던 어두운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항상 기품 있게 느껴졌던 얼굴에 설핏 드러났던 그 표정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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