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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27화 (27/132)

27화

“와아아…….”

레스티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야에 바다를 담았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드넓은 푸른 물결과 그와 만나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모래사장.

마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경이롭고 아름다워서 레스티아는 한참이나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티, 바다 구경이 재미있어? 설마, 이 오라버니랑 노는 것보다 재미있는 거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삐쭉 내밀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린 탓에, 바다 구경이 재미있냐는 질문만 알아듣고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바다를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에요! 정말, 정말 너무 멋있어요!”

그 대답에 마티어스는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오라버니랑 노는 게 더 재미있어요’라는 대답이 듣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레스티아의 주의를 붙잡으려면 더 분발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풋-.”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엘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마티어스가 이렇게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아버지에게도, 큰형님에게도 말 한마디 안 지던 녀석이 저렇게 작은 여자애의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까지 할 듯 굴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뭐야, 조엘. 시비 거냐?”

마티어스가 찌릿 조엘을 째려봤다. 하지만 조엘은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다정한 손길로 레스티아에게 레몬 크림이 듬뿍 발린 마카롱을 건넸다.

“레스티아, 내 동생. 네가 이렇게 바다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 간식 먹으면서 천천히 구경하렴.”

“앗, 네! 고맙습니다, 조엘 오라버니.”

레스티아가 마카롱을 받아들기 위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유롭게 자리 잡는 모습이 처음 이 마차를 타고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향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크윽. 조엘, 비겁하다. 먹는 걸로 유혹하다니.”

“무슨. 동생의 관심을 붙잡아 두는 네 방식이 일차원적인 것뿐인 것을.”

“윽.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쿠키를 준비해 둘걸!”

레스티아는 조엘과 마티어스가 간식을 두고 아옹다옹 다투는 영문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카롱을 입속으로 쏘옥 넣었다.

“…….”

리시언은 턱을 괴고 조용히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동전만 한 마카롱을 두어 번에 걸쳐 베어 물고는 오물거리는 레스티아의 양 볼이 무척 흥미롭다는 듯이 말이다.

‘잘 먹네’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했다.

레스티아가 무엇을 먹든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구경한단 말인가.

이제 가주인 제라르도 돌아왔으니,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신경 쓸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지?’

그 생각에 도달하고 나니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향하는 이 모든 감각이 낯설 뿐이었다.

“리시언 님?”

리시언의 시선을 느낀 레스티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시언은 아차, 싶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너, 굳이 벌써 바다를 볼 필요 없어. 베르체스터 영지에 가게 되면 질리도록 보게 될 테니까.”

“네? 질리도록, 이요?”

레스티아는 언제 의문을 표했냐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베르체스터 본성은 바닷가 절벽 위에 있으니까. 네 방 안에서도 훤히 보일걸.”

“세상에…….”

방 안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레스티아의 반응을 지켜보던 마티어스가 잽싸게 말했다.

“그래! 리티! 곧 여름이잖아! 더워지거든 해변으로 놀러 가자. 이 오라버니가 제대로 놀아 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리시언과 조엘의 표정이 탐탁지 않다는 듯 변했다.

“마티어스, 동생을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 가겠다고? 제발 사고나 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뭐? 조엘! 시비 걸지 마!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라버니로서의 내 명예가 추락한단 말이야!”

“아, 남아 있는 명예가 있던가?”

“진짜! 리시언 너까지! 하여간 이 집에는 내 편이 한 명도 없어! 아니다, 리티, 너는 내 편이지?”

마티어스가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레스티아는, “네, 마티어스 오라버니. 바닷가에 놀러 가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거봐! 역시 리티는 내 편이야!”

레스티아의 말에 마티어스는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이 곧바로 득의양양해졌다.

“으흠, 우리 막내는 하여간 착해.”

레스티아는 작게 웃으며 세 명의 오빠들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여전히 이런 귀공자들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인 제라르 베르체스터가 직접 레스티아의 신분을 보증했다.

무서운 얼굴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의 아이임을 선언했다.

‘공작님은 허튼 말을 할 분은 아니셨어.’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조엘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대로…… 나는 내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될 거야.’

레스티아는 슬그머니 솟아나는 의심을 애써 지워 가며 조엘이 눈앞에 내민 마카롱을 하나 더 받아 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한참 해변을 따라 달리던 마차가 우뚝 멈추어 섰다.

“아, 벌써 도착한 것 같군. 레스티아, 곧 배를 타게 될 거야.”

“배요?”

“그래! 리티! 내려서 구경하자!”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의 손목을 잡고는 잽싸게 마차 밖으로 나섰다.

바깥세상의 풍경은 아까 전과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는 그대로였으나, 해변 대신 부둣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눈앞에는 집채만 한 크기의 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수많은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와아아……!”

레스티아의 입과 눈이 아까 전보다도 더 크게 벌어졌다.

항구의 풍경은 일전에 서재에 있는 책에서 본 삽화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니. 책에서 봤던 세상을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다.

“자, 레스티아. 이 중에서 우리가 탈 배가 어떤 건지 알아볼 수 있겠어?”

레스티아의 곁에 다가온 조엘이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

레스티아가 재빨리 부둣가를 훑었다. 조엘이 낸 문제는 너무나 쉬웠다.

“저기, 저 배인 것 같아요. 돛에 베르체스터 가문의 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어요.”

“역시, 내 동생은 똑똑하기도 해라.”

“앗. 그런데…….”

이제 보니, 베르체스터의 문양을 달고 있는 배가 한두 척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배 중에서 어떤 걸 타게 되는 걸까?

레스티아가 고민하자, 마티어스가 서둘러 레스티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리티, 리티, 저거야, 저거. 저기 제일 큰 배! 고민할 필요 없이 빨리 타러 가 보자!”

“네? 네!”

레스티아는 마티어스의 손에 이끌려 베르체스터의 깃발이 나부끼는 수많은 범선 중에 제일 커다란 배에 올라탔다.

“앗…… 바닥이.”

집채만 한 커다란 배에 올라탔는데도 발끝부터 미세한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나, 정말 물 위에 떠 있구나……!’

레스티아는 발끝에 살짝 힘을 주며 가볍게 흔들리는 몸의 감각을 즐겼다. 낯설지만 재미있는 감각이었다.

“어때? 배에 올라탔을 뿐인데,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않아?”

마티어스가 해풍에 멋대로 흩날리는 레몬 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싱그럽게 웃었다. 레스티아는 동의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제가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렇지? 바다를 더 자세히 보러 가자!”

레스티아는 마티어스를 따라 뱃머리로 가서 배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배에 올라타서 본 항구는 아까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시선이 가는 것이 따로 있었다.

집사 헤일록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조엘…… 곁에 서 있는 리시언이었다.

리시언은 기다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왜 리시언 님은 외출할 때마다 항상 기다란 로브를 입고 계신 걸까?’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굳이 저런 로브를 입어서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레스티아는 의아했다.

‘잘생긴 얼굴인데…….’

저 로브 안에 가려진 반짝거리는 금색 눈동자는 또 얼마나 예쁜데.

마티어스와 함께 액세서리 가게에서 보았던 그 어떤 보석들보다 더 귀해 보이고 아름다운 그 눈동자를 저렇게 가리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레스티아는 리시언과 눈이 마주쳤다.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자주 리시언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자주 리시언 님을 보는 것 같아. 아무리 리시언 님의 눈이 예쁘다고 해도 그렇지. 바보 같아.’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신경 쓰였다.

눈을 마주치는 일 정도는 수많은 사람들과 늘 하는 일이었는데, 리시언과 마주치는 건 어색했다.

“아, 이런.”

곁에 서 있던 마티어스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레스티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마티어스를 바라봤다.

“마티어스 오라버니, 무슨 일이세요?”

“아, 별거 아냐. 이대로 출발하면 딱 좋을 것 같았는데. 형이 생각보다 빨리 와서 좀 짜증났어.”

“네?”

마티어스의 시선의 끝에는 부둣가로 달려오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마차가 있었다.

베르체스터의 문양이 새겨진 가주의 마차로, 제라르가 타고 온 것이었다.

“베르체스터 공작 각하!”

분주하게 움직이던 뱃사람들도 그 마차를 발견하고 일순간 멈추어 서서 제라르가 탄 마차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베르체스터 공작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뜻이라는 걸 어린 레스티아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제라르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마차는 레스티아가 타고 있는 범선 앞에 정차했다.

그리고 제라르는 변함없이 딱딱한 표정을 한 채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께서 오셨나 봐요. 인사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레스티아가 마티어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의 손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리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질리도록 볼 사이잖아? 귀찮게 인사를 또 왜 해.”

“마티어스 오라버니…….”

일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마티어스는 제라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레스티아는 굳이 묻지 않고 마티어스의 곁을 가만히 지켰다.

레스티아가 알고 있는 제라르라면 레스티아를 굳이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었나.”

하지만 제라르는 그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직접 레스티아와 마티어스가 서 있는 뱃머리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레스티아에게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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