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레스티아의 서북부행이 결정됐다.
제라르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나, 아무도 그에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이 모든 원흉의 유력한 용의자인 황태자가 있는 수도에 머무르는 것보다 영지에 가 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스티아는 창가를 서성거리며 이른 아침부터 행낭을 꾸리느라 분주한 사용인과 기사 들을 초조한 눈길로 바라봤다.
태어나서 한 번도 수도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고 있는 세계라곤 오두막과 빈민가의 후미진 골목이 전부인 삶이었는데…….
레스티아는 자신의 작은 세계가 생각보다도 빨리, 더 크게 넓어지는 것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리티, 리티. 괜찮아. 이 오라버니가 이번에는 곁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마티어스가 그 초조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레스티아의 양어깨를 꽉 잡아 주며 말했다.
잔뜩 들뜬 표정. 눈부신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한 옅은 레몬 색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더 생기롭게 보였다.
“나랑 리시언도 함께 갈 거야. 조엘도 지금은 방학 기간이니까 같이 갈 거고. 다 같이 가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마.”
레스티아는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저…… 그럼…… 공작님은…….”
“어? 형? 글쎄.”
마티어스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레스티아는 마티어스가 제라르와 별로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라르도 갈 거야.”
뒤편에 앉아 있던 리시언이 짧게 대답했다.
리시언은 검을 잡은 이후, 한 번도 쉰 적 없는 아침 훈련도 거르고 레스티아를 찾아온 상태였다.
“그래, 레스티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침 산책이라도 할까? 별장 뒤편에 작은 연못이 있어.”
조엘이 다가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손길로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티어스도, 조엘도, 리시언도 모두 레스티아를 제 품 안의 아기 새처럼 돌보고 있었다.
그 덕에 레스티아는 이른 아침부터 세 명의 오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야 했다.
“아, 맞아. 연못이 있었지? 리티, 리티! 가자. 잠깐 산책 갔다가 아침 먹으러 가면 딱 좋을 것 같아.”
레스티아는 결국 마티어스의 손에 이끌려 방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조엘과 리시언이 함께 따라 걸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차갑고 서늘한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야 했다.
“어…… 공작님.”
제라르였다.
그는 이른 아침인데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정복 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이제 막 별장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듯 보였다.
레스티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피다가 침묵을 깨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 공작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
하지만 제라르는 이번에도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는 레스티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냉정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곁에 서 있던 집사 헤일록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헤일록, 내 동생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칠 스승을 알아보도록.”
“예.”
그 지시에 레스티아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베르체스터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제라르의 눈에는 여전히 레스티아가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에는 어떻게 인사를 건넸어야 했던 걸까. 작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티어스가 미간을 구기며 못마땅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리티, 리티. 괜찮아. 형은 원래 좀 꽉 막힌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
제라르의 시선이 마티어스에게 향했다. 조엘이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 익숙한 동작으로 마티어스의 앞을 가로막고는 빙그레 웃었다.
“형님, 아침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저희와 함께 영지로 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님을 조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제라르를 대신해 집사 헤일록이 대답했다. 그 말에 일순간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레스티아는 갑작스레 더욱 삭막해진 분위기에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려야 했다.
“굳이 갈 필요가 있습니까?”
조엘이 질문하자 제라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는 없지만 경고 정도는 해 두어야겠지.”
그 말을 끝으로 제라르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헤일록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그를 배웅했다.
마티어스가 쯧쯧 혀를 차며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아주 잘나셨어. 리티, 리티. 큰형, 진짜 재수 없지 않아?”
“마티어스, 제발, 레스티아 앞에서는 예쁜 말만 해.”
“예쁜 태도를 보여 줘야 예쁜 말이 나가지. 그치, 리티?”
레스티아는 자신의 양 어깨를 토닥거리는 조엘과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다 그 뒤편에 서 있는 리시언의 깊게 잠긴 황금색 눈동자에 시선을 뺏겼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남자들을 모두 만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리시언은 이상했다.
줄곧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모든 일들을 애써 관망하려고 하는 듯한 모습.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남자들 중 제일 어린 나이인데도 모두를 낮춰 보는 듯한 시선과 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 * *
“으흐음…….”
황태자 에리히엔은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황태자궁의 정원에 조찬이 준비되는 것을 바라봤다.
레스티아의 삼촌에게 건네주었던 그 상자. 그 상자에 들어 있던 검은 연기는 마력 증폭제였다.
원래는 레스티아가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없는지 알아볼 요량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라면 그 연기를 마주했을 때, 몸에 흐르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 고통 받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재수가 좋으면 살겠지.
그러면 베르체스터는 황가에 마력 중화석을 부탁해 올 것이고, 레스티아가 어떤 속성 마법을 쓰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법을 쓸 수 없는 평범한 몸이라도 증폭제가 가까이에서 터지면 크게 다칠 것이다.
여러모로 이 술수는 제라르를 곤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여겼다.
물론 두 가지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다.
공작가에 미리 심어 둔 첩자가 삼촌은 제거되었고, 레스티아는 무사하다고 전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베르체스터 저택이 불타올랐다.
불 속성 마법을 쓴다는 병약한 넷째가 레스티아를 대신해서 다친 것이라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통쾌했다.
“크큭…… 엄청 화났겠는걸.”
제라르 베르체스터.
그 잘난 얼굴에 얼마나 깊은 수심이 드리워졌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전령을 보내 조찬에 초대했다.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뻤다. 그만큼 동요했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하지만 제라르는 초대에 응했다. 황태자는 얼굴에서 웃음을 애써 지워 가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제라르를 환대했다.
“베르체스터 공작! 어서 오게!”
하지만 제라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에리히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리히엔은 눈썹을 작게 꿈틀거리고는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좋아 보여 다행이야. 그래, 베르체스터 저택이 전부 타 버렸다지. 걱정이 많겠어.”
“고작 저택 하나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베르체스터가 가진 막대한 재산 중 별것 아닌 것 하나가 없어졌다는 어투였다.
그 차분한 대응에 에리히엔은 이를 으득 갈았다.
지나치게 평온하지 않은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때, 제라르가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에리히엔은 다급하게 그 시선의 끝을 쫓았다.
제라르는 정원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새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히엔은 입꼬리를 귀까지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아, 예쁘지? 여기 이 새장에 애완조를 넣어 둘 생각이었어. 사고가 생겨서 텅 비게 되었지만, 조만간 채워 넣을 생각이야.”
제라르가 저것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동생의 납치 사건과 관련해서 무언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상황 자체가 즐거웠다.
에리히엔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씰룩거렸다.
“그러셨군요.”
제라르가 대답했다.
파스스스.
그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정원의 꽃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로운 꽃들로 가득 차 있던 황태자궁의 정원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황폐해져 버렸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제라르 베르체스터의 마법이었다.
“베르체스터 공! 이…… 이게 무슨 짓이지?”
에리히엔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제라르는 느긋한 시선으로 에리히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꽃향기가 지독해서, 식사를 즐기는 데 방해됩니다.”
“제라르 공……!”
“저의 불찰이니 공작가에서 전하께 새로운 애완조와 정원사를 선물하겠습니다.”
“이 오만한 태도가 무엇인가!”
제라르가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에리히엔은 화들짝 놀라 제라르를 바라봤다. 지독하게 건조한 푸른 눈동자였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온몸의 피부가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식탁에 차려져 있던 음식도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제라르는 천천히 에리히엔에게 걸어갔다.
“큭……!”
에리히엔은 호통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바짝 마른 입에서는 단내만 날 뿐 아무런 말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두 다리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마력 제어가 안 되는 것뿐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에리히엔의 코앞에서 멈추어선 제라르가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거칠게 끌어냈다. 자색으로 빛나야 할 마력 중화석 펜던트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제라르는 그 목걸이를 에리히엔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경고했다.
“전하, 목줄을 채운 대상이 누군지 잊지 마십시오.”
에리히엔의 눈에 펜던트에 장식된 베르체스터 가문의 문양이 담겼다.
네 개의 눈을 가진 사자였다.
사자에게 목줄을 채운다고 해서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의도가 명백했다.
제라르는 그렇게 제 뜻을 전하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제야 공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쿨럭……! 쿨럭……!”
에리히엔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쏟아졌다. 바짝 마른 입안에 알알한 쇠 맛이 가득 퍼졌다. 하지만 제라르는 황태자가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다는 듯 정원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에리히엔은 당장이라도 저자를 잡아 오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거든, 평소에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늙은 황제가 황태자가 되어서는 베르체스터 하나 다루지 못하냐며 그의 능력을 의심할 것이다.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크아아악!”
제라르는 분에 차 괴성을 내지르는 에리히엔을 뒤로한 채 황궁 밖으로 나섰다.
오늘 안에 동생들을 데리고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다.
더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제라르가 베르체스터의 마차에 올라타자, 마차는 미리 일러 둔 대로 곧바로 항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