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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21화 (21/132)

21화

“도망쳐! 화재다!”

“불이야! 불!”

검은 연기가 베르체스터 대저택 위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진화 작업은 무색해! 이건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이라고!”

“어서 대피해!”

저택의 사용인들도 화재가 났음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지르며 아래층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레스티아의 시야에도 저택의 바깥세상이 담겼다. 하지만 뿌옇게 흐려져서 그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아가씨!”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도라와 집사 헤일록이 기사들에게 업혀 온 레스티아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레스티아는 숨이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내뱉었다.

“리시…… 리시언 님의 마력 중화석이…… 중화석이 깨졌…… 깨졌어요. 빨리 가져다 드려야 해요.”

레스티아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베르체스터에게 마력 중화석이 중요하다는 것은 공작가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게 없으면 아차 했다가는 자신의 마력에 함몰되어 위험했다.

불과 얼마 전,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도 그렇게 사망했다.

자세한 사항은 장남 제라르만이 알고 있었으나, 장례식에 시체가 없었기에 모두가 마력에 잡아먹혔다고 여겼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무서운 최후였다.

“항시 예비로 보관하고 있는 중화석이 있긴 합니다만…….”

헤일록이 품 안에서 리시언이 가지고 있던 것과 동일한 반지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말끝을 흐렸다.

저 화염을 뚫고 어떻게 그것을 전달한단 말인가.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은 쉽게 진화할 수도 없다.

평범한 사람이 들어갔다가는 금세 흔적도 없이 타 죽을 것이다.

외출한 마티어스와 조엘이 돌아온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조엘이 가진 바람의 힘은 불길을 더욱더 타오르게 할 것이다.

마티어스가 가진 땅의 힘으로 불을 덮어 끄는 방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리시언도 위험할 것이다.

불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물 속성의 마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물 속성 마법을 다루는 제라르 베르체스터는 현재 황궁에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아…….”

레스티아는 헤일록의 눈에 깃든 절망감을 눈치채 버렸다.

매사 논리적으로 보였던 사람이 이렇게 감정을 내비칠 정도라면,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 확실했다.

레스티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곁에 있던 도라가 재빨리 부축했다.

“어떡해…….”

그동안 울고 싶지 않아서, 항상 꾹꾹 참아 오던 눈물이 봇물이 터진 것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리시언.

모든 걸 포기하고 빚쟁이에 팔려 갈 위기에 있던 레스티아를 구해 주고 희망을 품게 했던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

레스티아가 누더기 같은 자신은 다가갈 수 없다고 여겼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레스티아의 유일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나한테는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돼.’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베르체스터 저택에서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낼 수 있었던가.

리시언은 무심하고 날카로운 어투와는 반대로 항상 자상하고 따뜻하게 레스티아를 대했다.

그 따스함이 너무 좋아서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함께할 오후를 매일같이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돼서야 겨우 함께 저녁을 먹자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됐는데…….

그런데 두 번 다시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

“흑…… 리시언 님.”

레스티아의 시야는 계속해서 흐려지고 흐려졌다.

마법.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저 불길을 뚫고 나아가 리시언에게 반지를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왜 자신은 마법을 쓸 수 없을까?

진짜 베르체스터라면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역시,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라고 할 수 없었다. 늘 의심하던 것이 이토록 뼈에 사무치도록 고통스럽게 자신의 숨을 옥죄어 올지 몰랐다.

그리고 엉망이 된 머릿속에서…… 선연히 황금빛 문자가 떠올랐다.

“아……!”

레스티아의 기억 속에 일전에 읽었던 마도서의 한 페이지가 또렷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력의 흐름을 왜곡하여, 다양한 마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보호 마법.

레스티아는 그 마법을 설명한 페이지를 흥미롭게 읽었었다.

이게 가능하다면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들도 스스로의 마력을 왜곡시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도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마력을 왜곡시킬 수만 있다고 정의해 두었다.

‘……하지만, 그거,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저 불길을 뚫고 나아가 리시언에게 물 속성 마력 중화석을 전달할 수 있기만 하면 됐다.

마도서에는 분명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기나긴 스펠이 나열되어 있었다.

외우지는 못했으나 마도서를 읽고 그대로 읊는다면 그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시언이 항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만류했기에 직접 마도서의 마법을 사용해 본 적은 없었으나, 지금은 얌전히 리시언의 말을 따를 때가 아니었다.

레스티아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헤일록의 손에서 마력 중화석 반지를 빼앗아 들었다.

“아가씨!”

세 명의 호위 기사들은 혹여 레스티아가 다시 저택 안으로 향할까 봐 걱정하며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들의 예상과 반대로 저택의 반대편에 있는 서재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를 호위하는 세 명의 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그 뒤를 쫓았다.

레스티아는 서재 안으로 후다닥 들어섰다.

리시언과 늘 함께 글공부를 했던 데스크가 눈에 담겼다. 책이 쌓여 있었고, 그 책 사이에 책갈피로 끼워져 있는 노란색 종이꽃이 보였다.

반드시 리시언을 구해 내서, 저 다음 장을 읽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레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일렬로 늘어선 책장 사이사이를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누비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리시언이 책장 높은 곳에 숨겨 두었던 그 마도서를 찾아야 했다.

‘어디 있니?’

속으로 마도서에게 연신 말을 건넸다.

‘네가 필요해.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줘.’

그때처럼, 내게 말을 걸어 줘.

제발, 제발, 제발.

그때 반짝, 하고 책장 한구석이 빛을 발했다. 레스티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찾던 마도서가 제 부름에 대답한 것이었다.

레스티아가 그 책장을 향해 허겁지겁 사다리 의자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레스티아의 작은 체구로는 단단한 목재로 만들어진 사다리 의자를 끌기가 무척이나 힘겨웠다.

결국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던 호위 기사 엘리엇이 레스티아를 대신해 사다리 의자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가씨,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네! 저기, 저 책장 앞에 놔주세요!”

목소리와 행동에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그래서 엘리엇이 사다리를 설치하자마자 후다닥 올라가 마도서를 꺼내 들어 작은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레스티아의 기행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더 이상 그 모습을 봐줄 수 없다는 듯, 레스티아를 막아 세웠다.

“아가씨! 아무리 리시언 도련님이 걱정된다고 하셔도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니요. 제가 가야 해요! 제가 가서 리시언 님을 도와야 한다고요!”

레스티아는 자신을 막아 세운 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만큼 기사들도 다급해졌다.

“아가씨께서 다치시면, 리시언 님의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레스티아는 품 안에 있는 마도서와 마력 중화석 반지를 손에 꽉 움켜쥐고 기사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리시언이 기사들에게 명을 내릴 때처럼 위압감을 담아 말했다.

“저한테 충성 맹세를 했잖아요. 그건 말뿐이었나요?”

레스티아의 말에 기사들은 잠시 숨을 들이켜야 했다.

마냥 작고 순진해 보였던 아가씨가 이 순간만큼은 정말 고귀한 공작 영애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켜 주세요.”

레스티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 명의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 이 작은 아가씨를 저 불길로 들여보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견고하게 레스티아를 막아섰다.

“물론 저희는 아가씨의 기사입니다. 하지만, 주군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는 막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어떻게 저 안으로 들어가신단 말입니까. 온통 불타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들어가선 안 됩니다.”

레스티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게요.”

레스티아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마도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서 보호 마법 스펠을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읊조릴 때마다, 작은 손에 들린 낡은 마도서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과연…… 될까?’

다급한 마음에 호위 기사들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이것은 도박이었다.

레스티아의 인생을 건 가장 큰 도박.

‘마법이 정말로 발현될까?‘

작은 심장이 연신 콩닥거렸다.

하지만 마티어스와 함께 카지노에서 주사위를 던졌을 때와는 달랐다.

이건 타고난 운이나 요행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와는 다른 확신이 있었다.

이 마도서 안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신념.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들 것이란 믿음.

레스티아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앙증맞은 다홍색 입술이 현세의 인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의 스펠을 읊조린다.

곧바로 레스티아의 깊게 가라앉은 짙은 잿빛 눈동자에 황금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세상에.”

“아가씨……?”

저택의 모두가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며 턱을 떨궜다.

공녀님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레스티아는 어떤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베르체스터 가문의 속성 마법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레스티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불꽃과 연기를 가르며 길을 만들었다.

구름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저택의 불길은 그녀에게 감히 닿을 수조차 없어 보였다.

“됐죠? 다녀올게요.”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치 않다는 듯, 레스티아는 주저 없이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줄곧 레스티아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녀를 만류했던 호위 기사들 역시 더 이상 레스티아를 막아 세울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녀는 완전한 베르체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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