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삼촌은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멀쩡해 보였다.
오랫동안 삼촌이 풍기는 알코올 냄새와 짜증 어린 표정을 보며 자랐던 레스티아는 그 낯선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레스티아, 이렇게 보니, 처음부터 공작가에서 자란 아이 같구나. 무척 예뻐졌어. 이렇게 귀한 핏줄을 타고난 아이를 내가 그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다니…….”
귀한 핏줄을 타고난 아이라니.
삼촌은 번번이 레스티아가 창녀의 딸이라며 힐난했었다.
분명 레스티아의 엄마가 제 친동생이었는데도 그 비난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귀한 핏줄이라. 그때와 지금의 괴리감이 너무 큰 나머지 레스티아는 미묘한 현기증을 느꼈다.
“미안하구나. 가난했잖니.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단다.”
미안하다는 표정.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그리고 포옹하려는 손길.
레스티아는 저 커다란 손에 살이 터지도록 맞곤 했다.
잘못했어요, 삼촌
용서해 주세요, 삼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의 기분을 풀게 하려고 빌고 또 빌었던 나날이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것처럼 굴며 포옹하려 들 수 있는 것인지.
레스티아는 삼촌의 손에 닿지 않기 위해 더욱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안 돼, 이렇게 피하면 더 세게 맞을 텐데’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삼촌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본능이 오랫동안 길들여졌던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삼촌은 더욱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며 성큼 가까이로 다가왔다.
“이런, 오랜만에 봐서 부끄럽니? 내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단다. 네가 없으니 집이 텅 빈 것 같았어. 용서해 주렴. 너는 이 삼촌이 그립지 않았니?”
리시언은 그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레스티아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분명 레스티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리시언에게 한 번쯤 시선을 줄만도 한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레스티아에게 다가가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하지.”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삼촌을 막아 세웠다.
참견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학대해 놓고 이제 와서 친한 척을 하는 저치의 불쾌한 태도를 보는 것도 역겨웠다.
“리시언 님,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레스티아는 리시언을 만류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삼촌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마치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의를 다지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리시언은 결국 레스티아의 뜻에 따라 길을 내주었다.
“고마워요, 리시언 님.”
애초에 삼촌을 만나겠다고 한 것은 레스티아였다.
둘 사이에 정리되지 못한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두렵다고 도망치거나 리시언에게 뒤처리를 맡길 경우, 다시는 삼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정리해야 할 때였다.
레스티아를 신경 쓰고 있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레스티아는 용기를 가지고 삼촌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삼촌.”
똑 부러지는 목소리였다.
레스티아의 당당한 태도에, 삼촌은 되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알고 있는 레스티아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떠는 아이였다. 일부러 그렇게 키웠다. 반항과 대꾸를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데 반항을 한 것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미묘하게 금이 갔다. 하지만 삼촌은 작정한 듯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레스티아, 섭섭하구나. 나는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온 거야. 봐라. 네 어머니의 유품까지 가지고 왔어.”
그는 품속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네 엄마가 남긴 유품이란다. 이걸 네게 꼭 전하고 싶었단다.”
“그것도 거짓말인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레스티아는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냉담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삼촌은 진작 팔았을 거예요. 버렸거나.”
레스티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팔아 치우는 삼촌이지 않았던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또 무조건 버렸다. 레스티아가 꽃을 따러 들판에 갔을 때마다 주워 왔던 작은 돌멩이처럼 말이다.
“너……!”
레스티아의 정확한 판단력에 삼촌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랬다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생글거리며 웃었다.
“아니, 아니야! 네가 크면 주려고 했는데, 이제야 주게 됐구나. 이걸 받아 주고, 이제 우리 교류하며 지내자꾸나.”
그러나 이미 턱이 분노한 듯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 확실했다.
“필요 없어요. 가지고 가세요.”
“레, 레스티아. 너무 매정하게 구는구나. 내가 최근에 일을 시작했어. 집도 새로 지을 생각이란다. 놀러 오렴."
“아뇨.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제 양육권을 포기하시는 대신 돈을 받으셨단 걸 잊으신 건가요?”
레스티아는 조금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삼촌이 저를 아프게 했던 게 나쁜 짓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진짜 베르체스터가 아니더라도 삼촌과 다시 가족이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삼촌은 그날 나를 팔았으니까.”
베르체스터 공작가로 온 날, 삼촌이 빚 대신 자신을 팔아넘긴 일이 레스티아의 어린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삼촌이 아무리 때리고 괴롭게 했어도 레스티아는 삼촌을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없는 자신의 유일한 그늘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폭력배들이 삼촌에게 나이프를 들이댔을 때, 레스티아는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삼촌은 되레 레스티아를 팔아 버렸다.
이제 가족을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가족이 아님을 안다.
평생 살아온 삼촌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들이 레스티아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그럼 이제 가세요.”
눈에 약간 눈물이 고였으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리시언은 어쩐지 레스티아의 그 말이 울부짖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던 것을 스스로 이겨 낸 승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윽…… 너."
삼촌은 이제 레스티아를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품이라는 상자를 들이대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레스티아, 제발, 이것만 받아 주렴. 그러면 이만 가 보겠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란다.”
저 유품이 무엇이길래.
하지만 레스티아는 받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초에 없다. 초상화 한 장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떤 애틋함도, 미련도, 애초에 존재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냉정하게 뒤돌아설 수 있었다.
“삼촌이 가지세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저보다 삼촌이 더 많으실 테니까요.”
그러자 서글서글하게 미소 짓고 있던 삼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상자를 빼어 들더니 레스티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가면을 내던지듯 레스티아가 알던 평소의 삼촌으로 되돌아와 커다란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이 계집애가! 말도 안 쳐듣고!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야!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레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삼촌은 레스티아의 몸에 손 하나 댈 수 없었다.
레스티아를 호위하는 세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삼촌을 제지한 것이다
“크악!”
삼촌은 자신의 팔과 다리가 날카로운 쇠붙이에 찔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뒹굴었다.
호위 기사들이 주저 없이 검을 빼들은 것이다. 그들에게 레스티아를 위협하는 적은 베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이익!”
하지만 삼촌은 검에 찔려 뒹구는 와중에도 마치 어떤 것을 필사적으로 해내려는 듯, 이를 악물고 레스티아를 향해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나무 상자를 내던졌다.
상자가 바닥을 구르더니 레스티아의 발목 아래에서 열렸다. 열린 상자에서 갑작스럽게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레스티아!”
곁에 서 있던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기사들을 향해 밀치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레스티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검은 연기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아주 끈적하고 불쾌한.
곧바로 리시언이 만들어 낸 새빨간 불꽃이 그 검은 연기를 태우기 위해 화르륵 타올랐다.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다급하게 리시언의 이름을 불렀다.
리시언의 모습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아주 천천히 레스티아의 눈에 담겼다.
레스티아는 그제야 리시언이 왼손 검지 손가락에 파란색 마력 중화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 중화석은 레스티아가 호위 기사들의 등에 업혀 응접실을 탈출함과 동시에 회색으로 변하며 깨져 버렸다.
콰아앙-!
멀어져 가는 응접실에서 한차례의 폭음이 들려왔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화염의 열기는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저택에 불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안 돼! 안 돼요! 이대로 갈 수 없어요. 리시언 님이, 리시언 님이 저 안에 있단 말이에요!”
레스티아는 울부짖으며 양손으로 자신을 들쳐 메고 달리고 있는 프랭커의 등을 연신 두드렸다.
하지만 프랭커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레스티아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리시언 도련님은 강하신 분입니다. 불 속성 마법사이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곧 나오실 겁니다.”
그 곁을 호위하고 있는 엘리엇과 유이엘이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레스티아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리시언의 마력 중화석이 깨져 버리는 모습을.
분명 조엘이 말했었다.
마력 중화석이 없으면 자신은 자기가 만들어 낸 바람에 찢겨 죽을 거라고.
그렇다면 리시언은 저 불꽃에 타 버리는 것 아닐까. 머릿속으로 상상했을 뿐인데도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다.
삼촌은 역시 거짓말쟁이였다.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그 상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그것을 레스티아에게 전달하려고 한 걸까.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리시언이 자신을 지키느라 위험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
살을 녹일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
이것들이 시작되는 지점에 리시언이 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드드득득-.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레스티아가 리시언이 만들어 낸 불이 마냥 아름답고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