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진실의 계승자’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몰래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괴소문일 뿐, 마지막 ‘해석하는 자’가 사라진 이후 200년 동안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그들에 대해 조사할 필요성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베르체스터와는 접점도 없는 그런 괴집단보다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황가가 유력해. 만일 범인이 황가라면 누가, 왜, 레스티아를 납치했는가에 대한 의문만 남는데.’
리시언이 걱정하는 것은 황가가 레스티아가 ‘해석하는 자’라는 것을 혹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해석하기 난해하고 어렵다는 마도서를 술술 읽는 능력이라니.
분명 황가가 알면 탐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대놓고 레스티아를 내놓으라고 쳐들어왔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은밀하게 접근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조엘과 마티어스가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황실 아카데미의 수석 장학생인 조엘은 자신의 인맥으로 황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움직였고, 아카데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자퇴한 마티어스는 가출할 때마다 떠돌던 뒷골목을 정보를 찾아 배회했다.
리시언은 대외적으로 몸이 약해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 없다고 알려진 몸이었기에 저택에서 레스티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아 버렸다.
몸이 근질거렸다.
보호라고 해 봤자, 평소처럼 서재에 함께 박혀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저……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마도서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리시언을 불렀다.
리시언은 추론을 잠시 멈추고 레스티아의 부름에 답했다.
“왜?”
“이 단어가 이 뜻이 맞나요?”
레스티아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질문을 해 왔다.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가리킨 필기 내용을 훑었다.
가능하면 최대한 예쁜 모양새로 필기하기 위해 힘을 꾹꾹 눌러서 쓴 정갈한 필체가 저절로 입꼬리를 말아 올라가게 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일자로 고정시키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래, 맞아.”
웃으며 칭찬을 하는 것은 리시언에게 있어 무척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와, 맞췄네요!”
무뚝뚝하게 말했음에도 기뻐하는 레스티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오랜 습관 탓에 상냥한 말이 나가지 않았다.
“쉬운 단어 맞춘 거로 좋아하기는.”
“그…… 그렇죠? 제가 괜히 들떠서는. 이건 정말 쉬운 건데.”
레스티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겁먹은 토끼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리시언은 아차 싶어서 애써 칭찬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잘했어.”
“저, 정말요?”
“그래.”
이 말만큼은 정말이었다.
‘해석하는 자는 원래 이렇게 글도 빨리 익히는 건가.’
그런 결론을 불러올 만큼, 레스티아의 습득력은 엄청났다.
마치 메마른 스펀지가 물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지식을 빨아들였다.
아마도 머지않아 리시언이 가르칠 것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스승을 찾아야 하겠지.
그게 어쩐지 섭섭하기도 했으나,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제라르가 돌아오면 이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미래에 대해 의논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저……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또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질문을 해 왔다.
리시언은 자신이 레스티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능청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너,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또 뭔데?”
아차. 능청스럽게 대답한다는 것이 어쩌다 보니 날카롭게 대답해 버렸다.
레스티아가 겁에 질린 듯 움찔 떠는 것을 보며 리시언은 그답지 않게 미묘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이번에는 또 용감한 토끼 상태인지 또박또박 제 의사를 피력했다.
“오늘은 마도서를 읽어도 될까요?”
“…….”
리시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라르의 처분이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마도서를 읽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마도서를 읽고자 했다.
대부분의 마도서를 레스티아의 손이 닿지 못하는 높은 책장에 올려 두었으나…….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의 서재를 뽈뽈 돌아다니며 구석에 버리다시피 처박힌 마도서를 3권이나 발견했다.
-어떻게 찾아낸 거야?
라고 질문하면,
-책이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래서는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 읽어. 하지만 내용을 말로 내뱉으면 안 돼. 마법이 발동될 수도 있으니까. 알지?”
“네에……!”
레스티아는 회색 눈동자를 총명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작 책 한 권 읽는 게 뭐가 저리도 좋은 걸까.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쪼르륵 책장으로 달려가더니, 일전에 발견한 마도서 한 권을 가져와 조용히 묵독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서독하지 않는 이상 눈동자에 마법진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는 마법진이 그려진 것처럼 반짝거렸다.
‘해석하는 자의 눈은 원래 저렇게 빛나는 건가.’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진창을 구를 대로 구른 아이가 가진, 먹구름이 가득 낀 회색 눈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시선을 느꼈는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환되자, 리시언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아 챘다.
“어? ……왜? 마도서가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요.”
레스티아는 마도서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결심한 듯 수줍게 말했다.
“저기, 저…….”
“뭔데 그래?”
“그게요……. 오늘 저녁은…….”
“뭐야, 저녁에 뭐. 왜 그렇게 뜸을 들여?”
“저…… 저녁 같이 드실래요?”
“뭐?”
“그…… 바쁘시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한번 여쭈어 보고 싶었어요.”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뭐야, 또 이번에는 겁쟁이 토끼 상태네.’
리시언은 한눈에 레스티아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더니만 같이 밥을 먹자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참나. 그게 뭐가 어렵다고. 알았어.”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레스티아가 기쁜 듯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인상 깊었다.
‘해석하는 자는 웃는 것도 좀 특이한 건가?’
매번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큼.
리시언은 해석하는 자의 정체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품어야 했다.
“도련님, 아가씨.”
그때, 정적을 깨고 서재 안으로 집사 헤일록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뜩이나 깐깐한 인상의 헤일록은 오늘따라 더욱 삭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공녀님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뭐? 손님? 누구?”
레스티아에게 찾아올 손님이 있던가. 리시언이 인상을 쓰자, 헤일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의 삼촌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삼촌이 찾아왔다는 말에,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마도서를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사…… 삼촌이요?”
삼촌이 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잊고 살던 과거의 폭력이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질 것 같았다.
레스티아의 생기롭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리시언은 미간을 좁혔다.
그자는 분명 조엘에게 양육권을 포기하는 대신 돈을 받아 갔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집에 불을 지르며 찾아오지 말라며 위협해 두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직접 베르체스터 저택까지 찾아오다니, 참으로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상대할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니었다.
“돌려보내.”
리시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헤일록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실은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그자가 공녀님께 꼭 전해야 할 것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더군요.”
“전해야 할 것?”
“……공녀님의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이 있다고 합니다. 꼭 공녀님께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말에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레스티아의 어머니가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응당 그녀의 것이어야 했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요?”
레스티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필요한 것인지, 가지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
그렇다면.
리시언이 헤일록을 향해 짧게 지시했다.
“뺏어 와.”
레스티아가 굳이 그 작자를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
베르체스터의 공작 영애의 신분을 얻게 된 이상, 이제 그녀에게는 원하는 것만 취하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예.”
헤일록역시 리시언의 지시가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런데…… 레스티아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니요. 제가 삼촌을 만나 보겠어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리시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굳이 그 쓰레기를 만나려는 이유가 뭐야? 유품 때문에 그래? 가져다준다니까.”
레스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 입으로 직접,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지 못한 게 여지를 남겨 둔 것 같아서 너무 후회돼요.”
그리고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많은 시간 동안 삼촌에게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고 참아 왔던 말들을 이제 내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삼촌은 베르체스터 저택의 중앙 홀 근처에 위치한 손님용 응접실에서 레스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헤일록의 안내를 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리시언이 함께였다.
“굳이…… 곁에 있어 주시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레스티아가 리시언에게 말했다. 하지만 리시언은 단호했다.
“걱정 마. 지켜보기만 할 테니.”
그저 옆에 있어 준다고 했는데도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것만 같았다.
‘휴…….’
마침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레스티아의 눈에 삼촌의 뒷모습이 담겼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만큼 공포스러웠다.
레스티아는 항상 저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술에 취해 있는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했다.
술에 취해 있다면 몸을 사려야 했고, 안 취해 있다고 해도 그의 기분을 가늠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레스티아는 용기를 내서 삼촌이 있는 응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호칭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삼촌.”
레스티아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삼촌이 곧장 뒤돌아서더니 양팔을 넓게 벌리며 레스티아에게 다가왔다.
“레스티아! 사랑하는 내 조카! 오랜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