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리시언과 조엘은 서재에 마련된 별도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리시언, 무슨 일이야. 네가 나한테 무언가 요청하는 건 처음인걸.”
“……그 애, 마도서를 읽었어.”
“뭐?”
레스티아가 해석하는 자라는 리시언의 말에 조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제라르에게 뭔가 들은 거 없어?”
침묵을 깨고 들려온 질문에 조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은 바가 없었다.
현재 레스티아의 탄생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제라르뿐이었다.
가문의 후계자만이 아버지의 유언장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레스티아가 태어났을 당시, 조엘은 제국의 서북쪽에 위치한 베르체스터 영지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늘 바쁜 사람이었고, 가족들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녀 역시 병약했기에 자식들을 영지에 두고 따뜻한 남부로 홀로 요양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조엘은 큰형 제라르와 쌍둥이 형제 마티어스와 함께 유모 밑에서 자랐다.
조엘은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감수성이 깊은 탓에 부모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다. 하지만 괜찮았다. 형제들 모두가 같은 처지니 혼자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핼쑥해진 얼굴로 리시언을 안고 영지로 돌아왔다.
-너희들의 동생이야.
라고 말하면서.
처음에는 리시언을 무척 질투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자신도 마티어스도 제대로 안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의 품을 독차지하는 저 녀석이 싫었다.
그러나 아픈 어머니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어 속 좋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는 그런 조엘의 태도를 좋아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웃어도 그녀는 조엘을 안아 주지 않았다. 대신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조엘, 마티어스, 혹시 엄마가 없어도…… 가엾은 이 아이를 잘 보살펴 줘. 알았지? 너희가 형이니까.
마티어스는 어깨에 힘을 주고 걱정하지 말라 우쭐거렸고, 조엘은 그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조엘은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저 애보다 가엾은 건 당신이라고. 당신부터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당시 어머니에 대해 입방아 찧던 사람들의 말을 알고 있었다.
-베르체스터 공작 부인께서 어제 부군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셨다며?
-공작님께서 영지에 들러 달라는 부인의 부탁을 거절하셨다 들었어.
-뭐? 자기 자식을 낳아 준 여자한테 어떻게 그래?
-공작님은 항상 그러셨잖아.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부인은 공작님을 직접 찾아갔고.
-휴, 부인도 답답하시겠어. 지금은 직접 찾아가실 수 없으니…….
-건강이 안 좋으시니까. 쌍둥이를 낳은 후로는 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했던 것은 제국의 귀족들은 청승맞다고 생각할 짝사랑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남편을 왜 사랑하냐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조엘은 어머니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아버지에게 분노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랑하는 척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얼굴 한번 비추는 게 뭐가 어렵다고.
가족을 만들었다면 연극이라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의무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하루하루 희게 말라 가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어린 형제들은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의 관을 지켜야 했다.
아버지는 바쁜 일을 처리해야 한다면서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그 후, 가뜩이나 적적하던 베르체스터의 본성은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것처럼 삭막해져 버렸다.
제라르는 황실 아카데미에 입학해 버렸고, 마티어스는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리시언은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의 빈방에서 반나절이 넘도록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조엘은 그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레스티아는 어머니가 숨을 거둔 그해에 태어난 아이였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어머니가 생사를 오갈 때,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떤 여자와 얼마나 대단한 밀회를 즐기고 있었기에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던 건지.
그런 시기에 태어난 아이.
그것은 아버지의 딸일 뿐이다.
제라르의 뜻대로 베르체스터에 데리고 오되, 정말 동생으로 인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찾아낸 아이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베르체스터 공작의 딸이 길거리에서 꽃을 팔고 있다니.
분명 열한 살이라고 들었는데 지나치게 작고 말랐다.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제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알았다.
레스티아에게는 죄가 없었다.
죄가 있는 자는 낳아 놓고 책임지지 않은 아버지일 것이다.
제라르는 레스티아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버려졌다고만 말했다.
아버지라는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분명 양육비를 지급한 것만으로 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엘은 레스티아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아버지의 방치하에 큰 이 아이는 자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아니, 가문의 비호가 없었으니 자신보다 더 괴롭고 힘든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석하는 자’라.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
아니, 상관없었다.
동생으로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그녀가 무엇이라고 해도 오빠의 의무를 연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사랑하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리시언, 레스티아가 무엇이든 그건 애초에 상관없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동생이 아닌 건 아니니까.”
지나치게 침착한 반응에 리시언은 조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엘은 레스티아가 가진 능력이 불러올 그녀의 복잡한 미래에 대해 조금의 걱정도, 우려도 표하지 않았다.
리시언은 조엘의 이런 행동이 가족이 아닌, 타인을 상냥하게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을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새 가족을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라는 것은 리시언도, 조엘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그래. 큰형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는 레스티아와 조금 더 친해지는 데 집중하는 게 좋겠어.”
조엘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레스티아가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마티어스가 귀찮게 하고 있겠지.”
두 사람은 그것으로 대화를 갈무리하고 레스티아에게 향했다.
하지만 서재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엘이 선물한 커다란 토끼 인형만이 소파에 외롭게 놓여 있을 뿐.
그 잠깐 사이, 마티어스와 레스티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엘, 이거 아무래도 이번에는 두 명이나 잡으러 가야겠는걸.”
리시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조엘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하, 마티어스.”
저런 사고뭉치가 자신과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쌍둥이가 맞는지. 해가 지날수록 믿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 * *
“꺄아아악!”
레스티아는 눈을 꼭 감고 마티어스의 목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리티, 리티. 괜찮아. 꽉 잡고 있어!”
하지만 마티어스는 레스티아의 비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를 한 손에 안아 들고 거침없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쾅! 쾅쾅!
마티어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파였다가 메워지기를 반복했다.
발끝에 엄청난 괴력이 가해지는 마법이었다. 그 덕에 마티어스는 인간이 낼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레스티아는 서재 안으로 그가 들어오기 전, 창문이 흔들렸던 이유가 이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리티, 리티. 내가 좋아하는 산책 코스를 안내해 줄게. 저택의 정원보다 훨씬 좋을 거야.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
이미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베르체스터 저택이 금세 콩알만큼 작아지더니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은 점점 더 숲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티어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겨우내 침엽수에 쌓여 있던 눈이 떨어지며 자욱히 안개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듯 그사이를 내달렸다.
레스티아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리는 것을 느끼며, 빨리 이 무서운 이동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리티! 눈떠 봐.”
그리고 마침내 마티어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레스티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와…….”
눈앞에는 레스티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겨울 숲 아래로 내려다보는 수도의 전경이라니.
그것은 마치 화폭에 담긴 그림 같기도 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낸 장난감 같기도 했다.
“여기 있으면 저 멀리 수도의 번화가까지 다 보여. 내 비밀 장소지. 어때?”
마티어스가 자랑스레 말하며 조심스레 레스티아를 품에서 내려 주었다.
“정말, 너무 멋있…… 앗!”
레스티아는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자신의 발치 바로 앞이 바로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사색이 되어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걱정 마, 리티. 이 마티어스 오라버니가 있는데 뭘 걱정해?”
마티어스는 해맑게 웃으며 레스티아의 양쪽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하,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자, 발밑만 안 보면 돼. 정면만 보는 거야. 그럼 엄청 좋다고?”
레스티아는 마티어스의 말대로 정면을 응시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아까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시리도록 화창한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
여러 마리의 새들이 수다스럽게 지저귀는 청아한 소리.
겨울의 끝자락과 함께 바람에 실려 오는 산뜻하고 짙은 봄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레스티아의 잠들어 있던 오감을 하나둘 깨우는 것만 같았다.
“어때? 정원 산책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지?”
마티어스의 질문에 레스티아는 깊게 공감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베르체스터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와…… 여기서도 베르체스터 저택이 보이네요!”
레스티아가 반갑게 말했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손사래 쳤다.
“뭐야! 리티, 왜 여기까지 와서 집을 찾고 그래? 벌써 집에 가려고? 절대 안 돼!”
마티어스는 순식간에 다시 레스티아를 품에 껴안더니 이번에는 산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 내 동생님! 그럼 곧바로 다음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네에?”
또 어디를 간다는 걸까.
레스티아는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이번에도 마티어스를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