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제는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는 것도 익숙해졌고, 귀족가의 아가씨답게 다양한 식기를 사용해 식사를 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공녀님께서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계십니다.”
집사 헤일록이 검무장으로 나설 준비를 끝낸 리시언에게 검을 건네며 짧게 보고했다.
“사실 꽤나 걱정했습니다. 빈민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신 터라, 공작가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습니다.”
“조엘도 우려했었지.”
“예.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아마도 아가씨께서 타고나신 자질과 인품이 훌륭하셔서 그러시겠지요.”
“그런가.”
“하하, 리시언 도련님. 동생분께 칭찬이 박하십니다. 귀히 여겨 주세요. 사랑스러운 분 아닙니까.”
리시언은 헤일록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받아 들었다.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라.
물론, 레스티아가 살아왔던 환경에 비해 구김 없이 잘 자란 아이인 것은 맞았다.
자신을 학대했던 삼촌을 원망하는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랬다.
이 꼬마 아가씨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고 보고 받은 식기 사용법도 그랬다.
리시언은 귀족들의 식사 예절에 익숙지 못한 레스티아를 위해서, 요리장에게 항상 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 둔 상태였다.
식기 사용 방법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려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레스티아가 요리장을 직접 찾아가 식사 예절을 익힐 수 있는 요리를 해 달라고 지시했다.
곤란해 하는 요리장에게 “베르체스터 사람이라면 익혀야 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했다던가.
그리고 집사 헤일록에게 특별 강습을 받았다 들었다.
하여간, 헤일록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무서워했으면서.
이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할아버지와 손녀로 볼 정도로 친근해 보였다.
여러모로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런데도 석연치 않았다.
‘응석 부려도 되는 나이 아닌가.’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자신을 붙잡고,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에 대해 한 번이라도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올곧게도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이면 이야기를 하자고 한 조엘의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문 채 저택 생활에 적응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성실한 건지, 원래 고지식한 건지. 아니면…….’
하여간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신경을 써? 내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일에……?’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리시언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내며 거칠게 손에 쥐고 있는 검을 휘둘렀다.
챙!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대련을 하던 기사 프랭커의 검이 멀찍이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프랭커는 조금도 실망한 기색 없이 헤벌쭉 웃어 보였다.
“아아! 리시언 도련님. 오늘도 빨리 끝내시려고! 이러시면…… 감사합니다!”
“아니, 다시.”
리시언이 못마땅한 듯 검을 다시 고쳐 쥐자, 프랭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빨리 끝내시죠? 저기 레스티아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프랭커의 시선을 쫓으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검무장에 서 있는 소녀가 시야에 담겼다.
레스티아가 평소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글자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 이후부터 레스티아는 줄곧 이렇게 리시언의 오전 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여간 성실해.’
리시언이 혀를 한번 차고는 조용히 검을 갈무리했다.
“아가씨!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어느새 프랭커가 주인을 만난 대형견처럼 레스티아의 앞에 가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프랭커, 오늘도 좋아 보여요.”
“당연하지요. 제가 누굽니까? 베르체스터의 레이디께 꽃을 하사받은 기사님 아닙니까! 당연 좋아 보여야지요, 하하!”
“그, 별것 아닌데요, 뭘.”
레스티아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얼마 전이었다.
프랭커는 레스티아와 눈도장을 몇 번 찍더니 은근슬쩍 레스티아에게 종이꽃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기사들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레스티아에게 종이꽃을 받은 일을 부러워한다는 이야기였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가문의 레이디가 건네준 꽃을 품고 전장에 나가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는 말도 능청스레 흘렸다.
그 말을 들은 레스티아는 기사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아 꽃을 잔뜩 접어 선물했다.
레스티아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꽃을 받은 기사들은 “베르체스터의 레이디께서 내게 꽃을 주셨어!”, “이건 평생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야!”, “난 이제 불사신이다!”라고 외치며 연신 주접을 떨어 댔다.
“레스티아, 가자.”
리시언이 짧게 말하자, 레스티아가 프랭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그 귀여운 종종걸음에 퍽 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리시언이 아차 싶어 말했다.
“너. 네가 굳이 아랫사람들한테 친절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인사를 건네면 상냥하게 받아 주셔서 즐거운걸요.”
“……그래, 뭐, 네가 즐겁다면 그걸로 됐어.”
아무래도 괜찮겠지.
리시언은 처음 약속했던 대로 레스티아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본인은 별것 아닌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 행동은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의 지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레스티아에게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리시언의 지지 덕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일들이 점차 조금만 용기를 내도 괜찮은 일로 바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득문득 자신이 진짜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어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서, 진실을 들을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레스티아는 주먹을 작게 말아 쥐며 리시언과 함께 서재로 들어섰다.
그리고 요 근래 계속 했던 것처럼, 제국 공용어를 학습하는 데 집중했다.
‘정말 내가 베르체스터라면…… 글 정도는 알아야 해. 적어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내심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글공부 자체가 무척 재미있었다.
마도서를 읽을 때와는 다르게 머리가 아프기는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리시언 님이 읽으시는 책도 읽고 싶어.’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앞에 놓여 있는 책들을 힐끗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어려워 보이는 제목의 두꺼운 책들 사이에는 일전에 레스티아가 선물했던 노란 종이꽃이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종이꽃을 저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
레스티아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일을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양 볼을 수줍게 붉혔다.
그러다 리시언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그 부분 다 읽었어?”
“앗, 아니요.”
딴생각을 하다가 들켰다는 생각에 레스티아는 서둘러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리시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려운 것 있으면 말하고.”
“네, 네……!”
레스티아가 허겁지겁 다시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할 때였다.
덜컹덜컹.
서재의 창문이 갑작스럽게 덜컹거렸다. 거센 바람이 창문에 부딪히나 싶더니, 이내 땅까지 조금 흔들렸다.
“어? 어? 무슨 일일까요?”
레스티아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창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리시언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에는 진짜로 멍청이가 돌아온 것뿐이니까.”
“멍청이요?”
누구를 말하는 걸까.
레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재 안으로 누군가가 달려와 크게 소리쳤다.
“어디 있어! 내 여동생!”
그리고 다다다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
레스티아의 시선이 저절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옅은 레몬 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 조엘 님?”
레스티아가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는 조엘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의 색상과, 키, 얼굴은 조엘과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나도 달랐다.
조엘이 천사처럼 우아하다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악동 같았다.
머리카락은 다듬은 지가 꽤나 오래된 듯 앞머리가 눈을 살짝 덮을 정도로 덥수룩 자라 있었으며, 그 사이로 보이는 자색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장난기가 엿보였다.
그리고 양쪽 귓불에는 마력 중화석을 깎아 만든 듯 보이는 짙은 녹색 피어싱을 여러 개 착용하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셋째 오빠.
마티어스 베르체스터였다.
“아니, 아니야! 조엘이라니! 조엘보다 내가 더 멋진 오빠라고. 어떻게 헷갈릴 수 있어?”
마티어스는 레스티아의 말에 조금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자색 눈을 크게 뜨며 곧장 항의해 왔다.
“누가 더 멋지다는 거지?”
마티어스의 뒤편으로 조엘이 걸어왔다. 한쪽 팔에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낀 채였다.
“다녀왔어, 레스티아.”
조엘은 마티어스를 제치고 레스티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사르르 웃으며 눈높이를 마주했다.
“내 동생, 잘 지내고 있었어? 약속대로 셋째 오빠 마티어스와 선물을 가져왔어.”
조엘은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곧바로 레스티아의 품에 안겼다.
“아……!”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촉감.
조엘이 선물한 것은 새하얗고 커다란 토끼 인형이었다.
기다란 귀가 축 처져 있는 토끼 인형은 목에 앙증맞은 빨간 리본과 작은 금방울을 매달고 있었고, 블랙 다이아몬드를 조각해 만든 눈동자는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반사해 내며 반짝반짝 빛났다.
“레스티아를 생각하며 골라봤어. 특히 이 눈이 레스티아를 닮은 것 같은데. 어때?”
“너, 너무 귀여워요. 이걸 받아도 될지…….”
레스티아가 머뭇거리자, 조엘이 말했다.
“흐음, 그렇다고 이걸 리시언한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리시언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레스티아는 조엘의 말에 리시언이 이 토끼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상상해 버렸다.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쿡쿡 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제가 가질게요. 고맙습니다, 조엘 님.”
그제야 레스티아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조엘은 빙그레 웃더니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가출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오빠보다, 선물을 준비한 오빠가 더 멋진 오빠겠지.”
마치 경쟁을 벌이는 것과 같은 도발적인 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