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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9화 (9/132)

9화

참나,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제가 원하는 걸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하면서 따졌으면서.

리시언은 겁을 상실한 토끼에서 다시 오들오들 떠는 토끼 상태가 된 레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결정한 듯 말했다.

“아니, 마음대로 읽든가 버려도 돼.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마도서는 넘쳐나니까. 하지만 그 종류의 책은 네가 평범한 책을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읽는 게 좋겠어.”

해석하는 자가 마도서를 읽는 것은 운명 같은 것이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막아 봤자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마도서를 읽어야 한다면 다른 지식을 먼저 접한 후에 접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 여겼다.

지식이란 서로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지식의 근간도 쌓아올리지 않은 아이가 미지의 고대 지식을 얻는다, 라.

그것은 어쩐지 위험한 일처럼 느껴졌다.

뭐, 자세한 사항은 베르체스터의 가주인 제라르가 정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레스티아의 임시 보호자니까.

기본은 해야겠지.

리시언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네? 평범한 책들이요?”

하지만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고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평범한 책을 읽게 될 미래를 그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 내일부터 글공부를 하라는 뜻이야. 내가 가르쳐 줄게. 너, 이제 좋은 시절 끝났다.”

리시언이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레스티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방금 전, 책을 읽었던 그 감각이 정말로 좋았다. 다른 책들도 그렇게 읽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하는 리시언이 너무 감사했다.

리시언은 해맑게 미소 지어 보이는 레스티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불쑥 쿠키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나 먹어 봐. 책도 좋지만 일단 좀 많이 먹어야 하니까.”

“네!”

레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시언이 건네준 제 손바닥만 한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 * *

제라르는 베르체스터의 문장이 수놓인 검은색 정복을 입고 성대한 파티장에 서 있었다.

작위 계승식이 있었다.

늙고 연로한 황제는 충성의 서약을 받아 내고는 피곤하다며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원래대로라면 일정은 그것과 동시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베르체스터를 위해 준비한 파티에 참석하라”고 친히 명령을 내렸다.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이런 성대한 파티를 원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얼마 전에 마무리된 직후였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간소하게 작위 계승식만 치르겠다고 황가에 전한 터였다.

그러나 황가는 멋대로 작위 계승 기념 파티를 개최해 버리더니, 제라르의 참석을 강요했다. 무려 보름이 넘는 길고 피로한 일정이었다.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조엘이 무사히 여동생을 구해 왔는지도 확인해야 하는데…….

“이런, 제라르. 베르체스터의 문장이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는걸? 전대 공작님께서도 아들이 이렇게 장성한 걸 보면 기뻐하겠어.”

황태자 에리히엔이 말을 걸어왔다.

제라르는 피로감을 느끼며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는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조금 취한 듯 보였다.

파티장 뒤편에서 이미 한바탕 즐기고 온 모양인지, 옷매무새와 머리카락도 정갈하지 못했다. 그러나 뱀의 비늘 같은 눈은 평소와 같이 독을 품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아카데미가 아닌 곳에서 보게 되니 더 반갑군.”

짐짓 살가운 어조였다.

황태자 에리히엔은 제라르와 황립 아카데미 동기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마주해 온 사이였다.

하지만 친우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에리히엔이 제라르를 시기해 왔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자신이 그의 신분에 걸맞게끔 가장 뛰어나고 위대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마법, 학문, 검술, 그 어떤 분야에서도 단 한 번도 제라르를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제라르는 성인이 되자마자 전쟁에 뛰어들어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까지 거머쥐고 돌아왔다.

제라르가 나날이 명성을 쌓아 갈수록, 에리히엔의 내면은 뒤틀렸다.

게다가 제라르는 자신의 앞에서 스스로 굽히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재수 없는 자식.’

하지만 제라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자신의 밑이었다.

자신은 장차 황제가 될 몸.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자신의 가신이 될 운명이 아닌가.

에리히엔은 마침내 그 상황에 도달한 지금이 퍽 즐겁다는 듯 조소하며 제라르를 훑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라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최소한의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매번 무시해 왔으나, 가문의 수장이 된 이상 표면적으로라도 황태자를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제라르, 뭐 하고 있나? 즐기지 않고. 봐, 모든 귀족 영애들이 그대만 노리고 있어. 미혼의 베르체스터 공작이라니! 다들 자네에게 치마 속을 보여 주고 싶어 할걸?”

에리히엔이 키득거리며 저질스러운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제라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황태자의 습성은 오래전에 파악해 둔 터였다.

반응을 하면 할수록 황태자는 더 집요하게 제라르를 귀찮게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엔은 오늘따라 더욱 집요했다.

그는 곧바로 제라르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깃거리를 재빨리 입에 올렸다.

바로 베르체스터 가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상하군. 왜 이 자리에 베르체스터 가문의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이는 거지? 명색이 공의 작위 계승식 축하 파티인데 다 같이 모여서 파티를 즐기지 않고.”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축하해 주시니, 다른 이의 축하가 필요할 것 같지 않군요.”

제라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소 무례해 보일 정도로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지금까지는 가주로서 상대했지만,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에리히엔은 키득거리며 한 걸음 더 제라르 가까이 다가섰다.

“한번 맞춰 볼까? 둘째 조엘은 아카데미의 일로 바쁠 거고, 셋째 마티어스는 또 자유롭게 여행 중이겠지. 그리고 막내는…….”

“넷째는 몸이 아프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에리히엔의 입에서 동생들의 이름이 하나씩 언급되자, 제라르가 불쾌감을 슬며시 드러냈다.

그러자 에리히엔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히쭉 웃었다.

언제나 무감했던 제라르가 이렇게 반응을 보인 것이 즐거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크큭. 그게 아니야, 제라르. 내가 넷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 알잖아.”

베르체스터로 태어난 주제에 몸이 약해서 열네 살이 되도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온다는 그 쓰레기를.

에리히엔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비웃듯 제 본심을 쏟아 냈다.

“막내 말이야. 얼마 전에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잖아? 그렇지?”

그 말에 한겨울의 호수처럼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제라르의 눈동자가 일순간 깊게 잠겼다.

황가에서 레스티아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니면 그 후?

그렇다면, 그 애가 해석하는 자라는 것은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랬다면 벌써 공작가에 들이 닥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되었다.

“알고 계셨군요.”

제라르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차피 황가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숨겨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이었다.

특히 황태자 에리히엔이 안다면, 더더욱.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제라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 하니 말이다.

지금처럼.

“베르체스터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참 오랜만이지? 꼭 한 번 보고 싶어. 분명 그대를 닮아 아름답겠지.”

“……고작 열한 살짜리 아이입니다.”

하지만 방탕한 황태자의 입에 여동생이 언급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제라르가 나직한 어조로 살기를 드러내며 경계했다.

에리히엔은 제라르의 그 살벌한 기세에 입술이 바짝 말랐지만, 애써 대담한 척 낄낄거렸다.

“큭큭. 그래, 조만간 그 귀여운 레이디에게 초대장을 넣겠어.”

그러고는 즐거운 듯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마저 쏟아 냈다.

“하여간 전대 공작은 참…… 고마운 사람이야. 한 세대에 한두 명 태어날까 말까 한 베르체스터의 핏줄을 다섯 명이나 남겨 주다니.”

“…….”

“제라르, 그대도 그렇게 해야지. 그대가 충성할 나의 제국을 위해서 말이야. 마법사는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제국민도 지키지 않겠나.”

종마 취급에 사냥개 취급이었다.

제라르는 무거운 입매를 억지로 비틀어 올리며 에리히엔을 똑바로 응시했다.

“윽?!”

에리히엔은 자신의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걱정이 많으시군요, 황태자 전하.”

충성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자식.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황태자의 몸에 있는 수분을 모두 빼내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아니, 마법으로 만든 물보라 속에 집어넣고 괴롭게 익사시키는 게 좋을지도…….

짧은 순간에 제라르가 알고 있는 수만 가지의 살인 방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저자는 황태자였다.

황가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력 중화석을 만드는 방법은 황가만이 알고 있었기에, 제라르는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 중화석의 필요성은 마법사 가문인 베르체스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혼자였다면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동생들이 있었다.

어린 동생들이 제 마력에 잡아먹혀 죽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황가로부터 마력 중화석을 공급 받아야 했다.

제라르는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의 베르체스터는 아버지의 베르체스터보다 나을 겁니다.”

돌처럼 굳어 있던 에리히엔 황태자는 그제야 헛기침을 뱉어 냈다.

“흠흠! 그래, 그럼 기대하겠어.”

“저도, 황태자 전하께서 만드실 훗날의 제국을 기대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한편, 제라르를 남모르게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파티장의 레이디들은 꺅꺅거리며 작은 소란을 피웠다.

“어머나, 방금 베르체스터 공작님이 미소 짓는 거 보셨나요?”

“그러게요. 황태자 전하와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걸까요?”

“하…… 진짜 너무 잘생기셨어요. 자주 웃으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요. 어떻게 저렇게 웃으실 줄 알면서 늘 무표정으로 다니시는 걸까요?”

하지만 제라르의 근사한 미소 뒤에 숨겨진 깊은 분노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챙그랑-.

에리히엔 황태자는 제라르와의 대화 후, 방으로 돌아와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물건을 부숴 대기 시작했다.

“별것 없는 마법사 새끼가. 건방지게…….”

황태자는 매번 이런 식으로 물건을 부수다가 이내 아랫사람에게 손찌검을 시작하곤 했다. 그래서 궁전의 하녀와 시종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때 시종 하나가 굽신거리며 에리히엔에게로 다가갔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베르체스터 공작의 여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잘됐군.”

분노로 일그러져 헉헉대던 에리히엔의 얼굴에 순식간에 음흉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그리고 결심한 듯, 뱀 같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제라르, 그 건방진 새끼가 당황해 하는 걸 꼭 한 번은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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