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제게 도움을 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걸 해 본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 작은 토끼는 누구보다 용감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리시언 역시 그 모습을 신기한 것을 보듯 살폈다.
“리시언 님께 드릴 것도 만들었는데……. 싫으시다면, 이건 그냥 버릴게요.”
레스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종이꽃을 다시 가방 속으로 가져갔다.
리시언이 당황해 하며 재빨리 그 꽃을 빼앗아 들었다.
“뭐야! 누가 싫대? 나 줘.”
“정말이요?”
“그래. 그냥 물어본 거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정말요?”
레스티아는 활짝 핀 꽃처럼 웃으며 리시언의 손바닥 위로 샛노란 종이꽃을 올려 두었다.
“…….”
리시언은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구겨질세라 조심스레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레스티아가 먼저 침묵을 깨고 질문했다.
“저 리시언 님은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 계셔도 되는 건가요?”
“어? 그게.”
당황한 리시언이 변명거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거라 생각하지 못한 탓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라가 재빨리 말했다.
“리시언 님, 괜찮으시다면, 레스티아 님과 함께 가볍게 티타임 어떠세요?”
“그래. 서재로 가져와.”
리시언은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곧바로 저택의 반대편에 있는 서재 건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재요……?”
레스티아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고 말이다.
그들을 지켜본 사용인들은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봤어? 그 리시언 님이 레스티아 님께 아무 말도 못한 거.”
어제 처음 레스티아를 마주한 사용인들은 레스티아가 마냥 보살핌이 필요한 작은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리시언을 마주했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 레스티아가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들이 두려워하는 리시언에게 제 의사를 또박또박 전달한 것이다.
“우리 공녀님, 상냥하신 줄만 알았더니, 깡이 대단하신데?”
“야야, 깡이라니. 말 좀 예쁘게 해. 대담하시다고 해야지!”
사용인들은 상냥하고, 대담하고 귀여운 공녀님이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오셨다며 연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 * *
리시언은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품속에 있던 종이꽃이 구겨지지 않도록 책을 펼쳐 그 안에 넣었다.
“와아…….”
레스티아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정신없이 서재를 구경하고 있었다.
커다란 책장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서재는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다과가 차려지면 부를 테니, 마음대로 구경해. 어차피 이 서재는 베르체스터 거니까. 네가 전부 찢어 버려도 상관없어.”
“그……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러든가.”
레스티아는 천천히 서재 구경을 시작했다.
‘이것도 종이로 만들어져 있구나…….’
신기했다.
문자라는 건 대체 뭘까? 왜 사람들은 신문을 읽고 책을 읽는 걸까.
리시언은 글자를 알아봤자 복잡한 일만 늘어날 뿐이라 말했지만, 그건 분명 레스티아를 달래기 위해 건넨 말일 것이다.
‘나도 글자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레스티아는 천천히 공작가의 도서관 책장 사이를 거닐었다.
책장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신기한 책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어……? 이 책, 빛나고 있어.’
그 책은 레스티아를 유혹하듯 영롱한 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가 책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반짝거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잘못 본 거야?’
믿지 못할 광경에 레스티아는 양손으로 눈가를 닦아 내고 다시 책을 바라봤다. 하지만 책은 여전히 변화 없이 책장 구석에 꽂혀 있었다.
문득, 이 책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스티아는 발꿈치를 힘껏 들어 올려 제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책을 더듬더듬 꺼내 들었다.
“콜록, 콜록!”
책을 꺼냄과 동시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서,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책이었던 모양이다.
레스티아는 조심스레 손바닥으로 책의 표지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러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낡은 표지는 아무리 살펴봐도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재질이 아니었다.
심지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책인지, 책의 제목은 반절이나 지워져 있는 상태였다.
‘응……?’
그런데 놀랍게도 레스티아는 책의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수식언의 정의>
‘어……? 읽을 수 있어? 어떻게?’
태어나서 한 번도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는 레스티아였다.
신문도, 책도 읽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읽을 수 있다니.
레스티아는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을 느끼며 책을 펼쳐 들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직관적인 방식이었다. 꽃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꽃이라는 것을 아는…… 당연한 감각.
스스로 경험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그 책의 내용을 입으로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잿빛 홍채 위로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쿠구우우우웅-.
공간이 울리며 서재의 책장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 상황을 하나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재미있었다.
글자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 않고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접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들이 즐비했지만, 읽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막히지는 않았다.
“뭐야?”
리시언은 서재에 울려 퍼지는 진동을 느꼈다.
도라가 막 다과상을 가져왔기에, 레스티아를 부르려 하던 참이었다.
“어머? 마티어스 님이 돌아오신 걸까요?”
“벌써?”
저택에 울려 퍼지고 있는 미세한 진동.
그것을 느낀 저택의 모두가 셋째 마티어스가 돌아와 분풀이를 하고 것이라 여겼다.
땅 속성의 마법을 다루는 마티어스는 불만이 생기거든 항상 이런 식으로 지축을 흔들어 댔다.
하지만 오늘따라 조금 그 정도가 심했다. 평소라면 조엘이 금방 제압했을 텐데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좀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이 멍청이가. 설마, 집을 부숴 버릴 생각인 건가.”
“이거, 아가씨가 놀라지 않으셨을까 걱정되네요. 레스티아 님!”
“…….”
도라가 걱정스럽게 발을 동동거리자 리시언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전이라면 마티어스가 집을 부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서재에는 레스티아가 있었다. 혹여 책장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이다.
리시언은 천천히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은 마티어스의 느낌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마티어스.”
하지만 마티어스는 그곳에 없었다.
레스티아가 우두커니 서서 낡은 책 한 권을 작은 소리로 읽고 있을 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러면서도 기쁘다는 듯, 즐겁게.
레스티아가 읽고 있는 책 역시 그녀가 자신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알아봐 주어 기쁘다는 듯, 단어와 문장을 내뱉을 때마다 그에 맞춰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 너. 그 책.”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리시언은 결국 레스티아가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그대로 책을 꾹 눌러 닫아 버렸다.
탁.
“앗……?”
종이와 종이가 맞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레스티아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로 돌아왔다.
“너.”
리시언은 곧바로 레스티아의 양쪽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레스티아가 붙잡고 있던 책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떻게 고대 마도서를 읽은 거야?”
“네?”
레스티아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회색 홍채 위로 또렷이 나타났던 황금색 고대 마법진이 천천히 희미해지며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하, 이것 봐라?”
리시언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너, ‘해석하는 자’였어?”
“네? 그, 그게 뭐예요? 저는 그냥 책이 읽히기에 신기해서…….”
레스티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리시언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해석하는 자.
그것은 머나먼 과거에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마도서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법은 고대 문명이 남긴 유산이었다. 먼 옛날에는 대부분의 인간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문명은 하루아침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몰락해 버렸다.
그 이후로 마법은 피와 문자로만 전승되고 있었다.
피로서 마법을 전승받은 이들을 혈통 마법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베르체스터 가문처럼 마법사의 핏줄을 타고나 자신의 본능에 새겨진 특정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대신, 가문마다 부작용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반대로 문자로 마법을 전승받은 이들은 마법 연구자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마도서를 해석해 마도구를 만들어내서 평범한 사람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끔 돕는다.
하지만 마도서의 문자를 해석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가의 통제 하에 전해졌다.
아주 드물게…… 마도서를 자유자재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그를 해석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역사에 해석하는 자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200년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레스티아가 해석하는 자일 수도 있다니.
리시언은 생각에 잠겼다.
이 사실을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은 알고 있었을까? 제라르 베르체스터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축복일지, 저주일지…….
“제가 무언가를 잘못한 건가요?”
레스티아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리시언은 자신이 레스티아를 너무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아니, 미안. 다친 데는 없어?”
“네…….”
“일단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떨어뜨린 마도서를 주워서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저 위쪽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손목을 잡고 다과상이 차려진 곳으로 향했다.
도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자, 테이블 위에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내어 두고 물러났다.
향긋한 꽃향기가 책 냄새가 가득하던 서재에 은은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딱 봐도 맛있어 보이는 쿠키들도 귀엽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좀처럼 그것을 입에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리시언의 눈치를 살폈다.
“저…… 리시언 님, 화나셨어요? 그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