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왔어?”
리시언은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레스티아를 바라보다가 잠시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잔뜩 엉클어진 머리로 눈밭을 뒹굴고 있던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그런데 깨끗하게 씻고 옷다운 옷을 입히고 보니, 제법 귀여웠다.
엉망으로 엉켜 있던 잿빛 머리카락이 원래는 저렇게 곱디고운 하얀색이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닮았나.’
하여간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꾹 다문 입술이 자아내는 기품.
그것은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과 장남 제라르를 연상시켰다.
물론 이쪽이 훨씬 더 앙증맞고 귀여웠지만.
‘동생이라.’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의 장례식 마지막 날.
제라르는 베르체스터의 형제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우리에게 여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렸다.
딸이 있음을 알고서도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만으로 버려두다니.
하여간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은 이해할 수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어. 아버지를 대신해서, 공작가로 데려와 베르체스터로서 살게 할 생각이다.
제라르의 결정에 조엘이 그 여동생이라는 아이를 찾아오기로 정해졌다.
첫째 제라르는 작위 계승 때문에 바빴고, 셋째 마티어스는 아버지라는 구속구가 사라지자마자 가출해 버렸으니까.
리시언은 이 모든 것을 관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엘이 “오빠가 네 명이나 되는데 한 명만 찾아가면 어떻게 생각하겠어?”라며 억지로 끌어들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쩌다 보니 혼자 다 떠맡게 됐다.
리시언은 두려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뭐야.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설사, 정말 잡아먹는다고 해도 뼈밖에 없지 않은가.
살부터 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앉아.”
리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레스티아를 맞아 주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하라고 했어.”
커다란 식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요리사들이 과할 정도로 솜씨를 뽐낸 탓에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여기 앉으면 돼.”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잘해 주라는 조엘의 말을 상기하며, 친절하게 의자까지 빼 주었다.
하지만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은 레스티아는 조금도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야? 먹고 싶은 게 없어?”
리시언이 물었다.
레스티아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 아니요. 전부 맛있어 보여요. 그런데…… 어떤 것부터 먹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그냥 먹으면 되지 뭘 모르겠다는 거야?
리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스티아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나이프도 포크도, 스푼도…… 너무 많아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그러고 보니, 레스티아의 앞에는 수많은 포크와 나이프들이 놓여 있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가 속한 모르카티움 제국의 귀족들은 음식의 종류에 따라 모두 다른 식기를 사용해 먹어야 하는 식사 예법이 있었다.
리시언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이런 것을 보는 레스티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보일 것임이 분명했다.
“이런.”
리시언이 짧게 한숨을 뱉었다.
레스티아는 제국의 대귀족 베르체스터 공작의 딸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더라도 전대 공작의 비호가 있었다면 평민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
글도 읽지 못하고, 귀족처럼 음식을 먹는 법도 모른다.
심지어 잘못을 하지 않은 일에도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레스티아가 그동안 어떤 환경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성장했는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소녀를 방치한 전대 공작은 이미 죽은 이라고 쳐도.
역시, 그 삼촌이라는 쓰레기는 소각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레스티아의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목욕까지 하느라 분명 아까 전보다 더 허기졌을 테니까.
“일단 포크를 들어 봐.”
리시언이 고갯짓으로 레스티아의 테이블 앞을 가리켰다.
“네? 하지만 포크가 다섯 개나 되는걸요.”
“아무거나 네가 손에 들기 좋은 걸 잡아.”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던 레스티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리시언의 말대로 가장 작은 포크를 잡아 들었다.
디저트를 사용할 때 쓰는 포크였으나, 리시언의 눈에 레스티아의 야윈 손가락은 그것을 드는 것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너…….”
심지어 레스티아의 손등은 잔뜩 터져 있었다.
목욕 후에 치료약을 꼼꼼히 바른 모양이었지만, 그 상처들은 고작 한 번 관리한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시언은 저 손으로는 나이프질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 생각해 속으로 혀를 찼다.
“이 포크가 아닌가요? 죄송해요.”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 말했다.
투정과 응석보다 사과가 익숙한 열한 살짜리 소녀라니.
“사과는 왜 해? 내가 아무거나 잡아도 된다고 했잖아.”
리시언은 나름대로 최대한 상냥하게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움찔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 제가 멍청해서…… 죄송…….”
“넌 하나도 멍청하지 않아.”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말꼬리를 잘랐다.
“정말로 멍청하다고 해도, 나한테 잘못한 거 없고 말이야.”
하지만.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미 습관이 된 것이 분명했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똑바로 마주하고 말했다.
“야, 잘 들어.”
“네……?”
“나는 앞으로 네가 뭘 잘못해도 다 용서해 줄 거야.”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나한테만큼은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좋아. 사과할 필요도 전혀 없고. 알았어?”
레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리시언이 쏟아 내는 말을 들었다.
전부 다 용서해 줄 테니, 마음 가는 대로 하라니.
어렵고 또 혼란스러운 지시였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지금은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뭘 먹고 싶어?”
황금색 눈동자가 또다시 회색 눈동자에 빛을 만들어 냈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베르체스터 공작가로 갈지, 삼촌 곁에 남을지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항상 삼촌이 시키는 대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레스티아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리시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도 될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 주겠다는 그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다 용서해 주시겠다니. 내가 가짜 베르체스터여도 용서해 주실까.’
레스티아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발칙한 생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서.”
리시언이 재촉했다.
레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오른쪽에 있는 갈색 음식이 맛있어 보여요.”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잘했어.”
리시언은 간결하고 명확하게 레스티아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어 레스티아가 가리킨 음식을 손수 썰어 그녀의 접시로 옮겨 주었다.
“오늘은 내가 도와줄게. 들고 있는 포크는 쓸 수 있겠지?”
누군가가 레스티아에게 이렇게 음식을 손수 잘라 내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스티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른 채, 접시를 바라봤다.
곧장 리시언이 재촉했다.
“안 먹어? 네가 고른 거잖아. 막상 보니 별로야? 다른 거 먹을래?”
“아……아니에요!”
레스티아는 조심스럽게 포크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리시언이 접시 위에 올려 준 갈색 고기를 찍어 입안에 쏙 넣고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향긋한 향신료의 맛과 함께 처음으로 느껴 보는 고소한 육즙이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너무 맛이 있는 나머지, 처음에는 조심스럽기만 했던 포크질이 저도 모르게 점점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는 어느새 리시언이 접시 위에 올려 주는 음식들을 덥석덥석 받아먹고 있었다.
“맛있어?”
“네……네에! 정말 맛있어요!”
“그럼, 이것도 먹어 봐. 편식하면 안 되니까. 참, 그 전에 물 좀 마셔. 체하기라도 하면 조엘이 시끄럽게 굴 테지.”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내민 물 잔에 담긴 물도, 구운 야채도 남김없이 입속으로 넣었다.
“잘 먹네.”
리시언은 그런 레스티아가 마음에 든다는 듯, 나이프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접시를 채워 주었다.
그렇게 늦은 저녁 식사는 레스티아가 이제는 도저히 밥을 먹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가 돼서야 끝났다.
“정말로 배부른 거 맞아?”
“네, 정말 이제는 못 먹겠어요.”
리시언은 끝까지 레스티아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추궁했지만 말이다.
“그럼 이만 자라. 방에 데려다줄게.”
리시언은 기다렸다는 듯, 레스티아를 다시 품 안에 안아 들었다.
“저, 저, 이제 걸어갈 수 있는데!”
당황한 레스티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리시언은 “걱정 마. 방문 앞까지만 데려다줄 거니까”라며 놓아주지 않았다.
* * *
레스티아의 방은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도라가 앞장서서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상징하는 네 개의 눈을 가진 사자가 정교하게 조각된 방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커다란 창문이 나 있는 넓은 방 안에는 고급스러운 가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쓰기에는 조금 작은 감이 있었다.
모두 어린 레스티아의 신체 크기에 맞춰 특별히 제작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레스티아에게는 그것조차 커 보였지만.
“와…….”
레스티아는 눈동자를 굴려 천천히 방 안을 살펴봤다.
창가에는 혹한의 추위를 막아 내는 두툼한 벨벳 커튼이 둘려 있었고, 탁자와 장식장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게다가 널찍한 침대 위로는 하얀 레이스로 만든 캐노피가 하늘거렸다.
모두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그럼, 아가씨, 편히 쉬세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침대 옆의 줄을 당겨 주시면 됩니다.”
도라는 그렇게 말을 하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그럼, 잘 자라.”
리시언도 약속했던 것처럼 방문 앞에 레스티아를 내려 주고 돌아섰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이상하게도 문 앞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침대가 마음에 안 들어?”
리시언이 의문을 표하자, 레스티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질문했다.
“저…… 제가 침대를 사용해도 되나요?”
“뭐? 침대에서 안 자면 어디서 자려고. 잠깐, 그동안은 어떻게 잔 거야?”
“볏단에 천을 대고 잤어요.”
리시언의 목소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사납게 변했다.
“그럼, 네 삼촌은?”
“삼촌은 집주인이니까, 침대에서 주무셨고요.”
그러니까.
“저는 집주인도 아닌데 침대에서 자도 되나요?”
라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