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외전 - 후일담(下)2016.10.30.
여울이 흠칫 놀라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답을 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었다간 그대로 토할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했다. 여울이 초조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서란은 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저었다.
갑자기 왜 속이 이런지 모르겠다. 정화의 힘이 있으니 상한 음식을 먹더라도 이럴 일은 없는데.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고민하는 사이, 여울은 그녀의 이마에 밴 식은땀을 보고 낯빛을 굳혔다. 서란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어의를…….”
여울이 말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마니가 된 인간은 선인이므로 인간의 병을 앓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더럭 겁이 났다.
그가 아는 건 모두 천계에서 들은 지식일 뿐이다.
혹여나 그 지식이 잘못되어 선인이 걸리는 병이 있다면?
그는 서란에 관해서는 만에 하나인 가능성이라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열려라.]
여울은 앞뒤 안 가리고 통로부터 열었다. 허공이 갈라지며 입을 벌렸고 그 너머로 흑룡궁 안의 내의원 전각이 보였다.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안아 들고 통로를 넘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허공의 통로도 스르륵 닫혔다.
식사를 하다 말고 그 광경을 본 상인들은 얼이 빠졌다. 술병과 그릇이 여기저기서 떨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저, 저, 저거 방금……?』
『뭐지? 사람이 아니었나?』
『아! 그래, 용! 용이었구나!』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상인들의 시선이 용이라고 소리를 지른 상인에게로 몰렸다. 아까 여울과 대화를 나누었고, 음식 꾸러미를 가져다주기도 했던 자였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어쩐지, 맨몸으로 사막에 있는 것도 그렇고, 예락 옷차림인 것도! 아까 언뜻 보이는 눈동자 색이 이상하고 머리가 희어서 기이하다 싶더니만! 그래, 방금 전까지도 독이던 물이 갑자기 괜찮아진 것도 이상했지! 맙소사, 그럼 옆에 있던 여자가 그, 그, 왕이었나?』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예락에 자주 다녀오잖나. 그쪽 소문이 짜할 텐데, 못 들어봤어?』
『소문이라니?』
『용을 거느린 여왕이 반정을 일으켰다는 소문 말일세!』
상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동시에 서란과 여울이 있다 사라진 자리를 돌아보았다.
예락에서 일어난 기적은 사미국까지 소문이 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소문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대화까지 하다니. 게다가 저 녹주를 용이 정화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가족, 친지들에게 자랑할 이야깃거리를 얻은 모양이었다.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퇴궐하려던 어의는 갑자기 들이닥친 왕과 천룡을 보고 기함했다.
“아니,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외유를 나가셨다 들었사온데…….”
“진맥해라.”
여울은 다짜고짜 말을 내뱉고는 서란을 의자에 앉혔다. 흔들리는 바람에 속이 더 안 좋아진 서란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나마 토기는 그사이에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녀는 어의가 진맥을 하는 사이 곰곰이 생각했다.
음식 냄새가 역하다. 구토감이 든다. 먹은 것 때문이거나 병 때문일 리는 없다. 마니니까. 그럼, 아프지 않은데도 속이 메스꺼운 경우는?
그러고 보니 세상에 완벽한 피임법은 없다고 들었다. 게다가, 지난달에 달거리를 안 했다.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서서히 환해지는 어의의 주름 진 얼굴이 그 결론을 확정지어 주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회임한 것이냐?”
“예, 달포쯤 되셨사옵니다. 경사이옵니다!”
정말이구나.
가슴이 뛰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뒤늦게 오라비가 된 산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혈육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혈육이 생긴다. 그녀와 여울의 피를 이은 아이, 그녀와 그의 가족.
두서없이 생각이 흐르며 울컥 벅차오르는 게 있었다. 서란은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갈무리하고 침착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성질이 급한 아이겠구나. 아이를 가질 결심을 하자마자 찾아오다니. 어지럽고 속이 역했던 것은 입덧 때문이냐?”
“예, 아마 입덧 탓에 현기증이 온 모양입니다. 수라간에 몸을 보할 음식을 일러 주고 약을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그리 하여라. 뭔가 주의할 점 같은 건 없느냐?”
“아직 초기이므로 당분간 거동을 조심하시고, 따뜻한 곳에…….”
서란이 차분하게 대화하는 사이, 여울은 그녀의 뒤에 선 채 굳어 있었다.
그녀는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임시로 어의가 끓여 준 생강차까지 받아 마시고 일어났다. 한결 괜찮아진 얼굴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자 여울이 반사적으로 뒤따랐다. 함께 전각을 벗어나며 서란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넋이 나간 낯이다.
“여울?”
“보주.”
“괜찮으냐?”
“지금, 그러니까, 보주께서, 그…….”
그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다. 서란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결심하기가 무섭게 이리 되다니.”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귀가 붉었다. 속삭이듯 작은 말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믿기지가 않아.”
아직 아무런 티가 나지 않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우리…… 아이가, 내 안에 있는 거로구나.”
서란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피부가 목덜미에서부터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얼굴 전체가 불탈 듯이 변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가린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여울에게서 보기 힘들던 수줍음이다. 그 반응을 보자 서란도 실감이 났다. 그가 아비가 되듯, 그녀도 어미가 될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안았다. 지금은 그저 얄팍한 배인데도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줄 것이다.”
서란이 불쑥 중얼거렸다. 입 밖에 나온 목소리가 제 귓속으로 명령처럼 돌아 들어온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얼굴에 꽃물처럼 번져 가는 그 미소가 눈부셨다.
그것을 보며 여울은 잠시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도 전염되듯 미소가 퍼졌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의 아이. 그녀의 아이.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으며, 아직 그 태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애정이 있었다. 그것은,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저 역시.”
여울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서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뻗어 나온 팔이 제 배를 감싼 그녀의 손 위를 겹쳐 쥐었다. 맞닿은 몸 안에서 조율하듯 점점 같은 박자로 심장이 뛴다.
“사랑해 주겠습니다.”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괸 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서란이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여울은 젖어드는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과거, 절망으로 울어 보았던 이무기는 행복으로도 울 수 있다는 걸 아는 용이 되었다.
*
유리서란의 회임은 온 나라의 경사였다.
왕은 나라 전체가 혼란하니 당분간 후사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었다. 그러더니 소처럼 일만 했다.
반정을 일으키고, 공신을 쓸어 내고, 조정을 물갈이했으며, 천룡을 거느린 여왕이었다. 감히 그런 그녀의 선언을 무시하고 후사 타령을 할 만한 간 큰 자는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왕실의 웃어른들도 마니식을 위한 제물이었다가 왕이 된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나마 그녀에게 이런 사적인 문제를 꺼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은 셋뿐이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인 스승은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끼어들지 않았다. 현음당에게 옆구리를 찔린 안승호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른 하나인 오라비는 제 연애와 신혼 탓에 정신이 없었다. 산은 결국 작년에 소청화와 혼인을 했다.
그는 여전히 온녕대군으로서가 아니라 금산 상단의 류산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지만, 대놓고 대군인 것과는 차이가 큰 법이다. 그래서 평민인 청화와 혼인하는 데에 별다른 잡음이 있지는 않았다.
금산 상단의 본거지가 용미인 만큼 그도 용미에서 살고 있었으나, 가 본 장소로 통로를 열 수 있는 여울이 있으니 거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종종 산의 요청으로 여울이 그를 데리고 궐에 오기도 해서 서란도 자주 오라비를 볼 수 있었다.
마지막 하나인, 당사자이기도 한 천룡 여울은 그리 깊게 그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간혹 천계와 소통할 때 마파람을 위시한 천룡들이 후사는 언제 볼 거냐고 떠들어 대곤 했지만, 그들이 떠드는 건 그 문제 말고도 많았으므로 그는 늘 한귀로 듣고 흘렸다.
사실 서란만 있어도 그에게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녀만 주시해도 신경 쓸 건 태산이었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으니까.
이런 상황이었으니 후계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끙끙거렸었다.
후사 없이 3년째에 이르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갖은 추측과 걱정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걱정들을 일거에 해소하며, 드디어 회임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예락 전체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궐에서는 연회까지 열겠다 호들갑을 떠는 것을 서란이 겨우 자제시켰다.
“와, 기분 진짜 묘하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산은 턱을 괴고 서란을 건너다보았다. 그의 곁에는 청화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앉아 있었다. 자리가 부담스러워서였다.
서란이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때 애용하는 호수의 정자에는 지금 산과 청화, 서란과 여울까지 두 쌍의 부부가 모였다.
온, 희나리, 가람, 그리고 쭈뼛거리던 야로까지 교룡들은 각자의 보주와 함께 이미 다녀가고, 현음당 부부도 다녀간 후에 그들만 남아 자리를 옮긴 터다.
서란이 찻잔을 기울이며 웃었다.
“신기하십니까?”
“그게 말이지. 기쁜데, 그러면서 이상하게 저놈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산이 여울을 향해 턱짓했다. 여울은 말없이 눈썹만 추켜올렸다. 산은 피식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천계 조상님들은 뭐라 하시던? 듣자하니 나랑 비슷한 기분인 분들이 꽤 있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후사 보라고 보챌 땐 언제고, 회임했다고 하니까 온갖 잔소리를 다 들은 참이다. 그래도 대체로 축하하는 분위기였는데, 마파람만 그리 길길이 날뛰었다.
「누가 보면 친딸인 줄 알겠소.」
「친딸이나 다름없지! 내 후손인데! 리하 핏줄이란 말이다!」
「아, 시끄러워. 언제는 애 몇이나 낳을 거냐고 난리더니. 야, 막내야, 저 노망난 늙은이는 그냥 무시해라. 축하한다.」
「노망이라니, 이 시건방진 놈이! 너희는 걱정도 안 되냐? 저 핏덩이가 애를 뱄다는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여울, 보주 잘 돌봐라. 네 보주는 다른 건 똑 부러지게 잘하던데, 제 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 보고 있으면 영 위태위태하니.」
「맞아, 가끔 보면 애가 진짜 불안하다니까? 대체 누구 닮은 거야? 내 보주는 같은 핏줄인데도 과로는커녕 게을러 빠져서…… 아, 아! 아파요, 보주!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겁니까?」
「후배, 유리왕족들 대대로 입덧이 심하다. 잘 먹여라. 잘못하면 안 그래도 가느다란 애 살 쭉쭉 빠질 게다.」
「어, 그러고 보니 자네도 보주랑 반려였지. 자네가 저 애들 좀 잘 일러 주게.」
「난 보주랑 반려 관계는 아니었지만, 우리 보주는 회임 중에 순무씨 죽을 주로 먹던데.」
「그런 흔한 건 수라간과 내의원에서 챙기겠지. 그보다, 저 남해 깊은 곳에서만 나는 비단금린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말이야…….」
이런 식의 말이 끝도 없이 쏟아져서, 여울은 또 당분간 소통을 닫아 두는 중이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유리왕족들이 입덧이 심하다더니, 서란도 정말로 입덧이 심했다.
그는 요즈음 천계에서 주워들은 정보대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진귀한 식재료들을 구해 오곤 했다. 다행히 개중에 서란의 입맛에 맞는 것이 꽤 되어 그녀는 입덧의 정도에 비해서는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침묵하는 여울을 가만 지켜보던 산이 알 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배부르게 잔소리를 들었나 보네. 고생해도 싸지.”
여울의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지켜보고 있던 서란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왜 제가 회임했다고 여울이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임신하면 여인이 얼마나 고생하는데, 좀 욕먹어도 싸.”
“죄지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괴롭히지 마세요.”
“내가 언제 괴롭혔…… 아니, 란아야. 괴롭힌다 쳐도 저놈이 당할 놈인 줄 아냐? 와, 반려다 이거지.”
“그러다 후회하실 텐데요.”
“무슨 후회?”
“오라버니도 머지않았잖습니까. 아니 그러냐, 청화야?”
“저, 저, 전하…….”
청화가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에 파묻더니 그 틈으로 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산이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한참 어린 청화에게 그는 거의 잡혀 살고 있었다.
서란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울도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조만간 저쪽에서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과거에 있던 일들 탓에 여울은 늘 서란을 주시하는 편이다. 그녀의 상태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인다.
아무 일이 없어도 자신의 마니를 애지중지하는 게 천룡인데, 유일한 반려인데다 목숨이 위태로운 꼴까지 보았으니 그의 걱정은 약간 병적인 상태에 가까워져 버렸다. 서란이 티를 잘 안 내는 성격인 탓도 컸다.
여울 스스로도 자신의 불안이 좀 과한 편이라는 걸 안다. 나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걱정이 늘 줄은 그도 몰랐다.
서란의 회임을 알게 된 이후 여울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도 걱정이고, 아이도 걱정이고, 출산 과정에서 그녀가 어찌 될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오죽하면 잔소리를 하던 천계의 천룡들마저 괜찮을 거라 그를 달랠 지경이 되었다.
정작 서란은 입덧이 가시고 난 후부터는 평화로웠다.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자 무거운 몸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만삭에 이를 때까지 업무를 놓지도 않았다.
“보주, 당분간은 쉬시면 아니 됩니까?”
“쉬고 있느니라.”
“그럼 이것들은 뭡니까.”
여울은 그녀의 서안에 쌓인 두루마리들을 가리켰다. 서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니라. 꼭 봐야 할 것들만 보잖느냐.”
그는 서란이 유능하고 성실한 왕이라는 게 간혹 슬펐다.
보다 못한 여울은 그녀의 일거리를 빼앗아 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붓보다는 검을 움직이는 편이었던 그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 아니냐. 무리하지 말거라.”
“보주를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아니, 나는 괜찮대도. 반쯤 선인인 몸이잖으냐.”
“되었으니 누워 계십시오.”
처음에는 서툴렀으나 오성이 뛰어난 용인지라 금방 능숙해졌다. 서란이 만삭에 이를 때쯤에는 어느 정도 그녀를 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가 천룡이라 대신들이 알아서 기는 덕분에 쉬운 면도 있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서란은 할 일이 없어졌다. 정확히는, 할 일을 빼앗겼다.
그녀는 침상에 기댄 채 상소더미를 붙잡고 있는 여울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어째 나보다 네가 더 고생인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발 보주께서는 편히 쉬어 주십시오.”
그리 말하는 그가 꽤 절실해 보여서, 서란은 약간 반성했다.
이제 예락의 혼란도 많이 가셨고 아이도 태어날 테니 일을 줄여야겠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명정 4년 5월 5일 새벽, 진통이 시작되었다.
여울에게는 10년쯤 되는 것 같은 새벽이었다. 그는 제 감정에 동조해서 날씨가 몰아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차라리 제가 대신 아팠으면 싶었고 아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긴 새벽의 끝에,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예쁜 공주 마마이옵니다.”
함박웃음을 띤 의녀가 그리 말하자마자 여울은 산실에 들었다.
서란은 지쳐 땀에 젖은 상태로 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하얗게 일어난 입술은 깨무느라 약간 상처가 났다. 그녀를 보며 그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는 하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 말과 낯빛에 진이 빠진 채로도 서란은 웃음이 났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안고 있던 포대기를 내밀었다.
“안아 보렴.”
아기는 너무 작았다.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한 생명이었다. 만지기도 겁날 정도였다. 여울은 멍하니 아기를 받아 안았다.
포대기 안에서 꼬물거리던 아기가 흐릿하게 눈을 떴다. 서란을 빼닮은 노을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직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눈에 여울의 모습이 담겼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전신을 물들여 갔다.
서란은 완전히 넋이 나간 여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반려가 그들 사이의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이대로 평생 지켜보고 있어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
“……너무 작습니다. 원래 이리 작은 것입니까?”
여울이 저도 모르게 한껏 줄인 목소리를 냈다. 아기를 안고 있으니 목소리조차 크게 내기가 어려웠다.
“금방 자란다고 들었느니. 스승님께서, 아쉬울 정도로 쑥쑥 클 테니 어릴 때도 눈에 많이 담아 두라 하셨단다.”
“그렇, 습니까…….”
여울은 손가락을 들어 몹시 조심스럽게 아기의 볼을 만졌다. 제가 아기를 다치게 할까 겁이 나서 닿을 듯 말 듯 스치기만 했다. 지켜보던 서란이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작기만 하고, 예쁘지는 않느냐? 갓 태어난 아이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던데, 전혀 이상하지 않느니라. 그저 예쁘기만 하구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서란이 발긋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고 있었다. 울어 버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벅차올라 설렌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한, 기쁜, 행복한, 그런 표정.
지금까지 그녀의 표정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보는 순간 그의 얼굴마저 흐트러지며 입 안이 달큼해지는 얼굴.
여울은 땀에 젖어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예쁩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란이 아기에게서 시선을 뗐다. 아기가 아니라, 저를 보고 있는 그를 알아차리고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우리 아이 말이다, 여울.”
“아기도 당신처럼 예뻐지겠지요.”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구나. 이럴 땐 네가 거짓말을 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느니라.”
여울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란은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 생각했다. 여울은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다 했으나 그녀는 아무래도 더 낳고 싶었다.
혼자는 외로울 테니까. 예쁜 딸아이도 좋지만, 그를 닮은 아들도 있었으면 싶고.
여울을 닮은 소년을 상상하며 서란은 설핏 웃었다.
갓 떠오른 햇살이 창호지에 스며들어 그들을 어루만졌다.
하늘이 축복하듯 맑은 날이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