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외전 - 후일담(上)2016.10.27.
명정 3년, 9월. 사미국.
유리서란은 여울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병장기 소리와 함께 그들을 쫓아오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가빠진 서란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여울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속삭였다.
“안 되겠습니다, 보주.”
“미안하구나, 내가…….”
“이리로.”
그는 어둑한 골목 안쪽으로 돌아서서 서란을 끌어당겼다. 제 품 속에 그녀를 감추고, 사미국인들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전신에 덮어쓰는 풍성한 흰 천으로 자신과 그녀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꾹 눌렀다. 서란은 숨을 죽였다.
경비병들이 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이국의 말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온 게 확실하나?』
『분명합니다. 피부가 흰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미국의 말이었다.
사미(沙迷)는 예락의 동쪽 바다 너머에 있는, 사막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래의 나라다. 예락국과 사미국은 거리에 비해 교류가 빈번한 편이었다.
사미국 출신 무사들은 예락국을 자주 방문한다. 예락은 요마가 많은 편이라 낭인무사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무사로 일하다 아예 눌러앉는 경우도 꽤 되었다.
그러나 예락에서 사미국인을 종종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사미에서는 예락국인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상인이 아니고서야 사미국에 굳이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나라는 척박하고 배타적이었다. 모든 이방인은 입국심사를 거쳐서 입국증을 받아야만 했다. 번거롭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절차였다. 그래서 사미국의 경비병들은 이방인이 보이면 곧바로 입국증을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내참, 요즘도 밀항자가 있다니.』
서란과 여울이 쫓기고 있는 건 그 탓이었다. 그들은 입국 심사를 거치지 않았다.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여울이 용의 힘으로 기척을 죽였다.
『그새 어디 갔지?』
『여기에는 안 보입니다!』
『이미 다른 길로 간 게 아닙니까?』
『흩어져서 찾아보도록.』
소란하게 떠들던 경비병들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흩어지더니 점점 멀어졌다.
“갔느냐?”
“예.”
서란이 답답한지 움찔거리더니 천을 걷었다.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 피해 다니니 예전 생각이 나는구나.”
“그때와는 다르잖습니까.”
지금이 명정 3년이니, 바다에 가기 위해 궐을 몰래 빠져나왔던 건 딱 3년 전의 일이다.
쫓기고 있는 건 같으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절박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그저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해 숨은 것이므로.
“이미 와 놓고 하기에는 우스운 말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충동적으로 온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보주께서는 좀 쉬어 주셔야 합니다.”
서란의 즉위 이후 요마가 줄어들면서 낭인무사의 수요도 줄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일거리를 찾아 들어오는 사미국 무사들의 수를 좀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나왔다.
이후 여울과 함께 산책을 하며 그 이야기를 하다가, 사미국에 무사가 많은 이유에 대해 화제가 옮겨 갔고, 그러다가 서란이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그녀가 그 말을 한 지 사흘이 지난 후, 침전에 든 서란은 여행 준비를 끝마친 여울을 보고 당황했다.
그 길로 그들은 잠시 쉬고 오겠다는 글줄만 달랑 남겨두고 궐을 몰래 빠져나왔다. 통로는 가 본 곳으로만 열 수 있기에, 여울은 밤새 서란을 태우고 바다 위를 날았다.
날아서 왔으니 입국 심사를 거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경비병을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걸렸다간 신분을 증명해야 할 텐데, 바다 건너 예락의 왕과 천룡이라는 게 알려졌다간 여러모로 귀찮을 터였다.
“사미국 이야기 한 지 사흘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행동력이 너무 좋아진 것 아니냐?”
서란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여울은 그녀에게 덮어씌운 천 자락을 여미며 답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보고 싶어 하셨으니.”
“예전이라니?”
“사막이 어떤 곳인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고 쓰셨잖습니까.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보내지 못할 답서에 그리 썼었다. 그리고 평생 불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하며 붓 아래에서 문장을 뭉갰다. 여울이 그 답서가 있는 그녀의 서간집을 본 건 3년 전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서란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설마 그…… 서간집 내용을 기억하고 있느냐?”
“거의 외우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여울은 자신이 그 서간집을 보며 얼마나 격렬한 폭풍을 겪었는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당연히 그 안에 담겨 있던 것들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말했던 하고 싶은 일들이나 소망에 대한 것들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무력하여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러니 힘을 얻은 이후부터는, 그녀의 소망을 이뤄 나가는 게 그의 목적이 되었다.
여울이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만 머금자 서란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궐에선 지금쯤 난리가 났겠구나. 원래 이 시간에는 조강을 듣고 있어야 하거늘.”
“며칠쯤 쉬시는 건 대신들이 더 반길 겁니다.”
“정해진 일과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
“나중에 경연관에게 물어보십시오.”
얄궂게도 여울의 목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서란의 성실함이었다.
유리서란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치세가 훌륭하다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군주의 치세가 뛰어나다는 것은 대체로 그 군주가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가끔 상궁들이 진지하게 왕의 과로를 걱정했다.
내버려 두면 지칠 때까지 일만 하고 있으니, 영의정인 안승호까지 나서서 여울에게 전하와 함께 쉬고 오라며 떠민 적도 있었다.
그러니 서란의 생각과는 달리, 궐에서는 그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은근히 좋아할 게 뻔했다. 천룡인 여울이 함께 있으므로 호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시지요.”
여울이 고민하는 기색의 서란을 이끌고 골목을 벗어났다. 사미국의 지리를 잘 몰랐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그는 되는대로 걸음을 옮기며 천계와의 소통을 시작했다.
「사막을 보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쪽에서 북동쪽으로…….」
「아니, 다들 저놈이 뭐가 예쁘다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
사미국을 가 본 적이 있는 천룡이 알려 주는 말을 마파람이 뚝 끊었다.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킬킬 웃었다.
「서란이가 보고 싶다고 하잖소. 여울이 안 끌고 나왔으면 저 아이는 티도 안 내고 있었을 건데, 도와주질 못할망정 왜 또 시비요?」
「노망이 나서 그래. 무시해. 야, 막내야, 거기서 북동쪽으로 쭉 가면 된다. 얼마 안 멀어.」
「이 불효막심한 것들이!」
귓가가 시끄러웠지만, 예전에 처음 천계와 연결했을 때만큼 요란하진 않았다. 그래도 늘 두세 명이 함께 말을 하는데다 높은 확률로 마파람이 끼어들어 잔소리를 하곤 했다.
여울은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며 필요한 것만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저놈 저거 봐! 또 저 할 말만……!」
그는 마파람을 무시하고 소통을 끊어 버렸다. 이 짓도 몇 년쯤 하니 이제 익숙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느냐?”
“예.”
여울이 앞장서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를 뒤따르며 서란은 낯선 거리를 관찰했다.
사미국은 햇살이 뜨거워 나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풍성한 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천이라 저리 싸매어도 답답하지는 않았다.
밝은 색의 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짙은 피부의 사람들이 돌로 만들어진 건물을 드나들었다. 목조 건물이 대다수인 예락과 달리, 누르스름한 돌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묘하게 생긴 가로수에는 수박처럼 둥글고 큰 열매가 달려 있었다. 메말라 버석거리는 공기가 숨을 타고 들어온다. 강한 햇살이 이국적인 풍경을 하얗게 빛냈다.
조심스럽던 그녀의 시선은 시장에 이르자 대놓고 사방을 훑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이 너무 많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노인이 바구니에 담아 파는 과일조차 낯선 생김새였다.
“여울, 너도 사미국은 처음이라 했었지?”
“예.”
“그럼 저 과일이 무엇인지 너도 모르겠구나.”
“천계에 물어보면 됩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아니, 괜찮다. 천룡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렴.”
서란은 말을 하면서도 주위의 낯선 것들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반면 여울은 생소한 주위보다 그것을 둘러보는 서란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나, 살짝 벌어진 입술이나, 상기된 볼, 홀린 듯한 발걸음 같은 것 말이다.
몰려 있는 인파에 그녀가 치이지 않도록 유도하다 보니, 예전에 갔던 도하의 야시장이 떠올랐다. 얼마 구경하지도 못하고 교룡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자리를 피해야 했던.
그녀가 눈여겨보던 소소한 것들을 사 주고 싶었고, 좀 더 자유롭게 둘러보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어서 목 안이 깔깔해졌던 기억.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세하게 기분이 들떴다.
“좀 돌아보시겠습니까?”
서란이 그를 돌아보더니 망설였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느냐?”
“급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조정에 일이 밀려 있을 텐데…….”
“시급을 다투는 일은 끝내신 걸로 압니다.”
“허나.”
“돌아갈 때는 통로를 열면 되니, 금방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잊고 쉬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럼…… 조금만 보자꾸나.”
여울은 담담한 어조로 그녀를 꾀었다. 서란은 알면서도 그에게 넘어갔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예전부터 그녀는 호기심이 많았다.
서란이 즉위하고 지금까지 3년간, 그들은 꽤 많은 곳으로 외유를 다녔다.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보료 평야나 차밭, 남해의 섬, 폭포, 그 외에도 여울이 떠돌며 보았던 명소들까지.
용의 힘이 있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다며 그녀를 유혹하는 건 늘 여울이었다.
서란은 인내에 지나치게 익숙하여 원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때문에 여울은 그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소망을 찾아내는 데 능숙해졌다. 대체로 둔감한 그였지만 그녀에 한해서는 예민했다.
“여울, 저것 좀 보아라. 저것, 아까 보았던 이상한 나무의 열매 아니냐?”
서란이 들떠서 소녀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무늬 없는 수박처럼 커다란 열매였다. 그 열매에 대롱을 꽂아 놓은 게 가판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사더니 대롱에 입을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열매 안의 즙을 마시는 걸까?”
“드셔 보시지요.”
“돈이 없느니라…….”
왕인 그녀가 돈을 들고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사미국의 돈은.
그녀의 말끝이 미묘하게 처지자 여울이 나직이 웃었다. 그러더니 가판 쪽으로 다가가 열매를 사 왔다.
서란은 멍하니 있다가 엉겁결에 그가 건네주는 열매를 받아 들었다.
“사미국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났느냐?”
“미리 산한테 받아 놓았습니다.”
“사미국 말은?”
“간단한 것만 배워 왔습니다.”
“그것도 산 오라버니께 부탁했더냐?”
“예.”
결국 사미국에 외유하기 위해 여울이 산을 알뜰히 이용했다는 소리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준비를 철저히도 했구나.”
“보주를 모시는 일이잖습니까.”
그가 스스럼없이 답했다. 서란은 이럴 때면 그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천으로 감싸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결같이 지극했고, 갈수록 살가워졌다. 간혹 여울이 서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산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녀가 그냥 지나치듯 한 말조차 새겨들으니.
‘밤에 자제를 못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 외에는…… 음.’
서란은 제가 떠올린 생각이 민망해 눈을 내리깔고 얼른 대롱에 입을 대었다. 미지근한 즙이 입 안을 달게 적셨다.
“생각보다 맛있구나. 너도 먹어 보렴.”
그녀가 내미는 열매의 대롱을 그가 머금었다. 한 모금 먹더니 미간에 금이 갔다.
“……신기한 맛입니다.”
“별로더냐?”
“나쁘지는 않습니다.”
“별로인 모양이구나.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보주께서는 눈치가 너무 빠르십니다.”
“네가 빤한 것이니라.”
그들 사이에 낮은 키득거림이 오갔다. 별것 아닌 대화가 즐거운 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저것 군것질을 하고 소소한 물건들을 샀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결국 사막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하만 사막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사미국에서 가장 넓은 사막입니다.”
“……엄청나구나.”
서란은 강렬한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뜬 채 앞을 보았다.
금빛 모래가 언덕을 이루며 길게 펼쳐져 있었다.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모조리 황금빛이다. 태양에 달구어진 모래 위로 아지랑이가 흐늘거렸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광막함이었다.
사방에서 열기가 조여 왔지만 서란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곁에 있는 게 수신이라 불리는 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걸었다. 여울을 믿으므로 길을 잃는 것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뒤따르며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정말로 까마득하구나. 어쩐지 이 세상 같지 않게 낯설고. 너는 어떠하냐?”
“수기(水氣)가 거의 없어 어색합니다.”
“불편한 게냐?”
“그저 신기한 정도입니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니 출발했던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새파란 하늘과 아득한 금빛 언덕들, 그리고 곱게 펼쳐진 모래에 남은 둘의 발자국뿐이었다.
황량한 바람이 그것마저 서서히 덮어 간다.
세상에 남은 게 그와 그녀뿐인 듯한 광경.
말없이 그 광경을 눈에 담던 서란이 문득 여울을 올려다보았다.
“여울.”
“예, 보주.”
“아이, 좋아하느냐?”
“예?”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에 끼고 있는 하얀 쌍가락지를 만지작거렸다. 여울의 손에도 비슷한 쌍가락지가 있었다. 즉위식 직후에 그녀가 그에게 선물했던 물건이다.
그와 그녀의 정표를 번갈아 본 서란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웃는다.
“나는 너를 닮은 아이가 보고 싶단다. 너는?”
“……그런 말씀은 침전에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울이 나직이 답하더니 그녀의 턱을 쥐었다. 가볍게 입을 맞추던 게 서란이 맞이하듯 입술을 열어 주자 점차 깊어졌다.
풍성한 흰 천이 하늘로부터 그들을 가렸다.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모래가 반쯤 삼켰다. 그 바람에 그녀가 비틀거리자 그가 팔로 허리를 받쳐 안았다.
입술이 떨어졌다. 속눈썹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여울이 속삭였다.
“참지 않아도 됩니까?”
마주한 주홍색 눈동자가 커졌다 반달처럼 휜다. 그녀에게서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서란은 도망치듯 그들을 감싼 흰 천을 벗어났다.
“아니, 지금은 참으렴.”
“통로를 열면…….”
“사막에 있다는 녹주(綠州)라는 곳을 보고 싶단다. 사미국 말로는 오아시스라고 하던가? 그걸 보고 나서 돌아가자꾸나.”
“짓궂으십니다.”
여울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녹주를 찾기 위해 물의 기운을 감지했다. 서란은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며 농을 던졌다.
“네가 욕심이 많은 게지.”
“제가 보주를 욕심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가 빙긋 웃으며 묻는다.
여울이 전에는 정말로 진지하게 저리 물은 적이 있었다.
2년 전쯤인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 욕심이 지나치느냐고 심각하게 물었다. 그에 답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대답을 알면서도 굳이 묻고 있다.
약아졌어.
서란은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 묻지 말거라.”
여울이 웃음을 터뜨렸다.
*
녹주는 다행히 멀지 않았다.
초승달처럼 고인 청록색 물 위로 야자수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작은 호수는 노란 단색으로 칠해진 풍경 속에서 홀로 푸르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테두리를 녹빛으로 장식한 수정 같았다.
물가에는 낙타를 이끄는 한 무리의 상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녹주로 다가오는 남녀를 보고 눈을 치떴다. 그들이 짐이나 물통조차 없이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을 맨몸으로 다니다니, 조난자인가?』
『그런 것치곤 안색이 멀끔한데.』
웅성거리던 말들은 서란과 여울이 가까워지며 사그라졌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 탓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메마른 열기가 꽉 차 있는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깊게 고인 물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자는 몹시 키가 컸고, 삿갓을 눌러써서 머리칼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삿갓 아래로 보이는 선이 반듯했다.
여자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난생 처음 보는 하얀 피부의 사람이었다. 면사를 써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섬세한 미모인 것이 티가 났다.
둘 모두 옷차림이 특이했다. 상인 중 몇이 예락의 복식임을 알아보았다.
『여행객이오?』
그들이 가까워지자 상인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없이 끄덕였다.
『그 여자는 예락국 사람인가 보군. 거기에서 왔소?』
『그렇소.』
상인은 좀 더 말을 붙이고 싶었으나 남자의 태도가 무뚝뚝해서 입맛만 다시며 물러났다.
개중 다른 상인이 물가로 다가가는 여자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가 그의 손이 닿지 않도록 여자를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날카로운 시선에 상인이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여자가 물을 마실까 봐 걱정되어 말리려던 것뿐이오. 지금 이 오아시스는 쓸 수가 없소.』
여자는 사미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남자도 정확히는 못 알아듣는 눈치라 상인이 몸짓을 곁들였다.
그는 한쪽에 치워 둔 낙타의 시체와, 파리가 꼬여 있는 요마의 시체를 번갈아 가리켰다. 요마의 시체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저 요마가 오아시스에 빠져 죽어 있었소이다. 건져 내긴 했는데 그사이 물이 오염된 모양이오. 물을 마신 낙타가 바로 죽어 버렸소. 그래서 우리도 경고문만 만들어 두고 얼른 떠나려던 참이오. 마을이 멀지 않아 다행일 뿐이지.』
여울은 단편적으로 알아들은 단어와 상인이 가리키는 시체들을 보고 대강 사정을 알아차렸다. 서란은 사미국어를 알지 못했지만 정황을 보니 짐작이 갔다.
“물이 오염되었다는 소리냐?”
“예, 그런 듯합니다.”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여의주의 가장 대표적인 힘이 물의 정화였으므로.
서란은 잠깐 고민하다 여울에게 눈짓했다. 여울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가로 다가갔다.
『아니, 그 물은 지금 독이라니까!』
상인들이 당황해서 소리치는 걸 무시하고 그가 물에 손을 넣었다. 삿갓 아래에서 주홍색 눈동자가 짧게 반짝였다. 호수에 희미한 빛이 감돌다 금세 사그라졌다.
여울은 상인들이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물을 떠서 삼켰다. 상인들이 멀거니 그를 보았다. 그는 이방인인 그들까지 걱정해 준 성의를 보아 한 마디 해 주었다.
『괜찮소.』
그사이 서란은 그늘에 걸터앉았다. 여울 덕에 덥지는 않으나 햇빛이 따가웠다. 그녀는 여울의 등 뒤로 낙타에게 물을 먹여 보고 놀라는 상인들을 지켜보았다.
“언제 봐도 신기하구나.”
“이 정도는 보주께서도 하실 수 있잖습니까.”
“연습을 했으니 가능하긴 해도, 저리 많은 물을 한 번에 정화하는 건 무리니라.”
서란은 바쁜 와중에도 마니로서 여의주의 힘을 이용해 정화하는 능력은 익혀 두었다. 그 덕에 적어도 음식을 먹고 잘못될 일은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참을 떠들던 상인 중 두엇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정말 물이 깨끗해졌더군.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야. 덕분에 쉬어 갈 수 있게 되었네. 야밤에 사막을 지날 생각에 걱정했는데…….』
『자네들 덕에 알게 되었으니 이거라도 좀 들게.』
그들은 설마 여울이 물을 정화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상인이 내민 것은 술 한 병과 나뭇잎으로 감싼 고기, 밀가루 떡 등의 음식이었다. 보아하니 물이 맑아져서 여기서 쉬어 갈 작정인 듯, 다른 자들은 천막을 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고맙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여울이 꾸러미를 받아 들자 상인들이 돌아갔다. 서란이 처음 보는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무슨 고기냐?”
“낙타 고기인 모양입니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낙타가 저 혹이 있는 생물이었지? 저것을 먹기도 하더냐?”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신기한 듯 고기가 담긴 나뭇잎을 받아 든 그녀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순간 속이 울렁였다. 역한 기운이 솟구치며 현기증이 일었다.
서란은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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