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68화 (68/70)

68. 외전 - 자드락(3)2016.10.23.

자드락은 기겁해서 일어난 다음,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몇 걸음 물러서고 나서 그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의 눈이 갈피없이 흔들렸다.

“보주, 제가 방금……?”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희사가 눈물로 젖은 얼굴로 그를 살폈다. 자드락의 눈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돋아났던 비늘도 가라앉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 목덜미를 더듬어 보더니 손에 피가 묻어난 걸 확인했다.

그녀는 그 피와, 자드락의 입가에 묻어 있는 자신의 피, 그리고 비늘이 사라진 그의 피부를 번갈아 보더니 울음을 뚝 그쳤다. 공포로 물들었던 얼굴에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자드락, 괜찮아? 괜찮아진 거지?”

“괜찮아지긴 했습니다만, 조금 전에 제가 보주께…….”

“이제 안 아픈 거 맞지?”

벌떡 일어난 희사가 그에게 매달리며 다그쳤다. 자드락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희사가 환하게 웃었다. 울다가 웃는 얼굴은 이상했지만, 그 미소는 눈부셨다. 그의 가슴께가 덜걱거렸다.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예?”

“방금 내 피를 먹어서 네가 나은 거 아니야? 내가 네 체액을 먹고 향을 감추는 것처럼!”

“자, 잠시만요, 보주.”

자드락이 당황해서 그녀를 밀어냈다. 너무 가깝다.

그녀로부터 좀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상황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거짓의 반동으로 극심하던 고통을, 그녀에게서 억지로 빼앗아 삼킨 피가 가라앉혔다.

그의 낯이 창백해졌다.

“죄송합니다.”

“응?”

자드락이 흔들리는 눈으로 희사의 목에 난 상처를 보았다.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가 멋대로 상처를 입혔잖습니까.”

“아니.”

희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어떻게 될까 봐 얼마나 놀랐는데. 잘된 거지.”

“잘되었다니요,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희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꼴깍 침을 삼킨 후에, 열심히 웃어 보였다.

“안 무서웠어.”

“거짓말을 하려면 눈물이라도 좀 닦고 하십시오.”

“이, 이건 너 걱정하다가 흐른 거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소맷부리로 눈가를 닦았다. 자드락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종종 다른 이무기들이 여의주의 향을 맡으면 마약처럼 홀린다는 소리를 하긴 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사태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게 문제였나?

“우선 상처부터 보겠습니다.”

자드락은 빠르게 그녀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나 이를 갈았다.

아주 짐승처럼 물어 놨다. 자괴감이 차올랐다.

그의 눈치를 보던 희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정말 괜찮아. 너를 도운 거 같아서 기쁘단 말이야. 지금까지 내내 너한테 짐만 되었는데.”

“짐이신 건 맞는데, 제가 원해서 짊어진 짐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지요.”

“쓸데없는 생각이라니,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습니까. 보주께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아깐 도움이 된 거 맞잖아!”

희사가 항변했다. 자드락은 그녀가 어설프게 싼 짐을 챙겨 들며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럼, 앞으로 이것도 실험해 보자. 내 피가 너한테 어떤 효과가 있는지.”

“그러려면 피를 내야 하는데, 몸에 칼을 대시려고요? 엄살도 많은 분이.”

“그쯤은 참을 수 있어. 효과가 있으면 얼마든지 써. 이건 보주로서의 명령이야!”

꿋꿋하게 고집을 세우는 희사를 자드락이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까져도 아프다고 울던 그녀가, 지금은 그가 낸 상처가 아프지도 않나 보다.

도움이 되고 싶으니 얼마든지 피를 내라 하는 얼굴이 곧았다. 울컥 치받는 감정이 있어서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자드락은 그녀를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와 야산을 올랐다. 적당한 공터를 찾아낸 후에 축지를 준비했다.

그는 나뭇가지로 진을 그리며 계속 생각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본다. 마음이 어지럽다.

정신이 나가서 그녀를 상처 입혔는데도 화를 내거나 그를 꺼려하지 않고, 도움이 되고 싶다 하는 건 그에게 미안해서일까. 단지 그뿐일까?

지금까지 봐 온 그녀를 떠올렸다. 붉어지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울며 어쩔 줄 모르던 얼굴, 우물쭈물 말을 삼키는 얼굴, 접문을 할 때의 얼굴. 혹시…….

“준비가 끝났습니다.”

“응.”

희사가 진 안으로 들어섰다. 자드락은 유심히 그녀를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고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그간 내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던 걸 그만두고 바짝 붙었다.

“저기, 보주.”

“왜, 왜?”

희사의 목덜미가 꽃잎처럼 물든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닿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역시.

자드락은 반달처럼 눈을 휘었다.

“사실 나중에, 안전해지면 말씀드리고 싶었는데요.”

“뭘?”

“그랬는데…… 보주께서 너무 무방비하셔서. 저는, 다 알아채고도 참을 정도로 인내심이 좋진 않거든요. 그래서 그냥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 서두가 기니?”

“연모합니다.”

희사가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사내로서요.”

“……어?”

“출발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자드락, 너 방금…….”

주위 풍경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희사는 얼떨결에 그에게 이끌려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늘어났던 풍경이 되돌아오며 변했다. 예전에 머물었던 청람산 근처의 동굴이었다.

상당한 거리를 축지한 만큼 좀 쉬어 줘야 했다.

자드락은 호흡을 고르며 희사를 놓아주었다. 짐을 들고 동굴 안쪽으로 걷는 그를 희사가 붙잡았다.

“기다려!”

“하룻밤 쉬고 떠나도록 하지요. 용미 쪽으로 가 볼까 합니다. 그쪽은 사미국인이 많으니…….”

“그게 아니라, 자드락. 너 아까 한 말…….”

희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자드락이 씩 웃었다.

“지금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왜 네 마음대로 그리 결정하니? 내 답이 무엇일 줄 알고?”

“압니다. 보주께서도 절 좋아하시잖습니까.”

태연자약하게 나온 대답에 희사는 터질 듯한 얼굴이 되어 쥐고 있던 그의 옷깃을 놓았다. 선 채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아, 아, 아, 아니야!”

자드락은 어물어물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보주께서는 인간이면서 저보다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그, 어, 으아, 으아아…….”

희사가 이상한 소릴 내면서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드락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동굴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급하게 그를 뒤따랐다.

자드락은 동굴 안에 빠르게 짐을 풀어놓았다. 전에 길게 머무르던 곳이라 금방이었다. 석 달이 넘는 도주 생활 동안 그가 이런 일에 익숙해진 탓도 클 것이다.

희사는 그의 뒤를 종종 따라다니면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면서, 왜 대답하지 말라는 거야?”

“보주께서 그런 말을 하시면, 제가 더 이상 못 참을 테니까요.”

“그런 말이라니? 뭘 못 참는데?”

“귀로 확답을 들으면.”

자드락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향한 눈에 낯선 빛이 돌았다. 여태까지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가 속삭였다.

“보주를 욕심내게 될 겁니다. 이미, 오래 참았거든요.”

그녀를 욕망하는 시선이 와 닿는다. 눈길이 부피를 가지고 몸을 훑어 내린다. 생소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랐다. 겁이 났다.

희사는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자드락이 돌연 평소와 같은 얼굴이 되더니 픽 웃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보주께선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보셨으리라는 거, 잘 압니다.”

가벼운 말투였다. 그가 도로 돌아서서 하던 것을 마저 했다.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불빛이 어른거렸다. 망연히 서 있던 희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해 봤어.”

“……예?”

“나도, 그런 생각 해 봤다고.”

자드락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희사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발돋움을 했다. 입을 맞췄다. 차마 파고들지는 못하고, 그저 꾹 누르고는 떨어졌다.

“네가 좋아.”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희사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대답해 버렸으니까, 이제 못 참겠네?”

자드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더듬더니, 낮게 웃었다.

“……뭔지 제대로 알고 계신 거 맞습니까?”

“알아!”

“아는 분이 고작 이런 걸로…….”

“이거면 충분하지, 뭘 더 바라니? 이 이상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정말 알아서 해도 됩니까?”

놀리는 듯한 물음. 하지만 그 목소리는 깊었다.

희사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너야말로 어떻게 하는지 알긴 해? 해 본 적 없잖아?”

“안 해 봤어도 압니다. 전 원래 뭐든 잘하잖습니까.”

“와, 너 진짜 밉상이야.”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희사는 순순히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그 품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그 밤부터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

수배령이 내린 이후, 그들의 선택지는 협소해졌다. 마을에 함부로 들를 수도 없었고, 객잔을 잡기도 어려웠다. 포위되기 직전에 축지로 탈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거짓말을 할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희사는 피를 내어 그를 진정시켰다. 자드락은 그들을 제보하려던 백성을 죽이기도 했다.

이무기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나쁜 짓’들에 손을 대었다. 여의주의 피로도 완벽히 희석하기 어려운 부담이 차근차근 쌓였다.

힘겨운 날들이었다. 그러나 꿈결처럼 달콤했다.

그들은 입을 맞췄고, 몸을 섞었으며, 함께 잠들었다. 귀엣말을 나누었고 별을 보았다. 손을 잡았고 이마를 맞대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으나, 이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런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은 영원할 수 없었다.

“자드락.”

황무지에 있던 버려진 마을이었다. 다행히 우물은 멀쩡했다. 우물물을 뒤집어쓰고 있던 자드락이 희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윗옷을 벗고 있는 자드락의 상체를 눈으로 훑었다.

“……너, 말랐어.”

자드락은 빙긋 웃고는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희사는 평소처럼 그 손을 마주 잡는 대신,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자드락의 옆구리와 팔뚝을 거쳤다. 아직 덜 아문 상처들. 옆구리는 병사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창에 베인 것이고 팔뚝은 세자의 교룡인 헤살에게 입은 상처다.

“갈수록 마르는 것 같아.”

착각이십니다, 하고 둘러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드락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배령이 떨어지고 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한곳에 오래 머문 적이 드물었다. 끊임없이 도망치고, 쉼 없이 주술을 썼으며, 영성을 흐리는 짓을 반복했다. 몸이 조금씩 망가지는 걸 자드락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슬슬 향이 나네요.”

그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희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자드락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고 입술을 맞대려는 순간에,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그만두자.”

“예?”

“즉흥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안 되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그만두자고. 도망치는 거.”

희사가 웃었다. 천진하던 웃음은 긴 도주를 거치며 깊고 옅어졌다. 그녀는 부스러질 듯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무리인 거 너도 알잖아. 시간문제일 뿐이야.”

“…….”

“넌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피곤하십니까?”

“응, 지쳤어.”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의 몸을 훑었다.

궐에 있던 시절에는 하나도 없던 상처가 정말 많이 늘었다. 아문 상처, 아물어 가는 상처, 그리고 지워지지 않을 흉터. 그 상처가 하나하나 생길 때 있었던 일들이 스쳐 간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고 덧붙여 말했다.

“너도 지쳐 가고 있잖아.”

“전 괜찮습니다.”

“너는 괜찮다고 말해도, 네 몸은 안 그래.”

희사는 조금 더 물러났다. 그녀의 표정은 울듯이 일그러졌으나, 울지는 않았다.

“나, 이제 향을 지우지 않을래.”

“그게 무슨……!”

자드락이 따라붙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희사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잇새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우지 않으면 하루도 되지 않아 포위될 겁니다.”

“그래, 그럼 끝낼 수 있으니까.”

“……보주,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일단 쉬시지요. 내일 이야기하세요.”

그녀의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희사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부터 향을 지우지 않으면, 금방 끝날 거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고집 피우지 마십시오. 얼른 지우고, 자고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으실 겁니다.”

“싫어. 안 지울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다.”

“억지로 지울 거니?”

강제로 범할 거냐고, 묻고 있다.

자드락은 얼어붙었다. 희사는 울지 않으려 했으나, 눈에 습기가 고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미안해. 하지만 더는 못 보겠어.”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습니까! 심장을, 갈라서…….”

“알아. 그래도 그게 나을 거 같아.”

“낫긴 뭐가 낫습니까? 저보고 보주께서 그리 되는 걸 지켜보란 말입니까?”

“정말 미안해. 그래도, 도망 다니는 거, 이제 못 견디겠어. 너무 힘들어.”

희사가 그의 팔을 떼어 냈다. 포위되기 직전에도,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여유를 잃지 않던 자드락의 얼굴에서 완전히 여유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를 지켜보며 다시 생각했다.

마니식을 치르고 죽는 건 그녀 혼자다. 자드락은 죽지 않을 거다. 교룡들은 형제처럼 자랐으므로, 되도록 서로를 해하고 싶지 않아하니까.

더 이상 그가 망가져 가는 걸 볼 수가 없었다. 희사는 자드락을 외면했다.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한계가 올 거라는 거, 너도 나도 알잖니. 여기까지만 하자. 넌 할 만큼 했어.”

“보주!”

“네가, 강제로 향을 지우려 하진 않을 거라 믿어.”

희사는 돌아서서 걸었다. 그녀답지 않은 단호함이었다. 자드락은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머물기로 한 폐가의 문을 열면서 희사는 이별하듯 말했다.

“자드락,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그녀는 끝까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호흡을 잊은 것처럼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유리희사는 향을 지우는 것을 거부했다.

자드락이 그녀를 억누르고 범하는 건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도망 다니며 다양한 실험을 했기에, 한 번만 밤을 보내면 며칠은 향이 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드락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예전에 만들었다가, 연인이 된 후 쓰지 않았던 향을 지우는 주술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주술은 급하게 만든 탓에 조잡했다.

그래도 전에는 어렵지 않았다. 희사의 몸에, 주로 머리카락으로 가려지는 뒷목에 주술 진을 그려서 유지하는 방식이었고, 하루 한 번 다시 그리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희사는 그녀의 몸에 진을 그리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난 싫어.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거부할 수 없겠지. 힘으로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어쩔 수 없으니까.”

“……이렇게, 정말 이렇게 끝내겠다는 겁니까?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보주…….”

자드락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희사는 끝내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울었는지, 울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자드락은 그녀의 몸 대신 머무는 곳 근처에 진을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비효율적이었다. 희사가 머무는 공간 안에 계속 향이 고였으므로, 금방 주술이 흐트러지며 밖으로 향이 샜다. 그나마도 밀폐된 곳이어야 주술이 먹혔다.

시간이 좀 있었다면 개량할 수 있겠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자드락은 한 시진마다 진을 다시 그렸다.

주술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희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절대로 향을 지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자 자드락은 더 빠르게 지쳐 갔다. 이무기가 아니었다면 길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무기였기에, 꽤 오래 버텼다.

그들 사이에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 희사는 포기하라 말했고, 자드락은 포기할 수 없다 말했다. 서로를 원망할 수도 없는 평행선이 아득하게 뻗어 나갔다. 시간이 무너져 갔다.

그 줄다리기에서 자드락이 패배한 건, 필연일 것이다.

졸았다.

그것은 죽음 같은 잠이었다.

“오랜만이구나.”

“……헤살.”

퍼뜩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무표정 위에 씁쓸함을 머금은 헤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났구나.

그 순간, 자드락은 후회했다.

강제로 범할 것을. 그렇게라도 그녀를 살릴 걸 그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살리는 게 무슨 의미지? 또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설령 그리 했더라도, 길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다.

그들이 머물던 폐가는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유리희사는 이미 끌려간 후였다.

자드락은 그녀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뒤집어진 짐들 사이에서 하나의 물건을 챙겼다. 그녀가 쓰던 면사였다. 교룡들은 그것을 못 본 척해 주었다.

자드락은 소서촌에 유배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요청은 묵살되었다. 마니식을 지켜보다가 뒤집어엎은 전적이 있는 탓이었다.

희명옹주의 두 번째 마니식은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치러졌다.

마지막에 유리희사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무슨 심정이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까마득한 공백을 그의 상상이 채웠다. 상상은 언제나 끔찍했다.

1년은 천 년처럼 길었고 하루처럼 짧았다. 상상을 할 때면 끝없이 고통스러웠으나 후회를 할 때는 순식간이었다. 그녀에 대해 곱씹는 건 살을 파헤치는 통증임과 동시에 가장 달콤한 쾌락이었다.

의미 없이 향을 지우는 주술에 매달렸다. 완성시키고 나자 술에 맛을 들였다. 우는 대신 웃었다. 노래를 불렀지만 가사는 붙이지 않았다.

소서촌의 동굴 속에서,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죽어 갔다. 천천히 미쳐 갔다.

그러던 어느 날에, 익숙한 향을 맡았다.

달고 그리운 향. 두 번 다시 맡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여의주의 냄새.

‘보주.’

꿈일까. 환상일까. 환상이라도 좋았다. 신기루라도 괜찮다. 그는 제 침상에 누워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손끝으로 얼굴을 덧그려 보았다.

‘낯선 얼굴…….’

그러나 익숙한 향. 너무 그리워서 돌아 버릴 것 같았던 향. 그 향기만이라도 얻고 싶다. 파편이라도 갖고 싶었다. 탐하며 부스러지는 이성 사이로 살기가 와 닿았다.

“무슨 짓이냐.”

차갑게 검을 겨누는 낯선 이무기가 있었다. 자드락은 혼곤한 정신으로 그 이무기와 여의주의 향을 내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 또 다른 당신과 제가 있네요, 보주.’

살의와 호의가 동시에 치솟았다. 찢어발기고 싶었으며 동시에 제 몸뚱이를 갈라서라도 살리고 싶었다. 자드락은 정신 나간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할까?

‘그래, 너희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겠다.’

그리 결심하고 도왔다. 어떤 끝을 맞이할지 보려 했다. 희사와 그는 실패했다. 저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실패하겠지. 처참하게 타 버릴 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무의미하게 살아 있는 생이다. 희사와 같은 향을 풍기는 마니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유지되지 못했다. 그와 유리희사에게는 없었던 희망이 그들에게 보였으므로.

“심장을 뽑지 않고도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 방법이 있다.”

저 말을 제 입으로 내뱉으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니, 그 순간에 생각을 할 수 있기는 했던가?

마니식이 비정상적인 제도였다고? 비틀린 역사였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용은 진짜 용이 아니라고?

그럼, 유리희사는, 내 보주는, 왜 죽어야 했지? 내가 마니식을 의심하지 못해서? 방법이 있었는데도, 내가 찾아내지 못해서?

까마득한 절망뿐이라 희사는 향을 지우지 않았다. 만약 저 진실들을 알았다면, 한 조각의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향을 지우는 걸 허락했을까?

그랬다면, 그와 그녀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드락은 끝을 선택했다.

“어떤 결말이 나든, 나는 그걸 버티지 못할 거야. 부러워서든, 절망해서든. 마니가 죽는 걸 또 볼 자신이 없어. 그렇다고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내는 걸 보고 미치지 않을 자신도 없어. 어느 쪽이든 알고 싶지 않아.”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하늘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를 가엾게 여겨 죽을 자리로 이끌어 준 걸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기꺼웠다. 세자의 교룡을 망가뜨리는 순간이 즐거웠다.

옛날에, 그녀가 살아 있을 때에, 이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정작 그녀의 심장을 삼킨 자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고 다른 교룡에게 하는 화풀이라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한계에 이르러 무너지는 감각은 휴식처럼 달았다. 그는 웃으며 스러졌다.

보주.

언젠가 먼 미래에, 혹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에는 다른 결말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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