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외전 - 자드락(2)2016.10.20.
고된 나날이 시작되었다.
다행인 점은, 왕실이 마니의 도주를 은폐하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왕실은 교룡들만을 이용해 은밀히 자드락과 유리희사를 추격했다. 수배령을 내리진 않았다.
좀 더 다행인 점은, 자드락이 주술을 특기로 삼았으며, 그 실력이 몹시 탁월하다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무력은 무공에 뒤쳐져도, 주술은 다방면에서 유용했다. 사실 자드락 정도의 수준이면 무력도 상당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부상을 완치시키는 일이었다. 주술은 무공만큼 몸 상태에 영향을 받지는 않으나, 그래도 자상을 입은 상태로는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자드락은 등잔 밑을 노렸다. 청람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중에 진을 그리고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그러곤 짐승을 잡아 여의주의 향을 묻히고 풀어 놓아 추적의 방향을 틀었다.
치료를 위한 도구나 가재도구는 약간 떨어진 마을에서 사 왔다. 돈은 희사가 달고 있던 장신구를 팔아 마련했다.
짙은 피부를 드러낸 자가 마니의 장신구를 매매했으니, 교룡들은 그 마을을 시작으로 여의주의 향을 쫓아 엉뚱한 곳을 뒤지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나친 곳에 그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터다. 물론 오래가진 못할 임시방편이지만.
곱게 자란 유리희사는 이런 산중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제법 잘 견뎠다. 자드락 역시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재주가 좋은 편이라 금방 능숙해졌다.
산 속에서 숨어 지낸 지 열흘하고도 나흘. 자드락의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자드락은 그들이 숨어 지내는 동굴 입구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다. 햇빛 아래는 제법 더웠지만 그늘진 동굴 근처는 시원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서판 위의 종이에는 글자와 숫자, 선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자드락은 머리를 싸쥐었다.
“역시 쉽지 않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종이를 구겨 버렸다. 등 뒤에서 불쑥 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쉽지 않아?”
“보주.”
그녀는 자드락이 떠다 준 물로 막 목욕을 한 참이었다. 색소가 옅어 갈색에 가까운 검은 머리칼이 물에 젖어 있었다. 궐에서처럼 시중을 들어줄 이가 없다 보니 옷고름도 어설프고 물도 제대로 닦질 않았다.
자드락이 서판을 내려놓았다.
“이리 오십시오.”
희사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드락이 제 옷고름에 손을 대는데도 별 생각 없이 내려다보았다. 경계심이라고는 없었다. 자드락이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켜 온 교룡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드락은 그 신뢰가 기꺼우면서도 묘하게 거슬렸다. 그가 쓴웃음을 지은 채 그녀의 옷고름을 고쳐 매었다.
그의 낯은 태연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얇은 홑옷만 걸친 채라 몸의 선이 뚜렷했다. 그의 체취에 물들어 있는, 성숙한 여인의 몸.
“보주께선 참…….”
“왜?”
“……아닙니다. 수건 이리 주시고, 여기 앉으세요.”
수건을 건네받은 그가 그녀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말려 주는 건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희사는 반쯤 눈을 감았다.
“아까, 뭐가 어렵다는 거니?”
“만들고 있던 주술이오.”
“아, 여의주 향 감춘다는 그거?”
“예. 아무래도…….”
자드락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희사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희고 보드라운 선이 자꾸 눈길을 끈다. 그는 간신히 시선을 뗐다.
함께 숨어 지낸 지 2주, 자드락은 제 욕심이 어디에 가 닿아 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무슨 마음인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 감정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봄날에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붙인 노래를 연주할 때부터일까? 혹은 마니식을 망치고 그녀를 구할 때부터? 더 이전에, 아이가 여인이 된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아니, 어느 순간 벼락처럼 찾아들었다기보다는, 수면 아래에서 쌓이던 지층이 때가 되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일 것이다.
자드락은 제 감정을 티낼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희사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뿐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 감정을 드러내면 그녀는 부담스러워질 터다.
그러니 참겠다. 감정을 내비치는 건 안전해진 이후로 하겠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타래를 수건으로 감싼 채 입을 열었다.
“보주, 주술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어 뒀던 피도 다 떨어져 가니 그동안은 향을 감추는 데에 다른 방법을 써야겠습니다.”
다른 방법이란, 접문이다.
아직 마음을 알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필요한 일이니까. 주술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 동안에 향을 지우려면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자드락은 제가 참 약아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종종 희사가 그에게 얄밉다고 하는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응. 뭘 하면 돼?”
그에게 머리카락을 맡기고 나른하게 답하던 희사는, 이어진 그의 말에 기겁하고 말았다.
“접문해도 되겠습니까?”
“……응?”
그녀가 멀거니 뒤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접문이 뭔지도 모르십니까?”
“내가 바보인줄 아니? 당연히 알아!”
반사적으로 답해 놓고 그녀는 다시 멍청해졌다.
지금, 저 이무기가, 제 교룡이, 자신한테 뭘 하겠다고?
희사가 말을 잊자 자드락이 빠르게 덧붙였다.
“몇 번만 하시면 됩니다.”
“며, 몇 번이나?”
점입가경이다. 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이어 말했다.
“주술이 완성될 때까지만, 임시변통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던 희사의 심장이 그 말에 가라앉았다. 희사는 그녀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의도로 저 말이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실험을 해 봤다. 피를 먹으면 하루 정도 향이 가려진다. 많이 먹는다고 그 시간이 늘진 않았다. 먹은 체액이 몸에 머무는 시간이 하루 정도라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자드락은 다른 의도가 아니라 향을 지우는 데에 타액을 써 보자는 뜻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럼 그렇지.’
조금 설렜는데.
희사는 풀이 죽었다.
그녀는 자드락을 마음에 둔 지 오래되었다. 소녀 시절부터 피어난 연심이었다. 그는 늘 그녀의 곁에 머물며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 그를 마음에 품은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드락은 그녀를 어린아이 대하듯 했다. 주인으로 모시긴 해도 그녀가 열 살일 때부터 보아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희사는 가끔 그의 행동에서 다른 의도를 찾아내려 하곤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한심해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피 대신에, 타액을 먹으란 거야?”
“예. 하루빨리 부상을 아물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 피를 일부러 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사실이다. 자드락은 이무기였으므로,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진실을 전부 말하지는 않을 뿐. 거짓말이 아닌데도 양심이 켕겨 와 자드락은 슬쩍 희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럼…… 해.”
희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더듬더듬 답했다. 그녀의 말에 자드락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주, 접문이 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 맞습니까?”
“뭐, 뭐야. 안다고 했잖아! 필요한 일이라며? 그럼 어쩔 수 없으니까…….”
“보주께선 참 겁이 없으십니다.”
자드락이 혀를 차며 말했다. 희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해야 한다고 한 건 너잖아.”
“그렇다고 냉큼 하라 하십니까?”
“그럼, 하지 말라고 해?”
“그건 아니지요.”
“뭐 어쩌라는 거야!”
희사가 빨개진 채로 씩씩거렸다. 자드락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음이 남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받쳐 든다. 희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자드락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동굴 입구에서 스며드는 햇살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꾹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힘주어 감는 바람에 눈꺼풀 주위에 생겨난 미세한 주름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제 감정 탓일까.
정적이 흐르자 초조해진 희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할 거면, 빨리 해!”
“네, 네.”
장난스러운 대꾸와 함께 그녀의 입술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그게 자드락의 입술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희사의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몸도 빳빳하게 굳었다.
“입을 열어 주셔야지요.”
입술을 맞댄 채로 자드락이 속삭였다. 희사는 홀린 듯이 입술을 열었다.
입 안으로 그가 침입해 들어왔다.
그건 몹시 낯설고, 굉장히 이상하고, 그러면서도 정전기가 탁탁 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으…….”
그녀에게서 절로 나온 신음인지 호흡인지 모를 것을 자드락이 삼켜 버렸다. 그리고 제 타액을 넘겨주었다. 혀끝이 스쳤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구겨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접문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자드락은 타액을 넘겨주면서 모른 척 그녀를 맛보았다. 희사가 반사적으로 타액을 삼켰다.
그것을 느낀 그가 입술을 떼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물러났다.
“끝났습니다, 보주.”
“으응……?”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희사는 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드락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보주, 진을 점검하고 올 테니 기다리십시오. 아, 젖은 채로 계시지 마시고, 머리카락을 마저 말리셔야 합니다. 슬슬 더워진다지만 그래도 혹여 감기 드시면 안 되니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
희사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자드락은 동굴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홀로 남은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자드락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외곽에 쳐 둔 진을 따라 걸었다. 입구에서 아무리 고개를 빼도 보이지 않을 곳에 이르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목덜미부터 차근차근 타오르더니 얼굴이 뜨끈해졌다.
그는 입가를 손으로 덮은 채 신음을 흘리다가, 손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얼굴에 올라온 열기가 안 식는다.
“아, 젠장. 이거 생각보다…….”
제 욕심으로 모른 척 시도한 일이 제 무덤을 판 꼴이 된 것 같다. 평생 있는 줄도 몰랐던 정염이 제멋대로 솟구쳐서는 잘 가라앉질 않았다.
이걸 주술을 완성할 때까지 해야 한단 말이지. 싫지 않다. 좋은데, 너무 좋아서 문제다.
“미치겠네.”
자드락은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헤집었다. 별수 없었다. 주술을 빨리 완성시키는 수밖에. 그는 태연한 얼굴이 될 때까지 희사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
그들은 자드락의 부상이 아물자마자 출발했다. 목적지는 창이었다. 북으로 가서 홍진강을 넘어 창 제국에 들어가면 추적이 힘들어질 테니까.
자드락은 이동하면서 계속 장거리 축지용 매개체를 만들어 놓았다. 매개체를 유지하는 건 꽤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룡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몇 번의 교전이 있었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그는 점점 능숙해졌다.
때로는 환상을 만들어 그 뒤에 숨었으며, 때로는 분신을 만들어 미끼로 삼았다. 축지를 이용해 이동 경로를 꼬았고 결계를 쳐서 길목을 막기도 했다.
그 와중에 주술도 완성되었다. 더 이상은 입맞춤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입 맞추기 전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희사는 이제 자드락 앞에서 흐트러진 옷차림을 내보이지 않았다. 자드락은 능청스레 농을 걸면서도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렇게 도주 생활이 이어진 지 석 달째. 결국, 수배령이 내렸다.
“수배령이네요.”
자드락은 뚫어져라 한 곳을 노려보았다. 수배령이 보란 듯이 벽에 붙어 있었다. 면사를 뒤집어쓰고 있는 희사가 중얼거렸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그들이 있는 곳은 홍진강 이남의 마을이었다. 여기만 통과하면 국경이었다. 그러나 강변에는 병사들이 빼곡했다. 진을 치고 있는 교룡도 하나 보였다.
그것을 본 희사가 자드락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제 어쩌지?”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미리 잡아 뒀던 객잔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 들어선 희사가 답답한 면사를 벗었다.
자드락은 지도를 펼쳐 놓았다. 지도의 곳곳에는 그가 축지용 매개체를 묻어 둔 곳이 표기되어 있었다. 지도를 읽는 법도 잘 모르는 희사는 침상에 걸터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홍진강변 전체를 지키진 못할 테니, 인적 없는 곳으로 돌아서…….”
“이보시오!”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중얼거리던 자드락의 말이 뚝 끊겼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객잔 주인의 것이었다.
“안에 있잖소. 아까 올라가는 것 다 봤는데. 열어 보시오, 얼른!”
희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드락이 지도를 덮어 치우며 대꾸했다.
“무슨 일이오?”
“급한 일이오. 열지 않으면 열쇠로 따겠소.”
객잔 주인이 협박하듯 말했다.
정황상, 검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만약 검문이 아니라면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된다. 이 자리에서 달아나는 건 그들이 마니 일행이라는 걸 광고하는 꼴이었다.
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자드락은 희사에게 면사를 건네준 다음 문으로 다가갔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은 언제든 주술을 쓸 수 있게 수인을 맺은 상태였다. 그는 문을 반 정도 열었다.
역시 검문이었다. 객잔 주인과 포졸 네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드락의 짙은 피부에 쏠렸다. 한 포졸이 인상을 쓴 채 물었다.
“사미국인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여기서 포졸들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들의 존재가 알려질 거고, 강변에 있던 교룡이 당장 쫓아오겠지.
둘이서 장거리 축지를 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축지는 흔적을 남긴다. 그들이 여기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했다.
자드락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왜 대답이 없어? 너, 이무기냐?”
이무기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심문으로도 충분했다.
자드락이 입을 다물고 있자 포졸들이 슬그머니 창을 치켜들었다. 객잔주는 퍼렇게 질려 물러났다. 포졸 중 하나가 품에서 폭죽을 꺼냈다. 다른 이들을 부르려는 듯했다.
자드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무기가 아니오.”
포졸들이 멈칫거렸다. 그들이 서로에게 눈짓했다. 자드락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사미국 혼혈일 뿐이지. 무슨 일이오?”
“……정말인가?”
“수배령에 있던 것과 닮았는데.”
“하지만 이무기는 거짓말을…….”
포졸들이 웅성거렸다. 자드락은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댔다. 그의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에 포졸 중 하나가 머뭇거리더니 재차 물었다.
“이름이 뭐요?”
자드락의 눈이 흘깃 포졸의 창끝을 스쳤다. 철로 된 창날이 달려있었다.
“……이철.”
“사미국인은 이름이 길다던데?”
“혼혈이라지 않았소. 예락에서 태어났소.”
“정말 희명교룡 자드락이 아니오?”
“아니오.”
“……알겠소, 방해해서 미안했소이다.”
포졸들은 꺼림칙한 기색이었으나 순순히 물러났다.
자드락은 급하지 않은 동작으로 문을 닫았다. 그는 포졸들의 발소리가 다른 곳으로 떠날 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자, 자드락!”
숨을 죽이고 있던 희사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자드락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방금 거짓말을…… 어떻게 한 거야?”
희사가 그의 어깨를 잡다가 흠칫 놀랐다. 자드락의 목덜미에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서둘러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자드락이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왈칵 피를 토해 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다가 누가 들을까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너, 너, 너, 왜 피가!”
자드락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입 안에 피 맛이 진했다. 눈앞이 빙빙 돌며 속이 뒤집혔다.
이무기가 거짓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윗대의 이무기 중 하나에게 주워들었다.
‘하려 들면 할 수는 있을 거라더니, 해 보니 가능하긴 하군.’
반동이 생각보다 크지만.
자드락은 목을 타고 오르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어지러운 시야를 간신히 붙들고 곁에 있는 희사의 어깨를 밀었다.
“짐을, 챙기십시오. 빠져나가야…….”
“아, 알았어!”
희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정신없이 방을 헤집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짐을 쌌다. 숨을 몰아쉬고 있던 자드락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떡해…….”
희사가 울먹거렸다. 어느새 눈물이 넘쳐흘러 뺨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녀가 바짝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희미하게 여의주의 향이 났다.
벽을 짚고 고통을 내리누르던 자드락의 시선이 문득 눈물로 젖은 그녀의 볼에 가 닿았다. 달콤하고 옅은 여의주의 향. 거기에 이끌린 건 본능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그가 희사의 얼굴을 붙잡고 제게로 당겼다. 희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자드락은 그녀의 눈물을 핥아 올렸다. 할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사는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자, 자, 자드락?”
처음으로 겪어 보는 거짓말의 반동은 강렬했다. 심지어 한 번에 내뱉은 거짓말이 다섯 개. 통증에 절어 이성이 흐릿해졌다. 인간의 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 삼킨 그녀의 눈물에 있는 미미한 여의주의 기운이 달게 몸을 적셨다. 화상에 와 닿는 냉수 같았다.
하지만 모자라다. 눈물로는 한참 부족했다.
자드락이 희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그녀에게로 기울었다.
희사는 그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아야…….”
뒷머리를 바닥에 찧어서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자드락의 몸이 그녀의 위를 묵직하게 눌러 왔다. 희사는 그를 밀어내려 낑낑거렸다. 그러다 얼어붙었다.
자드락이 그녀의 목, 여린 살에 입을 댔다. 그 감촉에 소스라치려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윽……자, 자드락? 왜 이러는…….”
뱀의 송곳니가 목을 물었다. 흘러나오는 피를 그가 받아 마셨다.
희사는 겁에 질려 바르작거렸지만 그의 아래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제 목에 달라붙어 있는 그가 무서웠다.
“자, 드락, 왜, 흐엉, 엉, 이러지 마…….”
홀린 듯이 그녀의 피를, 정확히는 여의주의 기운을 집어삼키던 자드락은 일정량이 넘어서는 순간 벼락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 스스로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가라앉은 통증, 입 안에 달게 도는 여의주의 향이며, 자신 아래에 깔려 울먹이는 보주의 모습, 그 목에 뱀이 문 것처럼 남은 상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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