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외전 - 자드락(1)2016.10.16.
마니전에도 봄은 늘 공평하게 찾아왔다.
후원의 한쪽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시냇물이 그 아래에 흘렀다.
흑룡제때 외에는 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마니는 매년 그곳에서 꽃놀이를 했다. 꽃놀이라 해 봤자 나인 몇과 야외에서 화전을 부치고, 화전가(花煎歌)를 지어 부르는 정도였다.
진달래 그늘 아래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있던 자드락이 몸을 일으켰다. 희명옹주(熙明翁主) 유리희사(流理喜思)가 금을 뜯던 손을 멈추고 제 교룡을 돌아보았다.
희사가 생글 웃었다.
자드락은 양반다리 위에 팔을 괴고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주인을 응시했다. 주인을 대한다기에는 꽤 건방져 보이는 태도였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드락은 원래 그러했다.
희사가 장난스럽게 금의 줄을 튕기더니 곧이어 음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좀 더 기교가 들어간 음률이 흘러나왔다.
밝고 명랑한 가락은 시냇물 위를 통통 튀어 가는 꽃잎 같았다. 짙은 진달래가 그녀의 얼굴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은은한 꽃내음과 달콤한 여의주의 향이 뒤섞여 맴돈다.
자드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음과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모든 것이 달다.
희사는 묘하게 우쭐한 얼굴이 되었다. 자드락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질적인 이무기의 동공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가 키득거렸다. 다시 금을 탄다. 조금 더 정돈된 가락이 흘렀다.
그녀는 흥이 난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보송한 귀 옆머리가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린다. 자드락은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이 눈에 담았다.
문득 울듯이 일그러졌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무기들이 모두 외면하던 조그맣고 무력하던 아이는 어느새 관례를 치른 스무 살의 여인이 되었다.
그의 눈이 곱게 물들인 희사의 입술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거쳐 둥근 이마를 더듬었다.
‘예뻐졌네. 그렇게 작던 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이무기에게 10년은 탈피 한 번도 하지 못할 시간이지만, 인간에게는 아이에서 어른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자드락은 바늘이 명치를 파고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니식까지 2년 남았다. 고작, 2년.
어느새 연주를 끝낸 희사가 자드락의 코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깝다.
자드락은 약간 뒤로 몸을 뺐다.
노래가 좋다는 말일 터다. 희사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이 붉어져,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가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희사는 글자마다 음을 붙이고 늘여 가며 그의 이름을 노래처럼 발음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금 위를 세 번 노닐었다.
자드락이 인상을 썼다.
자드락이 눈을 깜박였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금을 내려다보고 있던 희사가 고개를 들었다.
발긋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봄꽃 같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며 휜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희사가 끄덕였다.
자드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금의 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 그 손가락이 얇은 줄 위를 뛰논다. 꽃망울이 터지듯 음도 뛰놀았다.
자드락은 그 노래를 음미했다. 그녀가 지은 가락이라 듣고 보니 정말로 그녀 같은 음이다. 진달래를 올린 하얀 화전처럼, 곱고, 달고, 사랑스럽지만,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덧없이 져 버릴 꽃과 같은.
*
“볕드는 자드락에 꽃이 피고, 나비가 시내 위에 춤을 추니, 어린 봄 살금살금 찾아든다. 봄날이 향기롭고 즐거우니, 이대로 영원하길 바라건만, 여름 해 타오르자 꽃이 진다. 꽃 죽은 자리마다 잎이 돋아, 그 봄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작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익숙한 목소리. 가늘게 떨리는 음성에서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눈이 잘 뜨이지 않았다. 자드락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노래가 뚝 멎었다. 자드락은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자드락.”
희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발갛다.
그녀는 참 잘 운다.
“또 우셨습니까.”
잔뜩 잠기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시울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투두둑 그의 얼굴에 떨어진다. 희사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물었다.
“왜 그랬니?”
“…….”
“어쩌려고 이랬어, 응?”
희사는 떨리는 손으로 자드락의 얼굴을 감쌌다. 자드락은 제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격통이 내달렸다.
“큭.”
낮게 신음하자 희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누, 누워 있어. 너 상처가…….”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까?”
“바, 반나절 정도? 네가 깨어나질 않아서, 얼마나…….”
반나절이나 정신을 잃었나. 한시가 급한데.
자드락은 울먹이는 희사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배의 자상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틀어막다가 어설프게 감긴 천을 발견했다. 붕대의 역할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 천은 급하게 찢어 낸 속치마 자락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걸 붕대라고 감아 두셨습니까.”
“가진 게, 없어서…….”
“애쓰셨네요. 별 도움은 안 되었지만.”
허술하기 그지없는 천 조각을 움켜쥐며 그가 키득거렸다. 어깨를 떨며 웃자 피가 더 많이 배어 나왔다. 희사가 그의 말에 찡그리다 그것을 발견하고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그 꼴로 웃음이 나오니?”
“예, 보주 덕에.”
자드락은 능청스레 대꾸하며 주위를 가늠했다. 별로 깊지 않은 굴 안이었다. 마니식을 엎어 버린 다음, 희사를 빼내어 간신히 여기까지 와서 정신을 잃었던 게 기억났다.
그는 품 안에서 부적과 침통을 꺼내 대강 상처를 치료했다. 그가 제 상처 근처에 긴 침을 툭툭 꽂아 넣을 때마다 희사가 흠칫흠칫 어깨를 떨었다.
자드락은 그 기척에 입술을 실룩였으나 웃지는 않았다. 치료 중에 웃다가 내장이라도 보이면 그의 보주는 기절할지도 모른다.
“자, 자드락.”
“예.”
“……대답해 주렴. 왜 나를 빼냈어?”
희사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드락은 코끝을 긁적였다. 그는 피가 멎은 상처 위에 부적을 붙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고 싶어서요.”
“그게 말이 되니?”
“정말입니다.”
“그럼, 왜 그러고 싶었는데?”
“흠…….”
자드락이 흘깃 희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니식을 위해 꾸미느라 화장에 원삼에 떨잠까지 화려한 차림이었는데, 달아나는 와중에 치장이 엉망이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울어서 발갛게 부어 있는 눈가가 안쓰럽다. 그는 그 눈두덩을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보주께서 너무 울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뭐?”
“거기서 또 펑펑 울까 봐서요. 울보 맞잖습니까.”
“울보라니! 내 누누이 말하는데, 넌 정말 주인에 대한 공경이 부족해서……!”
희사는 평소처럼 반응하다 입을 닫았다.
자드락은 그녀에게 대놓고 울보라고 놀리고, 그녀는 주인을 제대로 모시라고 화를 내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이제 끝났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겠지.
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참고 싶은데 또 눈물이 솟았다.
“이거 보십시오.”
자드락이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아이를 달래듯 쓱쓱 눈물을 닦아 냈다. 희사는 훌쩍거리면서도 순순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
다 큰 여인인데 그 모양이 어릴 때와 똑같다. 자드락이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제법 손이 매서웠다.
“아!”
화들짝 놀란 희사가 자드락의 손을 피해 물러났다. 그녀가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너, 감히……!”
“보주.”
실실거리는 낯과 달리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드락의 눈은 깊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 그가 배의 자상에서 흐른 피로 젖은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이거, 드셔 보십시오.”
“……응?”
희사는 백치처럼 되물었다. 귀로 들은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드락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역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피를 삼켜 보십시오.”
“피? 이 피를? 왜?”
희사는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그가 다시금 코끝을 긁적였다. 난처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시험해 볼 것이 있습니다.”
“뭘 시험하겠다는 거니?”
“여의주의 향이 가려지나 봐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방 추적당할 겁니다. 주술을 하나 만들 작정이지만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향이라는 말에 희사는 반사적으로 제 팔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녀는 아무 향도 맡지 못했다. 자드락이 픽 웃었다.
“이무기가 아니면 못 맡습니다.”
“나, 나도 알아!”
희사가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향을 가리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니?”
“제 냄새로 여의주의 향을 덮어 보려 합니다. 보주께서 제 체액을 먹으면 되는데, 마침 피가 났으니까요.”
“체액? 그런 걸 먹는다고 향이 가려져?”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아?”
희사는 의심스럽게 제 교룡을 보았다. 자드락은 의미심장한 낯으로 그녀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보주께서 열 살 때, 저를 덮치신 덕에 알게 되었습니다.”
“……더, 덮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어디서 뱀은 눈꺼풀이 없어서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오셔서는, 이무기도 그러냐고 저한테.”
“악! 그만!”
그녀는 기겁하여 그를 밀쳐 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상처를 자극당한 자드락이 신음을 흘렸다. 새빨개져 화를 내려던 희사가 그 신음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두었다 하면서 눈만 굴리는 걸 보고 자드락이 키들거렸다.
“기억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하긴 인상적인 일이니까요.”
“…….”
열 살,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이무기를 얻은 유리희사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의 교룡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무기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텐데, 희사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녀는 그간 건성으로 했던 공부를 후회했다. 그녀의 어미였던 귀인 장씨가 마니인 그녀에게 올 이무기는 없을 거라 했기에, 배워 봤자 무슨 소용이냐 하는 심정으로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공부하기가 싫었던 탓도 있다.
희사는 맹약식 이후에야 급하게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그러다 뱀은 눈꺼풀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무기는 뱀에서 출발한 존재였다. 희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이무기도 울지 않는 걸까? 난 하도 자주 울어서 보모상궁이 그러다 몸이 바짝 마르시겠다고까지 하는데.’
그녀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데면데면하던 자드락에게 가서 물었다.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자드락은 난처하게 시선을 굴렸다. 그의 반토막만 한 열 살짜리 보주가 그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거리낌 없이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더니, 똘망똘망한 목소리가 묻는다.
어린 희사는 자드락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몹시 당황했지만 그녀의 칭얼거림에 이길 수가 없었다. 맹약에 따라 모시기로 한 주인이니까. 자드락은 결국 억지로 눈물을 몇 방울 떨궜다.
이게 뭐가 그리 신기한지.
자드락은 코앞에서 조그만 아이의 얼굴에 감탄이 퍼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솔직한 표정의 변화가 묘하게 그를 홀려서, 잠시 넋을 놓았다.
그사이 희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핥아 삼켰다.
어지간한 자드락도 이 사태엔 기절할 듯 놀랐다.
희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게 참 귀엽고 우스워서 피식거리던 자드락은 품 안의 아이에게서 여의주의 향이 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맹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향에 적응하기 전이다. 이무기에게 여의주의 향은 달고 인상적이라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향이 사라졌다.
여의주가 사라지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는데.
자드락은 희사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주홍빛 눈이 동그래져서 그를 본다. 눈은, 여전히 주홍색인데.
그는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아주 바짝 붙어야 간신히 여의주의 향이 조금 났다. 그것을 온통 뒤덮고 있는 물비린내 같은 흐린 향이 있었다. 그의 체취였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희사가 그의 눈물을 먹은 것밖에 없었다. 체액은 체향을 품는다. 그 향은 이무기의 기운이기도 하다.
희사가 그의 체액을 먹으면서 여의주의 향이 그 기운에 가려진 걸까?
의문스러웠지만, 그 당시 자드락은 신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고 넘겼다.
오랜 예전의 기억을 되새기던 자드락이 중얼거렸다.
“제 눈물을 드시고 향이 지워지셨는데, 그게 하루 정도 갔습니다. 그러니 한번 드셔 보십시오. 여의주의 향을 감춰야 합니다.”
“아,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희사가 결의에 찬 얼굴로 자드락이 내민 손을 바라보더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댔다. 그의 손에 묻은 피를 그녀가 핥아먹었다.
그 감촉이 굉장히 생경했다. 자드락은 제가 시켜 놓고서는 흠칫 떨었다.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
“네 피, 신기해. 비린내가 안 나. 이무기라서 그러니?”
“아마 그렇겠지요.”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희사가 화들짝 놀라 버둥거리자 자드락이 혀를 찼다.
“가만 계십시오. 향을 확인하려는 겁니다.”
“말을 먼저 하고 하란 말이야! 놀랐잖아!”
“아니, 제가 뭘 할 거라고 생각하셨기에 놀라십니까?”
“그…… 됐으니 빠, 빨리 확인이나 해 봐.”
희사가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드락은 발긋해진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여의주의 향은 바짝 붙었을 때나 미미하게 났다. 그 외에는 온통 그의 체취만이 가득했다.
코끝에 스치는 여린 피부. 그녀에게서 나는 그의 향. 오르락내리락하는 숨결. 감싼 팔에 느껴지는 여인의 허리. 오감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존재. 그의 보주.
그가 마니식을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했을 감각들이다. 자드락의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러내렸다.
이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순간 자드락은 그것이 필연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가 심장을 빼앗기고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보주.”
향을 확인한다더니 자드락이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물러나질 않았다. 희사는 자신의 허리를 당겨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함께 달아나시겠습니까?”
“……어디로?”
“어디로든지요. 먼 곳으로. 마니도, 교룡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요.”
“순서가 잘못된 거 아니니? 이미 저질러 놓고선.”
그의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였다. 희사는 그로부터 최대한 떨어지려했다. 그의 팔에 안겨 있는 탓에 무의미한 짓이었다.
더 붙어 있다간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이 들킬 것 같아서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부상이 걱정되어 크게 밀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의 귓가에 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멀리, 아주 멀리 가서.”
낮게 스며드는 남자의 목소리.
“단둘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사는 애써 진정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귀에서 뛰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요란했다.
아냐, 이건 고백이 아닐 거야. 자드락은 내 교룡이니까, 날 지키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뿐이야. 진정하자, 유리희사.
그녀는 간신히 스스로를 달랜 후에 말을 꺼냈다.
“……그게 가능해? 다 쫓아올 텐데. 난, 마니잖아…….”
“가능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12년을 봤는데 보주께서 무능한 걸 제가 모를 리가요. 그나마 잘하시는 건 금 타는 것 정도잖습니까. 그러니까 보주께는 아무것도 안 바랍니다.”
능청스런 대꾸에 희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항변하고 싶은데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 그래, 무능한 날 데리고 뭘 어쩌려고! 얼마 가지도 못해서 붙잡힐 걸!”
“제가 유능하니까 괜찮습니다.”
“……너 얄미워. 늘 그랬지만.”
“왜요, 반박할 말이 없으십니까.”
“이렇게 알면서 굳이 되묻는 게 얄밉다는 거야!”
“칭찬으로 듣지요.”
자드락이 다시 웃었다. 그녀는 맞닿은 몸이 떨리는 것으로 그의 웃음을 느꼈다.
그가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희사의 시야에는 그의 어깨만 보였다. 넓은 어깨. 희사는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자드락.”
“예.”
“네가, 날 살려 줄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있잖아, 자드락.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말씀하시지요.”
“……나 사실은, 정말로 무서웠어. 마니식 하러 가기 싫었어.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는걸. 도망가고 싶었어. 어디로든지.”
“…….”
“마니식 하러 가면서, 너보고, 도망치게 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하고 싶었어. 널 붙잡고 떼를 쓰면서 울고 싶었단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계속,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참기가 힘들어서…….”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저렇게 겁을 내고, 늘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그녀는 마니식의 제단 앞에 설 때까지 그에게 도와 달라 하지 않았다. 끝내 참아 냈다.
자드락은 쓰게 웃었다.
“압니다.”
“나, 진짜 울보인가 봐…….”
“그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자드락이 손을 들어 그녀의 뒷머리를 꾹 눌렀다. 제 품에 그녀를 파묻고는, 나직이 말했다.
“마음대로 우셔도 됩니다.”
그 말이 열쇠가 된 것처럼, 희사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의 어깨가 흠뻑 젖어들었다. 자드락은 그녀의 몸을 감싸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처럼 앞날이 새카맣게 가라앉을지라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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