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반정(3)2016.10.09.
서란이 산과 마주한 곳은 궐의 내원에 있는 누각이었다. 누각 밖으로 싸락눈이 쌓이고 있었다. 야외인데도 그 안은 따스했다. 누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여울의 힘이었다.
“정말 괜찮겠, 아니…… 괜찮으시겠습니까?”
턱을 괸 채 한참 말이 없던 산이 입을 열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존대에 서란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냥 편히 말하세요.”
“곧 즉위하실 텐데, 제가 어찌.”
“사석에서는 상관없습니다.”
“권위를 지키셔야지요.”
“고작 이런 걸로 흔들릴 권위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서란이 살짝 웃었다. 그녀는 검은 눈의 오라비를 응시했다.
“오라버니께는 그럴 자격이 있는걸요.”
산이 멋쩍게 코를 긁적였다. 낯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이어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고.”
“……오라버니도 제 결정이 무르게 느껴지시나요?”
서란이 입에 담은 ‘결정’은 세자의 유배를 뜻했다. 그녀의 물음에 산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산이 길게 침묵했다. 내심 형님이 사약까지는 이르지 않기를 바랐던 그는, 천응이 평종을 살해하면서 태도를 바꿨다.
마지막 마니식이 끝난 이후 산은 천응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주장했었다. 아비의 복수도 복수거니와, 이런 짓까지 저지를 정도면 살려두었다간 우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과 정물처럼 앉아 있는 여울 쪽을 흘깃 보았다. 이어 먼 하늘과, 그 아래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청람산을 거친 그의 시선이 다시 서란에게로 돌아왔다.
“그저 혈육이라, 자비로 내린 결정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네.”
서란이 순순히 답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제 자신에 대한 경계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경계?”
“그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제가 다스릴 예락을.”
유리천응에게 보란 듯이 나아지는 예락을 보여 줄 것이다. 그가 틀렸음을 평생에 걸쳐 깨달을 수 있도록.
그의 존재는 서란이 방심하거나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가시가 될 터다.
산은 그녀에게서 심연을 보았다. 체념으로 쌓였던 그 심연은 다른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네게 걸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만족스러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서란이 마주 웃었다. 그러자 산이 단박에 태도를 바꾸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궐에 납품하는 향신료는 금산상단이 독점하게 해 주시옵소서, 전하.”
그는 능청스레 손을 비볐다. 서란이 눈을 치떴다.
“지금 청탁하시는 건가요, 오라버니?”
“왕을 동생으로 둔 덕 좀 봐야지.”
“저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습니다만.”
“곧 할 거잖아?”
그녀의 즉위식은 1월 1일로 잡혀 있었다. 연호는 명정(明正). 즉위식은 명정 1년 1월 1일이 된다.
촉박한 날짜지만 왕위를 오래 비워 둘 수도 없어 관리들도 궁인들도 눈 돌아가게 바쁜 상태였다.
서란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대가 없이 해 드릴 순 없겠는데요.”
“어차피 공신들 쳐내면 납품 자리 비잖아, 안 그래?”
“공정하게 심사를 볼 예정입니다만.”
“심사해 봤자 우리 물건이 낙점될 텐데, 심사 절차에 걸리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해 보자고, 응?”
산이 능글맞게 미소했다. 서란은 못 참고 짧게 웃었다.
“저를 이기면 생각해 보도록 하겠어요.”
“이기다니, 뭘?”
“전에, 대국 한번 하자고 하셨잖아요.”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듣기가 두려워 바로 덧창을 닫아 버렸다. 그때에는 그녀가 살아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실낱보다도 가느다랬다.
그랬는데, 그녀는 왕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바둑을 두자고 그에게 말하고 있다.
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속에서 무언가 일렁인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조건을 걸어야 공평하겠지요. 만약 제가 이긴다면…….”
“……뭘 걸려고?”
서란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눈에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오라버니가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군지 듣겠습니다.”
예상도 못했던 조건이다.
산은 얼이 빠졌다. 그의 얼굴이 차근차근 붉어지는 걸 서란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산이 빽 고함을 질렀다.
“그, 그,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잖아!”
“그런 말은 제게 승리한 후에 하세요. 사실, 짐작 가는 이가 있지만.”
“짐작은 무슨! 없다고! 없다니까?”
“네, 네. 즉위 후에 대국할 테니 연습 많이 해 두세요.”
“현음당 말고는 둬 본 사람도 없다며? 너 자신이 넘친다?”
“얼마 전에 여울이랑 둬 봤습니다.”
“쟤는 약해빠져서 의미가 없어!”
산이 여울에게 삿대질을 했다.
가만 있다가 화살을 맞은 여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툭 내뱉듯 말했다.
“청화에게 알려 줘도 되나?”
“……뭘 알려 줘? 아니, 여, 여기서 걔가 왜 나와?”
“네가 전에 나한테, 그녀에 대해서 말하기를…….”
“야, 야! 그만! 거기까지! 이 배은망덕한 뱀 놈이!”
산이 기겁하여 여울에게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졌다. 애꿎은 찻잔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여울은 손짓으로 그것을 멈춰 매끄럽게 내려놓았다. 허공에 뿌려졌던 찻물마저 되감기듯 잔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산은 그 놀라운 광경에도 감탄하는 대신, 열불이 터지는지 가슴께를 툭툭 쳤다. 그 촌극을 보고 있던 서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마. 급한 일이옵니다.”
내관이 누각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아직 즉위하지 않아 마마로 칭해지고 있었다.
서란이 웃음을 거두고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마니식 이후 그녀는 거의 쉴 틈 없이 일에 쫓기고 있었다. 예락의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에서 흰 노리개가 반짝였다. 그것을 응시하던 산이 여울을 돌아보았다.
“친구야.”
여울이 눈만 돌려 그를 보았다. 산이 턱짓으로 서란을 가리켰다.
“란아 호신부 저거, 네가 만들어 줬다며?”
“그래.”
“너 말이다.”
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여울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란아한테 뭐 제대로 선물한 적 있냐?”
의외의 물음에 여울의 얼굴이 멍해졌다. 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반려라면서 선물 하나 안 줘 봤어? 양심 없는 새끼야.”
“보주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신 적이…….”
“말을 안 해도 그쯤은 알아서 챙겨야지, 멍청아. 너 청혼도 맨몸으로 했지?”
산이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여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곤 서란 쪽을 보았다. 그녀는 내관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본 산은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호신부를 다시 가리켰다.
“넌 쟤가 틈날 때마다 저거 만지작거리는 거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안 들든?”
“…….”
“내가 이런 무심한 놈을 매제로 맞아야 하나. 갈 길이 멀다, 정말.”
여울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호신부는 정말 기능적인 목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선물. 정표(情表).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어떤 것을? 어떻게?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그의 낯이 흐트러지는 걸 보며 산은 고개를 내저었다. 200년만의 천룡이고 자시고 그에게는 여전히 속 터지는, 그러나 하나뿐인 친우였다. 이제부터는 매제이기도 하다.
산은 들으라는 듯 거창하게 한숨을 쉬었다.
“야, 도와줄까?”
“……부탁하지.”
“너 이거, 빚으로 달아 둔다.”
“마음대로 해라.”
“좋아, 용 한번 제대로 부려먹어 보겠네. 이리 와 봐.”
산이 손짓했다. 여울은 고분고분 그의 귀엣말을 들었다.
*
바쁜 날들이 흘렀다.
공신이 쓸려 나가며 조정이 개편되었고 안승호가 영의정이 되었다. 현음당은 제자를 키우는 것에 만족하여 모든 지위를 고사했다.
궐을 떠나 몸을 숨겼던 왕족들이 돌아왔다. 이미 혼인했던 제녕군은 온과 함께 궐을 나갈 준비를 했고 아직 어린 진녕군과 그의 교룡 희나리, 그리고 화련공주는 궐내에서 거처만 옮겼다.
모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야로는 홀로 헤매었다.
“여…….”
소년은 이름을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궐내에서 여울과 딱 마주쳤다. 주홍색으로 변한 눈도, 하얗게 변한 머리칼도 낯설었다.
그러나 야로에게는 그보다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이 더 낯설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 움켜쥔 손마디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여울은 소년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야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비명처럼 외쳤다.
“여울!”
소년은 허겁지겁 달려 그의 뒤를 쫓았다. 말이 횡설수설 흘렀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여울, 나는.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어. 미안해……!”
여울은 멈추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야로가 그의 소맷부리를 쥐었다.
여울이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울먹이는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새까맣게 덮쳐 오던 절망이 떠오른다.
그는 천천히 야로의 손을 떼어 냈다. 그대로 멀어진다.
소년은 비로소 깨달았다. 제가 했던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는 것을. 제 손으로 그와의 관계를 부쉈음을 뒤늦게 자각했다.
쏘아 냈던 살이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미 아문 손바닥이 쑤셔 온다.
야로는 울컥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몰랐단 말이야! 네가 그렇게, 그, 마니를, 그렇게나…….”
그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은 그대로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울었다.
“야로, 너 여기서 뭐 하니?”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향이 다가와 소년을 품에 안았다. 고운 소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누가 내 교룡을 울렸어?”
화련공주가 눈을 부라렸다. 야로가 울음을 뚝 그쳤다.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화련공주가 쪼그려 앉더니 야로의 머리를 토닥였다.
처음 만났을 땐 야로가 더 컸는데, 6년이 지난 지금은 화련공주가 더 컸다.
야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보주. 용서받고 싶은데, 용서를 해 주지 않아요. 너무 큰 잘못이어서. 어떡해요?”
화련공주가 갸웃거렸다. 그녀는 야로가 정확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추격을 위해 떠났다가 무리를 해서 아픈 채 돌아온 줄로만 알았다.
열여섯의 공주는 깊은 고민 없이 답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계속 빌어야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정말요? 나중엔 용서해 줄까요?”
야로가 그녀에게 매달렸다.
용서라. 화련공주는 유배된 오라비가 저지른 짓을 떠올렸다.
오라버니, 왜 그러셨습니까? 왜 아바마마를…….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제 오라비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글쎄, 평생 용서 안 해 줄지도 몰라. 너무 큰 잘못이면.”
소년은 풀이 죽었다. 화련공주는 야로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짐짓 어른스레 말한다.
“뭐든 마음대로 되진 않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라잖아. 얼른 커야지, 너도. 그리고, 나도.”
간신히 삼켰던 눈물이 도로 터졌다. 어린 교룡은 주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소년을 안아 주었다.
*
운녕교룡 느루는 소서촌에 유배되었다. 그는 자신이 반룡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유배된 첫날에 용이 하늘로 솟구쳤다. 소서촌의 주민들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로 검은 용이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근방의 주민들은 불길한 울부짖음을 들었다고 전했다.
“운녕교룡은 어찌 되었느냐?”
“추락했습니다. 산중에서 뱀이 되어 기고 있겠지요.”
서란의 물음에 여울이 냉정히 대꾸했다. 그녀는 가만히 혀를 찼다.
그와 그녀는 함께 청람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여울의 손에는 함이 들려 있었다.
서란은 가을에 궐을 나올 때 그의 품에 안겨서 올랐던 산길을 되짚었다. 그때에는 어둠에 잠겨 있던 산길이 지금은 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소룡전으로 가는 철문을 지나쳤다. 여울이 문득 물었다.
“소룡전은 어찌하실 겁니까?”
중조 역천 이전의 이무기들은 자유로이 살았다. 그들은 왕실에 묶인 생물이 아니라 천년호 근처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영물이었다.
그때에도 이무기끼리 서로를 가르치거나 예락의 왕실을 통해 이것저것 배우긴 했었으나 이리 격리되어 있진 않았다.
서란이 선선히 답했다.
“차차 자유를 줄 것이니라.”
“여의주를 탐하다 왕족을 습격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배우고 성숙한 이무기들을 우선으로 풀어 주고, 약속을 걸어 제한할 것이다. 지금 있는 어린 이무기들이 다 자라고 나면 더 이상 격리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말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예락에 거대한 변화가 불어온다. 그에 따라 이무기들의 삶도 바뀌게 되리라.
다음 시대의 이무기들부터는 여의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태어난 자들만이 있을 것이다. 그 수는 기존보다 현저히 적겠으나 문제가 되진 않을 터다.
이무기의 수명은 길고, 인간의 수명은 그에 비해 짧으니까.
수십이 넘는 이무기가 왕족의 선택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지금이 비정상이었다. 이무기의 수가 줄어들면 정말 이무기를 얻을 만한 성품의 왕족들만이 맹약을 맺게 될 것이다.
앞서 걷는 서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할 일이 무척 많구나. 방납 제도를 고치려면 조세부터 개혁해야 하고, 그러려면 우선 현재 재정 상태부터 점검해야 하지. 과거를 활성화하는 것과, 언관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공신으로부터 박탈한 권한들도 나눠야 하며, 발생할 공백의 처리와, 늘어난 요마 문제, 비어 버린 마을들도……”
서란은 혼잣말처럼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그러다 문득 여울을 돌아본다.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조금 두렵구나.”
대전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내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그에게는 떨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울은 희미하게 웃었다.
“보주.”
“으응?”
“태조께서 마파람 선배를 통해 전해 달라 하신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정말로 잘했다고, 그리고, 잘해 낼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멈칫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듯한 칭찬과 응원이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란아, 하고 부르던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 품에 아이처럼 안겨 말하고 싶었다.
제가 죽을 거라 그리도 슬퍼하셨지요. 보세요, 어머니.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지켜보고 계신가요?
그녀는 일렁이는 마음을 갈무리하고 그를 향해 웃었다.
“태조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겠다고 전해 주렴.”
“예.”
어느새 천년호였다. 대낮이라 전의 밤에 보던 것처럼 빛나지는 않았다. 호수는 소용돌이치는 예락과는 상관없다는 듯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들은 천년호를 지나쳐 깊숙이 떨어진 숲 속으로 향했다. 흑룡궁이 내려다보이는 비탈에서 여울이 멈췄다.
“이쯤이 좋겠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함을 건넸다. 서란이 함을 받아 들었다.
여울이 반쯤 눈을 내리감고 손을 뻗었다. 서란으로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자연의 일부가 용에게 복종했다.
눈이 쌓인 흙을 가르며 물이 솟구쳤다. 솟구친 물은 흙에 스며드는 대신에 웅덩이를 이루며 고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꽤 큰 연못이 만들어졌다. 시릴 듯이 맑은 물이 하늘을 비춰 내며 찰랑거렸다.
연못을 완성한 여울은 그 근처에 결계를 쳤다. 오랜 시간 동안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신중한 대비가 필요했다. 이 안에서 머물 것은 여의주를 가진 뱀이었으므로.
“다른 뱀들과 함께 있는 건 위험할 테니까.”
함의 뚜껑을 내려다보며 서란이 중얼거렸다. 자드락은 여의주를 보고도 그 힘을 삼키지 않았지만, 다른 뱀들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천년호에 선왕의 여의주를 넣으면 앞 다투어 몰려든 뱀들이 그 힘에 홀려 이무기가 된다지 않는가. 이무기도 여의주를 보면 제정신을 못 차리는데, 짐승에 불과한 뱀들이 인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여울과 서란은 논의한 끝에 따로 자드락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여울이 만들어 내 결계를 씌운 연못이었다.
서란이 함을 열었다. 면사에 덮여 여의주를 품고 있던 뱀이 고개를 든다. 그녀는 함을 연못가에 내려놓았다.
“자, 가렴.”
뱀은 머리를 든 채 혀를 날름거렸다. 낯선 환경을 경계하던 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린 듯 기어 나왔다. 몸에서 떼어 놓질 않는 여의주를 야무지게 문 채였다.
용이 만들어 낸 연못은 정순했다. 지금은 황량하나 봄이 오면 그 맑은 기에 이끌려 풀이 우거지고 생명이 몰릴 것이다.
까만 뱀은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나란히 선 서란과 여울을 바라보던 뱀이 곧 머리를 돌려 연못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울 같던 수면이 그 움직임에 조용히 이지러진다. 깊은 물 아래로 내려간 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의주의 주홍빛만이 언뜻 비치다 스러졌다.
함 속에는 낡은 면사만 남았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함을 닫았다. 여울이 땅을 파고 함을 묻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고요해진 연못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찾아 쥐며 제게로 당겼다. 서란이 속삭였다.
“얼마나 걸릴까?”
뜬금없는 물음이었으나 여울은 알아들었다.
자드락이 다시 이무기로 태어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여울이 답했다.
“한 번 걸었던 길이니, 100년까지는 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내 수명이 다하기 전에 보는 것은 무리이겠구나.”
그녀는 선인이 되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다하면 하늘로 떠나야 한다. 여울 또한 그녀와 함께 천계에 들 예정이다. 그러니 다시 자드락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서란이 얕게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깨끗한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수면을 응시하며 속으로 기원했다.
‘네게 큰 은혜를 입었단다. 이제는 편히 쉬어라. 다시 태어나면 행복만 누리기를.’
그들은 함께 연못을 떠났다. 물러나며 여울이 결계를 마무리했다.
이제 수십 년간 아무도 여기를 알아내지도, 찾지도 못할 것이다.
자드락이 이무기가 되어 스스로 나오기 전까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