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반정(2)2016.10.06.
“무엇을 준비했습니까?”
서란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물었다. 천응의 입매가 굳었다.
천응이 그녀에 대해 알듯이 그녀도 천응을 안다. 그가 이리 쉽게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한 발짝을 내디뎠다.
웅, 하고 공기가 울었다. 단 위에 숨겨져 있던 진이 발동되었다. 푸른빛이 질주하며 문자들이 떠올랐다.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교룡들이 놀라 달려들기도 전에, 형형한 푸른빛이 서란에게 몰려들었다. 그녀의 몸을 빛이 휘감았다.
그것은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미세하게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서란은 흘깃 허리춤을 보았다. 여울이 주었던 노리개에 얽혀 있는 비늘 중 하나에 금이 간 것이다. 천응의 얼굴에도 금이 갔다.
“이럴 리가…….”
“역시, 축지술이었군요.”
서란이 중얼거렸다. 천응이 얼이 빠진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중조는 혜선대군의 천룡이 자리를 비운 틈에 암습으로 아우를 살해했습니다. 마니를 잃은 천룡은 무력해지니, 천룡을 상대하려면 마니를 노려야겠지요. 여기까지는 쉽게 예상이 가는 바입니다.”
천룡과 마니의 관계에 대해 안다면 누구든 그리 생각할 터다. 마니만 죽이면 되니까. 그래서 천응은 다른 방법을 준비했다.
서란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마니는 당연히 공격을 철저하게 대비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다른 것을 준비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 생각을, 읽었단 말이냐?”
천응이 이를 악문 채 대꾸했다. 직접적인 공격에는 대응책을 마련했으리라 예상했다. 아마도 호신부의 일종을. 천룡이 곁에 붙어 있는 한, 그것을 부수어도 마니를 해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세자는 느루의 힘으로 장거리 축지술을 준비했다. 천룡과 마니를 떼어 놓으려 했다. 축지는 공격적인 주술이 아니므로 보호 주술로는 막을 수 없다.
매개체로 쓴 느루의 비늘은 예경 외곽의 산중에 묻어 두었다. 지금쯤 그 근처에서는 병사들이 활을 겨누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주술사들도 공격용 진과 결계를 준비해 두고 대기 중이었다.
마니가 나타나는 순간,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숨을 빼앗기 위해. 천룡이 찾아오기 전에 끝을 내려 했다.
마니를 빼돌리고 천룡을 처리하고 나면, 뒷수습쯤이야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기다렸고, 승복하는 척 위장했다.
그런데 어째서.
서란은 씁쓸하게 말했다.
“호신부를 매개로 제 몸 자체에 결계를 쳤습니다. 축지가 먹히지 않도록.”
천응의 낯이 창백해졌다. 면류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린다. 늘어뜨려진 유(旒)들이 그 서슬에 부딪쳐 흔들리며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란은 그로부터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더 준비한 것이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천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보니, 서란이 몇 가지 더 준비했던 것들은 굳이 쓸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녀는 와호산맥의 결계에 갇혔을 때의 충격을 잊지 않았으므로, 천응이 자포자기로 함께 죽으려 드는 경우까지 상정해서 대비를 했었다.
“고작 이 한 수로 저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서란의 말에 천응의 자존심이 구겨져 짓밟혔다. 제 것이라 여겼던, 무슨 짓을 하든 그의 손아귀 안이라 여겼던 마니가 미미한 경멸을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칠한 입술이 움직인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승복하시지요.”
동정이 깃든 말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이 무너졌다. 천응이 불길을 토해 내듯 소리를 질렀다.
“느루!”
그 부름을 들은 반룡이 쏜살같이 몸을 틀어 단 쪽으로 날아왔다. 몸 이곳저곳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그 움직임을 따라 길게 흩뿌려졌다.
용이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내며 서란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그 서슬에 일어난 바람이 근처의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내내 고고하던 천룡이 움직였다. 긴 울음에 처음으로 분노가 담겼다. 한 발 늦게 출발했음에도, 천룡이 더 빨랐다.
그는 단 위로 덤벼드는 반룡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 목을 틀어쥐고 내팽개쳤다. 그래도 주위는 고려했는지 집어던진 방향은 사람이 몰려 있지 않은 능 근처의 잔디밭이었다.
검은 용의 긴 몸체가 눈밭을 긁으며 나뒹굴었다. 시뻘건 피가 메마른 잔디와 쌓인 눈을 물들였다. 그 위로 천벌처럼 벼락이 내리꽂혔다.
느루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눈을 뒤집고 흙을 파헤치며 퍼덕거리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반룡을 처리하고 나자, 거대한 천룡의 몸이 단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천응은 새파랗게 질렸다. 굽어보는 주홍빛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혔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란이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용을 부르듯이.
천룡의 온몸에 빛이 어렸다. 그 빛이 한 가닥으로 모여들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바로 위 허공에 뭉친 빛이 스러지며 사람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하얗게 빛나는 은발, 짙은 피부. 깃에 은실을 수놓은 검은 옷의 남자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보주.”
다 지켜봐 놓고도 걱정이 어려 있는 그의 눈이 그녀를 훑었다.
서란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후에 여울의 손을 살짝 당겼다.
허공에 반쯤 떠 있던 그가 그녀에게 이끌려 대지에 발을 내려놓았다. 땅으로 내려온 용은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받들었다.
그녀는 용을 거느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홍빛 시선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금군과 문무관과 백성들을 차례로 훑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묵직한 위압감이 사위를 장악했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건 관리들 사이에 있던 몽해학파 출신들이었다. 다음으로 절을 한 것은 백성들 중 몇몇이었다. 그들이 시발점이 되었다.
눈치를 보던 금군들이 무기를 늘어뜨렸다. 창이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났다.
하나하나 무릎을 꿇는 이들이 늘어 갔다. 서 있던 이들도 그 분위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끝내 꼿꼿이 남은 것은 주인에게만 복종하는 교룡들과 유리천응 혼자였다.
그가 흘깃 느루 쪽을 보았다. 흰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느루는 신성한 용이 아니라 그저 짐승처럼 보였다.
“하.”
천응은 핏기가 가신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면류관을 우그러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그는 명백한 우위 앞에서 의미 없이 발악할 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추하게 몸부림치고 싶지는 않았다.
천응이 열화와 같이 솟는 분을 억누르며 관을 집어던졌다. 떨어진 면류관이 단 아래로 굴러가다 멈췄다.
“네가 이겼다, 화예옹주.”
천응은 씹어 뱉듯 말했다.
서란은 담담하게 답했다.
“예우를 갖추세요, 반룡의 주인이여.”
천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목덜미에 퍼렇게 핏줄이 선다.
그가 불이 켜진 듯한 눈으로 서란을 응시했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그 시선을 받아 내었다. 마침내 천응이 느리게 무릎을 꿇었다.
새파란 하늘에 쌍무지개가 뜬 동짓날, 반룡을 거느린 왕은 무릎을 꿇었다.
예락 최후의 마니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예락은 쑥대밭이 되었다. 물리적인 쑥대밭이 아니라 정신적인 쑥대밭이었다.
하루아침에 천지가 뒤집혔다. 예락 전체가 동짓날 있던 일과 숨겨졌던 역사, 그리고 새로운 왕의 이야기로 들끓었다.
가장 비명을 지르는 건 사관들이었다. 그들은 비틀리고 끊어진 역사를 도로 밝혀내 바로잡아야 했다.
그래도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1주일 간 왕위에 있었던 유리천응은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운녕대군으로 강등되었다. 패륜과 역모가 밝혀져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서란은 긴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사약이 아니라, 유배였다.
아비를 죽이고 그 심장을 뽑아 반룡을 만든 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이 반정에서 피를 흘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시작부터 타협을 볼 생각은 없었다.
“무르군. 그런 무른 마음가짐으로 왕이 되겠다는 것이냐?”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 서란을 마주한 운녕대군 유리천응이 말했다. 익선관도, 곤룡포도 없이 흰 무명을 걸친 그는 태도만은 오연한 그대로였다. 그의 자세는 꼿꼿했다.
서란은 계단 위에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그림자처럼 여울이 시립해 있었다.
“제가 사약을 내리길 원하십니까?”
“나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당신이 아닙니다.”
천응이 비웃듯 입술을 비틀었다. 서란은 제 가장 큰 적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르지 않기에, 당신을 쉬이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단정한 목소리에서 서늘한 날이 느껴졌다.
천응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서란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후회하지 않나요?”
천응이 이를 악물더니 오만하게 턱 끝을 올렸다.
“내가 후회할 게 뭐가 있지? 나는 내 자리에 합당한 일을 했다. 실패한 것을 후회할지는 몰라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모든 거짓을 알고도 제자리로 돌릴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제자리라. 과연.”
천응이 피식 웃었다.
“화예옹주. 너야말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의 눈에는 한 자락의 감정도 없었다. 좌절이 보이지 않는 냉정한 눈이었다.
“인간이건, 이무기건 이득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신뢰? 그런 추상적인 것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더냐?”
“…….”
“현실은 이상이 아니지. 너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이무기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네 손으로 부순 것을 말이다. 네가 아니라도, 후대의 누군가는 목숨을 건 시험을 시도하며 너를 원망하겠지. 합리적인 방법을 없애 버린 자를!”
“혈육의 피를 흘리는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겁니까?”
“그렇지 않느냐? 왕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게 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지. 왕족은 얼마든지 있다. 한 명만 희생하면 되는 것을.”
한 명의 희생. 유리서란이 바로 그 희생양이었다. 저 간단한 말 아래에서 그녀가 겪었던 절망의 깊이를 천응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란은 여기서 굳이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논하지는 않았다. 유리천응은 감정으로는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덤덤히 이어 물었다.
“제 교룡을 반룡으로 만들며, 승천할 수 있을 거라 속이면서도 그리 당당하셨습니까?”
“교룡이 무슨 상관이지? 예락은 인간의 나라다. 이무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 내가 다스릴 건 인간이지, 이무기가 아니다. 어차피 뱀이 되면 다 잊을 텐데 짐승까지 배려할 작정이냐?”
그는 제 논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택한 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패배한 이 순간에도 그 신념이 천응을 지탱하고 있었다.
서란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공신의 입을 막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는 것을 방조하는 왕실이, 감히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이무기를 도구로 삼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늘어나는 요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까? 그러고도 인간을 위해 이무기들을 희생시켰을 뿐이라 변명하십니까?”
천응이 입을 다물었다. 서란은 그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쏟아 내었다.
“진실이 밝혀질까 숨기기에 급급하며,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게 합리적입니까? 이권으로 침묵을 사는 왕에게 권위가 있습니까? 비밀을 아는 공신들이 그런 왕을 순순히 따르더이까?”
“…….”
“치명적인 거짓으로 지탱하는 권위로 진정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까? 그 사상누각(沙上樓閣)이 영원하리라 생각했습니까? 모든 것이 뒤틀려 있으며, 그 흔적이 그리 곳곳에 남아 있는데!”
역사를 뒤져 개변된 흔적을 찾아내었을 때를 떠올렸다. 완벽하고 영원한 거짓이란 없다. 그녀가 찾아냈고, 스승인 현음당과 그녀의 부군이 찾아냈듯이, 그 흔적을 알아챈 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바로잡았으리라.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되었을 뿐이다.
서란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이 당신의 합리라면, 저는 조잡하다고 평하겠습니다. 언제든, 누구든, 그 진실을 지적하기만 하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합리로군요.”
서란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선고했다.
“바로 지금의 당신처럼.”
그 말에 천응의 어깨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서란은 계단을 내려왔다. 가느다란 몸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여렸다.
그 그림자가 천응에게는 거대하게 느껴졌다. 짓눌릴 것 같았다.
천응은 부정하고 싶던 현실을 마주했다. 그는 패배한 것이다. 자신의 마니이자 이복 여동생에게. 그것은 그의 최초의 패배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허술한 것을 붙들고 이것이 최선이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습니까?”
그의 앞에 선 서란이 말했다.
천응의 낯이 창백해졌다.
평정이 깨진다. 최초로 느껴보는 패배감.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것으로 몸을 떨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지금 승리했다 여기겠지? 용이 있으니 지금이야 모두가 굴복하는 척할 거다! 허나 곧 끔찍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네가 진실을 말한다 해서 모두가 너를 따를 것 같으냐? 바른 것보다 제게 이득인 것에 끌리는 게 인간일진대!”
“진실이니까 당연히 따를 거라 믿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습니다. 혼란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지도 않습니다.”
담담한 음성이 흘렀다. 그녀는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간 천응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오연하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답했다.
“그래도 바른 것을 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귀담아 듣고 숙고하며 더듬어 나가겠습니다. 옳은 길로 예락을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편하고자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한 게 아니니까요.”
천응이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뒤에 선 여울이 그의 움직임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악을 썼다.
“너는 후회할 거다! 예락은 예전이 나았다고 그리워하게 되겠지!”
“아니요, 예락은 새 미래를 꿈꾸게 될 겁니다.”
서란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금박 물린 치마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속삭이듯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신이 직접 그 눈으로 지켜보게 되겠지요.”
*
운녕대군 유리천응을 포함하여 대비와 비빈들, 제녕군, 진녕군, 화련공주 등 기존 왕족들의 거취를 결정하고 나자 남은 것은 공신들의 문제였다.
서란은 아직 즉위하지 않아 대전의 용상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실질적인 왕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남은 건 즉위식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비단으로 덧댄 두터운 서책이 쥐여 있었다. 표지에 금박으로 쓰여 있는 제목은 공신록(功臣錄)이었다.
모여 있는 대신들 중에서 몇몇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서란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공신록을 파기하겠다.”
“그, 그런……!”
“과한 조치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담담히 흘러나온 서란의 명에 공신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중구난방으로 말이 쏟아졌다.
그녀는 그들 가운데 서서 모든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대전에는 당사자인 공신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녀가 경청하자 온갖 노회한 논리와 고상한 협박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격한 반발이 쏟아지는데도 그녀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서란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항변이 차츰 잦아들었다. 마침내 불안한 고요가 대전을 채우자, 그녀가 입을 열어 명했다.
“중조의 반정은 역천이었으므로, 그 결과로 얻은 공(功)은 공이 아니다. 따라서 공신의 모든 권한을 파한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공신록이 아래로 떨어졌다. 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그것을 보던 대신들의 낯이 핼쑥해졌다.
“이에 이견이 있는 자는 반박해 보아라.”
그녀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나오는 말은 단호했다.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작금에 와서 중조 반정이 역천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역천을 인정하면, 반정을 도운 공로로 공신이 된 가문들은 공신으로 남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주장할 논리도 명분도 없으니, 이전의 왕들에게 했듯이 힘으로 압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란에게는 여태껏 공신들이 쥐고 흔들었던 무기인 왕실의 비밀이 먹히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이권을 지킬 방법은 반역뿐이다.
허나 그녀의 뒤에는 천룡이 있다. 교룡들마저 그녀를 지지한다. 민심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간에서는 새 왕이 살아 있는 신화처럼 숭배되고 있었다. 태조의 재림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
공신들은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었다.
“아무도 이견이 없는 듯하니, 이제부터 공신들에게 있던 권한을 어찌 할지를 논해 보아라.”
서란이 빙그레 웃었다. 판이 깔리자 몽해학파 소속 대신들과, 공신 출신이지만 사전에 마음을 돌렸던 대신들이 흐름을 주도하고 나섰다.
예락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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