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반정(1)2016.10.02.
산은 가람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다과를 내오라 하자 가람이 막았다.
“필요 없다. 보주 곁을 오래 비울 생각은 없으니.”
“무슨 일로 왔지, 화영교룡?”
이무기를 상대로 빙빙 돌리는 화술은 낭비다.
산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가람은 순순히 대답했다.
“얼마 전에 희나리를 만났거든.”
희나리와 온에게 예경에 있는 이무기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맡겼다는 건 산도 잘 알고 있었다. 일이 끝난 후 그들이 보주와 함께 숨어 있을 안가를 마련해 준 것도 산이었으니까.
“그건 알아. 뭔가 의문이 남아 찾아온 건가?”
“아니, 사정은 잘 알았다. 뭘 계획하고 있는지도.”
산은 약간 긴장했다.
소룡전의 주인 없는 이무기들이야 격리된 상태로 결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니 무언가 행동할 수 없지만, 혼인한 왕족들의 교룡은 이야기가 다르다.
용을 거느린 왕의 자식들만 여의주를 물려받기 때문에 왕의 형제자매였던 자들만이 교룡을 데리고 있다. 주인이 죽으면 바로 승천하므로 궐 밖에 머무르는 교룡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이무기인 만큼, 그들이 혹시 반발할 경우 일이 귀찮아질 것이다.
산의 긴장이 무색하리만큼, 가람은 시원하게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은 없는가?”
“도울…… 일?”
“희나리가 알려 준 것들을 보주께 고했다. 궐 밖의 다른 교룡들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꽤 소란했지만, 순리대로 내버려 두자는 게 모두의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관망하기로 한 거지.”
“그거면 충분해. 그럼, 당신은 왜?”
“보주께서 몹시 화가 나셨거든. 뭐, 나야 사정 듣자마자 뒤집어엎고 싶은 것을 참고 있던 상황이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고.”
희나리와 온이 퍼뜨린 진실은 이무기들의 입장에서 왕실, 정확히는 왕에 대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산이 알기로 꽤 다혈질인 화영교룡이 저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보아 온 화영옹주는 얌전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걔가 화를 내? 너보고 뭐든 가서 도우라고 할 정도로?”
“세자가, 즉위했으니까.”
그 말에 산은 바로 납득했다.
그도 조금 전에 욕설을 내뱉으며 서찰을 내던지지 않았던가. 서란이라는 대안이 없었다면 감히 용을 가진 세자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욕설에서 그쳤을 일이나, 이제는 대안이 있다.
“듣자하니 천룡이라는 존재에게는 딱히 도움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교룡들이 마니의 편에 서는 모습을 보이는 건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안 그래?”
가람의 말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우리 마니께서는 피를 보지 않기를 원하고 계시거든.”
“무혈반정? 그게 가능해?”
“나도 처음엔 당황했는데 듣다 보니 가능하겠더라고. 이미 계획은 짜 놨지만, 교룡들이 도와준다면 더 쉬워지겠지. 제녕교룡과 진녕교룡에게도 얘길 해 봐야겠군.”
“그 마니,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는 게 아쉽군. 배포가 마음에 드는데?”
“예락의 역사를 다시 쓸 왕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리 말하는 산의 태도가 자랑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 가람은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턱을 괴었다.
“좋아. 나는 뭘 하면 되지?”
“일단 란아와 의논을 해 보고.”
산이 마주 웃었다. 일이 더 쉬워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하늘은 자신들의 편인 모양이었다. 천룡이 함께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1주일 후, 건평 21년(천수 1년) 12월 22일.
동지(冬至).
밤새 눈이 내렸다. 예경은 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은 기와마다 하얀 눈이 소복했다.
긴 밤이 끝나며 서서히 동이 튼다. 어둠의 끝자락에서 빛이 점점 제 자리를 넓혀 갔다. 구름이 가득 낀 잿빛의 하늘에서 눈이 깃털처럼 흩날렸다.
흐리고 연약한 아침이 왔다.
여울과 서란은 예경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서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추우십니까?”
“아니.”
서란의 주위엔 눈이 들이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용의 권능이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모피를 덧대고 솜을 누빈 배자와 목도리 등은 모두 수를 놓은 호화로운 물건이었다. 부러 귀한 것을 챙겨 입었다. 그냥 늘어뜨렸던 머리도 절반은 묶어 비녀와 뒤꽂이로 화려하게 틀어 올렸다.
치맛자락에 드리운 노리개는 여울이 만들어 준 호신부였다.
정성 들여 꾸민 그녀의 모습은 흰 풍경 속에서 홀로 색채가 선명했다.
여울은 제 반려의 모습을 새기듯 바라보았다.
눈을 떼기가 어렵다.
그녀가 그를 돌아보며 웃는다. 흰 얼굴에 번져 가는 미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으나, 그는 능숙하게 그것을 감추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겠구나.”
“……예.”
여울이 그녀로부터 몇 걸음 물러났다.
산자락의 넓은 공터는 눈으로 덮여 화선지처럼 보였다. 그가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중앙으로 향했다. 그 발자국을 따라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먹이 선을 그리듯 검은 형상이 뻗어 나갔다.
흰 갈기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용은 휘날리는 눈 속에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소라고둥처럼 길고 낮고 웅장한 울음이 하늘로 솟는다. 그 울음에 몸을 사리는 것처럼 흩날리던 눈발이 멎었다. 하늘에 가득하던 잿빛 구름이 손으로 쓸어 내듯 밀려났다.
구름이 지워지자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천룡이 다시 울었다. 하늘 위에 오색의 빛이 어룽거렸다. 그것은 곧 선명한 무지개를 이뤘다.
색색의 고리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처럼 뻗어 나갔다. 빛이 자아내는 천상의 비단.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 위에 한 겹의 무지개가 또다시 떠오른다. 쌍무지개였다.
본래 무지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원을 그린다. 원에 시작과 끝이 없듯이, 무지개의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용이 만들어 낸 무지개에는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 시작은 서란과 여울이 있는 산중턱이었으며 그 끝은 태조의 능에 닿아 있었다.
서란은 눈앞에 흩뿌려진 무지개를 보았다. 엷은 빛깔이 휘황했다. 손을 대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그녀는 아이처럼 손을 내밀어 휘저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잡히지 않았다.
[만지고 싶으십니까?]
“……보고 있었느냐.”
서란이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여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용의 입으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은 무리여서 이리 머릿속에 말을 울리게 한다.
머리로 울리는 말은 미리 연습을 하며 몇 번 들었던지라 익숙했다. 반면 코앞에 보이는 용의 거체는 평생 가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볼 때마다 벅차오르며, 절로 경외감이 든다. 높은 산이 몸을 일으켜 굽어보면 이러할까.
그 용이 그녀에게로 바짝 머리를 낮춘다.
이무기일 때보다도 월등히 커진 용은 발톱조차 서란보다는 컸다. 머리를 바닥에 붙여도 그녀가 올라가기엔 무리인 높이였다.
그녀가 다가오자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부드럽게 그녀를 들어올려 두 개의 뿔 사이, 갈기 위에 내려놓았다.
하얗게 반짝이는 갈기는 솜처럼 포근했다. 바로 앞에 있는 뿔은 상아로 만들어진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제멋대로 뻗는 듯하면서 일정한 규칙을 그리는 모양새는 사슴의 뿔과 같았다.
서란은 오른쪽 뿔에 기대섰다. 그녀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준비되셨습니까.]
“그래. 가자꾸나.”
용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삽시간에 높아졌다. 용의 몸은 흔들림 없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허공을 유영하듯 날아올랐다. 하늘이 머리끝에 스칠 듯 가까워진다.
무지개에 발끝을 담그며 용이 하늘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느린 움직임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서란은 한 손으로 뿔을 잡은 채 아래를 굽어보았다. 예경이 내려다보였다. 손톱만 한 기와 지붕이 펼쳐지고 혈관 같은 길들이 이어졌다. 가장 높고 가장 넓은 흑룡궁이 아스라이 보였다.
대로 위에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동작을 멈추고 하늘을 본다. 용이 지나는 곳마다 아래의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손짓을 하고, 누군가는 주저앉았으며, 누군가는 절을 했다.
잿빛이던 하늘은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청명한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눈이 휘날리던 날씨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푸름은 예경의 하늘에만 펼쳐져 있었다. 예경의 외곽 주민들은 눈을 뿌리는 구름 낀 하늘과 새파란 하늘이 한 발짝 차이로 갈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하늘에 겨울에는 보기 어려운 무지개가 둘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 쌍무지개 사이로, 천공을 가로지르는 흰 뿔의 검은 용.
넋이 나간 사람들 사이로 어린 아이들이 달렸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팔짝거리며 하늘을 나는 용을 따라 달렸다. 희미한 노랫말이 사람들 사이에 오간다.
‘무지개가 뜨는 날에, 용을 타고 오시리라.’
천룡은 흑룡궁의 서쪽에 있는 태조의 능을 향해 날았다.
능 앞의 광장에는 인파가 가득했다. 마니식에서 등장할 용을 보기 위해서 몰린 사람들이었다. 동지하례가 마니식 이후로 밀린 터라 문무관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새로이 즉위한 왕, 유리천응은 면복에 면류관을 쓴 채 제단에 향을 올렸다. 그의 앞 허공에 검은 용이 떠 있었다. 느루였다.
검은 뿔의 용은 태조의 능 위에서 오만하게 백성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느루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본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느루를 보고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조금씩 웅성거림이 번져 갔다.
천응이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저게 뭐야?”
“요, 용이 또 있어?”
“하늘이…….”
사람들이 하나 둘 뒤를 돌아봤다.
경계를 서던 금군과 관복을 갖추고 열을 지어 있던 문무관들마저 하늘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느루를 보지 않게 되었다. 제례를 주관하던 제관들까지 제 일을 잊어버리고 손을 놓았다.
무지개가 뜬 새파란 하늘에서 거대한 용이 다가오고 있다. 흘러내리는 흰 갈기가 후광을 감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 용은 느루를 덜 자란 새끼로 보이게 할 만큼 컸다.
소란이 멎었다.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저절로 피어오르는 경외감이 사방을 잠식했다.
용이 가까이 내려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용의 머리 위에, 뿔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알아보았다.
여인이 용을 타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길게 흩날린다. 붉은 치맛자락이 선연하게 나부꼈다.
그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 같은 존재의 위에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신선인가? 아니면.
떨리는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 고였다.
“태조다. 태조께서 돌아 오셨어…….”
신음 같은 웅성거림이 오갔다. 천룡이 가까워졌다. 용의 비행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민중의 바로 위를 스칠 듯이 가로지른 용이 광장 위의 허공에 멈췄다.
여인이 잡고 있던 뿔에서 손을 떼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6층짜리 탑보다도 높은 공중이었다. 몇몇 사람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추락을 예감하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자도 있었다. 시선을 떼지 않았던 자들이 눈을 가린 이를 툭툭 쳤다. 그들이 위를 가리켰다.
“마파람이시여…….”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흔든다. 희미한 서기가 그녀의 몸을 떠받쳤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제단 바로 앞의 비어 있는 중앙에 그녀가 내려앉았다. 당혜를 신은 발이 소리 없이 대지를 디뎠다. 펄럭이던 옷자락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광장은 완벽한 정적에 빠져 있었다. 비녀의 금장식이 서로 스치며 달랑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숨소리조차 잦아드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입을 떼었다.
“천룡의 주인 된 자로서.”
그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명징했다.
서란은 제단 위에 서 있는 배다른 오라비를 응시했다. 천응의 뒤에는 느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 허공에는 여울이 떠 있었다.
반룡을 거느린 왕과 천룡을 거느린 마니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천응은 무표정했다. 서란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선언했다.
“역천을 바로잡으러 왔노라.”
쨍그랑, 하는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제단 곁에 있던 제관의 손에서 떨어진 술잔이 깨졌다. 부서지는 소리가 뚜렷하게 모두의 귀를 울렸다.
구석에서 얼어붙어 있던 사관은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붓을 쥐었다. 그가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역천을 바로잡으러 왔노라.
그것이 기록의 첫 문장이 되었다.
유리천응이 고개를 기울였다. 면류관의 옥들이 부딪치며 흔들렸다.
왕이 물었다.
“무엇이 역천이란 말이냐?”
“200년 전 중조가 제 아우의 자리를 탐하여 패륜을 행하고 순리를 비틀었다. 그 폐단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천륜을 어기어 하늘에 오를 자격을 잃은 저 반룡이 그 증좌이니.”
닮아 있는 주홍빛 눈동자가 서로를 비춰 낸다. 서란이 서늘하게 말했다.
“그대에게는 왕의 자격이 없다.”
숨 막히는 정적이 사위를 메운다.
서쪽에 정렬한 무관들과, 동쪽에 정렬한 문관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둘러싼 금군들, 남쪽에 자리한 주술사들. 그 뒤편으로 가득한 백성들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천응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결국 반역을 벌이겠단 뜻이구나. 추포하라!”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명령에 채찍을 맞은 듯이 금군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문관과 무관들이 분분히 물러난다.
그 사이로 밀물처럼 금군들이 몰려들었다. 중앙에 서 있는 한 명의 여인을 향해.
하늘에서는 느루가 치솟았다. 그가 저보다 한참 큰 여울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다.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되어 몰아쳤다. 파랗던 하늘에 먹구름이 피어났다.
서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왕이 된 세자 유리천응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창날이 번뜩이며 짓쳐들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번개처럼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것을 튕겨 냈다. 긴 창이었다. 그 창을 쥐고 있는 것은 희나리였다.
동쪽을 막아선 소녀는 창을 한 바퀴 돌리며 바닥에 내리찍었다. 서쪽에서는 칼날이 빛을 반사하며 하얗게 번뜩였다. 온이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금군을 마주했다.
남쪽의 주술사들 앞에는 검은 머리칼을 느슨하게 땋아 내린 큰 키의 여인이 맨몸으로 섰다. 화영옹주의 교룡인 가람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들이 이무기임은 모두가 알아차렸다. 그들이 교룡이라는 것도 몇몇은 알아보았다.
제녕교룡 온, 진녕교룡 희나리, 화영교룡 가람.
교룡들이 막아섰다.
왜? 정말로 그 소문처럼 왕실이 이무기들을 속였나?
분분히 말이 오갔다. 당황한 금군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광경을 본 천응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그때, 하늘에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사람들은 검은 용이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덮쳐 오자 그 아래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몇은 걸려 넘어져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땅에 처박힐 듯 내리꽂히던 용의 몸뚱이는 훅 밀려온 바람에 붙들려 멈췄다. 그 서슬에 바로 아래에 있던 몇몇은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하얀 갈기의 천룡은 미동조차 않은 채 추락한 반룡을 내려다보았다. 몰려들었던 먹구름이 지워지듯 사그라지며 다시 빛이 쏟아졌다. 허공에서 몸부림치던 반룡이 몸을 퉁겼다.
캬아아.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사방을 찢어 놓았다. 바람을 휘감고 반룡이 솟구친다.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운 채 달려들었다.
천룡이 낮게 울었다. 길게 내려앉는 나각 같은 소리. 그와 동시에 벼락이 돋아나 반룡을 후려쳤다. 주술이 아니라 날씨를 다루는 천룡의 권능이었다.
용의 피가 아래에 흩뿌려졌다.
이미 그 아래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앞 다퉈 달아난 사람들은 멀찍이서 용쟁(龍爭)을 지켜보았다. 구름이 모여들었다 흩어지고 번개가 허공을 수놓으며 바람이 몰아쳤다. 하늘이 제멋대로 바뀐다.
격돌이 이루어질 때마다 반룡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천룡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제압에 가까웠다.
그 격차가 증명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용인지를.
우릉거리는 소음과 희게 번뜩이는 창날들을 뒤로 한 채, 서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단 위의 천응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나직이 속삭였다.
“승복하시지요.”
배다른 오라비에게 건네는, 마지막 권유였다.
천응이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반룡과, 서란 주위의 교룡들을 둘러보았다.
교룡들이 아무리 이무기라지만 숫자로 밀어붙이면 승리하는 건 금군일진대, 그들은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구르는 눈빛들 속에 왕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알음알음 퍼진 진실과 눈앞에서 목격한 태조의 재림이 그들의 발을 붙들었다. 역천을 바로잡겠다던 마니의 말이 그들에게 망설임을 주었다.
천응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작게 대꾸한다. 왕이 아니라 오라비인 듯이.
“승복하면, 나를 어찌 할 작정이냐?”
“패륜과 역천의 죄를 묻겠습니다.”
서란은 오라비를 대하듯 말을 높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냉정했다.
천응의 어깨가 들썩였다. 긴 침묵. 하늘만이 번잡했다.
그가 느리게 손을 들어 제 머리의 면류관을 벗었다. 손끝이 테에 수놓인 용의 자수를 더듬는다. 그는 면류관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그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네 자비를 ……믿겠다. 와서 받아라.”
왕이 관을 벗어 내밀었다. 주위의 모든 이들 사이로 소리 없는 파문이 일었다.
서란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사락사락 옷자락이 끌렸다. 뒤에서 천둥이 울었다. 반룡은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덤벼들고 있었다.
서란이 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계단을 올라 천응에게로 다가갔다. 교룡들이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무기에 올려둔 손에 긴장이 맺혔다.
그녀가 왕이 있는 단 꼭대기에 올라섰다. 천응과 가까워졌다.
숙여 그늘이 드리운 천응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그려졌다.
한 발자국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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