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61화 (61/70)

61. 태동2016.09.29.

예경에 언제부턴가 괴이한 소문이 돌았다.

몽해의 바닷가에서 용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몽해의 주민들로부터 생생한 체험담이 퍼져 나갔다.

“하늘이 열렸지.”

“열렸다고? 무슨 뜻인가?”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해. 그리고 짐승들과 바다가 경배를 했다네.”

“바다라니…… 바다가 어떻게 경배를 하나?”

“용오름이 일고, 해일이 솟고…… 이야, 평생 다시없을 장관이었어.”

“허, 그게 전부 용이 태어날 때 일어난 일이란 말이지?”

“거 이상하네. 마니식 때마다 용이 태어나는데, 왜 우린 그런 걸 본 적이 없지?”

예락의 백성들은 의문을 품었다. 마니식에서 왕의 용이 태어날 때와는 너무나 다른 현상이었으므로.

그들의 의문에 답해 주듯 새로운 이야기가 퍼져 갔다. 숨겨진 진실이란 말은 언제나 매혹적으로 사람을 잡아끈다.

“자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무슨 이야기?”

“옛날 옛적에, 어느 못된 왕자님이 말이야, 제 아우의 자리를 탐을 내어서 말이지…….”

“……이거 설마, 중조 반…….”

“쉿, 조용히 하게.”

“이게 사실이면…….”

설화로 포장된 역사가 스미는 바람처럼 흘러 다녔다. 그 끝에 꼬리처럼 따라붙는 노랫말이 있었다.

‘참된 왕께서 무지개가 뜨는 날에 용을 타고 오시리라.’

“……이와 같은 소문이, 점점 더 퍼지고 있사옵니다.”

보고를 마친 내관이 눈치를 보았다. 세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가 턱짓했다.

“물러가라.”

내관이 냉큼 절을 하고 사라졌다. 세자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시선이 언뜻 문갑에 닿았다.

그 아래 깊은 곳에, 비사가 숨겨져 있다.

“하.”

세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위무관이 따라붙었다. 느루는 여전히 혼수상태인지라 그의 곁에 없었다.

늦은 밤이었다. 세자는 동궁을 나서서 편전으로 향했다. 부왕께 방문을 청했다.

“세자. 이 밤에 무슨 일이냐?”

왕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용 헤살이 실종된 지 벌써 두 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헤살은 몽해로 가겠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함께 있었던 교룡들 중 먼저 보내진 야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둘도 실종되었다. 심지어 그들의 주인인 제녕군과 진녕군도 없어졌다.

화련공주는 자신의 교룡인 야로와 함께 홍평으로 요양을 간 상태라 궐에는 느루 외의 교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의금부와 금군이 동원되어 실종된 교룡들과 왕자들을 추적하고 있으나 단서가 잡히질 않았다. 퍼져 나가는 소문도 추적해야 해서 인력이 부족했다.

양쪽 다, 조사에 수확이 없었다. 어디선가 흔적이 가닥가닥 끊기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적이 있었다. 내부에서 정보를 교란하는 관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싹 갈아치우고 싶으나 세자는 아직 ‘세자’였다. 왕이 아닌.

하다못해 여의주의 향으로 찾으면 금방일 텐데, 동원할 교룡이 없다. 주인이 없는 소룡전의 이무기들은 통제 범위 밖이다.

유일하게 남은 교룡인 화련교룡은 주인인 화련공주가 내주려 하지 않았다. 마니로 만들겠다는 협박은 먹히지 않았다.

왕은 화련공주에게 약했다. 화련공주가 야로의 건강이 좋지 않다 울며 고하자 요양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세자는 왕에게 예를 취하고 반듯하게 앉았다.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늙은 아비를 보았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자. 방해만 된다.’

궐내의 세력은 세자에게 장악당한 지 오래였다. 왕은 별 경계도 없이 세자에게 일을 떠넘겨 왔다. 세자는 자신이 넘겨받은 일을 핑계로 왕의 권한을 야금야금 집어삼키곤 했다.

“헤살의 소식은 있습니까, 아바마마?”

“……모르겠구나.”

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용이 곁에 없는 왕은 촌로에 불과해 보였다. 세자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시지요.”

“무슨 소리냐?”

“아바마마는, 용에게 버림받으신 겁니다.”

세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헤살이 죽었으리란 가정은 할 수 없다. 용의 죽음은 간단하지 않다. 태조가 살던 곳을 오염시켰던 용의 죽음이나, 천년호를 오염시켰던 용의 죽음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용이 죽었다면 그것을 숨기는 건 어렵다.

헤살은 살아 있으면서도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더 이상 용이 아니거나.’

세자는 그 추측은 속에만 담아 두었다.

서안에 올려져 있던 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름 진 피부 위로 파랗게 핏줄이 섰다.

세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요즈음 세간에 나도는 소문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

“물러나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네 이놈!”

발칙한 말에 왕이 고함을 질렀다.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자가 스산하게 웃었다.

“참된 왕께서 무지개가 뜨는 날에 용을 타고 오시리라.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더 이상 참된 왕이 아니시란 것이겠지요.”

“네가, 어찌 감히, 과인에게 그따위 망발을 하느냐?”

“아바마마께서는 작금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위기라니?”

“천룡이, 태어났을 겁니다.”

세자의 말에 왕이 얼어붙었다. 세자에게 비사를 물려준 것이 왕이니만큼 저 말의 의미를 그도 잘 알았다.

왕이 서안을 쾅 내리쳤다.

“정신이 나갔느냐? 그 무슨 불길한……!”

“이러니 제가 아바마마를 그냥 둘 수가 없는 겁니다. 짐작도 못하고 계셨습니까?”

세자가 혀를 찼다. 그가 한 점의 온기도 없이 냉철한 눈으로 아비를 본다.

“몽해의 바닷가에서 용이 태어났다는 소문. 퍼져 나가는 비사. 마지막으로 저 허황된 노래까지. 의미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도망친 마니가 천룡을 만들어 냈다는 것.”

“천룡이라는 보장이 있느냐? 자결을 하여 용을 만들었을 수도…….”

“아바마마. 주인이 죽은 용이면, 이미 천계에 들었을 겁니다.”

세자는 인상을 썼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왕의 얼굴에 노기가 들어찼다. 세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가만 있어도 제게 올 자리인 것, 어지간하면 저도 이런 수는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있다가는 패망할 것 같더군요. 송구합니다, 아바마마.”

세자가 손을 들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 밖을 지키던 내금위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소리 없이 방에 들어선 세자의 위사 중 하나가 덜덜 떨고 있던 사관을 잡아끌고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제가 참된 왕이 되겠습니다. 아바마마의 여의주로.”

“너, 너, 네가 어찌, 과인에게…….”

“그러게 진작 제 간언을 들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관이 나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흰 그릇 안에 죽음처럼 검은 물이 담겨 있었다. 세자가 웃었다.

“아바마마께 드리는 소자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달게 드셔 주었으면 합니다.”

*

느루의 방에서는 약내가 진동했다. 세자는 작은 함을 쥔 채, 홀로 그의 방에 들었다. 그러곤 방을 지키던 의원까지 쫓아냈다.

침상에 누운 느루의 몸뚱이는 화상으로 일그러져 흉했다.

세자는 혀를 차고는 함을 열었다. 영롱한 주홍빛이 어른거렸다. 아비의 여의주가 그 안에 있었다.

세자는 그것을 천에 싸서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러곤 혼수상태인 느루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리고 손수 여의주를 먹였다.

그는 물러나며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닦았다.

“크, 으, 아, 으아아악!”

여의주를 삼킨 느루가 불현듯 비명을 질렀다. 세자는 의자에 걸터앉아 그의 모습이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녹아내렸던 피부가 매끈해지고 파헤쳐졌던 안구가 되살아났다. 머리가 제멋대로 길어져 침상 밖으로 흘러내렸다. 신음을 흘리며 사지를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자는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을 생각했다.

용이 태어나자 바다가 거울처럼 변하고 해일이 일되 누구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며, 하늘에는 무지개가 뜨고 짐승들이 절을 했다 한다.

그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눈앞의 변화는 하찮아 보였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붙이면 상대도 안 되겠군.”

턱을 괴고 있는 낯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천룡은 포기한다. 그럼 노릴 수 있는 것은?

“으…….”

비명이 잦아들었다. 느루가 침상에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세자는 그의 몸이 멀쩡해진 것을 눈으로 대강 확인했다.

“정신이 드느냐?”

느루가 고개를 들었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주홍색으로 변한 눈이 세자를 응시한다. 그가 눈을 깜박였다.

“보주? 저는…….”

“내가 너를 용으로 만들었다. 소감이 어떠냐?”

“용……?”

느루는 넋이 나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기억은 번개에 지져지고 자드락에게 물어뜯겨 피를 토하던 순간이다.

그 이후 정신을 잃었는데, 지금 보이는 몸뚱이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시커멓게 죽었던 한쪽 시야도 전보다 맑아져 있었다. 몸이 가벼웠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손 위의 허공에 물방울이 생겨났다. 이무기일 때는 쓸 수 없었던 권능이다. 몸 안에서 넘치는 힘이 느껴졌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며 느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물었다.

“마니를 잡았습니까?”

“아니.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

세자는 제가 만들어 낸 반룡을 지켜보았다. 느루가 무어라 더 묻기 위해 입을 열다 멈칫했다. 그가 천장의 대들보로 손을 뻗었다.

찍.

쥐 한 마리가 떨어져 내렸다. 쥐는 경련하더니 피를 토하고 곧 죽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뭐 하는 짓이냐?”

“저것이 듣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용의 능력으로 짐승을 이용하여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존재는…… 하나뿐이다.

느루가 갸웃거렸다.

“짐승을 조종할 만한 건…… 헤살이 붙여 둔 것일까요?”

“헤살은 이제 없다.”

“예? 그게 무슨.”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찌 할지 결정을 내렸다. 세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

예경의 한쪽, 몽해학파 사대부의 별채.

여울과 서란은 같은 침상에 기대있었다.

“들켰습니다.”

“……반룡이 태어난 것이냐?”

“예.”

여울이 조용히 답했다. 서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염려했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구나.”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자라 해도 그녀의 아비였다. 아들의 손에 명을 달리한 것을 알게 되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여울이 그녀를 제 품으로 당겼다. 힘이 들어간 손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 웃었다.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그리도 강대하면서.”

“아시잖습니까.”

그가 가만히 이마를 맞대 왔다. 그의 불안이 가라앉으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란은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달래는 듯한 접촉이었다.

“네가 내 곁에 있잖느냐.”

혹시나 해서 호신부까지 만들어 주고서는.

그리 생각하던 서란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여울에게 물었다.

“내게 주었던 호신부는 어떤 물건이냐?”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한 번은 막아 냅니다. 그리고 제가 보주 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혹시 다른 능력을 더할 수 있느냐?”

“무엇을 이르십니까?”

서란은 눈을 내리깔며 추측한 것을 되짚었다.

세자의 입장과 목표를 고려해 보았다. 공신들이 진실을 알고 있는데 왕실이 모를 리가 없다. 모든 것을 안다는 가정하에 세자가 취할 행동을 상정해 보았다.

반룡이 천룡을 이길 수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을 터다.

그럼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마니를 노리는 방법뿐이다. 그러나 여울이 신경질적일 정도로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천룡이 근처에 있는데 서란을 해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막을 방법도.

대비는 철저해야 했다. 그녀의 목숨이 곧 여울의 목숨이므로.

서란은 여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다음 날 아침, 흑룡궁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왕의 묘호는 평종으로 정해졌다. 국상이 준비되었고 세자 유리천응(流理天應)이 왕위에 올랐다. 연호는 천수(天授).

마니가 여전히 잡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용을 거느리지 못한 왕이었다. 그래서 유리천응은 국상 이전에 마니식을 먼저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언했다.

“내가 곧 노랫말에서 이르는 참된 왕이니, 제물 없이 교룡을 용으로 만듦으로써 이를 증명하겠다.”

실상은 왕의 여의주를 사용해 이미 느루를 용으로 만든 상태였지만, 그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마니식에서 제례를 올리는 과정을 천응이 직접 할 예정이었다. 마니가 아니라 왕이 제례를 올리고, 용과 함께 전각에서 나올 것이다.

‘언뜻 보기엔 제물 없이 용을 만든 것으로 보일 테지.’

후대의 이무기들을 만드는 건 마니를 잡아 그 여의주로 해도 될 일이었다. 아니면 다른 왕족들을 활용하거나.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세자 유리천응에겐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천룡과 그 마니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그는 은밀하게 덫을 만들었다.

왕명으로 화련교룡 야로가 실종된 왕족들을 추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궐에서는 마니식이 대대적으로 준비되었다.

얄궂게도 정해진 날짜는 1주일 후, 동지였다.

*

“이 미친 새끼가.”

예경의 사가에 유폐된, 정확히는 유폐된 척을 하고 있던 산은 소식을 듣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여울은 산을 데려다 임천에 있던 청화와 만나게 해 주었다. 산은 청화를 통해 금산상단을 관리했다.

사가를 지키던 금군을 바꿔치기 하는 일에는 몽해학파의 인맥이 도움 되었다. 진실을 바탕으로 은밀히 포섭한 관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일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오늘 부고를 듣기 전까지는.

산의 손 안에서 서찰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이가 까드득 갈렸다.

“하다, 하다 이젠 패륜까지 가냐?”

산이 종이를 패대기쳤다. 울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는 머리를 탁자에 처박았다.

왕은, 이제는 평종이라는 묘호로 불리게 될 아비는 무능했다. 그건 산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산에게 그는 결코 나쁜 아비가 아니었다.

아비는 정이 많았다. 여의주 없는 아들에게 늘 무르게 굴었다. 자식들을 제법 아꼈다. 후계자인 세자에게 확고히 힘을 실어 주면서도, 다른 자식들에게도 늘 관심을 기울였다.

왕으로선 무능했으나 자식들에게는 괜찮은 아비였다. 예외는 화예옹주 유리서란 뿐이었다.

평종은 마니를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여겼다. 전통에 따라 마니는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는 희생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버릴 아이로 작정하고 서란을 배제했다. 평종은 그녀에게 애초에 정을 주지 않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마니를 남매라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저 제물인 줄로만 알았지. 살아 숨 쉬고 생각을 하는 같은 사람이라 여기지 못했으니…….’

이제는 그것이 잘못임을 안다. 그녀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지도. 평종은 화예옹주에게는 최악의 아비였다.

그러므로 벌을 받는다면, 서란의 손에 받아야 할 것이다. 세자가 아니라 마니 화예옹주에게.

“그런데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그 벌이 죽음까지는 가지 않길 원했다. 산은 서란이 아무도 처벌하지 않겠다 했을 때 내심 안심했다. 그는 제 혈육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비였고, 그래도 형이었다.

그런데 형이 아비를 죽였다.

지병 발작으로 급사하셨다 적혀 있으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이가 들긴 했으나 정정했던 아비다. 사실 알 만한 자들은 다 알 것이다.

이건 세자의 짓이었다.

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개자식.”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본다.

피도 눈물도 없다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이 정도까진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농담으로도 형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산은 입 안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아득했다. 한참을 그리 있었다.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한 점의 망설임조차 남지 않은 것. 저런 패륜아를 왕위에 올려둘 순 없었다.

산은 우그러진 서찰을 팽개치고 일거리를 잡아당겼다. 일이 손에 잡히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요.”

문 밖에서 호위무사 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에 집중이 안 되던 터라 반가웠다. 산은 서류를 밀어 버리고 뒷목을 주물렀다.

“손님, 누구?”

공식적으로는 유폐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손님이 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공식적인 방문일 터였다. 이미 몽해학파의 몇몇 인사들과 만나 본 그는 그쪽의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저, 거시기, 그게…….”

철호가 머뭇거렸다. 의아해진 산이 문을 열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커다란 덩치의 철호 옆에 만만치 않게 큰 키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산을 보자마자 쓰고 있던 장옷을 벗었다. 느슨하게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의 미인은 피부가 짙은 갈빛이었다.

이무기, 그것도 산이 아는 이무기였다. 그는 멀거니 중얼거렸다.

“화영교룡?”

“오랜만이군, 온녕대군.”

그녀는, 주인인 화영옹주가 혼인해 궐을 나간지라 모든 사태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화영교룡 가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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