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60화 (60/70)

60. 참을 필요가 있느냐?2016.09.25.

대강 계획을 정비하느라 늦은 저녁이 되고서야 서란은 여울과 함께 교룡들을 찾아갔다.

무척이나 어색한 자리였다. 어젯밤에는 워낙 충격적인 진실을 풀어 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대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온과 희나리는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하루 종일 생각이 많았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마주 앉은 그들 사이로 애매한 정적이 고였다.

서란이 머뭇거리다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쉬었느냐?”

“……있잖아.”

희나리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직 마지막 탈피를 하지 못한 그녀는 서란보다 어려 보였다. 검은 단발이 흔들렸다. 희나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해.”

“왜, 사과를 하느냐?”

서란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온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를 원망하지 않나?”

“너희라고 원해서 쫓은 것은 아니니.”

서란은 선선히 답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세자가 그들의 보주를 인질 삼아 강제했으리라는 건 뻔한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딱히 원한은 없었다.

희나리가 우물거렸다. 온은 까만 눈으로 서란을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니’라고 했지. 우리가 알던 뜻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 되었단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었으니.”

온의 시선이 여울에게 잠시 머물렀다. 여울은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온이 다시 서란을 주시하며 물었다.

“복수할 텐가? 마니식을 주도한 자들에게?”

“아니. 바로잡을 것이니라.”

“왕이 되어서?”

“그러하다.”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던 희나리가 끼어들었다.

“마니식을 없앨 거야?”

“물론. 그 과정에서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단다.”

“뭘?”

“예경에 있는 이무기들에게 너희가 알게 된 것을 전해 줬으면 한다.”

희나리는 움찔 굳었다. 온이 신음처럼 되묻는다.

“전부?”

“숨겨진 역사와 반룡에 대해서만. 만들어진 이무기와 스스로 난 이무기의 차이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왜? 은폐하려는 거야?”

희나리가 조급하게 물어 왔다. 서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용이 되길 원하고 있고, 맹약을 지킨다면 용이 되어 천계에 오를 수 있다. 상황이 변하는 것은 없잖느냐.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할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희나리의 표정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잠자코 있는 여울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다르다고는 늘 생각했지만, 정말 다르게 났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여울. 그럼 넌 정말로 못 느껴 봤어?”

“무엇을 말하나.”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 허기와도 비슷한 욕망. 어떻게든 용이 되고 싶은,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거야?”

소룡전의 이무기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증상이었다. 중조 반정 이전에는 자유롭게 살던 이무기들을 결계로 격리하여 소룡전에 가둬 키우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런 증상이 심해지면 왕족을 습격하게 되니까.

그래서 모든 이무기들이 여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여울을 따돌리거나 괴롭히지 않은 건, 그래도 이무기인 덕분이었다.

이무기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허덕이는데 홀로 고고한 그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여울은 담담히 대답했다.

“……보주를 만나기 이전에는, 한 번도.”

온이 신음을 흘렸다. 희나리는 망연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서란은 씁쓸한 기분으로 그들을 보았다. 이들 역시 피해자였다.

그 역천이 비틀어 놓은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

마니식, 만들어진 이무기, 격리된 소룡전, 고쳐 쓰인 역사, 과한 힘을 휘두르는 공신, 그로 인해 파생된 백성의 고통, 원념이 늘어남에 따라 늘어나고 있는 요마들까지.

전부 되돌릴 것이다.

그녀는 재차 다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희나리가 느리게 손을 말아 쥐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또박또박 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해 줄게.”

“나 역시.”

온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만들어진 이무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네 생각에 동의한다. 희나리, 너는?”

“알아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이 속만 쓰리지. 어차피 용은 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

희나리는 쓴웃음을 띄었다. 그 웃음은 앳된 소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퍼뜩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저기, 야로는……. 걔도 용서해 주면 안 될까? 걔, 그 뒤로 정상이 아니었어.”

무리한 부탁임을 아는 희나리는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서란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본 문제였다.

“나는 누구도 처벌할 생각이 없단다.”

“너한테…… 살을 날렸는데도?”

서란은 반사적으로 목을 더듬었다.

마니가 되면서 상처가 사라진 피부는 매끈하기만 했다. 지독하게 아팠고, 정말로 죽을 뻔했던 일이다. 아예 분노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쉽지 않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지나간 일을 굳이 끌어내지는 않겠다. 걱정하지 마렴.”

희나리는 새삼스레 그녀를 다시 보았다. 온은 여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서 온은 그의 대답을 읽어 냈다.

여울은 야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되갚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용서하지도 못한다. 지금도 그 추락감을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혔다.

제웅의 목이 베여 떨어지던 순간, 절망에 집어삼켜지던 기분. 숨이 잦아드는 그녀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그 목의 흉을, 내내 지켜보던 심정.

여울은 다시는 그 소년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결정한다고 해서, 온이나 희나리가 그에게 뭐라 항변할 자격은 없었다. 그것을 아는 온은 쓴 기색을 머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 이야기는 금방 진전되었다.

서란은 그들에게 계획을 일부 알려 주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달해 주었다. 세자나 왕에게 들키지 않고 소룡전에 들어가는 것은 여울의 통로를 이용하면 된다.

그들은 이무기들에게 진실을 알려 준 후 각자의 보주를 모시고 한동안 숨을 예정이었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이미 일러 주었다. 숨을 곳은 산이 청화를 통해 마련해 주기로 했다.

잠시만 버티면 된다. 왕실은 그들을 제대로 추적할 정신이 없을 터였다. 은폐했던 진실이 퍼져 나갈 테니.

“오늘 밤은 쉬고 가는 게 낫지 않으냐?”

“이미 결론이 났잖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아.”

희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여울이 통로를 열어 주었다.

그들을 마중하며, 서란은 내내 망설이던 물음을 꺼냈다.

“제녕교룡, 그리고 진녕교룡.”

“왜? 더 할 말이 있어?”

“……자드락은, 어떻게…….”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나 무엇을 묻는 건지 모두가 알아들었다.

온이 차분히 말했다.

“결말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원하는 대로 행했고, 웃으며 사라졌다.”

“……그래, 그랬구나. 고맙다.”

그녀를 응시하던 온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가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바로잡는 날을 기대하겠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속삭임을 남겨 두고, 통로가 닫혔다.

서란은 한동안 허공을 보며 서 있다가 느리게 발걸음을 뗐다. 그녀는 여울과 함께 별채로 돌아왔다. 마루에 올라서며 그녀가 그를 불렀다.

“여울.”

“예, 보주.”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더구나.”

“원래 뜸하게 먹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잖느냐. 차조차도. 어제부터 내도록.”

서란이 돌아섰다. 그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여울은 침묵했다. 흰 머리칼이 어스름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여울.”

그녀가 채근하듯 이름을 불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를 이끌고 도로 마루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여울이 놀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부엌에. 네가 뭐라도 먹는 것을 봐야겠느니.”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

“…….”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서란이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이 돌연 울듯이 일그러졌다.

“나 때문이잖느냐.”

여울은 부정하고 싶은 듯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거짓은 나오지 못했다.

서란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삼키는 것이 괴로우냐.”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 반응에 서란은 얇은 가시가 가슴께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도 손에 대지 않는 것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명령 탓에 억지로 그녀를 삼켰던 충격의 여파로 아무것도 삼키질 못하고 있는 거겠지.

죄책감과 미안함이 파문처럼 번져 간다.

그녀는 그의 옷깃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리 와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잡아끌고 별채의 대문을 넘어섰다.

“보주, 잠시, 저는.”

“서란.”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당황하여 말을 늘어놓던 여울이 입을 다물었다.

“연습하겠다고 하지 않았니.”

서란은 우물가로 향했다. 그녀는 두레박을 들고 멈칫했다. 그녀가 우물물을 직접 떠올려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다.

‘눈대중으로 대충 방법은 알겠는데, 이리 해도 되나…….’

서란이 고민하는 와중에 여울이 그녀의 손에서 두레박을 빼앗았다. 그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어두운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넣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났다. 그가 줄을 잡아당겼다.

사실 용인 그로서는 이리 일부러 물을 퍼 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우물을 써 본 적이 없는 기색이어서 하는 것뿐이었다.

여울의 뒤로 보이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서늘한 물이 두레박에 가득 담겨 끌려 올라왔다. 그가 그녀에게 두레박을 내밀었다. 서란은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마시렴.”

“괜찮습니다.”

“너는 지금 계속 괜찮다고만 하지, 목이 마르지 않다거나, 나중에 마시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느니라.”

예리한 지적이었다.

여울은 목구멍이 콱 막힌 듯한 기분이 들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용인지라 며칠쯤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는 소용없던 모양이다.

그는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

흐릿한 달빛이 고인 물이 찰랑였다. 갑자기 물에 비친 달이 이지러졌다. 흰 손이 물에 잠겼다.

서란이 물을 떠올렸다. 제 입에 그것을 머금고는 그의 옷깃을 쥐었다. 그를 잡아당겼다.

여울은 그녀에게 반발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로 몸이 기울었다.

그녀가 발돋움을 했다.

물기 어린 입술이 닿아 온다. 얇은 팔이 그의 목을 감아 내린다.

닫힌 그의 입술을 그녀가 열었다. 서늘한 물과 함께 그녀가 스며들었다.

여울이 두레박을 떨어뜨렸다. 물이 쏟아져 바닥을 적시고 그들의 옷자락에 튀었다.

입 속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끝내 여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녀와 그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 움직임을 느낀 그녀가 살짝 물러났다. 홍채의 결이 보일 정도로 밀접한 거리.

서란이 주의 깊게 그를 살폈다. 주홍빛 눈동자가 심려를 담고 깊었다.

“싫으냐?”

삼키는 것이.

발음과 동시에 새어 나온 숨결이 그의 입술에 닿는다. 여울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스칠 듯이 가까웠다. 그의 호흡이 고르지 않다.

대답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는 등을 그러안고 입술이 다시 닿았다.

약간 아플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가볍게 핥은 후에, 안으로 침입했다. 혀끝이 여린 속살을 문지르다 그녀의 혀에 엉켜든다.

젖은 소리가 났다.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매달리듯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게 되레 자극이 되었는지, 그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뭉그러지듯 사이로 새었다.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눈동자에서 동공이 좁혀 들었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 금빛이 도는 주홍색의 홍채. 인간이 아닌 것의 눈.

그 낯섦이 공포가 될 수도 있건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 눈에서 그녀를 향한 열기가 뚝뚝 흘러넘쳤다.

입술이 떨어졌다. 담담한 음성이 속삭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으, 응?”

그의 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서란이 놀라 반문했다. 여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그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춰 왔다.

손이 움찔거리는 그녀의 등을 쓸고 내려가 허리를 훑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그가 삼키고 싶은 듯이 빨았다.

겨우 입술을 떼어 내고, 그가 느릿느릿 목소리를 냈다.

“보주께 정신이 팔려 제가 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확 타올랐다. 저런 말을, 사실을 보고하는 듯한 어조로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단단한 가슴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지 말거라. 제대로 삼킬 수 있는지 봐야겠으니.”

“……다시 해 주실 것입니까?”

목소리에 얕게 웃음기가 있었다. 서란은 오기가 생겨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할 테니, 놓아 보아라.”

여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그의 사이 허공에 저절로 물이 생겨나 맺혔다. 그녀는 황당한 듯 그 이적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물을 머금고 그에게 입술을 댔다. 기다렸다는 듯 벌어지는 속으로 물을 넘겨준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감싸고 붙든다.

그는 입 안에 물을 머금은 상태로 머뭇거렸다. 장난치듯 요구해 놓고서는 삼키질 못했다. 서란이 재촉하듯 입술을 건드렸다. 맞닿은 입술이 움직이며 말한다.

“괜찮아. 그저 물이다. 아무것도 아니니라. 나는 여기 있느니.”

그녀의 눈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며 그가 물을 삼켰다.

여울이 입술을 떼고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서란이 초조하게 물었다.

“거슬리느냐?”

“……예, 조금은.”

그녀의 눈썹 끝이 처지며 떨린다. 여울이 설핏 웃었다.

“지내다 보면 잊겠지요. 괜찮습…….”

그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그녀가 다시 입술을 대었다. 머금은 물이 넘어왔다.

여울은 당황하여 물의 통제를 놓쳤다. 그 바람에 그들 사이에 고여 있던 물이 흩어져 떨어졌다. 서란과 그의 옷이 젖어들었다. 그녀가 넘겨주는 물을 그가 다시 삼켰다.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서란은 여울에게 이마를 맞댄 채 말했다.

“이번에는?”

“아무 생각도 못했습니다. 놀라서.”

“음.”

서란이 눈을 굴렸다. 여울은 그녀의 쇄골을 타고 내려가 옷깃을 적시는 물방울에 시선을 두었다.

살짝 소름이 돋아 있는 살결이 탐이 났다.

“계속 먹여 줄까? 네가 거슬림을 잊을 때까지 말이다.”

물방울에 넋이 나가 있느라 그녀의 말을 언뜻 알아듣지 못했다. 몇 초 후에야 알아들었다. 맥박이 빨라진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아니오.”

“언제 제대로 삼킬 수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니냐. 한시라도 빨리.”

“못 참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못 참겠다는 의미인지, 서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에서 욕망이 읽혔다. 서란은 잠시 숨을 잊었다. 침묵하던 그녀가 되묻는다.

“참을 필요가 있느냐?”

여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서란이 시선을 피했다.

발긋해진 얼굴이 아릴 정도로 애틋하다.

그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반려이니.

그가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었다. 쇄골에 고인 물방울을 훔쳐 내고 올라간 손가락이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그는 그 목에 더 이상 상처 자국이 없다는 것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보드라운 피부를 지분거리던 손이 더 올라가 턱선을 덧그렸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누른 채 맥박을 느끼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서란.”

나지막한 부름.

그녀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순간에 이름을 부르는 건 너무하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허나 연습하라 한 건 자신인 탓에 그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움찔거리자 여울이 미소를 짓는다. 나긋하게 풀리는 눈매. 온기 어린 접촉이 와 닿는다.

“들어갈까요.”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였다. 서란은 차마 소리 내어 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달아오른 낯을 감추기 위해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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