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9화 (59/70)

59. 잉태2016.09.22.

마루로 나오고 보니, 신발이 없었다. 버선발로 사랑방에 앉아 있다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큼성큼 가는 여울을 향해 산이 소리쳤다.

“야, 내 신발은?”

여울이 돌아보더니 성의 없이 손을 휘저었다. 마루 아래 어딘가에서 여울의 것으로 보이는 신이 허공을 날아왔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이능에 산이 흠칫 놀랐다.

여울은 기다려 주지 않고 이미 별채의 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산은 깊은 한숨을 쉬고 신을 신었다. 여울의 것이라 크기가 맞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어디냐? 몽해면, 현음당의 집인가?”

“그렇다.”

“지금 란아한테 가는 거지?”

“그래.”

“용은 어떻게 된 건데?”

“시험을 통과했다.”

“무슨 시험?”

여울은 입을 다물었다. 건성건성 대답하는 그를 포기하고 산은 홀로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시험이라면, 실전되었던 용을 만드는 방법 이야긴가.

그사이 여울은 사랑채에 올라서고 있었다.

걸음이 조급해졌다. 안에서 현음당과 마주 앉은 서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예의를 내던지고 문부터 열었다.

놀란 시선이 확 쏠린다. 여울은 서란부터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이성이 돌아왔다. 겉보기엔 덤덤한 얼굴이었으나 핏줄이 서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서란이 웃었다.

“벌써 다녀왔느냐?”

“예. 별일 없으셨습니까?”

“반 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겠니. 들어오렴.”

“란아?”

여울의 뒤에서 산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서란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며 나붓이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어, 어. 그러니까.”

여울이 안으로 들어가며 비켜섰다.

산은 문간에 멍하니 굳은 채 여동생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주홍빛 눈동자의 여울과 붕대를 감고 있지 않은 서란을 오갔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 빌어먹을, 잠깐만.”

“오라버니?”

“잠시. 쪽팔리니까 보지 마라.”

“네?”

서란이 의아하게 다가섰다. 산의 눈가가 벌겋다. 그는 콧잔등을 주무르며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것을 알아차린 서란은 모른 척 눈을 돌렸다.

산은 문틀에 기댄 채 돌아섰다. 훌쩍이는 소리가 조금 났다.

현음당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겨우 진정한 산이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울이 덤덤하게 말을 던졌다.

“다 울었나?”

“이 자식이 진짜!”

산의 얼굴이 터질듯이 달아올랐다. 그는 으득 이를 갈며 여울을 노려보다가 현음당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당신이 현음당인가? 처음 만나보는군.”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현음당이 여울과 산에게도 차를 내주었다. 산은 목이 타는지 바로 마셨고 여울은 손도 대지 않았다.

우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산에게 알려야 했다.

서란과 현음당이 산에게 설명을 하는 동안, 여울은 약간 물러나 천계와 다시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서란이 물어보았던 천룡의 권능에 대해 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대강 이야기를 들은 산은 간간히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고 있는 여울을 돌아보았다.

“쟤가 천룡이라고. 하늘과 소통을 하는?”

“네.”

“너는 저 녀석 여의주가 된 거고?”

“그래요.”

“그 시험이란 게 저놈이 널 잡아먹어서, 살아남으면 천룡이 되고, 죽으면 반룡이 되는 거였단 말이지.”

산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서란을 빤히 보다가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서란이 놀라 제 이마를 만졌다.

아프지는 않은데 당황스러웠다. 이리 허물없는 접촉은 처음이었다.

허공을 보고 있던 여울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험악한 눈으로 산을 노려보았다. 산은 태연히 웃었다.

“돌아오는 거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뭐? 잡아먹으라고 명령을 해?”

“……죄송합니다.”

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뒤통수가 서늘할 정도로 노려보는 여울을 한 번 돌아보더니 더 깊은 한숨을 쉰다. 이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박이 났네. 역시 내 투자는 실패하지 않는다니까.”

혼잣말을 한 산은 돌연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자드락은? 다시 이무기가 될 수 있는 거냐?”

“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무리겠군. 뭐, 완전히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것보단 낫나.”

산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산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너는 이제 어쩔 거냐?”

가벼운 물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가볍지 않았다. 산은 진실들을 보며 했던 생각을 되새겼다.

대안이 될 존재. 정당한 왕. 절실히 바랐던 도박이 완벽하게 성공하여 눈앞에 있었다.

서란은 그의 바람에 부응하듯 답했다.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도움이라니, 투자야.”

산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쾌활하게 덧붙였다.

“망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질렀던 땅에서 금광이 나온 거라고. 여기서 발을 빼면 상인이라 할 자격도 없지.”

“오라버니는 뭘 바라고 투자하시는 건가요?”

“새로운 예락. 보여 줄 거냐?”

농처럼 던져진 무거운 기대였다. 서란은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의지를 담은 눈으로 대답했다.

“네. 그러니,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산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 말의 무게를 모르지 않을 텐데, 그녀는 이미 결심을 다진 듯 확고했다.

오누이의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던 현음당이 나섰다.

“마마께서는 피를 흘리지 않을 거라 하셨지요.”

“네.”

“어찌 하실 작정입니까?”

서란이 여울을 돌아보았다. 약간 물러난 곳에 있던 그가 곧바로 반응하여 그녀를 보았다.

“여울, 용이 가졌다 전해지는 능력을 너도 모두 쓸 수 있느냐?”

“예.”

“날씨를 바꾸는 게 가능하더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무지개를 만드는 건?”

“가능합니다.”

“궐에 있는 금군은 1,500명이 넘는다. 관상감과 의금부 등에 소속된 주술사를 모두 그러모으면 300명에서 400명 정도는 될 것이다. 이들이 만약 공격해 올 경우 피를 흘리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느냐?”

“예.”

여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현음당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서란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태풍을 마주한 것 같던 천룡의 위압감을 이미 코앞에서 보았다. 용은 원칙적으로 하계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 권능이 이미 신선에 가까우므로.

“스승님께서 제게 태조의 재림이라 하셨지요.”

서란이 현음당을 돌아보았다. 현음당이 작게 끄덕였다. 서란은 미소를 띠었다.

“신화를 재현하겠습니다.”

“신화라면…….”

“예락이라는 이름은 무지개가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지요. 태조 유리하께서 무지개를 받아 여의주를 품었다 전해지며, 창에서 탈출할 때도 무지개를 타고 갔다고 하고요. 마파람을 용으로 만들 때도 무지개가 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지개를…… 만들려고?”

산이 얼빠진 채 물었다. 서란은 차분하게 전설을 입에 담았다.

“무지개를 드리우고 용과 함께 흑룡궁에 입궐하겠습니다.”

“정면으로 말이냐?”

“네.”

서란이 조금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을 타고 예경의 위를 날아서 가로질러, 근정전의 마당으로요.”

경악이 흘렀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잠깐, 너무 위험한, 어, 저 녀석이 천룡이라 상관없…… 나?”

“입궐하기 전에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현음당이 물음을 던졌다.

서란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선 은폐되었던 역사를 정리한 것이 두 가지 필요합니다. 하나는 짧고 명료하게, 민담이나 설화처럼. 다른 하나는 창의 기록과 여울이 천계에서 들은 내용을 근거로 하여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둘이나? 어디에 쓰게?”

“전자는 예경을 시작으로 예락의 백성 전체에게 퍼뜨릴 것이며, 후자는 스승님의 몽해학파를 시작으로 사대부와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퍼뜨렸으면 합니다.”

“진실들을 곧바로 공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겠습니다. 혼란과 의심이 혼돈으로 번지기 전에 신화를 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 질서를 만들 것입니다. 왕실에서 대응하기 전에.”

산이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공신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며. 그놈들 반발이랑, 이무기들이 받을 충격은 어쩌려고?”

“공신록을 파기할 생각입니다. 그들이 누리던 지위를 탐내는 사대부들을 충동질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공신들의 위세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무기들의 경우, 제녕교룡 온과 진녕교룡 희나리를 설득하여 미리 보내겠습니다. 반룡에 대해서는 알리되, 만들어진 이무기와 천룡이 되는 정확한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맹약을 지켜 용이 되는 자들은 변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시험’은 무방비하게 도전했다간 실패할 위험이 크니 일단 숨기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언제 생각해 둔 것인지 그녀의 말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서란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산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현음당도 마찬가지였다. 서란이 말을 이었다.

“이 진실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현 왕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니까요. 지금의 왕을 천륜을 어긴 잘못된 왕이라 낙인찍고, 신화를 바탕으로 대안이 되어, 천룡의 힘으로 제압하겠습니다.”

“부왕이나 형님이 순순히 납득할 리가 없을 텐데.”

“예, 하지만 왕의 용이었던 헤살이 스스로 떠났으니 수용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을 끌거나 우회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리 돌파하는 것이 여파가 적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렇겠군요. 파격적이기는 하나, 가장 혼란이 덜할 방법입니다. 성공할 경우는요. 그럼, 기존의 왕족들과 공신들은 어찌 하실 작정입니까? 아무도 처벌하지 않으실 겁니까?”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건,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성공하여도 누구도 처형하지 않을 것입니다. 권한을 빼앗는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허나 마마, 누리던 권력을 뺏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오히려 처형하지 않는 탓에 더 큰 반발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래, 거기다 살려 두면 계속해서 네 앞길을 방해할 거고 말이야.”

현음당과 산이 번갈아 말했다. 서란이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권력을 빼앗기는 게 죽기보다 싫어 거짓을 묵인했던 자들에게는 이것이 더 큰 벌이 되겠지요. 살아서 비틀렸던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도록. 게다가 반정을 하겠다는 자가 그 길을 피로 물들여서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특히 그것이 혈육의 피가 된다면요.”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선명한 눈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진실을 알지 못해 거짓을 따랐거나, 알고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침묵하던 이도 있었을 겁니다. 200년이 흐른 전통입니다. 일개 개인이 무너뜨리기엔 어렵지요. 그러니 저는 모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실부터 공개하려 하시는군요.”

“불온한 싹이 되면 어쩌려고? 이왕이면 시작할 때부터 싹 치우는 게 낫지 않아?”

산이 나직하게 물었다. 서란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것을 계속 솎아 내고 때론 회유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할 일 아니었습니까.”

“사서 고생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편하기 위해서 쉬운 길을 택하면 마니식을 유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녀의 말에 실린 의지를 모두가 알아차렸다. 정적이 흘렀다.

산이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말을 툭 던져 놓았다.

“신화를 만들 거면 제대로 해야겠지. 예락에 소문을 퍼뜨려 주마.”

“소문이라니요?”

“참된 왕께서 무지개가 뜨는 날에 용을 타고 오시리라. 이 정도면 어때?”

산이 노래하듯 말했다. 낯 뜨거운 표현에 서란이 볼을 붉혔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제2의 건국 신화잖아. 안 그래? 홍보와 광고는 원래 장사치의 기본 소양이야.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전설로 만들어 보마.”

“대군마마의 말이 옳습니다. 이런 일엔 날짜도 중요하지요. 동지하례 때 근정전 상공에 용이 나타나면…… 장관이겠군요.”

현음당이 끼어들었다.

동지하례는 동짓날 아침에 문무백관이 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의례였다. 동지는 1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 이후부터 점점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라고도 하며, 한 해의 시작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동지까지는 앞으로 약 두 달이 남아 있었다.

“동지라, 좋군. 빛이 되살아나는 날에 태조가 재림하는 거지. 그림 되겠네.”

산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현음당이 나섰다.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저와 제 지아비, 그리고 아들이 하겠습니다. 선비들에게 전파하는 건 몽해학파를 통하면 되겠군요.”

“백성들에게 알리는 건 내가 하지.”

“……감사합니다. 교룡들과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빠르게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두 달이면 빠듯한 일정이었다. 왕실에 움직임을 들키지 않아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다.

서란도 민망함을 가라앉히고 동참하여 세부 사항을 논하기 시작했다.

공신 가문들을 성향과 사정에 따라 나누고 반발이 심할 자들을 가려내는 와중에,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좀 조용히 하시지요. 둘을 낳든, 셋을 낳든, 그건 저희가 결정할 일입니다.”

여울이 쏘아붙였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현음당이 종이를 펼쳐 가문들 간의 관계를 쓰던 찰나라 또렷하게 모두의 귀에 들렸다.

서란이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여울?”

그는 귀를 막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서란의 부름에 그가 움찔 놀랐다.

현음당과 산이 어이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여울은 귀를 막은 손을 느리게 뗐다.

“죄송합니다.”

“방금, 음, 그러니까…….”

서란이 더듬거렸다. 여울은 무표정했다. 산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둘을 낳든, 셋을 낳든……?”

“…….”

“천계랑 소통한다더니 가족계획 짜고 있냐, 지금?”

산이 피식피식 웃었다. 여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다 마파람 때문이었다.

천룡 나래로부터 권능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데, 마파람이 자꾸만 끼어들어 헛소리를 해 댔다. 참다 참다 한마디 한 게 육성으로도 튀어나갈 줄은 몰랐다.

산이 물었다.

“천룡들이 그런 얘기도 해?”

“새로운 천룡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 소란한 편이다.”

“근데 말이야, 왜 너희 관계를 완전 기정사실로 취급하지? 자식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할 얘기가 있지 않나? 왜 벌써 부부 취급이야?”

“…….”

“어허, 부정을 안 한다 이거지? 너희, 나한테 말 안 한 일 있지?”

난처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에 서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산은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여울을 찔러 댔다.

“너 내가 분명히 덮치지 말라고 했었…….”

“그만.”

여울이 산의 입을 틀어막았다. 산이 킬킬거리더니 그의 손을 밀어냈다. 서란은 고개를 푹 숙였고 현음당은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산이 불현듯 떠오른 것을 물었다.

“근데 너희 애들은, 그럼 용의 혼혈이 되냐? 창 황족처럼?”

“그건 아닐 겁니다.”

현음당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설명했다.

“창의 건국 신화도 예락의 것처럼 역사와는 차이가 좀 있겠으나, 일단 용의 혼혈이라는 것 자체가 기적의 산물이라 알려져 있잖습니까. 반인반룡으로 태어나려면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 후손은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보주께서 완전한 선인이 되는 건 인간의 수명이 끝난 후이고, 나 역시 인간의 태를 취하고 있으니. 여의주를 물려받는 건 하늘에서도 예상치 못한 이례적인 일이다. 맹약으로 연결된 존재가 용일 때 영향을 받는 것 같다고 하는군.”

“왕의 자식들만 여의주를 물려받는 게, 용을 거느렸기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건 반룡이라도 상관없나 보군요.”

여울과 현음당의 대화를 듣던 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띤다.

“그래서, 몇이나 낳으려고?”

“시끄럽다.”

“아니, 조상님들께서도 궁금해하시잖아. 친구야, 그래서 몇 명이 좋냐? 둘은 좀 적지?”

여울은 그대로 그를 외면했다. 산이 신이 나서 캐물으려는 것을 서란이 말을 꺼내며 막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잖습니까.”

“왕의 후사를 논하는 거국적인 일이니 충분히 중요하지.”

“그러는 오라버니야말로 혼기가 차셨는데 어찌 하시려고요?”

“여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오냐?”

“오라버니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신가요?”

“어? 어, 없어, 그런 건.”

산이 움찔했다. 그는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서란은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조용해진 것에 만족했다.

“그럼, 다시 논의를 계속해 보죠. 우선 호의적일 만한 자들을 추려 먼저 연락을…….”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그들은 계획을 다듬었다.

예락의 서쪽 끝, 몽해에서 신화가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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