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8화 (58/70)

58. 제게 명하십시오.2016.09.18.

현음당의 집은 삼대가 함께 사는 만큼 방이 많았다. 긴 대화 끝에 넋이 나간 두 교룡들에게도 각방이 주어졌다. 아마 오늘 밤 제대로 잠들기는 힘들 터였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진실들이었으니.

여울은 서란과 함께 별채로 돌아왔다. 서란의 방에는 면사가 들어 있는 함이 놓여 있었다.

서란이 안으로 들어오자 함 속에서 뱀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슬금슬금 기어 나오더니 강아지처럼 다가와 그녀의 치마폭에 파고들었다.

“이런.”

그녀가 놀라 치마를 살짝 들었다. 발목에 머리를 부비고 있는 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드락이 손목을 휘감으며 타고 올랐다.

뒤따라 들어온 여울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자드락을 잡아챘다. 자드락이 못마땅한 듯 쉿쉿 소리를 냈다.

“왜 이리 자드락이 너를 꺼려하는 것이냐? 너는 천룡인데.”

“속은 예전과 똑같나 봅니다.”

무뚝뚝하게 답한 여울이 자드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품에 손을 넣어 여의주를 꺼냈다. 주홍빛이 방 안을 채우며 영롱하게 어른거렸다.

“그건 어찌할 것이냐?”

“자드락이…….”

여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서란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그새 자드락은 자리에 앉은 서란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손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녀에게 닿아 있는 것이 편안한 모양이었다.

여울은 그 모양새를 지켜보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제가 용이 되면, 헤살의 여의주를 빼앗아 자신에게 달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서란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헤살의 여의주란 마니 희명옹주의 여의주다. 자드락의 보주가 빼앗겼던 심장이었다. 맹약에 따라 본디 그의 것이어야 할 물건.

여울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작은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둥근 구슬이 느리게 구르다 멈춘다. 서란의 손에 기대 있던 자드락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뚫어져라 여의주 쪽을 보았다. 짧게 쉬익거리더니 느릿느릿 여의주 쪽으로 기어갔다.

서란과 여울 둘 모두, 숨을 멈추고 그를 주시했다.

자드락이 여의주를 가볍게 핥았다. 꼬리 끝으로 툭 건드리더니 머리를 대었다. 그대로 가만 있다가 여의주를 감싸며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던 서란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펴보았다. 뱀은 눈꺼풀이 없어 구별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가 다시 이무기가 될까? 여의주의 힘으로?”

“그리 하진 않을 겁니다.”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예, 아마도.”

가슴께가 아릿했다. 서란은 여의주를 안고 잠든 검은 뱀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함에 있던 면사를 끄집어내 덮어 주었다. 반투명한 너울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여울이 손을 당겨 잡았다. 손가락을 얽으며 눈을 마주한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괜찮다.”

교룡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느라 이미 늦은 새벽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예정이다. 그녀에게서 피로가 묻어났다.

여울이 말없이 일어나 그녀의 침상에 이부자리를 폈다. 서란을 이끌어 눕도록 하고는 단정히 읍을 했다. 이불에 파묻힌 서란이 물러나려는 그를 불렀다.

“여울.”

“예.”

무의식적으로 붙잡았다. 죽음을 각오했던 게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모조리 꿈일까 두렵다.

그녀는 망설이며 말을 골랐다. 조그맣게 속삭였다.

“같이…… 자면, 안 되겠느냐?”

아직도 낯선 은발이 흔들렸다. 그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본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서란은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 깨달았다. 삽시간에 얼굴이 탈 듯이 붉어졌다.

“아니, 그, 그, 그 뜻이 아니라. 나는. 그냥.”

그녀가 허둥거렸다. 순간 확 타올랐던 욕망을 여울은 능숙하게 갈무리했다. 그가 빙긋 웃었다.

“도발하지 마시라 했더니.”

여울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가 손끝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은밀하여 서란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미, 미안하다, 나는, 그러니까.”

“압니다. 저는.”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보주께서 잠들고 나면 문 앞에서 밤을 샐 작정이었습니다.”

보주와 떨어져 있기에는 너무도 불안하여.

서란은 그의 심정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쉬이 잠들기엔 무리인 밤이다. 그녀는 숨을 들이키고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물러나 그가 누울 공간을 만들었다.

“너도, 피곤할 테니.”

그녀는 소매를 놓고 그대로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났다. 이불이 들춰지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가 덮인다.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당겨 안았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이불을 여몄다.

따듯한 체온이 단단하게 감싸 온다. 서늘하던 것이 익숙하여 아직 낯설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품이다.

바짝 긴장했던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깜박이던 눈이 감겼다. 지쳐 있던 터라 금세 잠이 쏟아졌다.

여울은 서란의 호흡이 흐트러졌다가 일정하게 가라앉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교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게서 아직 자신의 냄새가 났다. 그것을 들이켰다. 안고 있어도 불안했다. 품에 있어도 욕심이 난다.

그는 감각을 넓게 퍼뜨려 사방을 감지 범위에 넣었다. 몇 겹이나 되는 주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서야 눈을 감았다.

용은 여의주를 품고 선잠에 들었다.

*

여울은 다음 날 해가 밝기도 전에 눈을 떴다.

그는 마뜩찮은 기분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언제 기어 올라왔는지 자드락이 서란의 가슴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의주도 꼼꼼하게 챙겨 와 품고 있었다. 조그만 머리통은 그녀의 목덜미에 올린 채였다.

그 뱀과, 일어나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여울은 서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들어 자드락을 움켜쥐었다. 여의주와 함께 한 번에 쥐어 침상 밖에 내려놓았다. 내팽개치진 않았지만 꽤나 거친 손놀림이었다.

그는 뱀이 항변하듯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깨끗이 무시하고 서란을 당겨 안았다.

“으음.”

자드락의 울음소리 탓인지, 여울의 움직임 탓인지 서란이 깨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뒤척이다 눈을 떴다.

여울은 얇은 눈꺼풀 사이로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나는 것을 숨 죽이고 지켜보았다. 흐릿하던 눈에 초점이 잡히는 과정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을 울린다.

맑아진 서란의 시야에는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 여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서란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여, 여울?”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그리 말한 그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서란은 그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그녀의 귓불이 붉어졌다. 방 안은 어스름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아니, 벌써 아침이잖으냐.”

침상 밖으로 벗어나던 서란은 바닥에서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자드락을 보았다. 자드락은 여전히 여의주를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그것이, 먹먹했다.

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미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을 꺼냈다.

“어제 산에게 연락해야겠다고 하셨지요.”

“아. 그랬었지.”

서란이 정신을 차리고 끄덕였다. 아직 잠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가볍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약간 엉킨 머리칼이 반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정갈하던 그녀가 흐트러진 모습이, 굉장히, 무방비했다.

여울은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도를 닦는 기분이었다.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천계에 조언을 얻어 통로를 여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가 본 적 있는 장소라면 열 수 있으니 금방입니다.”

“굉장하구나.”

솔직하게 감탄한 서란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여울을 돌아보았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겠느냐?”

“어떤 것을 이르십니까?”

“천룡의 권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전부 알았으면 한다.”

여울이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도 아직 모두 알진 못하는지라,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시급한 일이십니까?”

“되도록 빨리 알았으면 좋겠구나.”

해가 밝아 온다. 햇살이 창호지를 투과하여 방 안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빛 가운데에 선 그녀가 웃으며 단언했다.

“나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지 않을 작정이다.”

서란이 침상에 걸터앉은 그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싼다. 여울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묻는다.

“너를 믿고 그리 결심했단다. 해 줄 수 있느냐?”

빛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셨다. 벅차오른다. 여울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낮게 답했다.

“제게 명하십시오. 이루겠습니다.”

*

서란이 현음당 내외와 함께 아침을 먹는 동안, 여울은 천계와의 소통을 시작했다.

닫아 두었던 것을 여는 순간 고함 소리가 쏟아졌다.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귀를 막은 채 소리가 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온 말들은 모조리 무시하고 제가 알고 싶은 것만 물었다.

「통로를 여는 법을 알려 주십시오.」

「이놈의 자식이! 저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마파람이 으르렁거렸지만 저번에 연락을 끊는 법을 알려 주었던 천룡이 이번에도 설명해 주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울은 소란한 다른 목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며 그 말만 집중해서 들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래. 마지막 천룡이었다. 네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그녀는 여울에게 중조 역천 당시의 이야기를 해 줬던 용이기도 했다.

마지막 천룡이라. 여울은 만국유사에 있던 기록을 떠올렸다.

당시 중조의 아우가 거느렸던 천룡은 천년호에서 죽었고, 중조는 아비와 아비의 용도 죽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지? 여울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그녀가 덧붙였다.

「내 마니의 묘호는 영종. 중조의 조모였던 여왕이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이었지.」

유난히 잘 안다 했더니, 중조 직전 시대의 천룡이었다. 최초의 반룡에게는 바로 윗대의 선배가 되는.

아득하던 역사가 확 가까워진다.

여울은 불현듯 깨달았다. 천룡이 가진 힘 중 가장 강한 것은 천계와의 소통이었다.

지나간 역사를 당대의 존재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다. 누적된 경험을 전수받는다. 천룡을 통해 선대의 왕에게 직접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그들이 제지하기도 할 것이다.

천룡을 거느렸던 예락의 왕들이 어지간해서는 실정을 저지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째서 중조 이후의 왕들이 그토록 천룡의 등장을 경계했는지도 알 만했다. 그 권능도 권능이거니와, 숨기고자 했던 모든 것과 은폐된 역사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테니.

필요한 것들을 듣고 난 후에는 다시 연락을 끊었다. 그는 하나인데 불러 대는 천룡은 한둘이 아니니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정말로 축제를 벌이기라도 했는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익숙해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겠군.’

통로를 여는 법은 알아냈으나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산을 데리고 오는 데엔 반 시진도 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잠시라도 서란의 곁을 비우고 싶지 않았다. 이 집 안에는 교룡들까지 있었다.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해도 경계를 풀기엔 이르다.

여울은 어제 잘라 냈던 머리 타래를 꺼냈다. 용의 갈기였다. 그는 천계에서 얻은 조언대로 그것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온 서란에게 여울이 완성된 것을 내밀었다.

“이건…….”

하얗게 반짝이는 실과 검은 비늘이 얽힌 노리개였다. 희미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얽혀 있는 용의 비늘은 정교하게 세공된 흑요석처럼 보였다.

“항상 지니고 다녀 주셨으면 합니다.”

“네 비늘이냐?”

“예. 보주를 지켜 줄 호신부(護身符)입니다.”

“고맙다.”

서란이 웃으며 받아 들었다. 곧바로 옷고름에 흰 노리개를 달았다. 투박한 형태인데도 용의 기운이 서린 탓에 신비해 보였다.

따지고 보면 그가 그녀에게 주는 첫 선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여울이 나직이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부디 보중하십시오.”

“금방이라면서. 호신부까지 주어 놓고는. 걱정하지 말거라.”

그는 쓴웃음을 띠었다. 합리적이지 못한 불안감이다. 심장을 밖에 내놓고 있는 듯한 기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녀와 함께 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포기했다. 대신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작정이었다.

산이 유폐된 곳은 예경에 있는 온녕대군의 사가라고 들었다.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여울은 안승호가 알려 준 위치를 떠올렸다. 그곳과 가까운 장소 중에 들렀던 적이 있는 풍경을 떠올리며 용언을 사용했다.

[열려라.]

공간이 제멋대로 휘며 통로가 나타났다. 서란은 신기한 듯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공중에 생겨난 구멍 너머로 어둑한 골목이 보였다. 여울이 묵례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렴.”

그가 통로를 넘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객잔 뒤편의 인적 없는 골목이었다. 여울은 기억을 더듬어 예경의 뒷골목을 가로질렀다.

온녕대군의 사가를 찾는 것은 쉬웠다. 금군들이 동원되어 경계를 서고 있는 저택이라 확 티가 났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숨어들었다.

산은 사랑방에 홀로 있었다. 술 냄새가 났다. 여울은 인기척도 내지 않고 대뜸 문을 열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산이 문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취했나?”

산이 중얼거렸다. 여울은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근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퍼뜨린 감각으로 확인한 후에 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산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제 뺨을 때렸다.

“아프네?”

“나를 알아보겠나?”

“너 눈깔이 왜 그래? 머리는 어쩌다 늙은이처럼 샜어? 어떻게 여기에 있지? 너 죽었냐? 내가 유령을 보나? 아니, 술주정인가. 청화가 알면 끝장나게 잔소리하겠군.”

산이 횡설수설했다. 노인의 백발과 여울의 흰 머리칼은 확연히 달랐지만 그런 걸 구분해 낼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여울은 그의 헛소리를 가만 듣고 있다가 손을 뻗었다. 여의주가 가진 정화의 힘을 끌어내 산에게 퍼부었다. 단번에 술기운이 날아가자 산이 눈을 끔벅였다.

“어?”

“정신이 좀 드나?”

“미친?”

“그럭저럭 잘 지낸 모양이군. 떠날 준비를 해라.”

“야, 잠깐, 잠깐만.”

산은 눈을 찡그린 채 여울을 아래위로 훑었다. 주홍색으로 변한 눈동자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저 눈이 의미하는 것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 용이 됐냐?”

“그래.”

산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눈을 내리깔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란, 란아는?”

“무사하시다.”

담담한 대답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산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그가 어지러운지 이마를 짚었다.

“이 망할 새끼야, 그거부터 말해야 할 거 아냐!”

산이 왈칵 소리를 질렀다. 여울이 약간 움찔했다.

산은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 손을 치켜들다가 포기하고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앞에 놓여 있던 주안상을 발로 툭 밀어냈다.

“간 떨어질 뻔했네. 아.”

“일어나라. 시간이 없다.”

“무슨 시간? 난데없이 나타나서, 아니, 어떻게 온 건데? 무슨 일이 있었어?”

“일단 가지.”

여울은 마음이 급했다. 서란의 곁에 있지 않으니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산은 기가 막히는지 찌푸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앞뒤 자르고 말하는 꼬락서니는 내가 아는 뱀 놈이 틀림없긴 하네. 어딜 가자고?”

“몽해.”

“뭐?”

“설명은 거기서 하지.”

“나 유폐 중인데? 아니, 기다려 봐, 야!”

[열려라.]

여울은 산의 항변을 무시하고 통로부터 열었다. 현음당의 별채에 있는 여울의 방이 구멍 너머로 드러났다.

산은 얼이 빠져서 그 기이한 광경을 보다가 여울이 그를 잡아끌자 기겁해 옆에 있는 문갑을 붙들었다.

“이것 좀 놓고! 먼저 설명을 하라고! 저건 뭔데!”

“가서 해 주마.”

“돌겠네, 진짜. 야, 야! 너 인마! 으아악!”

여울이 산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냈다. 산은 버둥거리다 통로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각오한 바가 무색하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낯선 방이었다. 여울이 잡고 있던 뒷덜미를 놓자 그가 비틀거렸다.

여울은 그를 내려놓자마자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산은 그 하얀 뒤통수를 어이가 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디 가?”

“보주 곁에.”

“……내가 앓느니 죽지.”

산은 신음을 흘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는 터덜터덜 여울의 뒤를 따랐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