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반룡2016.09.15.
모든 것이 바뀐 날이 저물어 간다.
여울은 몽해의 바다 위에 있었다. 헤살과 교룡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만든 구름 한 조각에 걸터앉은 서란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노을에 물들어 가는 바다를 응시했다. 수평선 끄트머리에서부터 불그레한 빛이 투명한 옥색 바다를 적셔 갔다.
서란은 여울을 돌아보았다. 여울은 허공을 손가락으로 그으며 그녀의 주위에 주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주술이라기보다 용의 권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혹여 헤살이나 다른 교룡들이 날뛰게 되더라도 그녀에게는 여파 한 자락 닿지 않도록.
긴 갈색 손가락의 움직임이 우아했다. 깨끗한 손등이 눈에 띈다. 서란은 흉터가 사라진 그 손등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네가, 반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무기에 불과하다 했었지.”
“예. 반룡은 여의주를 이용해 용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반룡도 그리 대단해 보였는데, 용은 정말 강대한 존재겠구나.”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밤의 어둠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여울이 손짓으로 환한 빛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공중을 수놓는 등불 같은 빛들. 서란은 궐을 벗어나던 밤을 떠올렸다. 그녀의 발치에 그가 만들어 붙여 주었던 반딧불들이 생각났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아무리 강대해도, 마니를 잃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중조의 역천처럼.”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공포가 있었다. 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느냐? 천룡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했으니.”
“예.”
짧게 답한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의 심장을 파먹고 태어난 반룡과 마주한 천룡의 이야기 따위는.
그의 얼굴을 본 서란은 더 캐묻지 않았다.
“준비가 끝났으니, 결계를 해제하겠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올 것입니다.”
그는 그녀의 주위에 보호의 술을 한 겹 더 씌웠다. 안전한 곳에 그녀를 두고 홀로 헤살을 맞이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울은 자신의 시야 밖에 보주를 두고 싶지 않았다. 불안을 견딜 수 없었다.
서란은 엷은 두려움이 깔린 그의 표정을 응시했다. 저 공포는 자신 탓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여울.”
서란은 그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며 단언했다.
“약속한 대로,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마. 네 곁에 계속 있을 테니.”
여울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입술이 스쳤다.
“보주께서는 제 역린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아껴 주십시오.”
단조로운 음성 속에 절실함이 있었다. 서란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이 얽혔다. 여울이 설핏 웃었다.
그는 웃음이 늘었다. 예전보다 표정이 풍부해지고 있었다.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만 그 미소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울.”
“예, 보주.”
“언제까지 나를 보주라고만 부를 것이냐?”
“예?”
“청혼까지 하여 놓고, 주인으로만 대할 참이냐?”
그의 낯이 붉어졌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바다를 평지처럼 밟고 선 용이 수줍어하고 있었다.
서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답을 받아 낼 때는 그리 윽박지르듯 하더니.”
“그때에는, 마음이 급하였습니다. 사죄드립니다.”
“뭐가 그리 급했느냐?”
“하늘이 닫히고 나면 수명이 다하신 후에야 다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응? 나중에 다시 택할 수 있으면 굳이 그때 할 필요는 없었잖느냐.”
여울이 머뭇거렸다.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당신의 수명이 끝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전에 선택하면, 죽음을 거치지 않아도 되므로.”
그 말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살을 맞고 죽을 뻔한 것으로도 모자라, 명령으로 강제해 그가 그녀를 삼키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게다가 용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제 손으로 그녀에게 검을 겨누기도 했다.
그 순간들이 그에게 상처가 되어 남았다. 그 상흔의 깊이가 보였다.
그의 눈에 불안이 맴돌았다. 저것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속이 쓰렸다.
서란은 최선을 다해 미소했다. 그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가시길 바랐다.
“그때 선택했으니 나는 네 청혼을 수락한 것 아니냐. 그러니까.”
그녀는 구름을 짚은 채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용의 힘으로 유지되는 구름은 솜처럼 부드러웠다. 그녀가 속삭였다.
“보주 대신, 이름으로 불러 주렴.”
여울이 흠칫 놀랐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굳어 버린 사이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여울이 띄워 놓은 빛이 은은하게 그들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았다.
여울은 눈을 감았다. 겨우 두 글자를 발음하기 위해 수없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란.”
간신히 나온 음성은 평소보다 훨씬 낮았고, 보다 보드라웠으며, 떨림을 담고 있었다.
그 부름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부르라 해 놓고서 직접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여울이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안 되겠습니다.”
“뭐, 뭐가 말이냐.”
“지나치게…….”
“무슨 소리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답지 않게 뚜렷하지 않은 발음이 웅얼거렸다.
“도저히 못 부르겠습니다.”
“고작 이름인데 왜 그러느냐. 더한 것도 해 놓고선.”
조그맣게 항변한 그녀의 말에 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서란이 약간 물러났다.
말해 놓고 보니 부끄러웠다.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머리 위에서 맴도는 애꿎은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보던 여울이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가만 웃는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연습까지 필요한 일이냐?”
“보주께서도 익숙해지려면 노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녀의 눈 안에 박혀 드는 기분이었다.
홀린 듯이 보고 있는데 여울이 뚝 웃음을 멈췄다.
그는 삽시간에 날카로워진 눈으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로, 반룡과 교룡들이 오고 있었다.
헤살은 결계가 해제되자마자 교룡들과 함께 이동했다. 보란 듯이 공중에 빛의 구체들이 떠 있었다. 그 아래에 여울과 서란의 모습이 보였다.
온과 희나리는 바다 위를 걸어서, 헤살은 수면 위에 낮게 뜬 채 그들에게 접근했다. 간신히 서로의 모습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
여울이 띄워 둔 빛들이 물결 위를 흐릿하게 밝혔다.
헤살이 바다를 밟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온과 희나리도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뭐야?”
희나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의 눈이 여울의 눈동자와, 하얗게 변한 머리칼을 지나쳐, 살아 숨 쉬고 있는 서란에게 닿았다.
주홍빛 눈은 여의주의 증거다. 이무기의 눈이 주홍빛이라는 건 용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기적을 보았으니 여울이 용이 된 건 예상했다.
그런데 마니가 살아 있었다. 희나리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몽해를 울린 음성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마니식을 치른 것도 아닌데, 주인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용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온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헤살만이 그나마 침착한 모양새였다. 그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화예교룡 여울. 마니 유리서란. 왕의 명으로 너희를 추포하러 왔다.”
“헤살.”
여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교룡들이야 그렇다 쳐도, 당신은 느꼈지 않나.”
헤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여울이 서란을 등 뒤에 둔 채 파도를 밟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주홍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본다.
헤살은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그가 신음처럼 말했다.
“천룡이, 대체 무엇이냐?”
여울은 답하지 않고 헤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드락의 보주였던, 희명옹주 유리희사의 여의주가 비쳐 내는 주홍빛.
자드락이 흘리듯 했던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것은 진심이었을까.
“의심해 본 적이 없느냐?”
입을 연 것은 서란이었다. 구름에서 내려선 그녀는 여울의 힘으로 바다 위에 서 있었다. 발아래에서 물결이 일렁였다.
여울을 제외한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서란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니식이라는 제도를.”
희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준 채 서란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내내 고생한 것은 저 마니를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나 온이 주로 상대한 것은 여울이지, 마니가 아니었다.
아예 안중에도 둔 적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야로가 말했듯 고집을 피우는 철없는 모습으로 막연히 상상했다.
막상 마주한 마니는 그녀의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용은 하늘로 승천한다. 그런데 그 하늘이, 남을 해치고 빼앗은 여의주로 용이 된 자를 받아 줄 것 같았더냐?”
서란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벼락처럼 그들을 후려쳤다. 교룡들이 얼어붙었다. 긴 침묵 끝에 온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
“그건, 헤살이, 용이 아니란 소린가?”
“말도 안 돼. 달아날 곳이 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희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했다. 헤살은 굳은 얼굴로 서란을 보고 있었다. 여울이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이제 달아날 필요 따윈 없다.”
그에게서 무형의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공간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흐른다. 목덜미가 섬뜩했다. 희나리와 온은 저도 모르게 무기를 들었다.
“내가 지금 너희를 공격하지 않는 건, 너희가 원해서 우리를 추격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주홍빛 홍채 안에서 세로로 긴 동공이 희나리와 온을 노려보았다. 여울이 경고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희나리가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착각하지 말라는 건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전에도 여울의 살기는 두려울 정도였으나 지금은 아예 다른 존재로 느껴졌다. 너무나 거대하여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생물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헤살에게서는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희나리는 망연히 물었다.
“대체, 천룡이 뭔데?”
“용이다.”
짧게 답한 여울이 잠시 말을 골랐다. 헤살에게 시선을 둔 채 덧붙였다.
“비정상적인 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의, 옳은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긴 정적이 흘렀다. 희나리와 온은 아연해졌다.
헤살이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채 웃음을 터트렸다. 희나리가 기가 막힌 듯 그를 돌아보았다. 여울과 서란은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었다.
웃음은 신음과 비슷한 소리로 바뀌어 갔다. 헤살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기묘한 낯이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헤살이 짓씹듯 내뱉었다.
“마니의 심장을 맨손으로 헤집어 여의주를 뽑아낼 때에. 그리고 그것을 삼켜 먹을 때. 이미, 그래. 나는, 깨달았다.”
적나라한 표현에 다들 움찔 굳었다. 헤살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럼, 난 무엇이냐?”
“……그대는 반룡이다.”
서란이 대답했다. 헤살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 눈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서란은 천천히 설명했다.
“천륜을 어기고 피를 묻힌 여의주로 용이 되었으므로, 하늘에 오를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반룡이라 불리느니라.”
“그동안 마니식을 치른 용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승천한 게 아니었나?”
온이 파랗게 질린 채 끼어들었다.
“뱀이 되어 추락했다.”
답한 것은 여울이었다. 이무기와 마찬가지로 용도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것은 사실이다. 교룡들이 저도 모르게 헤살을 돌아보았다.
헤살은 고개를 숙였다. 열린 하늘과 기적을 보았을 때 이미 깨달았던 일이다. 아니, 더 예전에, 마니식을 치를 때부터 알고 있었다. 외면했을 뿐.
그가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리석었군. 정말로.”
헤살은 미동도 않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여울은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눈을 떼지 않았다.
헤살이 문득 이를 악물더니 팔을 치켜들었다. 곧이어 그가 행한 동작은 너무나 의외여서 여울조차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제 배 속으로 손을 처박았다.
“뭐, 뭐, 뭐 하는 짓이야!”
희나리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서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온은 헤살에게로 달리다시피 다가갔다. 헤살이 손을 들어 그의 접근을 막았다. 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제 배 속을 헤집더니 무언가를 찾아 끄집어냈다.
여의주였다.
이 자리의 모두가 눈으로는 처음 보는 여의주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작았다.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 남짓한 구슬이었다. 은은한 주홍빛이 투명한 구슬 안에서 불꽃처럼 너울거렸다. 이무기들만이 맡을 수 있는 달짝지근한 향이 확 퍼져 나갔다.
온과 희나리의 눈에서 일순 초점이 나갔다. 지독하게 유혹적이었다. 의지가 흐려진다. 주춤 여의주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들에게 여울이 용언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라.]
과거, 서란이 이무기를 고르러 왔을 때 헤살이 쓴 것과 같은 용언이었다. 천둥처럼 뇌리를 흔드는 말에 희나리와 온이 겨우 이성을 되찾고 낯을 붉혔다.
헤살은 무표정하게 여의주를 내려다보았다. 배 속을 헤집어 놓았으니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텐데,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타고 피가 흐를 뿐이었다.
그는 여의주를 여울 쪽으로 집어던졌다. 여울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희명옹주의 심장에 있던 것. 쥐고 있자 박동하는 온기가 느껴졌다.
헤살은 피가 줄줄 흐르는 배의 상처를 한 손으로 틀어막고 기이하게 웃었다.
“이젠 필요 없다.”
헤살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의 눈에서 서서히 주홍빛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검은, 이무기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바탕 피를 토하고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온이 넋이 나간 채 물었다.
“지금, 무슨 짓을…… 뭘 하려는 겁니까, 헤살 선배?”
“나는 떠날 것이다.”
헤살은 휘청거리며 바다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배의 상처에서 넘쳐흐른 피가 파도에 휩쓸려 간다. 희나리가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어디로?”
“어디든.”
“무슨 소리야! 맹약은? 맹약을 어기겠다고?”
헤살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울이 띄워 둔 구체들이 발하는 빛에 묻혀 별이 흐렸다. 그는 흘리듯 대꾸했다.
“다시 뱀으로 되돌아가면, 그것도 좋겠지.”
“좋긴 뭐가 좋아! 미쳤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엔 바른 길로.”
그 말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바른 길로 다시 이무기가 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서란이 놀라 외쳤다.
“그대는 이무기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
“선왕이 죽고 나서, 선왕의 용으로부터 남은 여의주를 받아 천년호에 바치는 건 다음 왕이지. 내 보주 말이다. 그 과정을 나도 지켜봤다.”
헤살은 고개를 틀어 그녀 쪽을 보았다.
“보주께선 예락의 이무기들은 모두 여의주로 만들어졌다 하셨다. 허나 의문이 들었지. 우리 중에도 도를 닦아 스스로 태어난 자가 있는 건 아닐까. 만들어진 이무기와 스스로 태어난 이무기 사이에는 뭔가 차이가 있지 않나. 내 의문에 보주는 답해 주지 않으셨다.”
“……반룡과 천룡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더냐?”
헤살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핏방울이 맺힌 것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니까.”
배신감과 자괴감이 그의 뇌리를 적셨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 위에 남은 발자국은 파도에 덮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란이 망설이다 목소리를 높였다.
“만들어졌다 해서, 용이 될 수 없다거나 잘못된 이무기인 건 아니다!”
그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헤살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검푸른 어둠 속으로 그의 모습이 묻혀 사라져 갔다. 아무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희나리가 쫓으려는 것을 온이 가로막았다. 온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여울과 서란을 응시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서늘한 밤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여울은 서란이 살짝 어깨를 떠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교룡들에게 대꾸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