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6화 (56/70)

56. 천룡2016.09.11.

현음당과 안승호 내외와 서란, 여울은 사랑방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한사코 상석을 거부하는 그들 탓에 서란은 여울과 함께 나란히 상석에 앉았다.

현음당이 함을 꺼내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서란이 여울을 통해 보냈던 함이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현음당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서란이 함을 당겨 열었다.

면사 속에 파묻혀 있던 검은 뱀이 뚜껑이 열리자 파드득 몸을 세웠다. 그녀는 그가 전처럼 물려 들까 봐 움찔 놀랐다. 여울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뱀이 머리를 세운 채 서란을 주시했다. 긴 혀가 날름거렸다. 그러더니 느릿느릿 함 밖으로 기어 나왔다. 서란 쪽으로 다가와 또 한참을 지켜보았다.

뱀의 까만 눈은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뱀이 쉿 소리를 내더니 손바닥을 타고 올랐다. 손목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가 팔뚝을 휘감았다.

그 기이한 행태에 모든 사람이 굳어 있는 가운데, 여울만 움직였다. 그는 손을 뻗어 서란의 팔을 휘감은 뱀을 잡아챘다. 손 위에 뱀을 올린 채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굳어 있던 서란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여울?”

한동안 뱀을 들여다보던 여울이 그를 내려놓았다.

“전의 말을, 번복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겉만 이렇지, 속은 같지 않느냐 물으셨잖습니까.”

그때에 그는 그저 짐승이라 답했다. 용이 되고 나니 다른 것이 보였다.

여울이 내려놓은 뱀은 못마땅한 듯 똬리를 틀고 쉿쉿, 했다. 그러더니 다시 서란 쪽으로 기어왔다. 늘어뜨린 그녀의 손에 뱀이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볐다.

안승호가 허, 하고 기막힌 소리를 냈다. 여울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확언했다.

“세월이 흐르고 도를 닦는다면 다시 이무기가 될 것입니다.”

“자드락이?”

“예. 기억은 없겠으나…… 분명 그입니다.”

암담하던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자드락에게는 이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고 슬픈 기억일랑 모두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서란은 제 손에 머리를 비비다 다시 손등을 타고 오르는 자드락을 쳐다보았다. 뱀은 숫제 애교를 떠는 것처럼 보였다. 전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이었다.

“……전에는 물려 들더니, 왜 이러는 것이냐?”

“보주께서 마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말하는 마니의 의미가 내가 알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구나.”

“그러합니다.”

현음당과 안승호, 서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여울은 귓가를 만졌다. 천계에서 그를 향해 온갖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천룡으로 변했듯이 보주께선 마니로 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니란 제물도, 왕이 될 후계자도 아니라 본래의 뜻 그대로 용의 여의주를 일컫습니다.”

“내 심장에 있는 여의주 말이냐?”

“보주의 심장뿐만 아니라, 보주 자체가 제 여의주입니다. 저는 보주를 통해서 천룡의 힘을 씁니다. 따라서 만약 보주께서 죽는다면, 저 역시 힘을 잃습니다.”

태연히 말하고 있으나 그의 속눈썹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를 삼키던 순간은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서란의 숨결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을 간신히 참고서 말을 이었다.

“마니가 되셨으므로 보주께선 여의주의 힘을 일부 쓰실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제 힘을 끌어다 쓰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둘이 한 몸으로 천룡을 이룬다는 건 그런 뜻입니다.”

“무슨 힘을 말하느냐?”

“예를 들어, 짐승이 따른다거나.”

여울이 자드락을 가리켰다. 자드락은 그녀의 팔을 휘감고 손등에 머리를 얹고 있었다. 편안해 보였다. 긴 혀가 느리게 날름거렸다.

“상처가 쉽게 낫고, 더러운 물을 깨끗이 만드는 등입니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목에 닿아 부드럽게 풀렸다.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천룡은 마니가 인간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는 하계에서 함께하며, 마니가 수명을 다한 후에는 마니의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택이라니…….”

“마니가 선인이 되면 같이 천계에 들 수 있습니다. 마니가 인간이길 택하면 수명을 다한 마니의 여의주를 받아 보통의 흑룡이 됩니다. 함께 있지 않으면 천룡이 아닙니다. 이것이 천룡과 마니의 관계입니다.”

“용이 고작, 인간인 마니에게 좌우된단 말이냐?”

서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여울이 희미하게 웃었다.

“반대입니다. 마니가 없다면 천룡이 될 수도, 될 이유도 없으므로.”

“……될 이유가 없다고?”

“이무기는 원래 하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완성된 존재이므로 굳이 용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리 많음에도 신선이 되길 원하여 수행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

“그래도 신선이 되고 싶어 도를 닦는 이들이 있긴 있듯이, 본래 용은 이무기 중에 원하는 자가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를 닦아 승천하는 경지였습니다.”

“하지만 예락의 이무기들은 모두 용이 되길 꿈꾸지 않습니까?”

현음당이 끼어들었다. 여울이 냉정하게 답했다.

“여의주를 이용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무기들은 그러하다. 불완전하게 태어났기에 완전해지고자 그리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리의 모두는 중조의 역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울의 말에 단번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안승호가 물었다.

“허면, 화예교룡께선 본래 여의주로 만들어진 이무기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

여울은 오래도록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어딘가 잘못된 이무기인지 의심했다.

천계의 천룡들이 귓가에 떠들어 대는 지금, 그는 제가 어떻게 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대대로 마니가 교룡을 얻는 경우 대부분 그와 같은 자생한 이무기였다는 것까지.

여울은 느릿하게 덧붙였다.

“만들어졌다 해서 천룡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에 대한 욕망이 모든 것을 앞서는 그들이 ‘시험’을 통과하기는 어렵겠지.”

서란이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원래의 이무기들은 용이 되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말인데……. 어째서 왕족들과 맹약을 맺었느냐?”

“태조와 만난 마파람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절실했고, 우연히 알아냈지요. 천룡이 되는 방법을.”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승호에겐 딱딱한 어투로 대꾸하던 여울이 서란을 향할 때는 노골적으로 극진해졌다.

“도를 닦지 않고도 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마파람의 전례를 본 이무기들 중에 몇이 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지요. 그들은 유리하의 자녀들 중 마음에 맞는 자와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이 이무기와 왕족들 간 맹약의 시작입니다.”

“그런…….”

맹약의 주도권이나 선택권은 왕족에게 있었다. 이무기들이 여의주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원래는 반대로, 이무기들이 맹약을 주도했던 것이다. 관심이 있는 이무기들이 자신이 모실 왕족을 고르는 식으로.

여울이 잠시 침묵하다 이어 말했다.

“그리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에 도전한 이는 실패하여 반룡이 되었습니다. 시도하지 않고 그저 약속을 지켜 여의주를 얻은 자들은 흑룡이 되었지요. 그들은 용이 되는 순간 승천하며 하계의 기억을 전부 잊습니다. 천계에서 환생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가 용이 된 직후에 그녀에게 해 주던 이야기였다. 여울은 그때 하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천룡은 하계에서 이미 용이 되었으므로, 천계에 들어서도 기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용들과 천룡의 차이입니다.”

서란은 연달아 알게 된 사실에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그의 말을 되새기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승천할 자격이 있는 용이 천룡이라 하였지. 용은 본디 천계에 속한 존재이니, 특별히 구분지어 ‘승천할 자격이 있다’라고 부르는 건, 천룡이 하계에서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용이기 때문인 것이냐? 다른 용들은 이미 천계에 있기에 승천 과정 자체가 없고, 반룡은 승천이 불가능하니.”

“정확하십니다.”

“네 말대로, 마니가 아니라면 천룡이 될 수도, 천룡이 될 필요도 없는 게로구나.”

“예.”

여울이 나직하게 답했다. 현음당이 신음 비슷한 감탄을 흘렸다. 어째서 천룡과 마니의 관계에서 마니가 ‘주인’이 되는지 이해가 갔다. 서란이 관자놀이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조 이전의 왕족들이나 이무기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예. 천룡이 되는 조건이나, 그 시험의 방법, 실패하면 무슨 위험이 있는지, 승천한 용들이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시험’에 성공하는 기준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한 이는 천계에도 없었다. 그러나 대략적인 조건은 알려져 있었다.

그저 흥미로 시험에 도전했던 이무기가 보주를 잡아먹고 반룡이 되는 바람에 선대의 이무기들은 경악했다.

그 이후로 성공한 천룡들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도전하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몇몇 조건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아무나 도전했다가 희생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시도 자체가 어려웠다.

보주의 입장에선 목숨을 상대에게 맡기는 일이며, 교룡의 입장에선 반룡이 될 위험은 둘째 치고 보주를 제 손으로 죽이게 될 수도 있는 일이므로.

“천룡이 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기에?”

“선대들은 이무기 상태로 여의주의 힘을 끌어내 쓴 적이 있으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무기가 제 몸 밖에 있는 주인의 여의주를 쓰려면 깊은 관계가 필수이므로.”

“깊은 관계라니, 어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주인을 살리기 위해 액막이가 되는 것입니다.”

“액막이라니…… 설마.”

서란이 떠올린 것은 살을 맞았을 때의 일이었다. 여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자드락이 그때 하려다 말았던 말이 이제는 무엇인지 안다. 서란에게 붙어 있던 재액이 보통이라면, 살 맞은 직후에 즉사했을 수준이라고 했다.

자드락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울은 무심코 제 목덜미를 만졌다. 그는 제웅의 목이 떨어진 직후에 통증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기묘한 고양감도 느꼈었다.

여울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여의주의 힘을 빌려 살을 일부 막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그는 천룡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한, 용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진심으로 용이 되길 원해야만 천룡이 될 수 있습니다.”

단, 용이 되려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교룡에게 그런 마음을 품도록 하는 것은 보주의 역량이었다.

제 주인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서, 또는 스스로 완전하다 여기는 이무기면서도 인간인 보주보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어, 혹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 소중해서.

이유는 다양했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무기에게 소망이 움트게 만드는 것은, 보주였다.

그래서 이무기를 천룡으로 만든 마니 간에는 왕위 다툼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형제자매를 해칠 만한 인간은 애초에 마니가 될 수 없었다.

여울이 제 귓가를 가리켜 보였다.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단 하나의 천룡이라도 하계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대의 천룡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그들의 마니, 그러니까 예락의 전대 왕들과도 말입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200년이 넘도록 예락에는 천룡이 없었지. 오래도록 비틀린 채 있던 것은 그래서였구나.”

낮은 침음성이 방 안에 흘렀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음당이 입을 열었다.

“그 ‘시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울이 침묵했다. 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는 것을 보며 서란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대신 말을 꺼냈다.

“교룡이 보주를 삼켜 먹는 것입니다. 보주가 살아남으면 천룡이 되고, 죽으면 반룡이 된다 합니다.”

“예? 먹는다고요?”

현음당과 안승호가 입을 떡 벌렸다. 현음당은 저도 모르게 여울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것을 본 현음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킨다니. 삼켜서 살아남으면 성공이라니. 그게 시험인 줄도 알지 못했을 테니, 결국 서란은 죽을 생각으로 그리했다는 소리였다.

여울이 그런 명령을 순순히 따랐을 리 없다.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폭우가 내렸던 이유를 알 법했다. 현음당이 제자를 흘겨보았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서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변명할 것은 많으나 할 말은 못 되었다. 잘되었다 해도 그녀가 결국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는 건 확실했다. 여울에게 못할 짓을 했다.

그리 생각하던 서란은 아까 헤살이 왔다는 말에 놀라 묻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여울.”

“예.”

“아까 내게 하게 만들었던 선택은 정확히 무엇이냐? 선인의 길 말이다.”

여울이 움찔했다. 그가 미묘하게 서란의 시선을 피했다. 현음당 내외는 의아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여울은 갑자기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

“……마파람 선배는 예상외로…… 활기찬 분인 듯합니다.”

“응?”

여울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예락의 선조이자 반쯤 신으로 추앙되는, 최초의 천룡 마파람이 지금 그의 귀에 대고 소리치고 있다고는.

게다가 그 내용이란 게, 이런 식이었다.

「너넨 좀 닥쳐 봐! 어린 것들이, 어디서 어르신 말하는데! 장유유서 몰라? 야, 너. 서란이 걔가 내 핏줄인 거 알지? 걔가 어떤 앤지 알아? 개판이던 집구석을 바로잡아 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리하가 노심초사 걔 지켜보느라 얼마나, 응?」

「…….」

「그런데 정신없는 틈에 몰아붙여서 애를 홀랑 꾀어 놓으니 좋냐? 좋아? 계약서도 안 보여 주고 도장부터 찍은 격이야, 너 이 자식아. 그것도 도장 뺏어서! 나도 좀 막나가긴 했다만 그래도 리하한테 선인이 어떤 건지, 천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준 다음에 했다고!」

「…….」

「아, 리하, 잠깐만요. 이놈 이거 안 그런 척하면서 손 빠른 놈이라서. 지금 경고해 놔야 되겠습니다. 야, 이 도둑놈 자식아!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당장 빌지 못해?」

여울이 귀를 막은 채 침묵하자 현음당이 물었다.

“지금 천계와 대화 중이신 겁니까?”

“아마 그런 듯합니다.”

여울이 답하지 않아 서란이 대신 답했다.

천계라니. 전설로나 전해지던 것이 지금 눈앞에 있다. 신화의 한 자락을 엿본 기분이었다. 현음당 내외의 감탄은 깊어 갔다.

“과연…….”

그와 별개로 여울은 이 시끄러운 것을 막아 버릴 방법이 없나 고심했다.

마파람을 필두로 한 천룡들은 다른 건 잘만 가르쳐 주면서 천계의 연락을 끊는 방법은 안 가르쳐 주고 있었다. 200년간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끼어들 수 있게 되었다며 반쯤 축제 분위기인 판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나마 차분한 성정인 천룡 하나가 여울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여울은 그 말들에서 조언을 얻어 간신히 천계의 접촉을 차단했다. 조용해지자 훨씬 나았다. 나중에 열면 두 배로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다.

그는 비로소 서란의 의문에 답할 수 있었다.

“천룡의 마니가 된 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몸이 됩니다. 몸 자체가 여의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인의 길과, 인간의 길 말이냐?”

“예. 원래 보주께 주어졌던 수명이 끝날 때까지는 그저 인간의 삶을 누리시면 됩니다. 오늘 이후로 늙지 않으며 병들지 않으시겠지만 수명은 있습니다.”

늙거나 병들지 않는다니,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신선이 아닌가. 현음당과 안승호는 경악했지만 여울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수명이 다하면 인간으로 죽어 내세의 길을 걷거나, 완전한 선인이 되어 저와 함께 천계에 들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신선으로 천계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 되면 하계에 관여하거나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너와 함께?”

“예.”

그녀에게 담담히 답한 여울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망설이다 작게 말했다.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습니다. 저는 당신과 더 오래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청혼이라 한 게로구나.”

서란이 빙긋 웃으며 한 말에 여울이 벌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천계에 가서 영원히 함께 살자고 청해 놓고, 설명 없이 대답부터 하라 윽박지른 건 맞는 말이었다. 마파람이 길길이 날뛰는 것에 항변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필요할 때 외에는 천계의 소통을 끊어 두기로 결심했다.

젊은 연인의 모습을 내심 흐뭇하게 보고 있던 현음당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이제 어찌 하실 겝니까?”

서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현음당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확고하게 말했다.

“대안이 되셨으니, 바로잡으셔야지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마마가 아니고선 누구도 할 수 없을 겁니다.”

현음당의 말에 곁에서 안승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조의 재림이라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서란은 옆의 여울을 보았다. 여울은 흐트러졌던 표정을 가다듬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주께서 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 제가 받들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여울은 생각에 잠긴 서란의 모습을 눈으로 더듬었다. 아마 시험이 무엇인지 알아냈어도 그는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제 손으로 죽일 수도 있는데 어찌 시도하겠는가. 서란이 명령으로 강제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터다.

그를 용으로 만들어 낸 것도, 그가 용이 된 이유도 그녀였다. 그는 그녀의 용이었다. 여울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절실히 바라던 바였으니까.

서란은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맞잡았다. 졸고 있던 자드락이 그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 쉿, 소리를 냈다.

그녀는 검은 뱀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드락이 그녀를 올려다본다.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태평하게 드러눕는다.

입 안에 쓴 맛이 돌았다. 마니식이라는 비틀린 제도가 만들어 낸 희생자. 자드락 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200년이다. 이 거짓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과 피를 흘렸을까.

잘못된 것을 알았으며, 고칠 방법을 안다. 그렇다면.

“왕이 되겠습니다.”

서란이 말했다. 짧은 말이었으나 무거웠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숨을 골랐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바로잡겠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며, 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망상에 지나지 않았던 꿈들을 현실로 이루어 낼 때였다. 그리고 그건 홀로는 해낼 수 없었다.

서란은 방 안의 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스승 내외와 그녀의 용.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유폐되어 있는 오라비를 떠올렸다. 절망을 앞두고도 그녀를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그녀가 머리를 숙였다. 진심을 담아 청했다.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바였다. 현음당 내외가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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