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5화 (55/70)

55. 역전2016.09.08.

서란은 자신을 안은 여울의 체온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무기의 몸인지라 언제나 서늘하던 그였는데. 그것이 낯설어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 바르작거렸다. 눈앞에 살랑거리는 은발도 영 낯설었다.

그녀가 밀어내자 약간 떨어진 여울이 불만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도 낯설었다.

“……여울이 맞는 게지?”

그녀의 물음에 여울은 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발끝까지 닿다 못해 땅에 닿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성가시다는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손날로 쳐 내자 단번에 그 긴 머리타래가 잘렸다. 서란이 흠칫 놀랐다.

여울이 머리뭉치를 둘둘 감아 들더니 버릴까 말까 망설였다. 아무래도 용의 갈기인지라 함부로 버릴 순 없었다. 그는 그것을 대충 챙겨 넣은 뒤,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닌 것 같습니까?”

“무언가…… 외모 말고도, 말하는 것이.”

서란은 얼이 빠져 있었다. 여울이 문득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하늘을 응시하더니 다시 서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용의 종류를 알고 계십니까?”

“천룡과 반룡 말이냐?”

그녀는 현음당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여울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다는 듯 끄덕였다.

“저는 당신을 마니로 만들면서 천룡이 되었습니다. 천룡은 하늘에 속한 존재이므로, 각성하는 순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시끄럽군요.”

“시끄럽다니?”

“천계에 있는 다른 천룡들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 옵니다.”

서란이 입을 약간 벌렸다. 천룡들이, 머릿속으로 말을 건다고? 당황스러웠다. 여울은 다시 귓가를 만졌다. 시끄럽다는 게 사실인지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제가 근 200년만의 천룡이라 합니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천룡이 된 것이냐?”

“보주께서 저를 천룡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울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귓가로 쏟아지고 있는 말들을 정리했다.

“맹약을 지켜 여의주를 받은 용은 흑룡이 됩니다. 이런 용은 승천하여 하계의 일을 모두 잊고 천계의 주민이 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교룡들을 말하는 거냐?”

“예. 그리고 주인을 살해하여 여의주를 탐하거나 남의 여의주를 빼앗은 이무기는 반룡이 됩니다. 이들은 승천하려 하면 벌을 받아 뱀으로 타락합니다. 그리고 천룡은.”

그가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위치를 가리켰다.

“여의주를 삼켰음에도 그 생명을 빼앗지 않고 용으로 변화한 자들입니다.”

“……설마, 왕의 자격을 증명하는 시험이라는 게.”

“교룡이 보주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여울이 담담히 답했다. 서란은 아찔해지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의주와 이무기가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하게 이어져 서로를 위한다면 살아남습니다. 성공하면 보주는 용의 여의주인 마니로 변화하고, 교룡은 천룡이 됩니다.”

“만약 실패하면?”

“실패한다면 보주는 사망하며, 교룡은 주인을 죽이고 여의주를 얻었으니 반룡이 됩니다.”

잔혹한 시험이었다. 단순하지만 실패할 때의 결과가 치명적인. 그녀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알고 있더라도…… 시도하기 쉽지 않은 방법이었구나. 그래, 나만이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닐 텐데도 왜 200년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그 시험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알겠다.”

말을 잇던 서란이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물으려는 찰나, 여울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살이 오고 있습니다.”

서란의 낯이 창백해졌다. 여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저번에 감지했을 때는 신음을 흘렸었으나, 이제는 긴장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찌 할까요?”

“응?”

“보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뭘 말이냐?”

“헤살과 교룡들의 처우 말입니다.”

답하는 여울의 눈매가 서늘했다. 그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서란은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내가 결정하면,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뜻이냐?”

“예.”

“헤살 역시 용이 아니더냐?”

서란은 불과 몇 시진 전에 재앙으로 변한 바다를 보았다. 용의 힘이 무엇인지 그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여울의 꼴도 보았다.

그녀는 아직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시선이 그의 오른쪽 귀에 가 닿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귀가 보였다. 그러나 피딱지가 엉겨 있었던 상처가 기억에 선명했다.

여울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반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무기일 뿐입니다. 물이건, 날씨건 그의 모든 권한은 제 아래에 있으니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차이가 나는 것이냐, 천룡과 반룡이?”

“천룡과 반룡의 차이라기보다는, 용과 반룡의 차이입니다.”

막힘없이 설명한 그가 손짓을 했다. 서란은 느끼지 못했으나 그 손짓에 허공을 가르며 결계가 생성되었다.

“일단 그들 근처에 결계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어찌 할지 천천히 결정한 후에 제게 말씀하십시오.”

결계라는 말에 좋은 추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움찔 놀라자 여울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결계로 그들을 그 안에 가두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게 가능했느냐?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이제 가능해졌습니다.”

이전과는 너무 달라진 상황에 아무래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애써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하는 사이, 여울이 언덕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옵니다.”

“사람?”

“현음당의 손자로군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나타났다.

민열은 말을 몰아 언덕을 올라왔다. 한쪽에 세워진 마차와 그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발견한 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년은 말에서 뛰어내리고도 한참을 헉헉거렸다. 겨우 고개를 든 그는 하얗게 변한 머리와 주홍색 눈을 한 여울을 보고 움찔 놀랐다.

“요, 용이 되신 겁니까?”

여울은 말없이 끄덕였다. 민열이 입을 헤 벌렸다. 선망과 경의가 그 눈에 어렸다. 소년이 멍하니 여울을 보고만 있자 서란이 말을 꺼냈다.

“스승님께서 너를 보내셨느냐?”

“시, 실례했습니다. 그러합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바다에 이변이 일어서.”

정신을 차린 민열이 횡설수설했다. 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쏟아 냈다.

“저도 들었습니다. 천룡 여울이 보주께 인사 올린다는, 말. 어찌된 일인지 조모께서 무척 알고 싶어 하십니다. 돌아오시지요.”

“허나…….”

서란이 망설였다. 여울이 그녀의 손을 당겨 잡았다.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며 그가 물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헤살이…….”

“결계에 가두어 놓았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허락하기 전에는 그들 중 누구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주께선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울은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 차분했다. 그러면서 얽힌 손이나 그녀를 보는 시선은 애틋해서 민열은 저도 모르게 낯을 붉혔다. 보고 있기가 묘하게 민망했다.

헛기침을 한 소년이 다시 말했다.

“저희 집으로 다시 가시지요. 조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년의 채근에 결국 서란과 여울은 마차에 올랐다. 민열이 말을 몰고 앞장섰다. 마차는 언덕을 내려가 몽해로 돌아갔다.

바다와 하늘에 펼쳐진 기적을 보느라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마부석에 앉은 여울에게 따라붙었다.

여울은 삿갓을 쓰지 않았다. 갈빛 피부는 보통 사미국인으로 취급되지만, 조금 전에 바다에서 용으로 변한 이무기를 본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 같지 않은 흰 머리칼이나 왕족의 특징이라는 주홍색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지나치는 마차를 응시했다. 마차가 현음당의 집에 들어가고 대문이 굳게 닫히자 그제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봤어?”

“용이겠지?”

“아까 그거, 마파람 전설에 말이야…….”

그들은 조금 전에 보았던 기적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설이 이 자리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현음당은 초조하게 마당을 오갔다. 안승호는 심각한 얼굴로 아들인 안명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마차와 민열이 들어오자 현음당이 달려 나왔다. 그녀는 여울을 보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맙소사.”

나이가 많은 만큼 다양한 경험을 했다 자부하는 현음당이지만 오늘의 일은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확연히 변한 여울의 모습을 보자 방금 보고 들은 기적이 사실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여울은 마차의 문을 열고 서란이 내리도록 도왔다. 붕대가 사라지고 깨끗해진 그녀의 목을 보자 현음당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제가 살아생전 태조의 재림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듣기에 과한 말이었다. 서란은 반사적으로 농을 던지듯 대꾸했다.

“제게 대안이 되어 달라 하신 분이 약한 말씀을 하십니다.”

“해내시리라 꿈꾸면서도, 정작 믿지는 못했나 봅니다.”

현음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천룡과 그 주인을 뵙습니다.”

서란은 놀라 다가가 스승을 일으키려 했다.

“스승님!”

“당연한 예우입니다, 마마.”

현음당의 뒤편으로 안승호와 안명, 함께 왔던 안민열까지 일가 모두가 절을 했다. 서란은 그 광경에 아연해졌다.

“이러지 마십시오, 스승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저 홀로 해낸 것도 아니고 제가 대단하여 이룬 일도 아닙니다. 저도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실감이 안 나는걸요.”

그녀는 난감하게 말하며 현음당을 억지로 일으켰다. 비틀비틀 일어난 노인이 서란과 그 뒤에 시립한 여울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주름진 눈에 물기가 어렸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참으로.”

중얼거리던 현음당은 결국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은 그저 순수한 걱정이었다. 제자가 살아 돌아왔음에 터져 나온 안도. 어느새 다가온 안승호가 현음당을 안고 달래 주었다.

스승의 눈물을 보자 서란은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붕 떠 있는 것 같던 감각이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꿈이 아니다.

그녀는 여울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그의 모습이되 변한 머리칼과 눈이 그가 용이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천룡.

막막한 나락에서 전부를 내던지고 한 선택이, 모든 절망을 부수는 희망이 되어 나타났다.

새카만 심연 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것은 삽시간에 사방을 채우며 눈부시게 개화했다. 광채가 뻗어 가며 어둠이 걷히고 늪이 맑아진다. 미로의 가운데에 길이 열렸다.

그녀의 앞에 있는 그는, 그런 의미였다. 그녀의 용.

“여울.”

“예, 보주.”

서란은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뺨을 그녀의 손이 감쌌다. 그가 그 손길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다시 뜬다.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는 주홍빛 눈동자.

정말로 그가 용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 없이 그가 용이 되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마니식은 없을 것이다. 없도록 만들 수 있다. 그녀는 현음당이 꿈꾸던 대안이 되었다.

서란은 콱 치받아 오르는 감정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고 여닫다가, 간신히 말했다.

“이제, 나는, 살아도 되는 것이냐?”

오랜 체념이 벗겨지고 있었다. 닿지 않던 희망이 손 안에 쥐어졌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퍼져 나간다.

여울은 그녀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것이 황홀했다. 그녀에게 미래를 줄 수 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율이 인다. 그는 온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예.”

여울이 제 뺨에 닿은 그녀의 손을 겹쳐 쥐었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가 미소했다.

“제 마니(摩尼)가 되신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11년 전의 서란이 제 앞에 나선 여울에게 했던 말에 대한 화답이었다. 고인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서란은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여울은 그녀를 당겨 안으며 눈물을 제 품으로 받아 냈다. 지금 그의 가슴팍을 적시는 눈물은 절망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행복했다.

*

헤살이 움직인 것은 하늘이 닫힌 후였다. 서광이 사라지고 바다가 평소대로 돌아오며, 무지개까지 흐려진 후에야 헤살이 교룡들을 돌아보았다.

“……가자.”

“여울에게?”

희나리가 되묻는 말에 헤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람을 일으켰다. 온과 희나리를 데리고 언덕 쪽으로 날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멈췄다.

교룡들은 왜 멈췄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들도 감지했으니까.

“결계……. 여울이 친 것이겠군요.”

온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몽해의 절반 정도를 감싼 결계는 그들을 완전히 가두고 있었다.

헤살은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그의 등 뒤로 희나리와 온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헤살이 팔을 늘어뜨렸다.

“부술 수, 없다. 내려가지.”

“못 부순다고? 같은 용인데?”

희나리가 초조하게 물었다. 헤살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같은 용? 네 눈에는 그리 보이나?”

“…….”

희나리는 입을 다물었다. 헤살은 용이 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했었다. 그러니 여울이 용이 된다 해도 접근하여 여의주를 빼앗을 수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정작 여울이 용이 되는 것을 보면서, 헤살은 다가갈 수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방금 보았던 기적은 헤살이 말했던 용이 되는 과정과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여울이 거두기 전까지 벗어날 방법은 없다. 내려가서, 기다리지.”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우위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여울이다. 헤살은 아래로 그들을 이끌었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내내 망설이고 있던 온이 입을 열었다.

“헤살 선배. 선배가 겪었던 용이 되는 과정은 어땠습니까?”

그 물음에 헤살은 아득한 과거를 회상했다.

마니식이 치러지는 곳은 태조의 능이다. 흑룡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능 앞의 광장에서 마니가 하늘에 제를 올린다. 그 후에 높은 담으로 둘러쳐진 전각으로 마니가 들어온다.

세자의 교룡은 처음부터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교룡이 보는 앞에서 집행인들이 마니를 죽이고 그 가슴을 연다.

여의주에는 아무나 손을 댈 수 없기에, 그 속에 손을 넣어 여의주를 꺼내는 것은 교룡이 직접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삼켜 먹으면 용이 된다. 그 후에 밖으로 나가 광장에 모여 있는 백성들에게 용의 모습을 보이면 끝난다.

1년의 도망 끝에 잡혀 온 마니 희명옹주는 그다지 반항하지 않았었다. 다만, 줄곧 울었다.

그녀는 제례를 위한 짙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어 있었다. 그러고도 흘릴 눈물이 남아 전각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시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이 뚝뚝 떨어졌다.

살아 숨 쉬던 여자가 시체가 되어 제단에 눕혀지고, 헤살은 그 심장을 파헤쳤다. 손에 닿는 피가 델 듯 뜨거웠던 것을 기억한다.

새빨간 피로 물든 여의주를 끄집어내 들여다보았을 때.

지독하게 달콤한 향과, 당장이라도 그것을 삼키고 싶은 욕망 속에서 헤살은 일순 서늘한 회의가 들었다. 제 손을 타고 흐르는 무고한 피와 죽은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정말 이런 방법으로 용이 될 수 있는가?’

손에 쥔 여의주는 주홍빛으로 빛났다. 강렬한 유혹이 느껴졌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헤살은 그 유혹에 굴복하여 결국 그것을 삼켰다.

온몸이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살이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에 그대로 쓰러져 사지를 비틀었다. 그리고 용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여의주를 원해 왔다. 의심 없이 용을 꿈꿨다. 그러나 마침내 용이 된 순간에 헤살이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이게…… 정말로 용인가?’

이무기 때와 다른 능력이 생기고, 강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공허했다. 왜 용에 그리도 집착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가시 같은 죄책감뿐.

그래서 승천할 날만을 기다렸다. 맹약을 다 지키고, 보주가 죽고 나서 승천하면 뭔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본능의 경고를 외면했다. 아닐 거라 애써 부정했다.

헤살은 조금 전, 그가 닿을 수 없는 열린 하늘 아래에서, 몽해 전체에 울려 퍼졌던 음성을 떠올렸다.

외면했던 그 경고가 면전에 들이밀렸다. 천룡이라는 존재로.

그 장엄한 광경이야말로 진정 용의 탄생에 어울렸다. 헤살이 겪었던 무고한 피로 뒤덮인 고통스럽고 허무한 마니식이 아니라.

“그건, 부정한 과정이었다.”

“……예?”

긴 침묵 끝에 튀어나온 헤살의 대답에 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헤살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여의주에서 문득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는 멍하니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마니 희명옹주의 피가 아직도 손에 묻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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