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4화 (54/70)

54. 운증(雲蒸)2016.09.04.

건평 21년 10월 21일.

하늘이 열렸다.

쏟아지던 비가 일순 멈추더니 도로 하늘로 치솟았다. 바다가 침묵했다. 파도가 모두 가라앉으며 수면이 유리처럼 고요해졌다. 비가 완전히 멎었다.

어느 순간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확 밀려났다. 갈라진 하늘 틈으로 서광(瑞光)이 비쳤다.

그 빛이 바다에 잠긴 이무기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무기의 전신을 적시고 내려간 빛이 바다에 닿는 순간 물 위로도 파문이 퍼져 나갔다.

파문이 지나쳐 간 곳에서 물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섭리를 역류한다.

바람이 일었다. 바닷물이 바람에 휩쓸려 구름까지 이어지며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거렸다.

용오름이었다. 사방에서 용오름이 솟구쳐 하늘과 바다를 이었다. 퍼져 나갔던 파문은 해일이 되어 거대하게 몸을 일으켰다.

“저, 저게 무슨…….”

“해일이다!”

몽해의 주민들은 끔찍한 높이로 덮쳐 오는 해일을 보았다.

“산 위로!”

“엄마아…….”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던 사람들 중 몇이 이상한 광경을 보고 멈췄다. 산더미만 한 파도가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짐승들은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마당의 닭이 주저앉아 머리를 숙였다. 말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개가 바닥에 엎드렸다. 새들이 치맛자락처럼 날개를 펼치고 부리를 내렸다.

짐승들이, 경배했다.

사람들은 그 광경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알아차렸다. 일어선 해일이 쏟아지지 않았다. 해일은 부풀어 올라 터질 듯한 모양새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바다가 벽이 되어 서 있었다. 그 끝에서 하얀 포말이 장식처럼 흘러내렸다. 그 너머로는 용오름이 솟구쳐 하늘에 닿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창처럼 바다에 꽂힌다. 짐승들은 한 방향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저건…….”

“저, 저게 뭐야.”

하나 둘 도망을 멈춘 사람들이 짐승들이 보는 방향을 응시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희나리가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온이 넋을 놓고 담 너머의 한 곳을 보고 있었다. 헤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 하늘이 왜 이래? 바다는 또 왜……? 헤살이 한 거야?”

그녀의 물음에 헤살이 신음처럼 대꾸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 뭐야?”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건 아직 아무도 없었다. 온이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가, 가까이 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헤살이 고개를 저었다.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희나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어쩐지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헤살은 설명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았으나, 그것을 납득할 수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용이 태어나고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고 있다.’

해일 너머에 검은 선처럼 꼿꼿이 선 이무기가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황금 같은 빛이 그 몸에 어렸다.

어느 순간 낮고 긴 울음소리가 부드럽게 터져 나왔다. 소라의 껍데기로 만든 나각을 부는 것 같기도 했고, 느리게 우는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이무기의 몸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 사이로 하얀 빛이 새었다. 서기(瑞氣)가 사방에 구름처럼 드리웠다.

이무기는 껍질을 벗었다. 조각난 검은 몸뚱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 속에서 하얀 광휘를 휘감고 용이 머리를 들었다. 검은 비늘의 흑룡이 이무기의 껍질을 깨며 일어났다.

하늘의 빛이 그 머리에 닿자 두 개의 하얀 뿔이 돋아났다. 이어 백색 갈기가 머리끝에서부터 꼬리 끝까지 돋아났다.

용의 몸에서 흐르는 흰 빛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금빛이 어우러져 소용돌이쳤다. 노을 같은 주홍빛이 함께 어우러졌다. 바다 위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듯했다.

흰 뿔과 하얀 갈기를 갖추자 용이 눈을 떴다. 금빛이 도는 주홍색의 눈동자는 투명하리만큼 맑았다.

용은 서기에 휩싸여 떠올랐다. 남아 있던 이무기의 껍질들이 바다 속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깨끗해진 몸을 감싼 검은 비늘은 보석처럼 광택이 돌았다.

바다는 호수처럼 변해 파도 한 자락도 없었다. 용오름이 사방을 에워싸고 해일은 일어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신을 맞이하여 예를 취하는 종들처럼.

구름들이 물러나며 맑아진 하늘에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전설이나 신화에 나올 법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용이…… 저렇게 용이 되는 거였어? 고통스럽다며?”

희나리가 중얼거렸다. 헤살은 망연히 그 기적을 응시했다. 눈을 돌리고 싶었으나 돌릴 수 없었다. 굳어 있던 온이 입을 열었다.

“헤살 선배. 저희가 보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헤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공중에 뜬 채 용이 몸을 비틀더니 입을 벌렸다. 그 입에서 여의주를 토해 냈다. 커다란 주홍빛 구체는 눈부신 광휘를 두르고 있었다.

허공에 떠올라 있는 그 여의주를 용이 감싸며 똬리를 틀었다.

용의 몸에 흐르던 빛은 여의주로 옮겨 가며 잦아들었다.

용오름들이 차츰 가라앉았다. 솟구쳐 벽을 이뤘던 해일도 고요히 내려앉았다.

잔잔한 바다와 쌍무지개가 뜬 구름 없는 하늘 사이에서 용은 여의주를 지키듯 감쌌다.

여의주의 빛이 천천히 작아지며 스며들었다. 주위를 맴돌던 구름 같은 서기가 몰려들어 그것을 받쳤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곳에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그 몸을 타고 흐르던 빛이 일순 빨려들 듯 몸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느리게 흩날렸다.

용이 다시 울었다. 길고 아름답고 슬픈 울음이었다. 눈을 감은 여인의 주위를 한 바퀴 돈 용이 그녀 가까이에 머리를 댔다.

서란은 눈을 떴다.

“윽…….”

어질어질하던 시야가 갑자기 뚜렷해졌다. 그녀는 구름 위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킨다. 아래의 구름은 금가루가 묻은 솜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닿는 감촉이 느껴지질 않아.’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꿈?’

그녀는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명한 하늘과 펼쳐진 대해가 보인다. 무지개와 서광이 뒤섞인 하늘은 비현실적이었다.

고개를 트는 순간, 용과 눈이 마주쳤다.

사슴과 비슷한 하얀 뿔은 상아처럼 매끄러웠다. 턱 주위를 감싸고 흘러내려 꼬리 끝까지 닿는 갈기 역시 백색이었다. 그에 비해 온몸을 감싼 비늘은 까맣다.

그녀의 키만 한 눈동자는 주홍빛이었다. 그 홍채 안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묘한 노란빛이 돈다.

용은 안개처럼 희미한 서기를 몸에 휘감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웅장했다. 그것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한다.

거대한 폭포나 휘몰아치는 태풍을 마주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어.’

압도된다.

용의 몸에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차츰 작아지더니 그녀의 앞에 몰려들었다. 빛이 물처럼 흘러내리며 사람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백색 갈기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말려 공중에 떠돌았다. 빛이 사그라들면서 그것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짙은 갈색의 피부와 걸치고 있는 검은 무복은 익숙하되 그 은발은 그녀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여울이 눈을 떴다.

그 눈은 그녀와 똑같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허공을 걸어 서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굽히고 이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백색 머리카락이 휘장처럼 드리웠다.

극진한 배례(拜禮).

무릎 꿇은 용의 위로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천룡 여울이, 보주께 인사 올립니다.”

나직하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닿은 다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경배하던 짐승들과 몽해의 주민들에게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주민들 사이에 서 있던 현음당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온과 희나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드, 드, 들었어?”

“천룡이 뭡니까?”

희나리의 말을 무시하고 온이 헤살에게 캐물었다. 헤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말을 잊은 것처럼 열려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너머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헤살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자신은 그 하늘 너머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서란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앞에 은발의 여울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마지막 명령을 했다. 그녀를 먹으라고 했고, 분명히 그가 그녀를 삼켰다. 삼켜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여울?”

그를 부르던 그녀는 흠칫 놀랐다. 거슬리던 목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서란은 제 목을 더듬었다. 헐겁게 매여 있던 붕대가 그 손길에 풀려 떨어졌다.

목은 언제 베였느냐는 듯이 깨끗이 나아 있었다. 더듬던 손목에 있던 베인 상처도, 가슴께에 찔렸던 흔적도, 다친 적 없다는 듯 깨끗하기만 했다.

그녀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란에게 다가와 금방이라도 안을 듯이 손을 들어올리다가 멈췄다.

용으로 변화하며 매끈해진 손등이 보였다. 이제 그의 손등에는 과거의 흉터가 없었다. 잘려 나갔던 귀도 멀쩡했다. 서란의 눈이 정신없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여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말했다.

“보주께선, 제 마니가 되셨습니다.”

“무슨…….”

서란은 여전히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여울이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의 용이며, 당신은 저의 여의주입니다. 이로써 한 몸을 이루어 천룡이 되므로, 하늘이 정한 바대로 묻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던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토해 내듯 물었다.

“저와 생사를 함께하는 선인(仙人)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삶을 유지하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보주께서 선인의 길을 택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깐만, 여울. 나는 지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기이한 모습을 그려 내던 하늘은 차츰 정상적인 푸름을 되찾고 있었다. 여울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귓가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의 눈앞에서 흘러내린 은발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는 보주께 청혼하고 있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란은 얼이 빠졌다. 이 상황에 저 말이 왜? 목덜미가 붉어진다.

그리 속삭이고 나서 여울은 물러나 태연히 섰다. 그녀가 항변하듯 되물었다.

“선인의 길이니, 인간의 길이니 알지도 못할 말을 해 놓고,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하늘이 열려 있는 사이에 선택하셔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때에, 순리를 따라 환생하실지, 아니면 선인이 되어 저와 함께 천계에 드실지를 결정하십시오.”

“그러니까, 도대체…….”

혼란이 가시질 않아 서란이 어물거렸다. 쌍무지개가 흐려지고 비추던 서광이 잦아들고 있었다.

여울이 그것을 보더니 다시 성큼 다가왔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저는 이제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주께선 거짓말로 저를 밀어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금빛이 도는 주홍색 홍채 속에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용의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그런데도, 저를 또 거부하실 겁니까?”

여울이 물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거칠었다.

짙은 피부와 대비되는 은발이나 변한 눈이나 둘 다 그녀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적응이 안 된다. 다른 사람 같았다.

서란이 당황해 굳어 있자 그가 재차 물었다.

“제가 좋다고 하셨잖습니까.”

숫제 윽박지르는 듯한 물음이었다. 서란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여울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그가 유혹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답하십시오. 선인의 길을 택하겠다고.”

“저기, 여울, 일단, 설명을…….”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하십시오. 마니 유리서란이 선인의 길을 걷겠나이다, 라고.”

무지개도 서광도 거의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여울이 급히 재촉했다. 서란은 초조해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머뭇거리다가 그의 말을 따라 읊었다.

“……마니 유리서란이 선인의 길을 걷겠나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남은 서광의 끝자락이 그녀에게 닿아 스며들었다. 따뜻한 물에 감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은발 너머로 보이던 하늘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늘 너머로 어른거리던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서광도 사라졌다. 그러자 갑자기 발아래가 쑥 꺼졌다. 모여 그녀를 받치고 있던 구름 같은 서기까지 흩어져 사라진 탓이다.

추락감이 느껴지는 순간,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고 당겨 안았다. 그는 약간 과할 정도의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깊은 안도가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잘하셨습니다.”

“내가 뭘 한 것이냐? 너는, 어떻게…… 용이 된 것이냐? 나는 왜…… 상처는…….”

“잠시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그가 그녀를 안은 채 공중을 걸어 벼랑으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계단처럼 밟는 모습을 보고 서란은 작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무언가 참는 듯이 사나웠다.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디로 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땅에 닿자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울은 성가실 정도로 길어져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을 한 보람도 없이 울컥 치솟은 감정이 가슴을 새카맣게 태웠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약속해 주십시오, 보주.”

“무얼?”

“다시는 그런 명령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저를 올려다보는 서란을 보며 여울은 잠깐 호흡을 멈췄다. 결과적으로 잘되었다 해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잃는 줄 알았다. 제가 정말 그녀를 먹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녀를 씹어 삼켜, 녹여 버릴까 봐, 얼마나. 얼마나.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끔찍하고, 끔찍해서, 도려내고 싶은 기억. 전신을 채운 무력감. 달아날 수 없는 절망의 밑바닥에 도달해 바닥을 긁었다.

그녀를 삼킨 순간부터 그의 뇌리에 하늘의 빛이 닿기까지의 몇 초. 그 찰나는 그의 평생에서 가장 긴 악몽이었다.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아찔하게 깜박였다. 그는 이마를 짚고 숨을 골랐다. 손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삼키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서란은 급격히 안색이 나빠진 그를 찬찬히 살폈다. 아직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은실처럼 흘러내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그의 눈동자를 눈에 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용의 모습을 상기한다.

“여울, 네가 천룡이 된 것이냐?”

“예. 당신을 제 마니로 삼아 천룡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약속부터 해 주십시오.”

“설명부터 해 다오.”

“싫습니다.”

그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서란은 당황하여 그를 보다가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제 목덜미를 더듬어 보았다. 말할 때나 움직일 때 거슬림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새 통증에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그것을 본 여울이 대번에 안색을 바꿨다. 얼굴 가득 공포가 퍼져 나갔다.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목을 확인했다.

흉 하나 없이 깨끗해진 흰 피부를 보고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녀의 어깨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그것을 보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답이 없는 상황이었음을 서로가 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달랐다. 그녀도 그런 명령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말이다.

“……알았다. 다시는 그런 명을 하지 않으마.”

서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쯤 풀린 그 얼굴을 보며 서란은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고 여울은 그녀가 생략한 뒷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다시는 보주께 그런 절망을 겪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보주께서도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진 마십시오.”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그의 손이 절박하고 간절했다. 그녀와 같은 색이 된 눈동자가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서란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시울이 붉었다.

“감사…… 합니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덧그렸다. 깊게 숨을 내쉬고,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겨우 안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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