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3화 (53/70)

53. 세 번째 명령(3)2016.09.01.

교룡들과 용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여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아득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컥.”

입 밖으로 피가 한 바가지 쏟아졌다. 그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간신히 서란을 내려놓고, 모래사장에 몇 차례 피를 토해 냈다. 선혈이 벌겋게 모래에 스며들었다.

서란의 명령을 거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연달아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시야가 제멋대로 일그러지며 피부를 따라 비늘이 두두둑 돋아났다.

아득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 몸뚱이가 무너져 흩어지는 듯한 느낌. 잘린 귀에서 느껴지는 통증까지. 머리가 고통으로 곤죽이 된 것 같았다.

그는 흐린 눈으로 서란을 찾았다. 모래 위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눈으로 좇아 그녀의 가슴께에 이르렀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가 들이민 검으로 베인 상처. 그는 이미 터져 있는 제 입술을 재차 깨물었다.

비늘이 돋아나고 있는 손으로 기다시피 움직여 그녀의 상처에 입을 댔다. 묻은 피를 몇 방울 삼켰다. 달콤한 여의주의 향이 입 안에 확 퍼져 나갔다. 그리고 머리가 약간 맑아졌다.

“큭…….”

너무 적었다. 살갗만 베인 상처인데다, 옷자락에 대부분이 스며든 후라 흐른 피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반동을 가라앉히려면 그녀의 피가 더 필요했다.

여울은 흐린 눈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서란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 상처를 내겠다고? 그럴 수 있을 리가.

헤살이 정말로 물러난 게 아니라는 것은 그도 짐작하고 있다. 하늘을 뒤덮은 결계도 인식할 수 있다. 헤살은 그저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한 것일 터였다.

그녀의 피를 먹고 버텨 보았자, 찰나의 유예일 뿐이다. 그는 그녀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잃을 것이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지킬 수 없다.’

그는 고통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피와 모래가 묻고 비늘이 돋아난 손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 그녀의 뺨이 더러워졌다. 여울은 흠칫 놀라 손을 떼었다. 눈물이 고였다가 툭 떨어졌다. 그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검은 그림자가 퍼져 나간다. 지나친 고통과 부상, 반동이 얽혀 엉망이 된 몸이 버티기 위해 저절로 본체로 돌아갔다. 모래사장에 길게 드러누운 검은 이무기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여울은 그 상태로 두어 번 더 피를 토했다. 모래 위를 이무기의 거체가 스르륵 움직였다. 서란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었다. 주인을 감싸듯 웅크린 이무기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해서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망가질 때까지 거짓을 말하겠다. 제 목숨을 이용해 그녀를 구할 수 있다면 스스로 자해라도 하겠다.

그러나 그의 목숨에는 그런 가치조차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살릴 수 있는데.

‘왜, 세 번째 명령을 그리 정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자신이 여의주고 그녀가 이무기였다면, 여울 역시 자신을 먹으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이해했다.

이해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자드락이 죽었다. 뱀이 되었다는 건 이무기로서의 자드락은 죽었다는 뜻이다. 산은 유폐되었고, 헤살이 나섰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용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렇게 명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무력해서. 숨통을 조여 오는 절망 속에서 그녀를 구할 능력이 없어서.

이무기는 울었다. 고통으로는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으면서 절망으로 인해 울었다. 눈물은 피와 섞여 모래를 적셨다.

*

서란의 기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정신을 차렸다. 퍼뜩 뜨인 눈에 보인 하늘은 아직 푸른 낮이었다. 목이 뻐근했다.

“여울……?”

그를 부르며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가슴께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피부에 난 상처가 보였다. 의아하게 그것을 내려다보는데 투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 주위에 빙 둘러진 검고 매끄러운 것은 이무기의 몸체였다. 이무기의 머리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귀 부위에 있던 돌기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서는 대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무기의 입가는 피범벅이었다. 입 주위의 모래밭은 이미 떨어져 굳은 피와, 토해 내 아직 굳지 않은 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가 들은 소리는 뭉쳐진 핏방울이 그 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그녀는, 그 이무기가 여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울!”

그녀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이무기의 흐릿하게 뜨여 있는 눈이 깜박였다.

“무슨, 무슨 일이…… 왜…….”

서란은 횡설수설 중얼거리다가 겨우 자신이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를 생각해 냈다. 여울이 직접 그녀를 기절시켰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살도, 교룡들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그저 젖은 모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바다다.

가슴께를 다시 보았다. 검으로 베인 듯한 상처는 심장 바로 위에 있었다. 그녀의 심장에는 여의주가 있다. 엉망이 된 여울의 상태까지 보자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물러나지 않으면 내 여의주를 꺼내겠다고 거짓말을 했던 게냐?”

서란이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약간 다른 내용이었지만 여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러느라 이 꼴이 되었느냐? 그럼 내 피라도 내서 마시지, 이, 미련한…….”

왈칵 눈물이 났다.

자드락이 했던 말이었다. 서란은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그의 검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여울이 급히 머리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이. 서란은 망설이지 않았다. 소매로 칼날에 묻은 모래를 대강 털고 손목을 베었다.

“윽.”

제대로 검을 다뤄 본 적 없는 그녀는 힘을 조절하는 법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쩍 갈라진 상처는 꽤 깊었다. 피가 흘러넘쳤다. 그녀는 홧홧한 통증을 무시하고 그 팔을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마셔라. 얼른.”

여울이 낮게 울었다. 낑낑대는 것 같은 소리. 이미 흘러넘치는 피는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팔을 휘감았다.

서란은 조금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제 팔을 핥고 있는 그의 입가를 토닥였다.

“괜찮으냐?”

한동안 피를 마시던 여울이 머리를 뒤로 물렸다. 그의 몸이 떨리더니 작게 줄어들었다. 인간의 태로 돌아온 그가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리 깊게 상처를 내시면 어찌합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서란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울.”

“붕대가…… 마차에 있겠군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것으로라도 일단.”

“여울, 너.”

여울이 제 옷자락을 찢어 그녀의 손목을 압박했다. 서란은 창백하게 질린 채 중얼거리듯 물었다.

“너, 귀가 왜 그리 되었느냐?”

그녀의 손목을 옷자락으로 매던 여울의 동작이 멈칫 굳었다. 그의 얼굴은 말라붙은 피딱지가 엉겨 처참한 상태였다.

오른쪽 귀가 보이지 않았다.

“……별일 아닙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서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제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을 밀쳐 냈다. 그의 어깨를 짚고 발돋움을 하여 귓가를 들여다보았다.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없다. 그의 한쪽 귀가 사라졌다. 잘린 상처가 끔찍했다. 그녀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어, 어쩌다 이리…… 대체…….”

“참을 만합니다.”

“너는!”

그녀는 화를 내려다 말았다. 이무기의 모습일 때는 잘 파악되지 않았던 그의 상태가 차츰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서부터 목덜미까지 뒤덮은 피와, 사라진 귀와, 몇 번이나 토혈을 한 듯한 앞섶과, 깨물어 터진 입술, 그리고 충혈된 눈까지.

처참했다.

가슴께가 망치로 두드리는 것같이 아팠다. 어지러웠다. 이런,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속이 새카맣게 그슬리는 것과 별개로 표정은 냉정해졌다.

“헤살은 어찌 된 것이냐?”

“제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물러나지 않으면 여의주를 부수겠다고 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계를 쳐 놓고 물러났습니다.”

서란은 파악이 빨랐다. 여울이 극단적으로 굴자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헤살이 잠시 물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계를 쳤다는 건 그들을 놔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고.

“귀는 왜?”

여울이 머뭇거렸다. 서란은 무표정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답했다.

“헤살의 용언에 저항하기 위해 고통이 필요했습니다.”

“고통이 필요했다고? 네 손으로, 잘랐단 말이냐?”

“예.”

“대체, 너는…… 다른 방법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없었겠지. 여울은 바보가 아니다. 목을 타고 들어오는 숨이 칼날같이 가슴을 저민다.

그녀는 헐떡이며 눈가를 소매로 눌렀다. 자제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솟구친 것이 달구어진 눈물이 되어 흘렀다.

헤살이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끔찍하고 붉은 상상이 그대로 눈앞에 있다.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여울은 초조하게 그녀의 손목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압박을 하다 말아서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 소매를 벌겋게 물들였다.

“보주, 일단 손목을. 마차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이깟 상처가 중하더냐?”

“중합니다.”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주춤 물러서며 다시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저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저 꼴이 되었다. 흔들리던 마음과 흔적처럼 남았던 미련마저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그녀는 눈물을 그쳤다.

“여울.”

“예.”

“본체로 돌아가 보렴.”

여울은 그녀가 마차로 가려는 것이라 이해했다. 뛰어가려면 빙 돌아서 가야 하니, 본체로 그녀를 태우고 바다를 통하는 편이 빠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모래사장에 늘어진 이무기의 꼬리 끝은 바다에 닿아 있었다. 파도가 들락거리며 꼬리를 적셨다.

까마득한 곳에 있던 머리가 그녀에게로 내려온다. 잘린 상처, 엉킨 피. 그게 다시 눈을 찌른다.

서란은 그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손이었다. 여울은 양순한 짐승처럼 그 아래에 제 머리를 대고 비볐다. 올라타라는 듯 눈을 감았다.

“여울, 나는.”

서란은 기어오르는 대신 제 몸보다도 한참 큰 그 머리에 몸을 기댔다. 가만히 쓰다듬었다. 파도가 이는 소리 사이로 맥박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박동.

“네가 살아 주었으면 한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여울이 번쩍 눈을 떴다. 서란이 제 머리만 한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목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피가 그의 비늘을 적셨다.

“네가, 내가 태어나 살았던 이유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세상에 남기는 것이 너였으면 좋겠다.”

여울의 전신이 떨렸다. 그가 진저리치며 물러나는 바람에 서란이 밀려났다. 그녀는 모래사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니 다시 명하마. 나를 먹으렴.”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서란은 최선을 다해 웃었다.

모래에 피까지, 엉망인 몰골이지만 그래도 그에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 미련 따위는 한 점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

“나는 네 안에서 네 여의주가 되어 살아갈 테니, 괜찮단다.”

서란이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의 머리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여울이 물러섰다. 그녀가 자꾸 다가가자 그는 계속 물러나다 결국 바다에 잠겨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이무기가 저보다 한참  조그만 여인의 형상에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보였다.

여울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 반쯤 잠긴 채 머리만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흘러 떨어졌다. 그 눈물은 바닷물에 섞여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고개를 저었다. 비늘이 부르르 떨렸다. 목을 타고 또다시 핏물이 올라왔다. 약속한 명령을 계속 거부하려 들자 속이 뒤집혔다.

서란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여울이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다 해도, 영원히 잠들지 않을 수는 없다. 그가 한계에 이르면 헤살이 나타날 것이다.

아니면 생각이 바뀐 헤살이 바로 찾아올 수도 있다. 여울을 죽이고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정하면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용은 짐승을 다스린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을 용이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하늘에는 배회하는 새들이 있었다.

헤살에게 그들의 모든 것이 좌우된다. 그녀는 그가 용과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가 어찌 될지 이미 보았다.

‘더 늦기 전에, 너를 용으로 만들 것이다.’

그녀는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미소를 지웠다. 단정하게 서서, 무표정하게 그를 본다. 서늘한 위엄이 그 얼굴에 드리웠다.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금 명령했다.

“화예교룡 여울. 네게 보주로서 명령한다.”

자해를 하거나, 그에게 자신을 죽이고 심장을 파내라고 할까도 고민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앞에 그녀의 시체가 남는다. 그래서 이 방법을 선택했다.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 시체를 남기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 그녀가 남기는 건 여울로 족하다. 그의 것이 되고 싶었다. 그의 여의주가 되고 싶다.

“나를 먹어라.”

이무기가 울부짖었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서란은 양 팔을 벌렸다.

“이것이 내 세 번째 명령이다. 지금 당장, 행해라.”

말갛던 하늘에 시커멓게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날뛰는 감정 때문에 이무기의 힘이 통제되지 않았다.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음처럼 비가 내렸다.

서란은 빗속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요하게 그를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로 바뀐 비가 그녀의 온몸을 흠뻑 적셨다. 머리카락이 흰 얼굴에 달라붙었다.

턱을 타고 떨어진 빗물이 옷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고였다. 젖어 안이 비치는 옷자락 사이로 여울이 남긴 불그레한 흔적이 얼핏 보였다.

어제 안았던 저 몸을, 제 반려를, 제 주인을, 그녀를, 삼켜 먹으라고.

여울은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를 보았다.

‘차라리 제 목을 조르라 하십시오. 저에게 함께 죽어 달라 명하십시오. 어찌 이리 잔인하십니까.’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절규가 속을 달군다. 혀에 피 맛이 돈다.

서란은 그가 내뱉지 못한 절규를 알아들은 것처럼 답했다.

“잔인하더냐? 말했지 않느냐, 나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고. 그래서 너를 끌어들였고, 바다에 오길 소망했으며, 너를 연모했다. 그것들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저, 너에게는…….”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빗물이 눈물처럼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미안하구나.”

또, 사과. 그녀는 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는데. 그 사과를 들으며, 여울은 깨달았다.

이것은 벌이다.

그녀를 버려두었던 벌이며, 그의 무능에 대한 벌이다. 그가 미향의 부탁을 핑계로 살의를 토해 놓았던 일에 대한 뒤늦은 천벌일지도 모른다. 여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푸르던 풍경이 빗속에서 잿빛으로 가라앉는다.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 가녀린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입술이 추위로 푸르러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여울.”

애틋하게 녹아드는 부름이었다. 여울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석상처럼 굳은 이무기에게서 비에 섞인 눈물이 바다로 떨어진다.

서란은 심호흡을 했다. 다시, 의지를 다진다.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픔이 무섭지 않다면 그도 거짓말이다. 그저 그 모든 것을 감내할 각오가 되었을 뿐이다.

또다시 생각을 한다. 사방이 막힌 미로 속에서 길은 이것뿐이다.

‘모두가 무사할 방법. 그를, 살릴 방법.’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살겠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마지막 남았던 미련의 부스러기가 빗물을 타고 떠내려간다.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비는 시릴 듯 차가운데도 기묘하게 체온이 올랐다.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유난히 선연했다. 그 눈에 희미하게 빛이 감돈다.

“내 마지막 명령이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었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알 수 없는 힘을 담아, 그녀는 재차 명령했다.

“먹어라.”

그 목소리는 기이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듣는 순간 감정이 범람하던 여울의 뇌리가 깨끗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하얗게 빈 머릿속에 절대적인 명제처럼 새겨졌다. 그 명령이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유혹적이었다.

콧속으로 달큼한 향이 숨이 막힐 정도로 밀려들었다.

여의주의 향? 날 리가 없는 향이다. 어젯밤에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그의 향만 짙었다. 그런데 어째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홍수처럼 모든 것이 휩쓸려 가고 딱 하나의 사실만이 남았다.

‘보주가 명했다.’

여울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명령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그녀가 그의 주인임을 부정하고, 그가 교룡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명령을 따르는 것. 그녀를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그녀의 교룡임을 인정하는 것.

전신이 떨렸다. 여울은 그녀의 것이었으며, 서란은 그의 것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보주임을, 그가 그녀의 교룡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거부할 수 없다.’

본능이 두 번째를 택했다.

따르고 싶지 않은 명임에도 그것을 수긍한다. 그녀의 의지를 그의 소망 위에 둔다. 그녀가 그의 주인이다.

그렇게 선택하자마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의 몸을 지배했다. 그것은 여의주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무기가 입을 벌렸다. 서란은 눈을 감았다.

먹구름이 하늘에서 휘몰아쳤다. 햇빛이 가리어 사라졌다. 비가 사방을 잠식한다. 바다는 새카맣게 출렁였다.

교룡이 제 보주를, 삼켰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