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51화 (51/70)

51. 세 번째 명령(1)2016.08.25.

여울은 정신없이 마차를 몰았다. 조금 전 들은 소식을 다시 곱씹은 건 마차가 몽해를 완전히 벗어난 후였다.

해안을 따라 달리던 마차는 몽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멈췄다. 바다가 바로 옆에서 출렁이는 낭떠러지였다.

여울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에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는 마차의 문을 열며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는 것이…… 보주!”

서란은 보료 위에 앉은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양손에 부서진 비늘을 반씩 쥐고 있었다.

여울은 그 광택 없는 비늘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드락이 주었던, 축지가 걸려 있는 비늘.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검고 가느다란 뱀이 머리를 세운 채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갑작스레 낯선 곳에 떨어진 뱀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여울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문을 쥐고 굳었다. 그가 반응한 것은 검은 뱀이 쉿, 소리를 내며 서란에게 덤벼드는 것을 본 직후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뱀의 머리를 잡아채어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서 뱀이 몸부림치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서란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주, 죽었…….”

“기절시켰습니다.”

서란의 손에서 부서진 비늘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여울은 한 손에 쥔 작은 뱀을 응시했다. 머리가 멍했다. 바윗돌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리 다오.”

서란이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말했다. 여울이 그 말을 알아듣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았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겨우 그녀의 말을 이해한 여울이 늘어진 뱀을 내밀었다.

서란은 품을 뒤져 꺼낸 것으로 뱀을 감싸 받았다. 자드락이 받지 않았던, 그의 보주 것인 면사였다. 부드러운 너울에 기절한 검은 뱀이 파묻혔다.

서란은 손 위에 그것을 올려두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건…… 자드락입니까.”

여울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서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냥, 겉만 이리 된 것이지? 속은 그대로겠지?”

그 간절함에 긍정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울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뱀은 영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고할 능력도, 기억도 없다. 이무기가 될 때 뱀일 적의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힘겹게 답했다.

“뱀은, 짐승일 뿐입니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그녀의 어깨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아찔한 정적이 마차 안을 배회했다. 서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을 만한 것이 있느냐.”

여전히 안색은 시체 같았으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녀의 물음에 여울은 그릇을 담아 두던 함 하나를 엎었다. 그가 내민 함 안에 그녀가 면사로 감싼 뱀을 넣었다. 그리고 함을 닫았다.

“스승님께 돌아가서 이것을 맡기고 오너라.”

여울이 함을 받아 들며 고개를 들었다. 서란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 뱀을 천년호에…… 보내 주셨으면 한다고, 부탁드려 보아라. 만약 무리라 하시면 그냥, 다른 깨끗한 호수에라도.”

그는 함을 움켜쥐었다.

자드락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정하고 싶던 것을 확신한다. 자드락은 스스로 제 삶을 끝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울은 서란에게 묵례하고 물러나 마차 주위에 간단한 진을 그렸다. 그러곤 함을 들고 몽해로 돌아갔다.

서란은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자마자 마차의 문을 닫았다. 뒤집어엎은 짐들 때문에 내부는 엉망이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단도였다.

한 손으로 칼집을 쥐고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쥐었다. 단도는 소리 없이 날을 드러냈다. 잘 갈린 칼날은 예리했다. 그것은 창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을 받아 그녀를 유혹하듯 반짝였다.

반들반들한 면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서란은 칼날에 비친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익숙한 미소를 얼굴에 덮었다.

흉했다.

‘자드락은 시작에 불과하다.’

헤살이 나섰다. 산이 유폐되었다. 현음당은 가족이 있다. 여울은 그녀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터다. 그녀가 살고자 하면 그들은 반겨 줄 것이나, 그로 인해 다치게 될 것이다.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희생되는 것들이 늘어나겠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반대로 그녀 또한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자드락은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소서촌에서 계속 살았을 것이다. 가사를 읊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셔 가면서, 그래도 살았을 거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든 아니든, 근본적인 원인은 그녀였다.

산은 궐을 나서서 제 삶을 찾았다. 왕족의 이름을 버리고 류산으로서 탄탄한 기반을 쌓았다.

그는 그녀만 아니었다면 제 발로 나왔던 궐에 돌아가 버렸던 왕족의 이름을 억지로 되찾을 필요가 없었다. 위험을 감수할 일도 없었다. 유폐될 일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현음당은 서란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스승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현음당이 그녀의 여사가 되지 않았다면. 안승호는 여전히 대사간이었을 것이고, 현음당은 예경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논하며 살았으리라.

‘그리고 여울. 그는.’

그를 그녀에게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답서를 보내지 않았었는데. 결국은 이토록 깊어져 버렸다.

‘내가 궐을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이리 되지는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이 그녀의 이기심 때문에.

‘수배령이 내렸을 때 포기했으면 되었을 텐데! 기어이 바다를 보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폭발할 듯 솟는 감정들을 억지로 눌렀다. 자신은 멍청했다. 말로는 겁을 내어 놓고, 실제로 자드락의 최후를 보고서야 실감했다.

그녀가 살려 하면 무엇이 희생될지를 온전히 깨달았다. 한갓 바다를 보겠다는 소망이 무슨 일을 일으켰는지를 되돌아보았다.

이성을 끌어내어 현재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헤살이 나섰다는 것은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뜻한다. 용은 그런 존재다.

‘남은 여유는 얼마나 될까.’

여울은 그녀를 헤살에게 내주려 하지 않을 터다. 그가 용과 싸운다면.

끔찍하고 붉은 상상이 뇌리를 잠식한다.

서란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가 잡힌다면 여울은 소서촌에 유배될 것이다. 자드락이 미쳐 가던 그 동굴 속에 홀로 남아. 그 역시 자드락처럼 스스로 최후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자드락의 결말이 여울의 결말처럼 보였다. 아찔했다. 그것만은. 그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끝은 용납하지 않겠다.’

달아날 수도, 맞설 수도, 항복할 수도 없다. 남는 선택지는 단 하나. 오랜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돋아났던 삶의 미련을 외면했다. 자신은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허무하게 죽어서도 안 된다.

그를 살리려면.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므로 반룡이 되진 않을 거다. 맹약에 따라 제 보주의 여의주로 용이 되는 것이니까. 자세한 건 알지 못해도 정당한 방법이므로 승천하는 건 가능하리라.

승천한 용은 하계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 그는 하늘에 올라, 완전한 자유를 얻겠지.

마니가 사라지면 세자가 바뀌거나, 다른 마니를 뽑게 될 터다. 어찌 되든 기존의 질서는 뒤흔들린다. 산이나 현음당이라면 그 혼란 속에서 무사할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상황보다는 낫다.’

그들만을 생각한다면 마니식을 치르는 게 제일 안전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여울이 위험하다. 자드락을 생각했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그를 그리 만들진 않겠다.

‘결국 돌고 돌아도, 답은 하나구나.’

파르스름한 날 위에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치고 있던 얼굴이 이지러진다. 서란은 화들짝 놀라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눌러 삼켰다.

숨을 고르고 다시 날에 얼굴을 비춘다. 몇 번 연습을 한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단도를 역수(逆手)로 쥐어 보았다.

다시 생각했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남은 것은 방법. 무엇이 나은가.

‘어떤 방법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보주.”

그 순간에 마차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란이 빛에 눈을 찡그렸다.

그녀를 본 여울의 목소리가 갈피없이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갈색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비틀었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단도가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울이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급히 온 건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호흡이 거칠었다.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연습한 보람이 있어, 그린 듯이 고운 미소였다.

“무척 빨리 왔구나. 어찌 되었느냐?”

“방금 무슨 짓을 하려 하신 겁니까!”

여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팠지만 서란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어깨너머, 마차 밖으로 새파란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의 색이 예뻤다.

“나를 바다로 데려가 다오. 그게 두 번째 명령이었지.”

“답해 주십시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첫 번째 명령도, 두 번째 명령도 완벽하게 해내 주었구나. 고맙다.”

“보주.”

“이제 세 번째 명령을 내리마.”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방법을 선택했다. 어떻게, 죽을지를.

그녀는 태연히 웃고 있었다. 그래서 여울은 두려워졌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명령이 무섭다. 공포가 야금야금 차올라 목을 죄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의 품 안에 있었다. 같은 마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려 하는 명령을 빼고는.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떨리지 않도록.

“이것은 맹약 이전부터 너와 나 사이에 맺었던 약속이니, 너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제발, 보주.”

여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선득한 것이 가슴을 조금씩 저며 왔다.

서란은 여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감싸며 명령했다.

“나를 먹고, 용이 되어라.”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 고막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부정하고 싶다. 믿을 수 없다.

예감했던 일이나 그것을 직접 귀로 듣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도, 다른 일이었다.

여울이 가느다랗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나를 먹으렴. 그리고 용이 되어서, 하계의 일 따윈 잊어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려무나.”

“싫습니다!”

여울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가 서란의 손을 쳐냈다.

“보주, 제발, 다른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뭐든 하겠으니, 그것만은. 진창을 굴러도 좋으니 그것만은.

서란은 흔들림 없이 웃고 있었다. 여울은 절박하게 물었다. 그가 그녀를 붙잡으려 던졌던 청을 꺼내 보았다.

“반려가 되어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검은 눈이 무너져 내린다.

무너지는 교룡을 보며 그녀의 마음도 무너지고 있었다.

인간이라 다행이다. 이무기였다면 거짓말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을 말했다.

“나는 네 반려가 될 생각이 없었단다. 대답한 적, 없지 않느냐?”

흔들림 없는 거부. 여울은 이를 악물었다. 10년 전이었다면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어젯밤을 생각했다. 후회하느냐는 말에 나왔던 부정과, 그를 당겨 안던 팔을. 저것은 그녀의 진심이 아니다. 그를 밀어내려 하는 말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서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또렷한 발음으로 반복했다.

“나는, 나를 먹으라 했다, 여울.”

“당신을 먹으라니, 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번복하지 않겠다. 이것이 내 세 번째 명령이니.”

“따를 수 없습니다!”

여울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그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진탕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기려 하자 반동이 오는 것이다.

서란은 그의 정확한 상태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금세 알아차렸다.

“여울? 왜 그러느냐?”

여울은 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핏물을 애써 삼켰다. 그는 몸이 보내는 경고를 외면하고 말을 쏟아 냈다.

“보주와…… 맹약 이전부터 했던 약속이나, 저는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어기겠습니다. 복종할 수 없습니다. 못합니다! 그 명령만은, 들을, 수가.”

“너, 지금…….”

그의 말이 더듬더듬 끊어졌다. 서란이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그의 목덜미를 타고 돋아나는 비늘이 보였다.

그녀는 기겁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목의 부상 탓에 통증이 일었지만 무시했다.

“네 목에, 비늘이……!”

여울이 손으로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손끝에 매끄러운 비늘이 닿았다. 그가 기묘하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처럼.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그럼, 이대로 죽겠습니다.”

서슴없이 튀어나온 말에 서란이 얼어붙었다. 얼굴이 희게 질리더니 눈꺼풀이 떨린다.

“그런 짓은 허락할 수 없다!”

“저는……!”

무어라 항변하려던 여울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마차 밖, 아득한 하늘을 보았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하던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용…….”

신음처럼 튀어나온 말을 서란도 들었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들어찬다.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헤살이 오고 있느냐?”

너무 이르다. 어찌 벌써 여기까지. 빨리, 그에게, 명령을. 그런데 그가 거부하면. 어떻게?

그녀가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여울은 본능으로 움직였다. 그녀를 둘러업고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여울?”

그는 대답 없이 마부석 쪽으로 가서 말을 풀어내려 했다. 마차보다는 말이 빠르니까. 그러다 떠오른 사실에 손이 멈칫했다.

용은 짐승을 지배할 수 있다. 말은 짐승이다.

여울은 고삐를 내팽개쳤다. 그는 찰나 고민했다.

제 거대한 존재감을 숨길 생각조차 없이, 용이 하늘을 날아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빨라도 하늘을 날아오는 용보다 빨리 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숨는 것은?

모든 사람을 피해 다닐지라도 모든 짐승의 눈까지 피해 다닐 수는 없다.

그럼 남은 방법은?

여울은 알고 있었다. 방법 따위는,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보주, 머리 쪽에 돌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꽉 붙잡으십시오.”

“무슨 소리냐?”

여울이 서란을 내려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에게서 검은 그림자가 확, 하고 일었다.

거대한 뱀과 닮은 이무기가 절벽 위에 솟아났다. 늘어진 꼬리 끝은 바다에 닿았다. 흑요석 같은 검은 비늘이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무기의 몸은 바다와 하늘 사이에 먹으로 그어진 선처럼 보였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컸다. 강대하고 순수한 생물. 처음으로 보는 이무기의 본체. 혼란에 빠진 와중임에도 서란은 일순 감탄했다.

‘아름답구나.’

꽃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을 볼 때 느끼는 경이. 다가오는 태풍을 볼 때, 내리치는 벼락을 볼 때, 아득한 지평선을 볼 때, 벅차오르는 감정.

이무기의 아름다움은 그런 종류였다.

까마득한 위에 있던 이무기의 머리가 아래로 향했다. 서란의 바로 앞까지 늘어뜨려진 머리에서 커다란 눈이 깜박였다.

눈 위쪽, 보통 생물이라면 귀가 있을 법한 부위에 돌기가 돋아 있었다.

‘뿔? 뿔은 아니겠지. 그건 용에게만 있으니…….’

서란은 그제야 그가 한 말을 이해했다.

‘저것을 잡고 올라타란 뜻이었구나.’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울이 잘하고 있다는 듯 바짝 머리를 숙인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서란이 그의 머리 위로 기어올라 한쪽 돌기에 매달렸다. 손끝에 닿는 비늘의 감촉은 서늘하고 매끄러웠다.

그녀가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낀 여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부드럽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대한 이무기의 몸은 흘러내리는 비단처럼 바다 위로 쏟아졌다.

물을 타고 이무기가 헤엄치기 시작한다. 물살이 갈라지며 파도가 인다. 엄청난 속도였다. 손을 놓았다간 그대로 튕겨 나갈 것 같았다. 서란은 돌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 채 옆을 보았다.

푸른 바다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수평선에 닿은 바다는 하늘로 색이 번져 들었다. 이무기의 검은 몸체에 부딪친 파도에서 하얀 포말이 진주처럼 흩뿌려졌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설렜을지도 모른다. 그 풍경을 보면서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늪을 느꼈다.

용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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