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밤의 끝2016.08.21.
서란은 부끄러워 감고 있던 눈을 떠 보았다. 등불 빛이 어스름하게 드리운 방 안. 검고 커다란 여울이 그녀의 위에 있었다. 그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 품 안에 있으니 모든 현실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열린 창 너머로 반달이 얼핏 보였다. 검푸른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 그 하늘은 좀 전에 보았던 바다를 연상시켰다. 어둠과 바다와 별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쉰 것처럼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가 말하며 내뱉은 숨이 귓바퀴를 따라 고인다.
“아무것도.”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닿는 손길 하나하나가 애틋했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불길이 지펴졌다. 차갑던 그의 체온은 그녀의 체온을 받아 열기를 띠었다.
그의 손끝에 만져지는 그녀의 피부가 달았다. 부드럽고 여려서, 그가 욕심을 부렸다간 부서질 것 같았다.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머리는 그리 생각하는데 몸뚱이는 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탐한 곳마다 붉은 자욱이 꽃잎처럼 남았다.
서란이 발끝을 오므렸다. 야릇한 감각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차근차근 몸을 적셔서 코끝까지 찡해진다.
여울은 붕대 위로 길게 입을 맞췄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상처까지 집어삼켜 버리고 싶었다. 그가 흐트러진 붕대 사이로 드러난 흉을 핥았다.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여울은 그 움츠린 어깨의 선을 따라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드러난 피부를 가볍게 깨물었다.
놀라 비틀리는 하얀 몸의 움직임이 그의 눈에 와 박혔다. 숨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일순 강해졌던 그의 악력이, 제풀에 놀란 듯이 풀어졌다.
억눌린 숨 같은 것이 그의 잇새로 새었다. 금방이라도 날뛰려는 짐승의 목줄을 틀어쥐듯, 그가 제 몸에서 힘을 뺐다. 무서울 정도로 달아오른 욕망이 그녀에게 부어질 때는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섬세했다.
서란은 어둠 속을 더듬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겁이 나느냐?”
“……예?”
“내가 부서질까 봐?”
그녀가 낮게 웃었다. 여울은 홀린 듯이 그 웃음을 보았다. 그가 물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두렵단다. 겪어 보지 않은 일인데 두렵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서란이 팔을 뻗었다. 그의 어깨에 닿은 흰 손가락이 갈색 피부를 따라 미끄러진다. 단단한 선을 훑으며 내려가 그의 허리를 스쳐 넘어갔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등을 안았다. 그 감촉에 여울이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그래도 그만큼, 설레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내주고 싶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참지 말렴.”
여울이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그가 그녀의 머리 옆에 팔을 괸 채, 자신의 품에 갇힌 그녀를 내려다본다. 한없이 연약하고 한없이 강한 그의 주인. 자신의 보주.
손길이 짙어졌다. 젖은 향이 났다. 혈관을 타고 생소한 것이 흐른다. 그녀에게서 저도 모르게 앓는 듯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여울이 일순 굳었다가, 그 음성을 삼키려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가빠진 그녀의 호흡 위로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아.”
그가 제 안의 욕망을 틀어쥐고 있던 목줄을 놓았다.
깊이 파고든다. 생각이 조각조각 흩어져 간다. 하얗게 빈 곳으로 열기가 치솟았다. 고통과 전율이 혼재된 감각에 이끌려 아찔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득한 추락감. 그 나락의 끝에서 열망이 여물었다.
*
먼저 눈을 뜬 것은 서란이었다. 아직 사방은 어두웠다. 호롱불이 깜박깜박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으.”
온몸이 녹진하게 녹아내려 사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약간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서란은 눈을 몇 번 비볐다.
맑아진 시야에 보인 것은, 그의 팔. 여울이 등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의 한쪽 팔이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귓가에 가늘고 고른 여울의 숨소리가 들렸다. 맞닿은 맨살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녀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제 피부 곳곳에 그가 남겨 둔 자국이 보였다. 그게 꽤나 야릇해 보여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낯을 약간 붉혔다.
서란은 침상에 주저앉은 채 여울을 들여다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 잠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리 무방비한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괜히 내리감긴 그 긴 속눈썹을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반듯한 콧대를 따라 손가락을 내려, 그의 입술을 덧그려 보았다.
‘내 교룡. 나의 이무기. 내…… 반려.’
정작 그에겐 제대로 답해 주지 않아 놓고선 속으로는 그리 불렀다. 깊이 잠든 그는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만지는데도 깨지 않았다.
서란은 여울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안다. 궐을 나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그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가 움직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눈을 뜨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다니. 그게 마음에 들었다. 뿌듯하고, 애틋하고, 그리고 사랑스러워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흘러내려 있던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 서란은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밤의 어둠 끄트머리부터 빛이 슬금슬금 번져 간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영원히 이렇게, 그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아.”
서란은 흠칫 놀랐다. 무의식적으로 삶을 꿈꿨다. 그녀는 제 안에 미련이 돋아난 것을 깨달았다.
현음당이 남겼던 말이 뇌리에 차올랐다. 서란은 착실히 숙제를 하던 어릴 때처럼,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
깜박 잠들었던 여울은 지레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서란이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버려서, 품에 안고 지켜보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허락했으니 이제 제 목숨을 버리는 명령은 하지 않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되어 졸았던 모양이었다.
품은 비어 있었다. 간담이 서늘했다. 소스라쳐 고개를 들자 다행히 그녀가 보였다.
서란은 창 쪽을 보며 앉아 있었다.
창호지를 통해 스며든 새벽의 어스름한 빛이 그녀 위에 안개처럼 드리워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물처럼 흘러내려 발치에 고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몸이 하얗게 빛났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여울은 잠시 숨을 잊었다. 그대로 넋을 잃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뜨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서란이 문득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여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미소했다.
“더 자지 않고.”
잠겨 있는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앉았다.
목덜미의 붕대가 어젯밤 때문에 헐거워져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붉게 아물어 가는 상처가 보였다. 흉은 아물지 않고 남을 것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유리를 삼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침상 근처에 챙겨 두었던 짐을 열었다. 새 붕대를 꺼내고 흐트러진 붕대를 풀어 치운 다음 약을 발랐다. 서란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곧게 앉은 흰 몸 곳곳에 그가 남긴 자국이 울긋불긋하여 면구스러웠다. 짐승같이 굴었다 싶어 죄스럽다가도 제 여인이라 새겨 놓은 듯해 가슴이 떨렸다.
“왜 벌써 깨셨습니까.”
“그냥 눈이 뜨였단다.”
그녀는 붕대를 다시 매고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혹여 무언가 변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다지 변한 건 없구나.”
“예?”
“아니, 변하긴 했구나.”
눈웃음을 지은 그녀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울은 굳었다가, 모른 척 물러나는 그녀를 붙잡아 당겼다.
팔 안에 가두고 입술을 머금었다. 얕은 입맞춤이었다. 가볍게 혀를 빨고, 턱, 목덜미, 붕대를 지나쳐 그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아슬아슬한 곳에서 멈춘 그가 낮게 속삭였다.
“무엇이 변하셨습니까?”
그의 숨결이 가슴께에서 느껴졌다. 발끝까지 찌릿한 감각이 돌았다. 서란은 간신히 대꾸했다.
“……네가 더 가깝게 느껴진단다. 너는 어떠하냐?”
“참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움푹 파인 쇄골 근처를 살짝 깨문 그가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서란은 제 교룡에게서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어젯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그는 확 타오르는 정염을 눌러 담고 단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너무 도발하지 마십시오.”
“도발이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여울이 침상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 속에서 이질적인 동공이 빛을 받아 뚜렷했다.
여울은 조금 전 그녀가 했듯이 입술을 짧게 훔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났다.
“이런 것 말입니다.”
서란은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낯이 화끈했다.
침상에서 벗어난 그가 밖으로 나가더니 그녀의 옷을 챙겨 왔다. 여울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돕지 않아도 된다.”
서란은 뺨을 붉힌 채 그를 밀어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다 균형을 잃는 것을 여울이 급하게 받아 냈다. 그녀의 몸이 너무 가벼워서 그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민망한 듯 웃었다.
“잠깐, 다리가 풀려서.”
“……제게 맡기십시오.”
어젯밤에 갈급하여 반쯤 이성을 잃었던지라 할 말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는 이무기라 보통 인간보다 월등한데, 그녀는 환자라 평범한 사람보다도 약한 상태가 아닌가. 아무리 그녀가 참지 말라 했어도 그는 좀 심했다.
밤에 제가 했던 짓들을 떠올린 여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여인의 옷을 다뤄 본 적이 없어 약간 헤맸으나 원체 눈썰미나 손재주가 좋다 보니 금방이었다.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당연한 듯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서란은 제 발로 걸을 자신이 없어 고분고분 안겼다.
그는 그녀를 목간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까 잠시 나간 틈에 준비한 것인지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있었다.
여울은 차마 목욕 시중까진 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붉어진 낯으로 물러나는 그가 이상하게 귀여워서, 서란은 설핏 웃었다.
씻고 나오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조반은 현음당 내외와 함께 들었다. 내내 서란이나 여울이나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현음당은 그것을 알아챘지만 못 본 척했다. 지아비가 눈치 없이 그 달라진 분위기의 정체를 물으려 하자 그녀는 몰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안승호는 기가 막혀 아내를 돌아보았다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현음당은 식사를 마친 후에야 말을 꺼냈다.
“밤사이, 생각은 많이 해 보셨습니까?”
서란은 후식으로 받은 수정과에 시선을 두었다. 잣이 두어 알 둥둥 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여울을 찾았다. 곁에 앉아 있던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애달프고 격렬하게 닿아 오던 몸짓을 상기한다. 반려가 되어 달라던 청을 생각한다.
돌아오면 대국을 하자던 오라비를 기억한다. 그런 결말로 괜찮으냐고 묻던 이무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쉽게 포기하진 말라던 스승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녀가 사라지면 슬퍼할 사람들.
이르게 눈을 뜬 순간부터 여울이 깰 때까지, 내내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잠든 여울의 얼굴을 보며 생겨난 욕심. 삶에 대한 미련.
“저는.”
서란은 목을 더듬었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조부님!”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부산한 소리와 함께 달려온 민열이 문을 열어젖혔다. 소년은 구르듯 방으로 들어왔다. 안승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지금 뉘 앞에서 몸가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
“조부님, 이것 좀 보십시오.”
민열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반쯤 구겨진 서찰을 내밀었다. 소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예경에서 온 급보라고 시급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안승호가 서찰을 펼쳐 들었다. 읽자마자 그의 낯빛이 허옇게 변했다.
불길한 공기가 감돌았다. 현음당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보았다. 서란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안승호는 서찰을 접었다. 민열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손자에게 서찰을 돌려주며 무겁게 입을 뗐다.
“희명교룡이 세자의 교룡을 포함한 교룡들과 충돌했다 합니다.”
“……네?”
“그 결과 세자의 교룡은 중상, 희명교룡은 사망했으며.”
서란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었다. 안승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교룡을 탐하다 희명교룡을 풀어 놓은 죄를 물어 온녕대군은 유폐, 용 헤살이 세자의 교룡을 대신하여 추격에 나섰다 합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현음당이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온녕대군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겐 저 죄목이 누명인 것이 당연하나,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그럴듯했다. 온녕대군이 어떤 성정인지보다는 그가 여의주가 없는 왕자라는 점이 훨씬 더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현음당은 서란을 돌아보았다.
서란은 표정이 사라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내부에서는 격랑이 일었다. 생각과 감정과 추측이 휘몰아쳤다. 희명교룡, 충돌, 사망, 온녕대군, 유폐, 용 헤살.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끌어 모은 냉정으로 가장 시급한 것부터 판단했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은혜를 갚을 상황이 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마마?”
“이만 떠나겠습니다.”
서란이 곧바로 일어섰다. 현음당이 붙잡을 새도 없이 그녀가 방을 나섰다. 얼어붙어 있던 여울이 황급히 뒤따랐다. 문 앞에 선 서란이 여울을 돌아보았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해라.”
“……예, 보주.”
그녀의 안색을 본 여울은 한마디 반박조차 없이 마차를 가지러 갔다.
현음당이 놀라 따라 나왔다. 서란은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나붓하게 예를 취했다. 이 와중에도 정갈한 자세였다.
그녀를 말리려던 현음당이 멈췄다. 그 인사에서 그녀는 서란의 선택을 알아차렸다. 현음당은 이마를 짚은 채 속삭였다.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옹주마마.”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스승님.”
“지금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현음당의 목소리에 노기가 깃들었다. 서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웃었다.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칠 것입니다. 방법을 알아내게 되면 돌아오겠어요. 그러니 못난 제자는 한동안 잊어 주십시오.”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용이 나섰다 하니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얼른 떠나려는 겁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불민하여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마마. 잠시만요.”
여울이 앞마당으로 마차를 몰아 왔다. 안승호가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서란은 재차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말릴 틈도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외쳤다.
“최대한 빨리, 몽해를 벗어나야 한다!”
“예.”
“옹주마마!”
현음당의 외침을 뒤로 하고 서란은 문을 닫았다. 여울이 고삐를 당겼다. 마차가 순식간에 마당을 벗어났다.
대문간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하인이 기세에 놀라 반사적으로 대문을 열었다. 검은 마차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하인은 먼지구름에 기침을 했다.
현음당은 망연히 서 있다 비틀 주저앉았다. 민열이 창백해진 얼굴로 조모를 부축했다.
“제, 제가 잘못 전한 걸까요?”
손자가 떨며 물었다. 현음당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서란은 마차에 타자마자 가진 것들을 모조리 쏟아 놓았다. 덜덜 떠는 손이 그 틈에서 더듬더듬 비늘을 찾았다. 여울의 것을 밀어 두고 자드락의 비늘을 들었다.
이상하게 빛났던 날 이후로 광택을 잃어버린 비늘. 자드락은 이것을 건네주며 축지를 새겨 놨다고 했었다.
‘머리는 왜 잘랐던 거지? 여울을 흉내 내기 위해?’
공포와 절망이 범벅된 가운데 이성이 속삭였다. 자드락은 그때부터 미끼가 될 생각이었다고. 혹여나 자신이 아니라 그들 쪽으로 교룡들이 갈 때를 대비해 축지를 건 비늘을 주었을 것이다.
면사를 돌려주려는 그녀를 향해 그가 했던 말이다. 이미 살 생각이 없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녀는 자드락의 비늘을 양손에 쥐었다. 차가웠다.
‘부수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새카만 어둠이 발끝에서 차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에 힘을 주었다. 툭 소리와 함께 비늘이 부서졌다.
허공에 진이 생겨났다. 희미하게 빛나며 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그것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로, 죽었, 다는…….’
까마득한 추락감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려던 순간에.
진이 검은 뱀을 한 마리 토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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