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별처럼 빛나는 바다2016.08.18.
교룡들은 좌룡강에 붙어 있는 작은 마을에 모여 있었다. 헤살은 늦은 밤에 그곳에 도착했다.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그는 관복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어 궐 안에서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무기와 똑같이 세로로 긴 동공의 눈동자는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헤살은 패잔병 같은 분위기의 교룡들을 훑어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고생이 많았나 보군, 다들.”
“헤살 선배. 반갑습니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온이 인사를 했다. 희나리는 머리만 까닥였고 야로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헤살은 딱히 그들의 무례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무기는 원래 주인 외의 존재는 존중하지 않는다. 선배에게 깍듯한 온이 예외였다.
그래도 용에게는 예우 정도는 갖추는 편이지만, 희나리는 심기가 불편했고 야로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유심히 그들을 보던 헤살이 온에게 물었다.
“야로는 왜 저러나?”
“제웅으로 살을 날린 후부터 쭉 저럽니다. 가능하면 보주 곁에 돌려보냈으면 합니다만.”
“이런 일을 겪기엔 아직 어리긴 하지. 야로.”
고개를 끄덕인 헤살이 야로를 불렀다. 야로는 대답 없이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을 본 헤살이 혀를 찼다.
“넌 예경의 화련공주에게로 돌아가라.”
“……느, 느루가. 나는.”
헤살의 말에 야로가 흠칫 몸을 굳혔다. 잔뜩 쉰 소년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헤살이 무심히 대꾸했다.
“내가 화련공주의 안전을 보장하마. 마니는 1주일 안에 잡힐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게 가능해?”
“그러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
헤살이 용언을 내뱉었다.
[열려라.]
허공이 일그러지며 제멋대로 휘더니 통로를 만들어 냈다. 공중에 뚫린 구멍의 너머로 소룡전 앞마당의 풍경이 보였다. 헤살이 그것을 가리켰다.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고 정신이나 차려라.”
야로는 멍하니 익숙한 소룡전을 들여다보았다. 조용하던 희나리가 소년의 등을 툭 밀었다.
“가. 화련공주가 기다릴 거야.”
소년이 표정 없는 얼굴로 교룡들을 돌아보았다. 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로의 얼굴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처럼 일그러졌다.
“가도, 돼?”
“가라.”
온이 소년의 몸을 직접 돌려세웠다. 야로는 홀린 듯이 통로 너머를 보았다. 소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통로를 향했다. 작은 등이 삼켜지듯 사라졌다.
야로가 떠나고 나자 헤살은 손짓 한 번으로 통로를 닫았다. 그가 온과 희나리를 돌아보았다.
“너희도 돌아가겠나?”
“혼자서 여울을 잡으려고?”
희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살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날 무엇으로 여기는 건가.”
“아.”
희나리는 제 입을 가렸다. 헤살은 용이다. 이무기끼리의 강함 따위는 그 앞에서 의미가 없다.
용은 존재 자체가 하계에서는 반칙에 가깝다. 보주와 이무기 시절에 맺은 맹약이 아니면 하계에 있을 수도 없다. 보주가 죽으면 모두 승천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이 알기로는 그러했다.
천계가 어떤 곳인지, 승천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 그녀를 포함한 이무기들과 용인 헤살마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막연히 그것을 추구하며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미안. 여울에게 당한 게 많다 보니.”
희나리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헤살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온이 물었다.
“마니와 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은 있습니까?”
“우선은 날아서 몽해로 가 볼 생각이다.”
“몽해?”
희나리가 처음 듣는 곳이라는 듯 갸웃거렸다. 헤살이 설명했다.
“세자가 말하길, 그곳에 마니를 가르쳤던 여사가 살고 있다 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한 번 들러 볼 가치가 있지. 가는 길에 있다면 하늘에서 내려다 볼 내 시선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거기에 없으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짐승들을 동원하면 된다.”
용은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들이 날씨를 조종하는 것, 물을 만들어 내는 것, 힘을 담은 말인 용언의 사용, 그리고 모든 짐승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짐승에서 출발하여 신선에 가까운 위치에 도달한 용은 짐승들의 경배를 받는다. 전해지기로는 동물들이 스스로 따른다고 하나, 실제 헤살이 사용하는 것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강제적인 조종에 가까웠다.
사람의 시야를 피해 간다고 쳐도 모든 짐승의 시야를 피하는 것은 무리다. 1주일 안에 마니를 찾아내 잡겠다는 것은 허언이 아니었다.
희나리와 온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같은 생각이었다. 헤살이 있으니 더 싸울 일은 없을 터고,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함께 가겠어.”
“따르겠습니다.”
동시에 답했다. 헤살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끄덕였다.
“출발은 내일 아침이다. 날아서 갈 것이니 하루면 도착할 것이다.”
“날아서? 우리는 어떻게 해?”
희나리의 물음에 헤살이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
“별수없군. 내가 도와주마.”
등에 태우는 편이 훨씬 간단했지만, 용은 주인도 아닌 자를 태울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온과 희나리는 납득하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
오랜만에 마차가 아니라 제대로 된 집에서의 휴식이었다. 밤의 고요 사이로 파도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서란은 복잡한 생각들에 눌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열었다. 담이 높아 바다가 보이진 않았으나 파도 소리는 좀 더 선명해졌다.
정말로 바닷가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한참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저히 이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서란은 침상에서 벗어났다. 조심스럽게 제 방의 문을 열던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검은 사람의 형상이 옆방의 툇마루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곳은 여울의 방이었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달빛이 비쳐 들었다. 여울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곳에 있었다.
“여울?”
“보주. 왜 주무시지 않고 나오셨습니까?”
“너야말로 뭘 하고 있느냐?”
여울은 답하지 않았다. 서란이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너도 잠이 오지 않더냐?”
“예.”
“왜?”
“두렵습니다.”
담담한 말에 먹먹한 공포가 묻어 있었다. 서란은 무엇이 두려우냐고 묻지 않았다. 침묵 속으로 파도 소리만 스며들었다. 그녀가 밝게 말했다.
“그럼, 같이 산보라도 가자꾸나.”
“이 시간에 말입니까?”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더 좋지 않으냐.”
생긋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밤바다를 보러 가자꾸나.”
여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서란이 약간 민망해질 때쯤에서야 그가 일어났다.
그들은 현음당 일가를 깨우지 않도록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자정이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잠든 마을에는 은은한 달빛만 돌아다녔다.
해변으로 가는 길은 딱히 찾을 필요가 없었다. 파도 소리를 따라 아래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돌을 쌓아 만든 낮은 담을 넘어서자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그 너머로 보인 것은 해변을 따라 펼쳐진 푸른 은하수였다.
미세한 알갱이들이 파도가 칠 때마다 물속에서 파랗게 반짝였다. 별처럼 빛나는 바다. 하늘의 검은 어둠과 바다의 푸른 어둠이 맞닿는 수평선은 뒤엉켜 구분되지 않았다.
창공에는 하얀 은하수가 뿌려져 있고 지상에는 그보다 더 선명한 별의 흐름이 파랗게 일렁였다. 하늘을 딛고 서서 바다를 올려다보는 듯했다.
서란은 말을 잃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그 무엇과도 다른 광경이었다. 물결을 따라 밀려 들어온 빛 알갱이들이 푸르게 해안에 박혔다. 그녀는 말없이 여울의 옷깃을 잡았다.
여울은 그녀가 무언으로 던진 질문을 알아들었다.
“야광충이라 합니다.”
나직한 목소리였다. 서란은 눈앞의 환상 같은 풍경에서 여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처음부터 해안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바다에 사는 아주 작은 생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밤이 되면 저리 파랗게 빛이 납니다.”
“만져 봐도 되는 것이냐?”
“예.”
여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서란은 모래사장을 걸어 나갔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발이 푹푹 파여 신으로 모래가 들어왔다. 그녀는 신을 벗었다. 내친 김에 버선도 벗었다. 시야를 가리는 귀찮은 면사도 벗었다.
그것들을 한쪽에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한손으로 휘어잡았다. 맨발에 매끄러운 모래가 스쳤다. 달리다시피 물로 다가갔다.
여울은 그녀를 뒤따르며 그녀가 내려놓은 것들을 챙겼다. 인적이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물이 차니 주의하십시오.”
서란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파도의 끝자락이 닿는 곳에 섰다. 밀려온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물러났다. 푸른빛이 발에 묻어났다.
그녀는 조금 더 걸었다. 서늘한 물결이 맨발을 어루만지고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발자국을 따라 별이 남았다.
예뻤다. 서란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어 조그만 웃음이었다. 그녀가 아이처럼 첨벙거리며 모래톱에 발자국을 그렸다.
그러다 젖은 모래에 미끄러져 휘청거리는 것을 어느새 뒤로 다가온 여울이 받쳐 주었다. 서란은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가빠진 숨을 골랐다.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리 신비한 광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숨김없이 설렘을 드러냈다. 발치에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청백색 별이 새로이 덧그려졌다.
서란은 허리를 굽혀 물결에 손을 담갔다. 그 바람에 잡고 있던 치마가 흐트러져 끄트머리가 흠뻑 젖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손에 닿는 빛 알갱이들에 정신이 팔렸다.
두 손을 모아 파도를 떠 올렸다. 손 안에 조그만 우주가 담겼다.
“같은 곳이라도 때에 따라 이다지도 다르다니. 나는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없구나.”
서란이 손을 벌렸다. 손아귀에서 찰랑이던 바다가 흘러내렸다. 발갛게 상기된 볼에 푸른빛이 비쳐 들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고왔다. 여울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충동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서란이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푸른 어둠 속에 선명한 주홍빛.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약속한 것처럼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짧은 입맞춤이었다. 물러나며 그가 귀와 볼이 만나는 여린 피부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이 이어 귓불을 스쳤다. 관자놀이를 타고 올라 이마에 도장을 찍듯 꾹 눌렸다. 서란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옷이 엉망이 되셨습니다.”
입술을 뗀 여울은 제가 무슨 짓을 했느냐는 듯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서란은 제 치마 끝자락이 파랗게 물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치맛자락을 잡고 들어올리자 물이 흐르며 푸른빛이 잦아들었다. 손이 젖어 있어 잡은 곳도 푸르스름한 알갱이가 반짝이다 사그라들었다.
“돌아가면 씻어야겠구나.”
“춥지는 않으십니까?”
“적당히 시원하여 좋단다.”
기분 좋게 대꾸한 서란이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젖은 모래에 남은 발자국은 파도가 칠 때마다 푸르게 물들었다.
여울이 뒤따라 걸었다. 반달이 하늘에서 굽어보고 있었다. 조용히 거닐던 서란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
“여울.”
“예.”
“나는 자신이 없다.”
여울이 의아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느린 걸음에 일정하게 흔들렸다. 서란은 발끝으로 물을 튕겼다.
“내가 살고자 한다면.”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둠을 살짝 들추었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도주를 이어 가야겠지. 한시도 방심해선 안 되는 생활을.”
“…….”
“자드락도, 오라버니도, 스승님도, 내게 기적을 기대하는데, 정작 나는 캄캄하기만 하다. 경험도 식견도 짧고 서툰 내가 뭘 해낼 수 있겠느냐. 끝내 답을 찾지 못하면. 그 긴 고통의 와중에 네가 지친다면. 그래서 후회하게 된다면.”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아니, 결국 믿지 못하는 건 나다.”
그녀가 멈췄다. 밤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눈으로 더듬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아니라, 내가 버티지 못할 테니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버텨 주실 순 없습니까?”
그녀의 바로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란이 돌아보았다. 그녀는 울듯이 웃었다.
“바로 그게 문제다. 너는 또 다치겠지. 나는 네가 나로 인해 아픈 것을 보고 싶지 않단다. 그걸 버틸 자신이 없느니라.”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홀로 남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여울이 부정했다. 그는 내내 차올라 넘실거리던 공포를 토해 내었다.
“당신의 부재를, 견뎌 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이 아프게 들렸다. 서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네게 이리 해서는 안 되었는데. 내 욕심으로.”
파도가 그녀의 맨발과 치맛자락을 계속해서 적신다. 여린 어깨가 가늘게 떨었다.
여울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턱을 감싸고 들어올렸다. 그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저를 받아 주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제게 마음을 준 것을 후회하십니까. 궐을 나온 것을 후회하십니까.
많은 것을 눌러 담은 물음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가 숨 죽여 답했다.
“아니.”
서란은 눈을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떨어져 그의 손에 가 닿았다.
“미안하다.”
그는 그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로 그녀를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그는 그 입을 제 입으로 막았다.
조금 전과 달리 사나운 입맞춤이었다. 떨고 있는 입술을 열고 먹어버릴 듯 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가 무너지려는 것을 허리를 안아 사로잡고 집어삼켰다. 서란이 버티기 힘들어질 정도가 되어서야 그가 입술을 뗐다.
“보주.”
그녀는 답하지 못하고 거칠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그녀의 손에 묻었던 푸른빛이 그의 옷자락에 옮겨 묻었다. 그것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숨소리와 파도 소리가 고요 속에서 섞였다. 그는 물기 어린 주홍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감히 주인께 청합니다.”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지. 그녀가 세 번째 명령을 내리지 않도록. 떠오른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울은 절박한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제 반려가 되어 주십시오.”
반려. 평생을 함께할 짝.
그 말이 무거웠다.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포기하는 선택은 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함께 버텨 나가자는 애원이었다.
서란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가 풍랑이 되어 그녀의 수면을 뒤흔든다. 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를 담고 있는 그의 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바다의 푸른빛이 비쳐 드는 검은 눈동자. 연인. 뭐든 주고 싶어지는, 아무것도 아깝지 않은 존재. 그녀의 것.
서란은 다른 대답을 했다.
“네게 며칠 전에 약속했던 것, 기억하느냐?”
“무엇을…….”
“허락하마.”
여울은 그 약속을 떠올렸다. 그에게 그녀의 허락은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반려와 닿는 것, 둘 모두를.
그 말을 이해한 순간 오래도록 인내한 욕망이 치솟았다. 그것이 화마처럼 뇌리를 휩쓸었다. 머릿속이 깨끗이 비었다.
여울은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서란이 당황해 그의 목을 부여잡았다. 젖은 치마 아래로 희게 드러난 맨발이 달랑거렸다. 그가 성큼성큼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내 발로 갈 수 있다.”
“젖은 발로 신을 신으실 순 없잖습니까.”
“네 옷도 더러워지잖느냐.”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로 다시 바다를 돌아보았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새길 듯 지켜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여울은 그녀를 안고 마을을 가로질렀다. 담을 넘어 별채를 감싸고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방이 가까워지자 문득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심장은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이 묻어났다. 아직도 그녀의 목은 중상이었다. 서란은 그의 망설임을 알아차렸다.
다음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파묻었다.
“나도, 네게 닿고 싶단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여울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인내하듯 길게 호흡을 고른 후에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란의 방에 들어간 여울은 그녀를 침상에 앉히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등불이 어둠을 몰아내며 복잡한 그림자를 그렸다. 서란은 모래투성이인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여울이 밖으로 나가더니 대야에 물을 받아 왔다. 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씻겼다. 마디가 굵은 손이 그녀의 발가락 사이를 세심하게 문질렀다.
처음 그가 그녀의 발을 씻겼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는 이리 될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둘 사이에서 물이 참방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대야를 치운 여울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가, 가는 몸을 스쳐 내려갔다. 데일 듯이 뜨거운 눈이었다.
서란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슴 어림에 시선을 두었다. 낯이 홧홧했다.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팔을 뻗었다. 말없이 그를 당겨 안으며 눈을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여울은 그녀의 품에 파묻혔다. 그녀에게서 그의 냄새가 났다. 조금 전의 접문 탓에 무척 짙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자제심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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