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47화 (47/70)

47. 비사(秘史)2016.08.11.

온이 올린 장계를 받은 즉시, 세자는 주술사를 보내 축지로 제 교룡을 데려오게 했다. 만신창이가 된 느루를 본 세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가 차는군.”

느루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살아나도 반신을 뒤덮은 흉한 화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잃어버린 눈 역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걱정보다 분노가 먼저 차올랐다. 내 것이 이리 약할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교룡이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느루를 저리 만든 것은 희명교룡 자드락이라고 했다.

유배되어 있던 놈이 어찌 그곳에 나타났는가.

세자는 분노를 내리누르며 정보를 끌어 모아 취합하기 시작했다.

결론을 내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늦은 밤에 산은 세자의 방문을 받았다.

산의 사가로 친히 나온 세자는 평복을 하고 익선관이 아니라 갓을 쓴 채였다. 산은 사랑방에서 그를 맞이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형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실까.”

다과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은 산이 비죽 웃었다. 세자는 서늘한 주홍빛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가 한참 말이 없자 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전해 듣고 있으면서, 뭣 하러 여기까지 왔어?”

“김상수. 금산상단 소속.”

세자가 단조롭게 읊었다. 산에게 은밀히 보고를 해 왔던 주술사 이름이었다. 산은 부러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 김가는 왜? 꼼꼼히도 혹사시켰던데. 돌아와서 몸져누웠어.”

“결계의 서쪽. 미끼로 나선 희명교룡.”

세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마니전의 나인은 왜 매수했지?”

“알아듣게 말해, 형님.”

“낯짝은 여전히 뻔뻔하구나.”

산이 머리를 긁적였다. 태연한 얼굴과 다르게 속내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듯했다. 세자는 뚫어질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입꼬리에 걸린 비웃음이 깊어졌다.

“너는 내가 백치로 보이느냐?”

“아니, 무슨 소리냐니깐?”

“처음부터 마니를 편들고 있었군. 화예교룡이 그리 중하였나. 비역질이라도 하는 게냐? 아니면 마니에게 홀렸느냐? 그것이 곱상하긴 하였지.”

“……발상 한번 참신하게 천박하네. 벗 하나 있어 본 적도 없어서 이해를 못해? 아니, 그건 둘째 쳐도 혈육을 상대로 그딴 소리가 나와?”

산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모욕에 절로 눈썹이 떨렸다. 그가 노려보는 시선을 받아넘기며 세자가 되받았다.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니면 그럴 리가 없으리라 여겨서, 거슬리는 점이 있어도 넘어가 주었단 거다. 정말로 우정놀음이니 남매놀음에 정신이 팔린 거냐?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세자는 찻잔을 쥐더니 느긋하게 찻물을 머금었다. 산이 비꼬듯 말했다.

“내가 마니의 편이면, 그 찻물에 독을 탔겠지. 겁도 없이 마시네?”

“독을 타? 네 사가에서? 그래도 네놈이 그 정도로 천치는 아니지. 감정에 휘둘리는 멍청함은 있어도.”

“천치는 아닐 거라면서 내가 마니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한다고? 내가…….”

세자가 산의 말을 끊고 탁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추국을 열어 증좌까지 네 앞에 들이밀어야 인정하겠나?”

“증좌는 무슨. 그런 게 있긴 해?”

“이리 사력을 다해 그들을 도우면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더냐? 못난 놈. 이미 아바마마도 아신다. 내일이면 왕명이 떨어질 게다.”

산이 입을 다물었다. 세자는 산의 침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이곳에 연금될 것이다. 유배지의 이무기를 풀어 놓은 죄로.”

“뭐?”

“네놈의 수작 탓에 소득 없이 마니를 놓치고, 내 교룡은 저 꼴이 되었지. 뭐라도 성과가 있어야 덤벼드는 공신 놈들의 입을 틀어막을 것이 아니냐.”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이무기를 탐내어 유배지의 희명교룡을 건드렸고, 그 탓에 희명교룡이 소서촌을 벗어나 날뛰면서 추적을 방해했다. 광증이 도진 희명교룡은 주살하였으나 그 피해가 크다. 어설픈 소망으로 저지른 짓이며 왕족임을 감안하여도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어 온녕대군을 유폐한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헛소리군.”

“마니의 탈주를 도왔다고 밝히기엔 왕실의 수치가 되니 말이다. 이정도면 그럴듯한 이야기지, 아니 그러냐?”

“형님한테나 그럴듯하겠지.”

“가택 연금에서 그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아바마마의 자비다.”

세자는 비웃음을 띠었다. 산은 이를 악물었다. 다과상 아래에 가려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정식으로 명이 내리기 전에 어찌 된 일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내 친히 온 것이다. 그래도 동복아우이니. 너 때문에 내가 입은 손해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경을 치고 싶다만.”

“왜 참아? 마음대로 하지 그래.”

산이 비뚜름하게 대꾸했다. 세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을 했다.

“헤살이 나설 것이다. 포기해라.”

산의 안색이 삽시간에 새파래졌다. 세자가 등을 돌렸다. 그가 문을 당겨 열며 말했다.

“그것들한테서 신경을 끄기만 하면 너는 평생 잘 살 터이니, 얌전히 처박혀 있도록 해라. 유폐는 오래가지 않을 거다. 부왕께선 늘 너를 가엽게 여기시니.”

“잠깐, 헤살이라고? 형님이 어떻게?”

“희명교룡이 내 교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건 네가 저지른 짓이 되지. 차남이 장남에게 저지른 실수를 아비가 보상하여 주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구도잖나.”

세자가 선뜩하게 웃었다. 산은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느루를 대신해 헤살을 빌리게 된 건가.”

세자는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산은 창백해진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움켜쥐고 있던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패어 있었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이 공기처럼 목을 파고들었다.

헤살이 나섰다. 그는 용이다. 이무기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 그것이 나섰다면 더 이상 벗어날 방법은 없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산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

산의 사가를 나와 흑룡궁으로 돌아온 세자는 제 방에 들어 주위를 모두 물렸다.

홀로 남자 문갑으로 다가갔다. 다른 서책들을 치우고 서랍의 밑판을 들어올렸다. 숨겨진 공간에 자물쇠가 걸린 함이 보였다.

그는 서안으로 돌아와 열쇠로 함을 열었다. 보자기에 싸여 있는 서책이 한 권 있었다. 보자기를 풀고 그것을 꺼냈다.

비사(秘史).

낡은 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이 저 두 글자만 쓰여 있었다. 세자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그곳에는 지워진 역사가 있었다. 왕에게서 세자에게로만 이어져 온 숨은 사실들. 예락의 왕이 될 자가 천년호와, 이무기와, 여의주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그곳에 쓰여 있었다.

“이쯤이었을 텐데…….”

세자는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원하던 항목을 찾아냈다.

여의주로 태어난 이무기와 도를 닦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 태어난 이무기의 차이. 중조 대에 기록된 그것은 후대의 왕들을 위해 남겨진 정보였다.

정확히는 처음으로 ‘만들어 낸’ 이무기들을 중조가 제 아들과 함께 관찰하며 남긴 기록에, 후대의 왕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덧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필체가 얼기설기 쓰여 있었다.

세자는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확인했다.

여의주로 태어난 이무기는 맹목적으로 여의주를 탐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왕족이 제안하는 맹약을 거부하는 일이 없고 보주에게 집착하므로 다루기에 편리하다.

이들은 용이 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기존의 이무기들과 달리 용이 되고자 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이를 위해 난폭해지기도 한다.

왕족을 습격한 사례가 있다. 심지어 주인을 공격한 적도 있다.

청람산에 결계를 설치하고 소룡전을 지어 이무기들을 격리하여 훈련시키기로 하였다. 맹약할 때 주인의 허락 없이 왕족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하도록 하라.

……

천년호의 오염은 지속적으로 바쳐지는 여의주에 힘입어 세월이 흐를수록 정화된다. 따라서 후대에는 기존과 같은 이무기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수는 많지 않겠으나 이들은 여의주에 집착하지 않는데다 상대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타고나므로 통제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만들어진 이무기들은 여의주의 향에 일방적으로 굴복하거나 용이 되기 위해 신념을 꺾기도 한다. 허나 스스로 난 것들은 자아가 강하여 주인이라 해도 납득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구별하여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들을 딱히 가려낼 방법이 없다. 용에 관심을 두는지, 재능이 뛰어난지 등은 막연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구별하기 어려워도, 탁월하다는 건 확실하지.’

세자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누런 종이를 넘겼다.

따라서 후손들에게 명한다. 반드시 마니에게 교룡을 선택할 기회를 주도록 하라.

마니의 교룡은 용이 될 기회를 잃는다. 이러한 자리를 거부하지 않는 이무기는 스스로 태어난 이무기일 수밖에 없다.

이 방법으로 자생한 이무기를 가려낼 수 있으며, 그것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통제할 수단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마니의 교룡으로 나서는 이무기는 항상 주의하도록 하라. 이들은 정이 깊어 주인으로 선택한 마니를 저버리지 못하나, 도덕심과 자제심 또한 강해 마니가 죽더라도 참사를 일으킬 염려는 적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니를 살리려 드는 경우다. 절대로 달아난 마니를 놓아줘서는 안 된다. 도주하려 들면 마니를 잡고 교룡은 유배하거나 죽이도록 하라.

‘자신이 있었거늘. 마니의 탈주를 부왕처럼 어설프게 처리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예전, 느루가 던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 이 책 속에 있었다. 세자는 내심 마니가 교룡을 이용해 탈출하길 바랐다. 자생한 이무기라는 변수를 즉위하기 전에 처리해 놓고 싶었으므로.

‘느루가 저 꼴이 될 줄이야. 상정 외의 결과다.’

잊지 말라.

스스로 태어났다는 것은 짐승인 뱀이 영물인 이무기에 이를 정도로 긴 시간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내버려 뒀다간 우환이 될 수 있다.

이유 없이 처벌할 수는 없으므로 마니가 일부러 달아나게 하여 그 죄목으로 이무기를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선은 달아나기 직전에 잡아 곧바로 처벌하는 것이다.

단, 다른 이무기들이 이 사실을 알게 해선 안 된다.

후손들이여, 명심하라. 너희는 천륜을 거스름으로써 이무기를 만들고 통제할 힘을 얻었다. 이는 언제든 잃을 수 있는 힘이다.

보주를 ‘마니’로 만들어 용이 되는 이무기는 곧 천룡(天龍)이라.

어떻게 태어난 이무기든 천룡이 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으나, 만들어진 것들은 쉬운 길을 두고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스스로 난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경고하노니, 천룡이 하나라도 탄생하는 날에 너희는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원하던 것을 확인한 세자는 책을 덮었다. 원래대로 꽁꽁 감싸 챙겨 넣으며 그는 인상을 썼다.

“기억한 그대로군.”

자생한 이무기와 만들어진 이무기는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100년을 거쳐 스스로 수행한 영물과 편법으로 태어난 영물이 똑같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나는 왕이 될 자이니, 내가 가장 강한 이무기를 가지는 게 합당하지 않나. 느루가 자생한 이무기일줄 알았는데…….’

세자는 열 살이 되기 전에 헤살에게 미리 실력이 탁월한 이무기들에 대해 물어봤었다.

헤살은 주술은 느루, 무공은 여울이라 알려 줬었다. 그는 아무래도 다양하게 활용하기엔 주술에 능한 교룡이 나을 거라 생각하여 느루를 선택했다.

비사에 대해 알게 된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제일 강한 이무기를 택했으니 느루가 자생한 이무기일 거라 생각했다.

‘잘못 골랐어.’

이제 와서 보니 잘못된 선택이었다 싶었다. 다른 교룡들까지 함께 있었음에도 자드락에게 이리 일방적으로 밀려 망가져 돌아오다니. 스스로 난 것과 만들어진 것의 격차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여울을 고를 것을.’

세자는 내심 후회했다.

화예교룡은 마니의 교룡이니 스스로 난 것일 터다. 희명교룡도 그러했으리라. 대대로 마니가 교룡을 얻는 데 성공한 경우 그 교룡은 자생한 이무기였다.

“만들어진 것들이 그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세자는 분노를 다스렸다. 어차피 느루는 용이 될 것이다. 마니식을 치르고 용이 되면 출생이 어떠했든 이무기들을 압도할 터다.

그다지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 교룡이니 별수 없었다. 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망가진 몸뚱이도 용이 되면 깨끗해지겠지.’

희명교룡은 소멸한 것으로 추정되고, 화예교룡은 용인 헤살이 나섰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세자는 그리 판단을 내렸다. 그는 공신들을 상대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

건평 21년 10월 20일.

여울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들을 돌보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습관적으로 준비하는 몸과 달리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몽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바다가 보일 것이다. 서란이 내렸던 두 번째 명령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그 다음은?

눈앞이 새카맣게 어두워진다. 여울은 무심코 손에 힘을 주다가 나무 그릇이 으스러지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피할 수 없는 절망이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는 서란의 21년이 이러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이 조여드는데 손도, 발도 쓸 수 없는 느낌. 턱 끝까지 차오른 늪을 내려다보는 것.

그는 그녀가 체념에 익숙해진 이유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 이해와는 별개로,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자드락처럼 실패하게 될지라도, 그녀가 스스로 제 목숨을 그에게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주하며 시간을 끌다 보면 마니식 없이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녀를 붙잡으려면…….

“여울.”

어느새 일어난 서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닿은 귓가에서부터 온기가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여울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항상 이른 시각에 일어나는구나. 잠을 자긴 하는 것이냐?”

서란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는 앉아 있는 그의 어깨 너머로 솥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떨어졌다.

가슴이 떨렸다. 더 깊은 마음과 더 깊은 공포가 차오른다. 여울은 급히 으스러진 그릇을 감추었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응, 너는 잘 잤느냐?”

“아침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곧 준비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못 잔 모양이구나.”

“…….”

서란은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가 왜 잠들지 못했는지 짐작했으므로.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바다에 도착한 이후에 대해서는 그녀도, 그도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유예했다. 그도, 그녀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화제로 삼는 것은 남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므로.

그 시간을 그녀 마음대로 하는 것은, 그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서란은 그에게 내내 미안했다.

그래서 더욱 주고 싶었다. 그가 받기를 원하지 않아도, 그녀는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적어도 그를 위해 쓰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부석에 올라탔다. 여울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말발굽 소리 사이로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그녀는 많이 웃었고 그는 말이 늘었다.

바다가 가까워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어오는 바람에 비린내가 실리기 시작했다. 서란은 마부석에 앉아 상체를 바짝 세웠다. 여울이 고삐를 쥔 채 말했다.

“저 언덕 너머가 몽해입니다. 이제 곧 보일 겁니다.”

서란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주위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거슬리던 면사를 살짝 걷었다.

마차가 언덕을 올랐다. 시야가 조금씩 트였다. 곧이어 새파란 바다가 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 아래 아득하게 시야의 바깥까지 확장되는 푸른빛. 투명하니 가벼운 하늘의 푸름과 대비되는 깊고 무거운 청색.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시각을 압도하는 광활함.

망망대해.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여울은 조용히 마차를 몰았다.

그러다 그는 어느 순간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웠다. 더 가면 몽해에 접어든다. 사람의 눈에 띌 수 있었다. 그녀가 면사를 쓰지 않고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싶었다.

서란은 마차가 멈춘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떨렸다. 눈이 깜박였다. 그녀가 겨우 눈을 떼고 여울을 돌아보았다.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상상만큼 아름답지는 않으나, 상상보다 더 넓구나. 내 한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네가 왜 바다에 대해 쓸 때면 글이 길어졌는지도.”

“마음에 드십니까?”

서란은 다시 바다에 시선을 둔 채 고개만 끄덕였다.

먹먹했다. 경이로웠다. 꿈꾸던 환상은 아니었으나 충격적인 광막함이었다. 그녀의 상상으로는 이토록 넓은 세계를 구현할 수 없었다.

껍데기를 깨고 나온 것처럼 시야가 넓어졌다. 한가득 부풀어 올랐던 것이 터지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몰랐던 세계.

그녀는 한참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마차가 멈춰 있다는 걸 알아채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왜 가지 않고.”

의아하게 묻던 그녀는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여울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를 기다려 준 거로구나.’

서란은 달아오른 얼굴로 면사를 끌어내렸다. 곧 몽해에 들어갈 테니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제 출발하렴.”

조그맣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은 그제야 마차를 움직였다. 그는 미리 챙겨 둔 챙이 넓은 삿갓을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마차는 천천히 몽해로 다가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