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46화 (46/70)

46. 주인 없는 잔2016.08.07.

바짝 메말라 있던 풀밭은 빗물로 푹 젖어 흙과 뒤섞인 채 개펄이 되었다. 그 펄 위로 희나리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풀잎이 그 서슬에 휘말려 비산했다. 그녀는 창으로 바닥을 치며 바로 뛰어올랐다.

늦었다. 온몸에 전류가 흘러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손에서 떨어진 창이 제멋대로 굴러갔다. 진흙이 엉망으로 튀었다. 물에 젖은 바닥에 몸이 닿았다. 찰나에 다시 강력한 전기가 흘렀다.

“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결정타였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온이 빠르게 그녀를 둘러업고 물러났다.

결계 범위 내에서 최대한 덜 젖은 곳, 아직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 이미 정신을 잃은 야로가 눕혀져 있었다. 몸놀림이 둔한 야로는 가장 먼저 쓰러졌다. 그는 그곳에 희나리를 눕히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결계 내의 범위에 폭우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번개의 주술을 사용했다. 바닥에 고인 빗물에 닿는 순간 전류가 흘렀다.

전기가 흐르는 빗속에서 싸운다는 건 지나치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젖은 바닥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감전된다.

주술은 변칙적이고 다양하지만 파괴력이나 속도가 부족하다. 따라서 홀로 정면 대결을 할 때는 불리하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주술사의 경우였다.

자드락은 제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결계 내에 퍼부은 번개는 평범한 주술사라면 스물은 모여야 가능한 양이었다.

느루는 주술로 불러낸 바람을 타고 공중에 선 채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둘이 쓰러졌다. 그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무능한 놈들!”

검을 고쳐 쥐던 온은 그 소리를 들었다. 대체로 온화하던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는 기절한 희나리와 야로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전투 불능이 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느루 외의 교룡들에게는 반격만 하고 있었다.

“더럽게 싸우기 싫군.”

낮게 중얼거린 온이 기를 일으켰다. 기로 전류를 차단하며 몸을 날렸다. 자드락과 느루의 주술들이 부딪치고 있는 난장판 사이를 스쳐 달려들었다.

자드락은 날아오는 검을 딱히 피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수인을 맺었다. 온이 달려드는 방향에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는 그가 든 검을 피뢰침 삼아 유도되었다.

순간적으로 고민하던 온은 기로 전류를 차단하는 대신, 일부러 제 몸을 들이댔다.

“큭.”

번개가 온몸을 뒤흔들며 내려갔다. 내장이 진탕되며 입 밖으로 피가 한 줄기 샜다. 그는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다리에 저절로 힘이 풀리며 비틀거렸다.

온은 버티는 대신, 그냥 쓰러지는 것을 택했다.

마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저 느루와 함께 협력할 마음은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그는 이대로 정신을 잃은 척하기로 결심했다.

자드락이 그들에게는 선공을 하지 않으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자드락과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약속을 한 적도 없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이대로 빠져도 괜찮을 터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자드락은 처음부터 오직 느루만 노렸다. 다른 교룡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느루가 세자의 교룡이기 때문이었다.

‘헤살처럼 될 놈이니까.’

빗줄기가 흐려 놓은 풍경 속에서 느루의 위에 헤살의 모습을 덧씌워 보았다. 자드락은 즐겁게 웃었다.

결계 너머는 맑은 하늘에 노을만 드리워져 있었다. 한 걸음 차이로 결계 내부는 굵은 비가 잿빛으로 공간을 채웠다. 구름이 결계 안을 어둑하게 뒤덮었다.

그 아래의 허공에서 바람과 번개가 전쟁을 벌였다. 하얀 빛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휘어지고 꺾어지며 애꿎은 대지를 그슬렸다.

자드락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번개 탓으로 젖은 공기 중에 전기가 맴돌았다. 고여 철벅이는 물웅덩이에서 전류가 파랗게 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

느루는 욕설을 내뱉으며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바닥에 던져진 부적을 중심으로 하얗게 냉기가 일었다. 물이 얼어붙으며 전류가 흐르던 길을 막기 시작했다.

자드락은 그쪽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머지 교룡들을 떨구기 위해 만들었던 전장이다. 일 대 일이 된 이제는 유지할 필요가 없다.

느루가 주술로 바람을 일으켰다. 칼날처럼 벼린 바람이 자드락을 향해 쏘아졌다. 자드락은 결계를 응용하여 제 주위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바람은 그것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자드락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번개가 느루를 향해 마구잡이로 날아갔다. 느루는 바람을 타고 피하거나 그것들을 휘어 버렸다.

느루가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리그었다. 그의 주술로 상공에서 생성된 바람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빗방울이 광폭한 바람에 휘말려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았다.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그가 팔을 뻗었다. 젖은 풀잎과 물방울을 휘감아 올리며 회오리들이 자드락을 향해 돌진했다.

공기가 내지르는 비명이 빗소리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빗물이 그 기세에 제멋대로 휘었다. 조여든 회오리가 자드락의 방어막을 후려쳤다. 보이지 않는 기의 막이 회오리로 인해 요동치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쯤에서 그만두지, 선배?”

느루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방어막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회오리가 점점 더 조여들었다. 기긱기긱,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자드락은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자드락이 손을 치켜 올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대지에서 진흙이 거인의 손을 이루며 솟아올랐다.

거인의 손은 공중에 있던 느루를 움켜쥐려 했다. 회오리를 움직이는 데 집중하고 있던 그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고작 이런 걸로……!”

피하는 순간 느루의 등 뒤에서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드락이 다른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또 하나의 진흙 손이 느루를 후려쳤다.

“손은 원래 두 개야, 후배야.”

느루는 강 쪽으로 던져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구쳤다. 집중이 깨지며 자드락을 압사시킬 듯 몰아치던 회오리가 산들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휘어지던 비가 원래대로 수직선을 그리며 쏟아졌다.

자드락은 느긋하게 강가로 향했다.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피를 훔쳐 냈다. 그 손등에는 새카만 비늘들이 돋아 있었다.

느루가 강물을 조종하며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자드락은 수인을 맺었다. 손에서 빛이 돋아나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복잡한 진이 그의 주위에 떠올랐다.

자드락이 팔을 뻗었다. 사위가 짧게 빛났다. 진에서 솟구친 번개가 푸른 뱀의 형상으로 강물에 직격했다.

강 전체에 전류가 흘렀다. 하얗게 배를 까뒤집은 물고기들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크아악!”

느루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간신히 일으킨 기로 제 몸을 감쌌다.

자드락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번개를 내리쳤다. 무식할 정도로 힘을 퍼부었다. 입술을 타고 피가 줄줄 흘렀다. 그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침내 기로 만든 느루의 방어막이 깨졌다. 젖은 몸에 번개가 직격했다. 그가 전신을 비틀었다.

느루의 몸 주위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부풀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자 보다 튼튼한 본체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곧 거대한 이무기가 올올이 비늘을 세운 채 강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무기가 내지르는 소리에 공기가 진동했다. 비가 강 위에 그려 내던 파문이 그 기세에 일순 지워졌다. 빗물이 비늘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검은 이무기는 사람 몸통만 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강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물살이 파도처럼 일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그 모습을 보며 자드락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윤곽이 검게 일어났다.

흑갈색에 가까운 검은 비늘의 이무기가 한 마리 더 모습을 드러냈다. 본체로 돌아간 자드락이 꼬리로 덤벼드는 느루의 머리를 후려쳤다.

집채만 한 이무기가 강물에 쓰러지자 강이 갈라지다시피 했다. 물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파도가 만들어져 강변으로 넘쳤다. 자드락이 그를 뒤쫓아 강물로 뛰어들었다.

곧 두 마리의 이무기는 서로를 물어뜯으며 엉켜들었다. 드넓은 좌룡강이 그 서슬에 미친 듯이 범람했다. 고요하던 물살은 해일에 가까운 파도가 되어 사방을 덮쳤다. 먹구름 아래에서 울부짖음과 첨벙거림이 귀를 때렸다.

기절한 척하고 있던 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무기의 피가 강물에 흩뿌려졌다.

온은 멀거니 그것을 보다가 급히 일어나 희나리와 야로 쪽으로 다가갔다. 이무기들의 몸부림 탓에 흘러넘친 강물이 그 둘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둘러업었다. 머리는 느루를 돕는 게 급하다고 판단했는데 몸은 느루보다 다른 교룡들을 챙기고 있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이기든 지든, 우리 보주들과는 상관이 없다.’

온은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가 야로와 희나리를 걸터앉혔다. 비는 아플 정도로 쏟아 붓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거대한 뱀들이 한 몸처럼 뒤엉켜 서로를 조이는 게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생김새지만 이무기인 온은 한눈에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드락이 느루의 한쪽 눈을 물어뜯었다. 붉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 강물에 섞여 들었다. 느루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발광하는 뱀의 거체가 끊임없이 강을 휘저었다.

자드락은 그의 목을 문 채 얽매어 조였다. 비늘끼리 부딪치며 빠각빠각, 소리가 났다.

동시에 하늘에서 구름이 휘몰아쳤다. 그 중앙에 새하얀 빛이 모여들었다. 부풀어 오른 빛 덩어리에서 흰 번개가 떨어졌다. 지금까지 자드락이 만들어 낸 번개 중에서 가장 굵고 눈부신 것이었다.

그것이 자드락에게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는 느루의 머리에 직격했다.

캬아아아.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천둥소리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반쯤 그슬린 이무기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그것을 꽉 잡아 누르고 있던 자드락은 제 몸도 일부 탄 주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져져 약해진 비늘을 부수며 그의 송곳니가 느루의 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목을 잘라낼 기세로 물어뜯었다.

느루가 발악하며 강물을 조종했다. 솟구친 물줄기들이 자드락의 몸을 파고들려다가 통제권을 빼앗겨 흩어지길 반복했다. 계속해서 쏟아진 이무기의 피로 강이 벌겋게 물들었다.

온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대경했다.

‘도와야 하나? 아니면 말려야…….’

사실 그의 입장에선 느루가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게 나았다. 정나미는 떨어진 지 오래였고, 세자의 교룡인 느루가 죽으면 그의 보주가 마니가 될 위험도 없어진다.

교룡을 잃은 세자 대신 다른 왕족이 세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온의 보주인 제녕군이 세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온은 멈칫했다. 검을 쥔 손아귀에서 느슨하게 힘이 빠졌다.

‘이대로 잠깐 못 본 척하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가 갈등하는 사이 이변이 일어났다.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사방을 틀어막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온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느루를 휘감고 있던 자드락의 몸이 흐려지고 있었다.

먹이 물에 녹아들어 흐려지듯이. 모래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이.

웅장하던 이무기의 몸뚱어리가 차츰 무너져 내렸다. 지워지는 것처럼 허물어졌다. 거대하던 형상이 서서히 소멸했다.

최후에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남아 맴돌다 사그라들었다.

느루는 저를 얽어매고 받치던 것이 사라지자 강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첨벙, 하고 핏빛 물보라가 일었다. 온이 뛰어내려 강가로 달려갔다.

까맣게 몰려들었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비가 잦아들면서 새빨간 노을이 여과 없이 흘러내렸다. 노을이 강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반쯤 배를 드러낸 채 강물에 둥둥 떠오른 느루의 입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구쳤다. 일단은 살아 있었다.

‘그럼 자드락 선배는……?’

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르고 조용하던 좌룡강은 비에 범람하고 피에 물들어 지옥의 강처럼 보였다. 죽어 떠오른 물고기들이 물살에 흘러갔다. 그 가운데 뜯어진 이무기의 비늘들이 떠다녔다.

강에 보이는 것은 그 외에는 길게 늘어진 피투성이 이무기, 느루뿐이었다. 자드락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온은 찰나 넋을 잃고 있었다. 그사이 느루가 온몸을 떨더니 작게 줄어들었다. 인간의 태로 돌아온 느루는 사지를 떨며 재차 피를 토해 냈다.

온은 반사적으로 강 위를 달려 그를 건져 냈다.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렇다고 동기인 느루를 눈앞에서 정말로 죽게 둘 순 없었다. 그는 그 정도로 비정하진 않았다.

느루의 몸 절반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쪽 눈은 물어 뜯겨 피가 줄줄 흘렀다. 목도 반쯤 뜯겨 너덜너덜했다.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온은 고통으로 온몸을 뒤트는 그를 둘러업었다. 그는 느루를 의원에게 데려가기 위해 근처의 마을로 달렸다.

*

청화가 축지로 보내진 곳은 그들이 출발했던 임천의 호명 객잔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산에게 연락을 보냈다.

산은 예경의 사가에 도착한 직후에 그녀의 서찰을 받았다.

“이 자식이 진짜로…….”

청화가 어떻게 자드락과 떨어졌는지 읽은 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교룡들이 자드락과 마주친다 해도 싸울 이유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마니였고, 마니를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닌 자드락을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산은 불안을 잠재우려 생각을 거듭했다.

자드락은 유배된 이무기이니 유배지 밖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이무기라면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에, 소서촌에는 감시하는 병사가 한 명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자드락이 이번에 그들을 허탕하게 만들었다 해도, 또 그러기엔 무리다. 그러니 교룡들은 굳이 싸우려 하지 않았을 거다.

자드락은 무사히 유배지로 돌아갔겠지.

교룡들이 미쳐서 싸움을 걸었다 해도 그 주술 실력이면 축지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터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살 생각이 있는 이무기였다면.

산은 자신이 던졌던 물음에 자드락이 기분 좋게 웃던 것을 떠올렸다.

“아, 젠장.”

아무래도 어떻게든 세자에게 들어간 장계의 내용을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저녁, 산은 궐에 심어 둔 끄나풀을 통해 장계를 베낀 두루마리를 입수했다. 그는 급하게 그것을 펼쳐 보았다.

긴 내용을 요약하면 결국, 희명교룡과 다른 교룡들이 충돌하여 그중 느루가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희명교룡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였다.

산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자살이었다.

“미친 놈, 결국…….”

입 안이 더럽게 썼다. 그것이 여울의 미래처럼 보여 더욱.

산은 욕설을 내뱉으며 두루마리를 집어던졌다. 이 소식이 서란과 여울에게는 전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결코 긍정적인 결과는 아닐 터였다.

“돌겠네.”

그는 함을 마련해 챙겨 놓은 ‘진실’에 관한 서류들을 응시했다. 자드락이 저런 선택을 할 정도로 무너진 건 아무래도 저 진실 탓이 컸다.

산은 문득 그것을 불태워 버리고 싶어졌다. 그는 저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저것은 무기였으나 손잡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쥐고 휘두르면 제 손도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대안 없는 파괴는 혼란만을 낳는다. 그 손잡이가 될 만한 대안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마니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용을 만들어 낸 왕족 같은.

혈육의 피를 보지 않은 왕족이 교룡을 용으로 만든다면, 그를 정당한 왕으로 받들며 저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산은 제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정당한 왕.’

만약 서란이 죽지 않고도 여울을 용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바다에서 용을 거느리고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태조의 재림이 아닌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그는 제 얼굴을 쓸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걸었던 참이다. 가능성이 한없이 낮더라도 투자해 볼 가치가 있었다.

기적을 보고 싶었다.

여동생과 친우가 다른 결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원했다. 그것은 산 자신이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투자할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저 진실을 어떤 방향으로 쓸지 확실히 정했다.

결정을 내린 후에 그는 서쪽을 가늠했다. 좌룡강이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정신 나간 이무기 놈. 네 보주랑은 잘 만났냐?”

산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불현듯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송로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는 하인을 불러 주안상을 받았다. 홀로 달이 지도록 술을 기울였다. 맞은편에는 주인 없는 잔을 두었다.

술은,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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