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부드럽게 반짝이는2016.07.31.
건평 21년 10월 13일.
대결계가 거두어졌다.
발동한 지 13일만의 일이었다. 동원되었던 군이 해산되고 주술사들도 돌아갔다. 세자는 소득을 거두지 못한 결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예락은 본래 용을 바탕으로 하는 왕의 권위가 절대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중조 반정 이후로 강성해진 공신들에게는 왕을 휘두를 힘이 있었다. 세자는 공신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세자의 자질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오갔다. 필두에 선 것은 제녕군의 외가인 소양 김씨의 가주였다. 제녕군은 여의주가 없어 아예 논외인 온녕대군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은 왕자이자 소양 김씨인 강빈의 장자였다.
예경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정치 공방과 관계없이 교룡들은 추적을 재개하고 있었다. 결계가 흔들리는 충격이 발생했고, 추적술도 가리켰던 방향인 서쪽에서부터 수색이 시작되었다. 웅래산 방향이었다.
웅래산 근처의 마을들을 탐문하던 그들에게 제보가 들어왔다. 제보를 한 것은 좌룡강 임천 나루의 사공이었다.
“갈색 피부에 짧은 검은 머리의 사미국인 무사가 면사를 쓴 여인과 같이 좌수로 가는 배에 탔다고 한다.”
“언제?”
온이 서류를 읽자, 희나리가 물었다.
“바로 어제라는군.”
“또 허위 제보 아니야?”
“아니, 심상찮아. 임천에서 온 제보다. 웅래산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니까. 게다가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야.”
“하긴, 목적지가 좌수라니, 거기는 국외로 가는 배가 드나드는 항구이기도 하고……. 그럴듯하네.”
지금까지 간혹 가다 전해진 제보는 엉뚱한 사미국인을 신고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 제보는 심상치 않았다. 느긋한 자세로 듣고 있던 느루가 일어났다.
“결정됐네. 임천으로 간다.”
결정을 내리자 교룡들은 하루 만에 임천으로 이동했다. 나루에 도착해서 적당한 배를 아예 통째로 빌렸다. 그들은 도술을 이용해 배의 속도를 높인 채 좌룡강을 타고 앞서간 배를 따라잡았다. 제보가 들어왔던 배였다.
그 배에 그들이 찾는 자들은 없었다. 대신 사공들과 승객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명부에 이름을 여울이라 썼습니다.”
“호위무사 같던데, 사미국인이 흔치 않아서 눈에 띄었지요.”
“그 규수가 자기 무사를 여울이라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요.”
가만 듣고 있던 느루가 인상을 썼다.
“그래서, 어디 있는데?”
승객들이 난감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느루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그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나섰다.
“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어제 제가 봤습니다.”
“그거? 자네도 보았나? 나도…….”
“저도 봤습니다.”
하나가 나오니 줄지어 말을 꺼냈다. 느루가 눈썹을 찡그렸다.
“뭘 봤다고? 제대로 말해라.”
“그 무사가 규수를 안고 배에서 뛰어내려서, 사고인 줄 알고 놀라서 쫓아갔는데, 무,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저, 저도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신선인 줄 알았습니다요.”
“교룡님들이 쫓아온 걸 보니 신선이 아니라 그 수배 내린 이무기였나 봅니다.”
“그럼 그 규수가 마니인가?”
“그런데 그 아가씨는 납치된 거 같진 않았…….”
시끌시끌한 가운데서 말을 꺼냈던 남자가 주위의 시선에 놀라 제 입을 막았다. 느루는 서늘하게 웃었다.
“입조심해라.”
“예, 예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겁을 먹고 머리를 조아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희나리가 중얼거렸다.
“너무 대놓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아? 따라오라는 것처럼.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는데.”
그녀의 말에 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루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휙 돌아보았다.
“그럼, 흐르는 강 위를 걸어서 갔다는 사미국인이 여울 아니면 누구일 거라 생각하지? 그게 가능한 게 이무기 말고 더 있나? 이무기인 이상 거짓으로 이름을 말했을 리도 없고.”
한심하다는 듯 깔아 보는 시선이었다. 희나리는 반박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 맞는 말이긴 했다.
느루는 픽 웃더니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온은 옆으로 흘깃 눈을 돌렸다.
야로는 발돋움하여 난간에 팔을 올린 채 푸르게 흐르는 강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강바람에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난간에 올려놓은 손에는 흰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소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까만 눈은 달 없는 밤처럼 어두웠다.
“야로.”
온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야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희나리가 다가가 야로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제야 소년이 돌아보았다. 그녀는 야로의 생기 없는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입이 붙었어?”
희나리가 짜증을 냈다. 평소라면 말렸을 온도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야로는 그녀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나리는 소년을 확 밀쳤다.
“최소한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 보라고!”
야로는 구겨진 옷자락을 펴지도 않고 도로 난간에 매달렸다. 희나리는 기가 찼는지 이마를 쥐었다. 그러더니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한 선택이었잖아! 우리하고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뭘 잘했다고 침묵시위야?”
“됐어, 그만해라.”
말이 험해지자 온이 결국 제지했다. 희나리는 씨근거리다 돌아섰다. 어느새 이야기를 끝냈는지 느루가 가까이 와 있었다. 느루는 비웃음을 띠었다.
“이렇게 무능하니 그런 결과를 내는 거군.”
“무능해? 그럼 네가 야로 좀 어떻게 해 봐.”
희나리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느루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야로에게로 다가갔다. 소년에게로 허리를 굽힌 그가 가볍게 말했다.
“화련공주의 마니식이 보고 싶어?”
야로가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느루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소년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세자가 화련공주를 마니로 삼을 리가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동복누이잖아……?”
되묻는 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느루는 짐짓 다정하게 야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로야, 야로야. 내 보주는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분이야.”
야로가 그 손을 쳐내며 주춤 물러섰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느루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네 활약을 기대하마.”
야로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온은 분노한 희나리를 붙잡고 말려야 했다. 느루가 태연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됐지?”
“너! 똑같은 이무기면서! 너한테 이따위로 굴 자격은 없잖아! 네가 벌써 용이라도 된 것 같아?”
희나리가 온을 밀치고 소리쳤다. 느루는 여유롭게 답했다.
“곧 될 테니까 별 차이 없지. 너희와는 달리 말이다. 자, 잡담은 이쯤 하고. 출발하지.”
그는 홀로 산뜻한 안색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여울’이 향했다고 들은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여의주의 향을 맡았다.
*
서란과 여울은 평온했다. 추적당하는 중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마차는 한적한 흙길을 달렸다. 논밭이 종종 눈에 띄었다. 벼 수확 시기가 가까웠다. 한껏 익은 벼는 누렇게 물들어 여물은 알을 늘어뜨렸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들은 푸근한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서란은 마부석에 앉아 스쳐 가는 풍경들을 면사 너머로 구경했다. 그리 넓지 않은 자리라 그녀는 여울과 딱 붙어 있었다. 여울은 고삐를 쥔 채 마차를 모는 것에 집중하려 애썼다.
수확 중인 논이 보였다. 농부들이 논두렁에 걸터앉아 새참을 나눠 먹는 듯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마차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란은 호기심이 많았고, 세상 대부분은 그녀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목을 빼며 지켜보았다. 그러느라 그녀의 몸이 기울어지자 여울이 보지도 않고 팔을 뻗어 허리를 감아 당겼다.
“위험합니다.”
“올해는 풍년일까?”
서란은 그의 팔에 의지한 채로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여울이 기억을 더듬어 답했다.
“작년보다는 작황이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잘된 일이구나.”
어렴풋이 보이는 면사 아래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그녀가 여울에게 기댔다.
“예락에서 가장 큰 곡창 지대는 보료 평야라고 알고 있단다. 거기도 가 보았느냐?”
“예. 머문 적은 없으나 지나다닌 적은 많습니다.”
“어떠하더냐? 추수철이면 정말로 황금 보료를 깔아 놓은 것처럼 보이느냐?”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여울은 제가 보았던 지평선을 떠올렸다. 그는 서툰 말솜씨로 이야기를 꺼냈다.
산자락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야. 그 평야를 가득 채운 논. 익은 벼가 햇빛을 머금어 황금처럼 빛나는 풍경.
대지 위에 금실로 수를 놓은 보료를 깔아 둔 듯이 풍요로운 곳. 바람이 그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여문 곡식들이 물결치는 모습.
서란은 가만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그가 말하는 대로 상상하여 그려 보았다.
“여울. 나는 말이다.”
앞으로 펼쳐진 길은 죽 곧았다. 여울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란은 마부석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를 까닥거렸다. 너울 너머로 웃는 얼굴이 어린 소녀처럼 밝았다.
“가 보고 싶은 곳이 무척 많았단다.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어릴 때는 크면 다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느니라.”
“……무엇이 그리 해 보고 싶으셨습니까?”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발로 디뎌 보고 싶었다. 보료 평야의 황금 들판이나, 해외의 문물들이 모여든다는 용미의 장시, 구름이 발 아래로 깔린다는 조령을 넘는 길,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고 화려한 깃털의 새들이 산다는 남해의 섬, 천 길 낭떠러지라던 강벽 산맥의 폭포, 능선을 타고 20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는 색색의 차밭…….”
목이 아직 낫지 않아 조그만 목소리가 달리는 마차의 소음 속에서 나른하게 이어졌다. 꿈길을 걷는 듯이.
“해 보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지. 아기나인들이 저희끼리 모여 봉숭아물을 들이며 노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 나는 안 끼워 주더구나. 화려한 당의 때문인가 하여 당의를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적도 있었단다. 어머니께서 무척 난감해하셨지.”
서란은 혼자 소리 내어 웃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벗을 사귀고 싶었다. 쌍륙 놀이를 같이 해 보고 싶었단다. 함께 꽃놀이를 가서 노을이 지도록 이야기를 하거나.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같이 무얼 하든 즐거웠을 것 같구나…….”
여울은 산이 주었던 화예옹주에 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글자 아래에 어렴풋하던 외로움이 그녀의 말 속에서 생생하게 묻어났다.
먹먹했다. 떠나지 말 것을. 자신이라도 그녀 곁에 있어 줄 것을 그랬다.
그는 간신히 대꾸했다.
“그 외에는 또, 무엇이 하고 싶으셨습니까?”
“음…… 정월이면 마니전 담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연들. 나도 연을 날려 보고 싶었다. 마니전 안은 좁아서 날릴 수가 없었거든.”
소소했다. 소룡전에 갇혀 사는 이무기들조차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조차 해 보지 못했던가. 후회는 끊임없이 쌓여 갔다.
서란은 그가 아니라 지나치는 논들을 보느라 그의 얼굴이 가라앉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흥이 난 듯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조금 자라고 나서는 다른 것들이 하고 싶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뭐였을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과거를 쳐 보고 싶었단다.”
“예?”
“스승님께선 내게 ‘마마는 영특하십니다’라고 칭찬하면서도 숙제를 해 가면 매번 지적만 했거든. 잘못되었습니다.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리 하시면 안 됩니다. 맨날 그러셨단다.”
“엄한 분이셨군요.”
“응, 그래서 내가 정말 영특하긴 한 건지 궁금하여 과거를 쳐 보고 싶었다. 반쯤은 훌륭한 결과를 내서 스승님께 자랑하려는 마음이었지.”
그녀는 조금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여울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서란이 눈을 흘겼다.
“웃지 말거라. 사실 더한 생각도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그러십니까.”
“으음. 발칙한 생각?”
그녀가 키득키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 역사와 제도를 배우면서 온갖 몽상을 했단다. 나라면 이리할 텐데, 이런 점은 바꾸고 싶은데, 하고. 발칙하지 않느냐? 생각으로는 누가 못하겠느냐.”
“그런 생각이 드시는 게 신기합니다. 저는 소룡전에서 학사가 관직 체계를 외우라 할 때 차라리 검이나 휘두르고 싶었습니다.”
“글쎄, 내가 건방졌던 게지. 마니가 아니었다면 역심을 품었다 몰려 죽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않느냐.”
“……마니는 본디 왕이 될 자를 일컫는 말이었다지 않습니까.”
여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서란은 멈칫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 교룡을 용으로 만든 왕족이었지.”
“후계의 조건이 그것이었다고 하니 크게 다를 건 없지요.”
“그때와 지금은, 너무도 다르지 않느냐.”
“……분명히 존재했던 방법이니,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서란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목가를 문질렀다. 그 동작에 여울이 덜컹 놀랐다.
“목이 아프십니까?”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당장이라도 마차를 세우고 그녀를 살피려는 듯해 서란은 그의 팔을 잡았다.
“아니, 아니다. 그냥 만져 본 것뿐인데 뭘 그리 놀라느냐.”
“아파서 만지신 게 아닙니까?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아니, 좀 간지러워서. 나아 가는 모양이다. 간지러운 것을 보니.”
“그래도 살펴보는 게 낫겠습니다.”
“걱정이 과하여졌구나.”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여울은 고삐를 놀려 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답했다.
“제가 과한 것이 아니라 보주께서 지나치게 의연하신 겁니다. 얼마나 중상이었는지 자각이나 하고 계십니까?”
“괜찮대도.”
마차를 세운 여울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약 상자를 챙겨 왔다. 그리고 그녀의 붕대를 갈며 꼼꼼히 상처 부위를 살폈다. 서란의 코앞에서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목을 보고 있었다.
서란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무기들은 대체로 외모가 단정하다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축에 드는 것 같았다.
가까이 있으니, 두근거렸다.
속눈썹이 참 길구나. 만져 보고 싶다.
그녀는 참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그의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의 목에 집중하고 있던 여울이 흠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얼이 빠진 낯이었다.
서란은 민망해 제 손을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검은 눈이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냥, 만져 보고 싶어져서.”
서란이 우물거렸다. 여울은 한참을 굳어 있었다. 그가 더듬더듬 붕대를 마무리했다. 그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너무 시험하지 마십시오.”
“시험이라니, 무슨…….”
의아하게 되묻다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 산중에서 나눴던 대화.
접문할 때 동하여서 그런 거냐고 그녀가 물었고, 결국 접문을 하였을 때. 그가 그녀에게 시험해 보시겠느냐고 했었다.
그 의미를 되새긴 그녀의 목덜미가 흰 붕대 너머로 붉게 달아올랐다.
여울이 다시 고삐를 잡았다. 산이 미끼로 추적의 방향을 틀어 준다 했어도, 언제 쫓기게 될지 모르니 길을 서둘러야 했다. 바다가 가까워지는 게 반갑지 않은 그의 심정과는 별개로.
다시 울리는 말발굽 소리 가운데서 서란이 입을 열었다.
“이리 궐을 나온 덕에 보고 싶었던 것들 중에 본 게 많아 좋구나.”
“험난한 일정이었는데 뭘 보셨다고 그러십니까.”
“천년호가 예뻤다. 산은 원 없이 본 것 같구나. 도하의 야시장도 좋았고. 흑룡강이 정말로 검은빛 물인 것도 신기했지. 또, 홍평에서 온천도 즐겨 봤잖느냐. 그리고 이젠 바다로 가고 있고. 이만하면 충분히 행복하단다.”
“……더 많은 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여울은 보이지 않게 이를 사려 물었다. 용이 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뭐든 할 수 있도록 그녀를 받쳐 줄 수 있을 텐데. 애타는 소망에 비해 지금의 자신은 지독하게 무력했다.
서란이 그의 팔을 잡아 왔다.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댔다.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는 잠깐 호흡을 골라야 했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충분하다고 했잖느냐. 하고 싶었던 것 중에 네 덕에 이룬 것도 있는 걸.”
“무엇입니까?”
“연정을 나누는 것.”
여울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귀가 붉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의 팔에 닿아 있는 그녀의 몸이 웃음으로 가볍게 흔들렸다.
“답하지 않아도 찾아 듣겠다던 이는 어디 가고, 이리 수줍어하느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그럽니다.”
“좋아서?”
“예.”
망설임 없이 답한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서란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니 목의 상처가 아파 왔다.
그녀가 웃다 말고 콜록거리자 여울이 대경했다.
다시 마차를 세우려는 그를 그녀가 붙잡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너울 너머로 얼핏 보이는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고통 반, 웃음 반인 눈물이었다.
“이 상처, 다 나으려면 얼마나 걸리느냐?”
“못해도 두 달입니다.”
“그건 너무 길다. 몽해에 도착할 때쯤엔 어떨 것 같으냐?
“닷새쯤 남았으니, 격한 움직임이나 큰 소리는 내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불편은 가실 것입니다.”
“그럼, 그때쯤…… 허락하마.”
“예?”
그녀는 그를 붙잡고 살짝 몸을 일으켜 귓가에 속삭였다.
“전에, 내가 허락하면 닿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서란이 그 말을 속삭여 놓고는 모른 척 시침을 떼고 반듯하게 앉았다. 여울은 손에서 미끄러지는 고삐를 아슬아슬하게 붙들었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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