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남겨 두고 싶은 순간2016.07.28.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흰 머리의 주술사가 말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듣던 느루가 이를 드러냈다.
“무리? 뭐가 무리란 말이야?”
“오늘 두 명이 혼절했습니다. 송장을 치우실 게 아니라면 대결계를 거두어야 합니다.”
“약해 빠졌군. 알았다.”
느루가 투덜거렸다. 결계가 발동한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느루는 손짓으로 주술사를 물리고 세자에게 보고할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결계 내부의 수색은 거의 끝났다고 봐야 했다. 어디에도 마니와 여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머물렀던 동굴은 몇 군데 발견했으나, 거기에 머물렀던 게 마니와 여울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초반에는 정신없이 나타나 병사들을 교란하던 여울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가 벌써 1주일이 넘었다. 남아 있던 혈흔을 모조리 이용해 추적술도 썼다. 혈흔은 웅래산 쪽을 가리켰지만 그곳을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미 결계를 빠져나간 게 아니냐는 말이 오갔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나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계를 나간 게 아니라, 마니를 치료하느라 처박혀서 안 나오고 있는 게 아닐까.”
희나리가 막사 기둥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다리는 그럭저럭 운신할 만큼 회복되었다. 온은 어깨의 붕대를 새 것으로 갈며 대꾸했다.
“그런 거면 이미 걸렸어야지. 수색하는 병사가 몇인데. 실종된 병사도 없고.”
그 역시 경미하던 관자놀이나 손의 부상은 다 나았고 어깨만 아직 어색한 상태였다. 이무기들의 회복력이 탁월한 덕분이었다. 희나리는 그가 어깨 뒤에 매듭을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움직일 만해?”
“그럭저럭. 여울이랑 싸우라고 하면 사양하고 싶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다음에 마주치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거든.”
온이 쓰게 웃었다. 희나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막사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에는 야로의 천막이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온이 물었다.
“야로는 여전해?”
“……응. 오늘도 벽 보고 앉아서 한마디도 안 하더라.”
“보주 곁으로 돌려보내면 좀 괜찮아질 것 같지 않나?”
“느루나 세자나 허락할 리가 없지.”
“화련공주는 세자도 꽤 아끼지 않아? 그냥 돌아가 버려도 아무 짓도 안 할 거다.”
“화련공주가 아니라 야로를 가만두지 않을걸?”
희나리가 비뚜름하게 내뱉은 말에 온이 머리를 짚었다. 칙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입구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세자에게 서찰을 보내고 온 느루였다.
“내일부터 결계 외곽 지역도 뒤진다.”
“결계는?”
“보주께 보고했으니 답신을 기다려야지.”
“알겠다.”
짧게 할 말만 한 온이 고개를 돌렸다. 희나리는 아예 말도 하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한 교룡들의 태도에 느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밖으로 향했다.
*
돈을 들인 마차는 요동이 적었다. 산이 일러 준 경로는 인적이 뜸한 샛길이었다. 예락에서 인적이 뜸하다는 것은 곧 요마가 많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여울이 있기에 잡다한 요마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타나는 요마는 그의 검에 양단되면서 마차에 들러붙기도 전에 떨어져 나갔다.
서란은 마차의 창턱에 팔을 괴고 밖을 지켜보았다. 산해경에서 본 요마도 있었고 구별하기 어려운 요마도 있었다. 처음에는 흠칫흠칫 놀랐으나,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으니 이제는 요마가 튀어나와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저리 강하면서도, 그때는.’
그녀는 부서질 것처럼 보였던 그를 떠올렸다.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며 울던 그를.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 모습이 깊게 남았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고마우면서도 화가 났던.
그가 그녀를 마음에 담아서 기쁘고, 기다리는 미래가 슬펐다. 희망을 말해 줘서 고마웠으나, 헛된 희망이기에 화가 났다.
그를 끌어들인 게 미안하면서도, 자꾸만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를 보는 그녀는 늘 상반된 감정에 빠져들었다. 속절없이 흔들리고 다듬어 놓았던 마음이 흐트러졌다.
‘좋아하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녀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소녀처럼 설레는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끼이익!”
순간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요마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사람의 머리에 원숭이 같은 생김새인데 외팔에 외다리였다. 그놈이 하나뿐인 팔로 마차의 지붕에 매달리더니 외다리를 창 안쪽으로 뻗었다.
서란이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것보다 빠르게, 여울의 검이 그 요마의 다리와 팔을 한 칼에 베어 버렸다. 달리는 마차 아래로 떨어진 요마의 몸뚱이가 굴러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괜찮으십니까?”
여울이 마부석을 딛고 마차 지붕을 쥔 채 몸을 내밀어 창 쪽을 보며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요마의 피가 튀었을까 봐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응, 아무렇지도 않느니라.”
“숲길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요마가 나올 것 같습니다. 창을 닫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다.”
서란이 순순히 답하자 그가 도로 마부석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내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서란은 덧창을 닫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아무래도 여울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계속 지극했으나 그건 예전과 똑같은 태도였다. 그녀가 그에게 답을 줬는데도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연모하지 말라 할 때와 비슷했다. 무언가 말하려다가도 말고, 그녀에게 닿을 때 조심하는 것이.
“설마, 못 알아들었나?”
그러고 보면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입모양으로 겨우 말했었다. 알아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듣고 모른 척하는 경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여울은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로 능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서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없는데.’
그녀는 마차 안에 있고, 그는 마부석에 있으면 하루 중에 그를 마주할 수 있는 건 잠깐의 휴식 시간과 잘 때뿐이었다. 너무 짧았다. 부족했다. 그녀는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마차는 순조롭게 이동했다. 서란은 마차 안에서 내내 고심하다 결정했다. 다시 말하기로.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로 직접.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여울은 적당한 공터에 마차를 세웠다. 말을 쉬게 하고 모닥불을 피운 후에야 그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멀미를 하진 않으셨습니까?”
“괜찮다.”
그가 서란을 부축해 그새 마련해 둔 자리에 앉혔다.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임천에서 챙겨 온 재료들로 죽을 끓였다. 솥을 불에 올려 두고 나서 그가 서란에게 다가왔다.
“붕대를 갈겠습니다.”
서란이 제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모아 넘겼다. 짧게 잘린 일부가 눈에 띄었다. 여울은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붕대를 풀고, 약을 바르고, 자드락이 챙겨 줬던 부적을 붙이는 작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손목의 상처까지 살핀 후에야 그는 물러나 솥을 확인했다. 목을 다친 서란을 위해서는 조금 식혀야 했다. 솥에서 죽을 떠서는 한쪽에 두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얌전히 구경하던 서란이 입을 열었다.
“여울.”
“예, 보주.”
“전에 내가 했었던 말은 알아들었느냐?”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울었던 때에.”
여울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부상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작고 쉬어 있었지만 그녀에게 집중하는 그에게는 선명하게 들렸다. 서란은 살짝 웃었다.
“아무래도 그때,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무엇을 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좋다고 했었다.”
해는 서산 끝에 걸려 있었다. 마지막 햇살이 누렇게 마른 풀 위로 길게 늘어졌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 노을과 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그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연모한단다.”
여울의 손이 뻣뻣하게 움직이다 죽 그릇을 엎었다. 그는 멍하니 풀밭에 쏟아진 죽을 내려다보다 새로 그릇을 꺼내서 떠 놓았다.
그러다 바닥의 죽을 밟고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뛰어난 균형 감각 덕에 용케 넘어지진 않았다. 그는 죽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아래와 제 손에 들린 죽 그릇을 번갈아 보았다.
명백하게, 허둥거리고 있었다.
서란은 저보다 한참 커다란 그가 그러는 꼴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몽글몽글한 것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라 입꼬리를 간질였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 믿기더냐?”
여울은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표정이 완전히 풀어진 채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가를 가렸다. 서란이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이리 와 보거라.”
서란은 그가 앉도록 옆으로 약간 비켜 앉았다. 그는 다가온 후에도 앉지 못하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약한 힘이었지만 그는 휘청거리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자세는 굳은 채였다. 서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쪽을 보렴.”
여울이 고개를 틀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반달처럼 눈을 휘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내가 농을 하는 것 같으냐?”
바다에 도착하면 어찌할 것인지, 그녀는 여전히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여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말이 뇌리를 흔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닿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이 닿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란이 속삭였다.
“눈을 감으렴.”
그는 반사적으로 명에 따랐다. 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말캉한 살이 맞닿자 그의 어깨가 흠칫 움직였다.
서란은 팔로 그의 목을 안고 제게로 당겨 내렸다. 여울이 놀라 헛숨을 들이키는 바람에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그 틈에 그의 입 안으로 난입했다. 긴장하고 있는 혀를 장난치듯 건드리고 아래로 파고들어 익숙한 타액을 훔쳐 냈다.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울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신호인 양, 굳어 있던 그의 팔이 움직였다. 그녀의 허리와 목을 감싸고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복수하듯 그녀의 입 속으로 그가 파고들었다.
난폭하게 잡아채다가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입술을 살짝 깨문다. 낮은 신음이 오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 그녀를 얽어맨다. 그가 자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란이 약간 몸을 비틀었다. 그 움직임에 여울은 제가 과한 힘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 역시 호흡이 거칠었다. 각자의 더운 숨이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않는 그들 사이의 공간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달아오른 침묵이 내려앉았다.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서란이 문득 미소를 띠었다.
“향을 지운다는 건 좋은 핑계지. 그렇지 않느냐?”
요 며칠 계속 파리하던 그녀의 입술이 입맞춤 탓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입술이 움직이며 작은 목소리를 내고, 곱게 휘어진다.
여울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정말로 향을 지우려는 목적이셨습니까?”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느냐?”
그녀의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가 발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투정 같은 대꾸였다.
여울은 제 품 속에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 줌에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몸. 녹아 사라져 버릴 듯 보드랍고 연약한.
혈관을 따라 탐욕이 흘렀다.
아찔한 찰나에 그 목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쿵 내려앉는 감각. 공포가 기어오른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과 함께 오르내리는 가슴. 그 생명의 박동이 미어지도록 사랑스러웠다. 두려움에 잠식되던 마음이 겨우 안정되었다.
서란이 그를 마주 안았다. 넓은 등에 손을 올렸다. 옷깃 아래로 꽉 짜여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그의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서늘한 체온에 그녀의 체온이 옮아 서서히 따듯해졌다.
굳건한 팔에 온몸을 맡겼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숨소리에 자신의 호흡을 맞췄다. 한 몸처럼 동시에 드나드는 숨. 저무는 노을이 붉은 면사포처럼 그들 위로 흘러내렸다.
앞날이 어찌 되든, 지금만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 떠오른 감정을 그대로 입 밖에 내었다.
“행복하구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울컥 솟구치는 감정들을 고르고 골라 다듬어 물었다.
“……왜 갑자기 저를 받아 주시는 겁니까?”
“받아 주는 게 아니란다. 그냥, 깨닫게 된 것이니라. 진작부터 내 감정은 이러했다는 것을.”
“그런…….”
“사실은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녀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이질적이어서 섬뜩하게 보일 수도 있는 길쭉한 동공의 눈동자가 묘안석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올곧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울이 파득 떨었다.
서란이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느냐?”
그는 웃고 있는 그녀를 넋이 나간 것처럼 바라보았다. 손끝이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눈가를 더듬는다.
여울은 그럼 왜 이제야 이리 하시느냐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치솟는 물음을 그냥 삼켰다. 대신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올려 그 입술을 다시 삼켰다.
서란은 움찔 놀라 뒤로 빠지려 했다. 여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 욕심을 실컷 채우고서야 떨어졌다. 그녀를 안은 팔은 여전하여 그의 품에 갇힌 꼴이었다.
서란은 어지러워서 그의 옷깃을 쥔 채 한숨을 쉬었다.
“……믿겠습니다.”
뒤늦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답하는 그는 묘하게 서글퍼 보였다. 그녀의 대답 말고도 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렸다. 무엇을 믿고 싶은 것일까. 서란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짓궂게 말했다.
“죽, 다 식었겠다.”
여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죽 그릇을 건네고 모닥불에 약탕기를 올렸다. 그는 서란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약재를 넣고 탕약을 달였다.
그가 식사를 마친 서란에게 탕약을 내밀었다. 군소리 없이 그녀가 쭉 들이키자 살구로 만든 달달한 과편을 입에 넣어 주었다. 쉽게 삼키도록 잘게 자른 것이었다.
서란은 빈 그릇을 내려놓고 과편을 입 안에서 굴렸다. 단맛이 쓴맛을 밀어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는 정말 살뜰하구나. 의외로 말이다. 물론 그런 점도 좋단다.”
여울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녀의 변화가 기쁜데, 분명 기뻐서 호흡이 흐트러질 지경인데도, 왜 가슴이 아릴까.
여울은 바다까지 남은 거리를 헤아리려다 말았다. 견디기 어려웠다.
서란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보며 물었다.
“내일은 마부석에 함께 앉아 가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부석은 그다지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약해진 그녀의 몸에 무리를 줄지도 모른다. 여행 자체로도 피곤할 터였다.
“보주의 몸 상태에 좋지 않습니다.”
“피곤해지면 바로 들어갈 테니, 응?”
“허나.”
“너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다.”
여울이 말을 잃었다. 갈색 피부에도 확연히 티가 날 만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어물거리는 사이 서란은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리 알겠느니.”
일어난 그녀가 서툴게 제가 먹은 그릇들을 정리했다. 불안한 손놀림에 여울이 다가와 그것들을 빼앗았다.
“이런 건 제가 할 일입니다.”
“안 해 봐서 서툰 것이지,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보주께서 하실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늘 시중만 받을 순 없잖느냐?”
“제가 계속 곁에 있을 텐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니까, 너한테만 시키기 민망하여 그런 것이 아니냐.”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여울이 그녀를 간단하게 마차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쥐고 귓가에 속삭였다.
“평생 모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쉬시지요.”
그가 가볍게 그녀를 밀어냈다. 서란은 몇 발짝 마차 쪽으로 걷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새 약탕기를 내리고 불을 밟아 끄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서 문을 열어 놓았다. 보료 위에 걸터앉아 그가 뒷정리를 하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돌아서던 여울이 그 모습을 보고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문을 닫으시지요. 바람이 들잖습니까.”
“보는 것 정도는 내버려 두렴.”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많은 표정을, 다양한 움직임을, 기억에 새겨 두고 싶었다. 이 순간을 뚜렷이 남겨 두고 싶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여울이 묵묵히 다가오더니 모포를 꺼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단단히 싸매 놓고 그는 다시 멀어졌다.
서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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