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41화 (41/70)

41. 계획2016.07.21.

마루로 나오자마자 자드락은 제 팔을 쥔 산의 손을 쳐냈다. 산 역시 순순히 놓아주었다. 자드락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배려가 넘치시네.”

“눈치가 있으면 당연한 거지.”

능청스러운 산의 대꾸에 자드락이 코웃음을 쳤다.

머뭇거리고 있던 청화가 조르르 달려와 산에게 서찰을 건넸다. 산은 그것을 펼쳐 들었다. 주술사 김씨가 보낸 보고였다. 빠르게 훑어본 그는 그것을 청화에게 도로 건넸다.

“네가 답장 좀 써서 보내라.”

“뭐라고 써요?”

“시키는 거 하면서 눈에 안 띄게 얌전히 있으라고. 상황 변할 때마다 보고 보내고.”

“네에.”

청화가 끄덕였다. 그녀는 돌아서기 전에 긴 머리를 다듬지도 않고 산발하고 있는 자드락을 흘깃 보았다. 그러다 자드락과 시선이 마주치자 찔끔 놀라서 부리나케 멀어졌다. 산이 혀를 찼다.

“애한테 겁주기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뭔데?”

“당연히 뻥이지.”

“이래서 인간이란.”

“유배지 밖에서 싸돌아다니는 이무기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나 못하는 일이지.”

“그게 자랑이냐?”

“물론.”

산은 질린 얼굴로 자드락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가끔 청화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곤 마루에 주저앉았다. 자드락은 그런 산을 보더니 아예 드러누웠다.

산은 여울과 함께 나타난 자드락을 처음 봤을 때, 걸인 내지는 광인인 줄 알았다. 몰골도 엉망이고 눈빛도 영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빗물과 먼지를 씻어 낸 후에 보니 나긋하니 곱상하여 과연 이무기구나 했다. 그럼에도 광인 같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괸 채 말했다.

“너 진짜 안 돌아가도 되냐?”

“안 가.”

“그럼 뭐 하게?”

“나만 가능한 짓.”

“그게 뭔데?”

“거짓말하기.”

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하는 이무기라니, 그의 상식 전체가 붕괴하는 기분이었다. 자드락은 킬킬 웃었다.

“아까 받은 보고, 결계 내부 이야기지? 결계 안에서 헤매고 있는 놈들이 마니가 빠져나온 거 알아채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내가 무당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확실한 건 대결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 정도지.”

“며칠?”

“벌써 9일째니까, 앞으로 사흘. 좀 미쳐서 무리하면 닷새쯤? 그 이상은 주술사들이 쓰러질 거다. 형님이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주술사들의 목숨에 위협이 갈 정도로 굴릴 순 없겠지.”

“그럼 기껏해야 사나흘 정도 여유가 있는 건가.”

자드락이 생각에 잠겼다. 산은 그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보이는 마당을 쳐다보았다.

꽤 높은 담으로 둘러진 별관 마당 안쪽에는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시월을 맞이한 나무들에는 죽어 가는 잎들이 고운 색으로 매달려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냉기를 머금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은 아직 아니었다. 첫눈은 언제쯤 올까, 눈이 오면 상단의 상행은, 이런 생각을 이어 가던 산은 문득 서란을 떠올렸다.

그녀는 올해의 첫눈을 볼 수 있을까.

문이 열렸다. 여울의 부축을 받아 나온 서란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녀는 손짓으로 그들을 불렀다. 산과 자드락은 일어나 그녀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야, 너 울었냐?”

산이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을 자드락이 대놓고 지적했다. 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서란이 의자에 앉는 것을 도왔다. 자드락이 바닥에 쪼그려 앉더니 턱을 괴고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산은 배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한숨을 길게 토하고는 지도를 꺼냈다.

“란아. 현음당 기억하지?”

여울이 건네주는 붓을 받아 들던 서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이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지도의 방향을 틀었다.

“너한테 성학집요 가르치다 쫓겨났다며. 형님이 다 불더라.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

서란은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내려다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급하게 붓을 움직였다.

[쫓겨나셨다고요?]

“응? 몰랐어?”

붓이 멈췄다. 서란은 망연히 제가 쓴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은 여사가 오지 않을 거라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그녀에게는 현음당과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상궁이 전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스스로 떠나신 줄 알았다. 그건 단둘이 나누었던 대화였으므로.

체념은 익숙했으나 그때엔 조금 힘들었다. 답답한 마니전에서 그녀에게 숨 쉴 틈이란 현음당의 강학과 여울의 서간뿐이었는데.

뒤늦게 의심해 보았다. 떠나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말에, 현음당은 무어라 했었던가.

상궁이 전해 준 말이 현음당이 남긴 소식인 줄 알았다. 그녀가 무언가 실수를 했는지, 왜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는 게 즐겁지 않은지 생각했었다. 알 수 없어서, 알 방법도 없어서 체념했었다.

현음당은 열두 살 때부터 5년을 함께했던 스승이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떠날 일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가 고작 저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갑작스레 사라질 사람이었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한심했다. 스승을 볼 낯이 없다. 그녀는 스승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버려진 게 아니라…….

서란의 표정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어머니의 손을 놓쳐 버린 어린아이처럼.

그 표정에서 대답을 읽어 낸 산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쫓겨난 것인 줄도 몰랐으면, 무슨 심정으로 스승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였을까.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까지 가르칠 정도면 사제 간에 정이 깊었을 텐데. 그녀의 삶에서 한 손에 꼽히는 친인이 아닌가.

‘쫓아냈으면 적어도 쫓아낸 거라고 알려 주기라도 하지.’

산은 울컥 화가 치밀다가, 자신이 화를 낼 자격이 없다 싶어 참았다. 그는 마니에게 관심조차 없었지 않나.

산은 서란의 뒤에 시립해 있는 여울을 슬쩍 살폈다. 입매가 굳어 있었다. 자신처럼 울컥했다가, 그녀 곁에 있지 않았던 교룡이라 화낼 자격이 없어 참고 있겠지.

산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성학집요를 배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인이 일러바친 모양이야. 형님을 거쳐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갔고, 처벌이 내려졌지. 여사직에서 물러나는 것과 남편인 대사간의 관직 강등이었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그냥 사직서를 내고 일가 전체가 시골로 내려갔더라고.”

안 그래도 파리하던 서란의 안색이 더 하얘졌다. 산은 내심 혀를 차고는 지도에 몽해라 쓰여 있는 작은 현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더라. 새로 현음당을 짓고, 남편과 아들까지 합세해서 은근히 학문을 나누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 아래에서 사사한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알음알음 ‘몽해 학파’라 칭하고 있더군.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군요.]

획의 끝이 조금 떨렸다. 산은 싱긋 웃었다.

“만나고 싶지 않아? 마침 바닷가인데.”

만날 수 있다고? 현음당을?

서란이 급히 고개를 들다가 어깨를 움츠렸다. 함부로 움직인 바람에 목의 상처에 무리가 갔다. 붕대에 핏물이 묻어났다.

“으.”

그녀가 신음하며 목을 감싸자 여울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의 목을 살폈다. 바닥에 주저앉아 없는 듯이 있던 자드락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벙어리로 살고 싶으냐고. 응? 조심 좀 해라.”

그가 투덜거리며 침통을 꺼내 들었다. 여울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을 받쳤다. 자드락은 거침없이 붕대를 풀어냈다.

실로 봉합해 둔 깊은 상처가 빛 아래에 드러났다. 완전히 낫더라도 커다란 흉이 남을 것이다. 피딱지 사이로 흥건하게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본 산은 작게 욕을 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자드락은 상처 근처에 침을 두어 개 꽂더니 새어 나온 핏물에 대뜸 입을 가져다 댔다. 그가 피를 핥아 삼켰다. 그 감촉에 서란이 움찔 놀라 몸을 빼려는 것을 자드락이 씁, 하고 소리를 내며 붙들었다.

여울은 그녀의 목을 받치고 머리카락을 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나온 피를 모조리 먹은 자드락이 야살스레 웃었다.

“아깝잖아, 유배지 밖에 있으려면 안 그래도 필요한 피라고.”

그는 고약과 약물을 꺼내 상처 근처를 닦아 내고 약을 발랐다. 침을 거둔 그가 새 붕대를 들어올리자 여울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내가 하지.”

자드락은 순순히 붕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놈이 내 친구랑 동생을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여울은 서란의 목에 조심스럽게 붕대를 매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이 딱딱한 것을 눈치 채고 난처하게 웃었다.

상황이 마무리된 후에 그녀가 다시 붓을 잡았다. 자드락은 여전히 바닥을 쳐 가며 웃고 있었지만 다들 모른 척했다. 그녀는 붓을 쥔 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글을 썼다.

[그게 가능할까요? 스승님께서, 원하실까요?]

“항구가 있는 좌수나 창릉 쪽으로 가는 것보다야 눈에 덜 띄겠지. 현음당이 원할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

산은 현음당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현음당에 대해 아는 건 그녀뿐이다. 서란은 그리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마니인 그녀에게, 마니를 뽑은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라 대놓고 알려 주었던 사람. 그녀를 가르치고,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던 스승. 그녀가 마니인 것에 개의치 않고 그녀를 사람으로 대해 주었던 여인.

만나고 싶었다. 마음이 일렁거렸다. 만나고, 싶었다. 너무나도. 그냥 스쳐 가는 것이라도 좋았다. 묻어 둔 그리움이 사무쳤다. 서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치미는 감정들을 익숙하게 갈무리하며 붓을 놀렸다.

[서찰을 보내 여쭙고 싶습니다. 전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게 뭐 어렵다고. 네가 써서 주면, 바로 보내도록 하지.”

산이 선선히 대꾸했다. 서란은 턱을 괴고 있는 오라비를 응시했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썼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뭘. 아, 그래도 출발할 준비는 미리 해 둬야 할 거다. 어찌 되든 여기 오래 머무르긴 너무 위험하니까.”

[대결계에서 저희가 나왔다는 건 언제쯤 들킬까요?]

“글쎄. 확실한 건 대결계가 유지 가능한 기간이 길어야 닷새 정도 남았다는 거지. 주술사들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말이야.”

서란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아까의 통증 때문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픈 판국에 무리를 하기까지 했으나 당연한 일이었다.

여울이 그녀가 보고 있던 지도를 밀어냈다.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란이 도로 지도를 잡아당겼다.

[내가 다친 탓에 여유가 별로 없다. 지금 결정해야 할 일이니라.]

“무리하시다 몸이 상하면 더 좋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

“보주께선 본인의 상태를 가벼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내 몸 상태인데 내가 모르겠느냐?]

“예,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결정해야 하는 것도 맞고, 서란의 몸 상태가 이러고 있기에는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글과 말로 다투는 주종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웃음을 그친 자드락이 쭈그려 앉은 채 눈을 굴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좌수 가는 배표 끊으면서 일부러 행적을 흘려. 그리고 너희는 그 배 타지 말고 육로로 몽해로 가라.”

그는 산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머지는, 쟤랑 내가 알아서 하지.”

“뭐?”

산이 황당하여 되묻는 것을 자드락이 깨끗이 무시했다. 그가 여울에게 눈짓했다.

“야, 마니 가서 쉬게 해. 잡다한 생각 하지 말고 푸욱 쉬게 좀. 미음이랑 약도 챙겨 먹이고.”

“알았다.”

서란이 무언가 항변하려 붓을 움직이는 것을 여울이 붙잡았다.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에서 붓을 빼앗았다.

“쉬셔야 합니다. 지금 보주 안색이 어떤지나 아십니까?”

여울이 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빠른 동작이었으나 정중했다. 너무 쉽게 들려 안기자 서란은 포기하고 그의 품에 기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산이 흘리듯 말했다.

“참, 너한테 투자한 그 결과물들. 난 안 써. 일단 보류해 놓을 거야. 혹시나 뭔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결정은 나중에 해.”

산 쪽을 돌아보려는 서란을 여울이 제지했다. 그러곤 서란을 안은 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산이 자드락에게 턱짓했다.

“뭘 알아서 하자는 건데?”

“돈 줘.”

자드락은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산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돈? 맡겨 놨냐?”

“아니다, 네가 구해라. 그게 낫겠지.”

“그러니까 뭘?”

“여자 하나 구해 와. 마니랑 비슷한 키의.”

“……여자를?”

“내가 그 여자와 함께 배를 타고 좌수로 가겠어.”

자드락이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좌룡강을 따라 덧그려졌다.

“여울의 이름으로, 이무기인 티를 내면서.”

산의 얼굴이 굳었다.

이무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그 사람인 척 미끼가 되는 것 따위는. 물론 정상적인 이무기일 경우였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건 거짓말을 꺼리지 않는 이무기였다.

자드락이 여울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도술을 쓰는 모습을 보이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터다. 이무기니까. 이무기가 제 이름을 여울이라 하는데 누가 미끼라 여기겠는가.

추적이 자드락이 향하는 좌수 쪽으로 쏠린다면 서란과 여울은 안전하게 몽해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자드락만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위험할 텐데?”

“인정한다며? 내 실력.”

자드락이 어깨를 으쓱였다. 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물건에 축지를 거는 것도, 새로운 주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수백의 주술사가 친 결계를, 비록 균열이 있고 충격을 주었다지만 넘어 버린다는 것까지, 확실히 본 적이 없던 실력이었다.

인간이었다면 전무후무한 주술사로 이름을 날렸을 수준이다. 이무기이니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물론 이무기로 쳐도 탁월하긴 했다.

“여자의 안전은 보장할 테니까 한 명 구해 봐. 마니로 위장할 사람이 필요해.”

“그러고 나면, 너는?”

산의 물음에 자드락은 잠깐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비실 풀린 얼굴로 약간 뒤로 물러났다.

“적당히 유인하다 여자 보내고, 난 축지로 돌아갈 거야. 소서촌으로. 됐지? 그렇게 알겠어.”

빠르게 내뱉은 자드락이 창으로 다가가더니 창틀을 잡고 뛰어넘었다. 산은 창을 문처럼 써서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자드락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창문에서 안 보일 곳에 다다르자마자 벽을 짚고는 웩, 피를 토해 냈다. 목덜미와 팔뚝을 따라 두두둑 비늘이 솟았다.

그는 입가를 문지르고는 허리춤의 호리병을 꺼내 몇 모금 들이켰다. 핏자국은 발로 대충 흙을 파헤쳐 묻어 버렸다.

그가 그대로 자리를 뜨려다가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더니 제가 토해 놓은 피를 활용해 장거리 축지용 매개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

서란을 방에 데려간 여울은 능숙하게 그녀를 돌보았다. 의자에 앉혀 두고 훌쩍 나가더니 미음과 약사발을 챙겨 왔다. 서란은 얌전히 그것을 먹었다.

그사이 여울은 침상의 이불을 새 것으로 갈고 물과 수건을 챙겨 왔다. 그녀의 얼굴과 목, 손을 꼼꼼히 닦아 주더니 새 옷을 내밀었다.

“나가 있겠습니다.”

돌아서서 나간 그가 문 밖에 섰다. 검은 그림자가 문풍지에 비쳤다.

문득 서란은 여울이 궐에 돌아온 첫날, 그녀의 침전 안에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녀가 속적삼 차림이건 말건 예의상 눈만 돌렸을 뿐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방 밖으로 나간다.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그저 수단이었던 접문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묘한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란은 화끈거리는 얼굴에 수건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겉옷과 속적삼을 모두 벗고 가슴 가리개와 속곳만 남긴 채, 물에 적신 수건으로 식은땀이 흘렀던 몸을 닦았다. 그 와중에도 어질어질해서 몇 번 멈춰서 쉬어야 했다. 몸이 많이 상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준비되어 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문을 열었다. 들어온 여울이 대야를 치우고 그녀를 침상으로 인도했다.

서란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눈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훤한 대낮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부터 잠을 자라니.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여울은 요지부동이었다. 서란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모양으로 말하자니 답답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당겨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너는 그리 다쳤는데도 마음대로 돌아다녀 놓고서, 나는 쉬란 말이냐?’

“저는 괜찮습니다. 보주께선 안 됩니다.”

‘제멋대로구나.’

“처음부터 제멋대로인 교룡이었잖습니까. 그러려니 하시지요.”

억지로라도 눕힐 기세였다. 서란은 어쩔 수 없이 침상에 누웠다. 눕고 나니 버틴 것이 무색하게 금세 잠이 쏟아졌다. 약재에 수면을 돕는 게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깜박이던 눈이 서서히 감기는 것을 여울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창을 타고 떨어진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어렴풋이 쌓였다. 그는 그녀가 편히 잠들도록 발을 드리워 빛을 가렸다.

의자를 당겨 와 침상 곁에 바싹 붙였다. 잠든 얼굴을 새길 듯이 바라보았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감정이 전신을 물들였다.

여울은 어젯밤에도 내내 이러고 있었다. 하루 종일이라도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뜬다는 전제하에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숨을 확인했다. 피부에 닿는 따뜻한 숨결을 느끼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다시금 그때의 공포가 떠오르자 심장이 그대로 갈려 나가는 듯했다.

자드락을 떠올렸다.

자드락은 분명 강한 이무기였다. 적어도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긴 하니까.

여울은 그처럼 된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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