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40화 (40/70)

40. 저는 포기하지 못합니다2016.07.17.

같은 시각, 여울은 산과 함께 있었다. 산은 마니전에서 알아낸 정보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이게 란아에 대해 내가 알아낸 전부야.”

여울은 무표정했다. 단순한 삶이었다. 한 장의 서류에 정리될 정도로. 스물 한 해가 그리 단출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죽었고, 열 살에 선택한 교룡은 계약하자마자 떠났으며, 열둘에 만났던 스승은 열일곱에 추방되어 잃었다.

1년에 한 번, 흑룡제때 궐에서부터 태조의 능까지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궁녀들은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반가의 아이들을 동무로 들이는 다른 왕족들과 달리, 또래의 동무 하나 없었다. 매년 생일 때마다 세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제한된 식생활. 금지된 것들. 끝이 결정된 삶.

그 안에서 체념을 쌓아 올리며 그가 보낸 서간에 보내지 못할 답서를 썼을.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가 약간 우그러졌다. 그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지난 11년이 켜켜이 후회로 쌓였다.

“현음당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

산이 부스럭거리며 서찰을 하나 꺼냈다. 그가 종이를 팔락팔락 흔들어 보였다.

“란아가 성학집요를 배우고 있다는 건 마니전의 궁녀가 형한테 고해바쳤던 것 같아. 형이 그것을 부왕께 일러바쳤고. 대군이나 군이었으면 문제가 좀 커졌을 텐데 다행히 옹주, 그것도 마니라 크게 불거지진 않은 모양이야.”

“처벌은 무엇이었나?”

“현음당의 여사 직위 해임, 남편인 대사간 안승호의 강등. 그런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안승호와 아들인 안명까지 사직을 청하고 현음당과 함께 예경을 떠났더라고.”

“어디로?”

“딱히 비밀도 아니고, 알 만한 선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해서 금방 찾았어.”

산은 탁자 한쪽에 펼쳐져 있던 지도를 당겼다. 그가 서해안의 한 지점을 짚었다. 흑룡강과 좌룡강 사이의 깊숙이 들어간 만에 위치한 작은 현이었다.

“몽해야. 조용한 어촌이지. 거기서 현음당을 새로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을 가르치거나 논하면서 살고 있는 모양이던데. 시댁인 동림 안씨나 본가인 문산 최씨나 저 일가는 내놓은 자식들인 것 같고.”

“바닷가군.”

“뭐, 그렇지. 란아가 여전히 바다로 가려 한다면 여기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현음당이랑 사이가 좋았다더라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불현듯 산의 시선이 쌓여 있는 두루마리 쪽을 스쳤다. 어제 보여 주었던 것들이다. 그 시선을 따라간 여울이 물었다.

“너는 저것들로 뭘 할 건가?”

“글쎄. 고민 중이다. 생각보다 큰일이라서 말이야. 태조의 사연은 그렇다 쳐도, 마니랑 중조 역천은 자칫 잘못하면 난장판 될 만한 이야기거든. 마지막의, 반쪽짜리 이무기 이야기는 차라리 이대로 묻어 버리는 게 나을 정도고.”

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거창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벌떡 일어났다.

“우리끼리 고민해 봤자 결론은 없지. 란아랑 얘기해 봐야겠다. 일어났을까?”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주무시고 계셨다.”

“너 안 잤냐? 밤 샜어?”

“졸리지 않았다.”

산은 수상하다는 얼굴로 여울을 뜯어보았다. 여울은 겉으론 태연해 보였으나 오래 사귄 산의 눈에는 그가 평소 같지 않아 보였다. 낌새가 이상했다. 그가 은근하게 물었다.

“못 잔 게 아니고?”

“…….”

“대충 고비를 넘기고 보니 설레서 잠이 안 오디? 허벅지는 괜찮으냐?”

“……?”

“허벅지 찌르면서 참은 거 아니었어? ……야, 설마 환자를 건드렸냐?”

“헛소리.”

여울이 인상을 썼다. 산이 유들유들하게 웃더니 그의 곁에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쳤다. 미간을 찌푸린 그에게 짐짓 진지한 충고를 하듯 말했다.

“전에 내가 경고한 건 기억하고 있겠지? 그 결계까지 쳐진 깊디깊은 산중에서, 단둘이, 일을 친 건 아니지?”

“넌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뭐긴, 여동생을 노리는 친구를 견제하는 거잖아. 우리 란아, 자라난 과정을 보니 순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이 오라비는 무척 걱정이 돼요. 어느 시커먼 뱀한테 홀랑 넘어갈까 봐. 설마 벌써 넘어간 건 아니겠…….”

능청을 떨어 가며 주절거리던 산이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여울의 얼굴에 확연하게 당황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제 어깨에 걸쳐진 산의 팔을 확 밀어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이 벙벙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야? 여울? 너 잠깐 서 봐. 야, 인마! 너 이 새끼.”

문이 쾅 닫혔다. 멍하니 있던 산이 다급히 그를 쫓아 나갔다.

여울이 문 바로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산은 그 등에 부딪칠 뻔하다가 겨우 멈췄다. 여울 너머로 거실 공간의 풍경이 보였다. 산은 왜 여울이 멈췄는지 깨달았다.

“좋은 아침.”

자드락이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 손에 가위가 들려 있었다. 잘 갈린 날이 시퍼렇다. 다른 한 손에는 서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쥔 채였다. 여울이 평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목숨값 받는 중.”

여울의 목소리에 서란의 머리가 약간 움직였다. 돌아보려다가 만 듯했다. 여울이나 산이 더 반응하기도 전에 가위가 가차 없이 움직였다. 한 타래의 머리카락이 귀 옆에서부터 잘렸다.

자드락은 그것을 손에 둘둘 감더니 냄새를 맡았다. 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 놈.”

자드락이 머리카락을 품에 챙겨 넣었다. 여울이 그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것도 무슨 용도가 있나?”

“아니? 그냥 갖고 싶어서.”

자드락은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가위를 정리했다. 서란이 그제야 돌아보았다. 그녀는 표정이 없는 여울과 입을 떡 벌린 산을 보고는 어색하게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일부만 잘려 짧아져 버린 것을 다른 머리카락 틈에 대충 섞어 눈에 덜 띄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울을 살피더니 붓을 들었다.

[목숨값으로는 저렴하지 않느냐?]

여울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한참 머물렀다. 그는 잠깐 자드락을 쳐다보다가 그녀의 곁에 시립했다. 저 자리가 거기라고 주장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자드락은 여울의 시선이 분명 노려보는 것임을 알아채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멀쩡한 의자를 두고 창을 활짝 열더니 창가에 걸터앉았다. 산이 그 꼴을 보고 인상을 썼다.

“그러다 눈에 띄어.”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둔하진 않아. 시원하고 좋은데, 뭘.”

“자알났다, 그래.”

툴툴거린 산이 서란 앞에 앉았다. 산은 서란의 옆에 시립한 여울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서란에게 말했다.

“자, 어때. 생각은 좀 해 봤어? 어제 얘기해 준 것들. 어떻게 하고 싶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 서란은 한동안 붓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옆모습이 단아했다. 깊은 물의 표면이 그 내부에 무엇이 있든 간에 고요한 것처럼. 여울은 문득 그 수면을 이지러뜨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정갈한 필체가 다시 종이 위를 채웠다.

[오라버니께서 알아낸 사실이니, 오라버니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응?”

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우물거리다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말했다.

“아니, 네가 그 발상을 꺼내지 않았으면 난 이걸 찾아볼 생각조차 못했을걸.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 왔고 평생을 배운 역사와 전통이야. 의심조차 하지 않았지. 이건 너라서 찾아낸 거다. 나는 투자를 했을 뿐이고. 그 결과물을 어떻게 쓸지는 네 마음이야.”

[저는 쓸 형편이 못 됩니다. 그저 바다로 가는 데에 도움을 주시면 족합니다.]

“바다로 가서, 무얼 하실 작정입니까?”

돌연 여울이 입을 열었다. 서늘한 물음이었다. 관계없는 양 창밖만 보고 있던 자드락이 잠깐 그를 돌아보더니 픽, 콧방귀를 꼈다.

서란은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산을 응시했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원망을 읽어 낸 산이 “끙” 소리를 냈다.

산 자신이 그녀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걸 눈치 챘을 때엔 원망은커녕 실망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여울에게 말했다고 원망하는 눈빛이라니.

이미 넘어갔나, 진짜.

“내가 말한 게 아니야. 저놈 짓이라고.”

산이 자드락에게 턱짓했다. 서란은 그쪽을 돌아보려다 말았다. 목의 부상 탓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붓을 움직였다.

[그저 바다가 보고 싶어서란다.]

“보고 나면 어찌 하시려는 겁니까.”

[글쎄. 아직…….]

“이미 들었습니다.”

여울은 이를 악물었다. 누굴, 어떻게 용으로 만들겠다고. 그가 용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건 그녀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녀가 희생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젯밤에 그가 읽은 입술의 움직임은 역시 잘못 본 것인 모양이었다. 간절히 원한 눈이 보여 준 착각일지도 몰랐다. 속이 새까맣게 탔다.

불편해진 분위기에 산이 헛기침을 했다. 때마침 밖에서 청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행수, 보고 왔어요.”

“청화야. 사랑한다.”

“아침부터 웬 개소리가, 아, 진짜 대행수 때문에!”

산은 피식 웃고는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바다로 가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는 거지? 좋아. 조금 이따 이야기하지. 보고 듣고 올 테니까.”

그는 자드락이 창틀에 걸쳐 놓은 뱀처럼 늘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너도 따라 나와. 할 말 있어.”

자드락은 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서란과 여울에게 눈길을 주더니 짜증 난다는 표정이 되었다. 산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드락은 비틀거리면서 그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둘이 나가고 나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서란은 가만히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붓을 쥐었다.

[내 교룡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말했잖느냐.]

그녀가 고작 열 살에 했던 말이다. 여울은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신음처럼 말이 샌다.

“그때부터. 설마, 그때부터 이미 이러실 예정이었습니까?”

[그리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단다. 그저, 아이의 치기로.]

붓이 멈췄다. 멈춘 곳에 핏방울처럼 먹물 방울이 떨어졌다. 아홉 살. 곧 열 살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결심했었다.

내게 교룡이 생긴다면, 그에게 내 여의주를 줄 거야. 세자 저하에겐 주고 싶지 않아. 내 교룡은 자신이 용이 되지 못할 줄 알고 있을 테니, 분명 기뻐하겠지?

그러니까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친해지면, 슬퍼할 테니까.

아이의 결심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너도 용이 되고 싶을 것이 아니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종이 위를 짚었다. 마르지 않은 먹물이 검게 묻어났다. 여울이 그녀에게로 몸을 숙였다. 눈이 마주쳤다.

서란은 붓을 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주. 말씀대로, 지금의 저는 용이 되길 원합니다.”

코끝이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였다. 눈의 홍채가 조여드는 게 보였다. 그의 눈이 깜박였다. 서란은 그 안에서 검은 불꽃을 보았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목에 감긴 붕대를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예전에는 용이 되길 바란 적이 없습니다. 왜 제가 그것을 바라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든 구애받지 않을 힘을 원합니다.”

그의 말들은 발음한다기보다 쏟아 내는 것 같았다.

“그 힘으로,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서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여울은 그녀의 가는 속눈썹을 보며 열화처럼 솟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제게 당신의 심장으로 용이 되라 할 생각이셨습니까? 제가 그것을 원할 거라 여기셨습니까? 그건, 너무 잔인하시지 않습니까.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다그치는 대신에, 그대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애원했다.

“그 결심은 거두어 주십시오.”

그녀는 제 아래에 꿇어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찌 설명할까. 어제 그녀가 간신히 다듬은 마음을.

이토록 깊은 감정을 받는 것이 지극히 행복하면서도 숨이 막혔다. 좋아해서, 좋아해 주길 원했고, 결국 그 바람을 이뤘건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리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럼, 내가 어찌 해야겠느냐?]

붓이 종이 위로 미끄러지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서란은 그를 보지 않고 글을 썼다.

[세자는 대결계라는 강수까지 두었다. 이런 짓까지 하고도 마니를 놓치면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겠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적해 올 것이다. 국경과 항구는 봉쇄된 지 오래되었다.]

그녀의 글씨에 억눌렀던 분노가 깃들었다.

[예락은 나라 구석구석까지 목민관이 배치되어 있다. 숨는다 해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특이한 외양을 하고서? 하물며 잠시라도 실수하면 향이 새는데.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은 실전되었고, 그걸 찾아낼 만한 시간도 환경도 내게는 없다.]

빠르게 글을 써내려 가며 그녀의 속에서 무언가가 들끓었다.

‘내가, 내게 희망이 없음을, 이리 내 손으로 설명해야만 하느냐?’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은 냉정한 판단이자,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해도, 도망 다니는 삶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너는 그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나는 자신이 없다.’

[나라고 죽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썼다. 서란은 놀라 제가 쓴 종이를 다시 보았다. 붓을 벼루에 내팽개쳤다. 먹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녀는 종이를 움켜쥐어 구겨 버렸다.

‘이미 봤을까.’

잠시 흐트러졌던 정신이 되돌아오자 바로 옆에 서 있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란은 구겨진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에 엉망으로 먹물이 묻었다. 그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흰 얼굴에 검은 먹이 묻어났다.

“……저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침묵하던 여울이 그녀의 손을 당겼다. 제 소맷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에 묻은 먹을 닦아 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보주께서 포기하셔도,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눈물이 깊은 눈시울에 고였다가 흘러 넘쳐 툭 떨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건 여울이 울 때 보이는 표정이구나.

그가 그녀 때문에 울고 있었다. 가슴이 아릿했다. 이성은 그의 말이 그저 억지라 하는데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 절망을 판단할 때 이리 막무가내로 부정해 줄 이를 원했는지도 몰랐다.

모든 현실과 그녀 자신마저 불가능하다 말할 때,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할 자를. 어둠으로 걸어갈 때 저 끝에서 기다리는 게 빛일 거라 믿으며 손을 잡아 줄 이를.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를 원할 사람을.

그런 것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서란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감싸고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이 얽혔다.

그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고여 있는 그의 눈가에 입술을 댔다. 여울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그의 눈물을 마셨다. 그것이 더 이상 흐르지 않도록.

이무기의 눈물은 인간의 것처럼 짰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눈을 떴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물기가 맺힌 속눈썹이 팔랑인다. 젖은 눈이 투명했다.

여울이 강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 순간 그는 그녀가 손을 놓으면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그를 이토록 약하게 만든 건 그녀였다.

서란은 그의 뺨을 감싼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그녀의 말을 읽을 수 있도록 천천히.

‘내게서 네 향이 나느냐?’

눈물 역시 체액이었다. 여울은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서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에게로 다가와 귀 아래 여린 살의 냄새를 맡았다.

고약과 경면주사의 강렬한 향들 사이로 새어 나오던 여의주의 달콤함이 물비린내처럼 무미한 이무기의 향에 파묻혔다. 그녀에게서 그의 냄새가 났다. 그것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그러합니다.”

부상으로 약해진 탓에 파리한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휜다. 그 입술이 다시금 느리게 움직였다.

‘그래, 나는 네 것이니. 네게 나를 주고 싶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여울은 그 움직임에서 읽어 낸 말이 정확한지 자신할 수 없었다. 먹먹함이 뇌리를 잠식한다.

서란이 붓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글을 썼다.

[바다를 보고 싶은 건 진심이란다. 볼 수 있게 해 주렴. 내가 네게 원했던 세 가지 명령 중 하나가 아니더냐.]

그 문장에는 더 이상 반발할 수 없었다. 여울이 고개를 떨궜다. 스스로의 무력함이 사무쳤다.

그가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자, 서란은 붓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걸음이 위태로워서 여울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향했다.

밖의 대청마루에는 산과 자드락이 있었다. 산은 마루에 퍼져 앉아 턱을 괴고 있었고 자드락은 아예 드러누워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이제 앞날을 논의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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