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39화 (39/70)

39. 난 거짓말 잘해2016.07.14.

밤하늘은 맑고 우아했다.

자드락은 별관 기와지붕에 드러누워 있었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쌓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술과 피가 섞여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자드락은 팔을 쭉 뻗었다. 매끈한 피부에는 비늘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희사.”

살아 있을 때는 불러 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자드락은 키득키득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닿지 못하는 말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자드락은 눈 위에 팔을 덮었다. 호리병을 쥔 손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용을 탄생시킴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한 후계자를 마니(摩尼)라 부른다. 이는 용의 여의주이자 교룡의 진정한 주인이 된 자를 일컫는 말이며, 예락의 왕세자를 부르는 칭호이기도 하다.

두루마리에서 본 문장이 망막에 맺혀 사라지질 않았다. 왜 몰랐을까.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고 달아나기만 했지,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의심조차 해 보지 못했다.

산은 정작 용을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하기에, 알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자드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았다면 보주와 저는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을, 지도…….’

숨이 막혔다. 그는 가슴께를 쥔 채 오래도록 호흡을 골랐다. 울음 대신 비실비실 웃음이 새었다.

자드락은 본래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주위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열망하니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

그는 교룡을 택하러 온 희명옹주 유리희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용이 되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희명옹주는 수줍음이 많았다. 그녀가 마니인 것을 이미 들은 이무기들은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공동에 선 그녀는 이무기들이 모두 제 시선을 피하거나, 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보통은 왕족이 마음에 드는 이무기를 고르면, 그 이무기가 받아들임으로써 교룡이 결정된다. 이무기들이 거부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마니인 경우가 아니면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희명옹주는 아무도 지명하지 못했다. 누구를 고르든 거부당할 게 뻔했으므로. 그녀를 데려왔던 선대의 용은 이런 결과를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마니에게 다가왔다.

용의 말에 자그맣고 하얀 아이는 금방이라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이무기들은 모두 그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다.

거북한 공기. 외면당하는 어린아이. 자드락은 그게 거슬렸다. 가만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섰다.

‘그까짓 용, 안 되면 뭐 어때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리 말하는 순간, 아이의 얼굴에 퍼져 나가던 환희와 안도. 자드락은 그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흘렀다. 빠르게 가는 만큼 추억도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은 잔인하게도 소중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그와 희명옹주 사이에 쌓아 주었다.

스물두 살. 자드락의 허리춤에 간신히 닿던 어린아이가 훌쩍 자라 여인이 되었다.

마니식을 위해 호화로운 예복을 걸친 희명옹주가 하늘에 제를 올렸다. 자드락은 멀거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고왔다.

제단에 절을 하고 일어난 그녀가 발갛게 부은 눈으로 자드락을 돌아본 순간. 그 울 것 같은 주홍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자드락은 이번에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1년의 도망 끝에, 그들은…….

마니의 교룡으로 나섰던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허나 한순간의 졸음으로 흐트러졌던 주술은 내도록 곱씹으며 후회했다. 그 찰나에 여의주의 향이 새어 나갔고, 그렇게 그는 마니를 잃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래서 더 이상 그의 마니가 없는데도, 자드락은 여의주의 향을 감추는 주술을 계속 발전시켜 왔다. 유배지에 처박혀 그것만 다듬었다. 진을 그려 두기만 하면 잠을 자든, 떠나든 상관없을 정도로 안정적으로 완성시켰다.

완성한 날,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허망해서. 만들어 봤자 쓸 곳이 없었으므로.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킬 이는 이제 없었다.

자드락은 제 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그는 희명옹주의 마니식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숨을 거두는 모습은 보지 못했기에 더 끔찍하고 다양한 상상이 되어 꿈속을 점령했다.

희명옹주 유리희사는 헤살 안에 있었다. 왕의 용 헤살을 용으로 만든 여의주가 그녀의 것이었으므로.

자드락은 동굴의 어둠 속에서 때로 상상하곤 했다. 헤살을 죽여 그 배를 가르고 그 안에서 희명옹주를 꺼내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헤살의 배를 갈라도 희명옹주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용인 헤살을 죽일 수만 있다면. 조금씩 미쳐 가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반쪽짜리 이무기에 불과하다. 천륜을 어기고 피를 묻힌 여의주로 진정 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만국유사의 저자 강승문이 예락을 벗어나 떠돌던 이무기를 만나 들었다는 저 말. 저게 사실이라면, 헤살은 제대로 된 용이 아니라는 것일까?

이무기와 용은 송사리와 고래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래가 아니라면.

“그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자드락은 뱃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살의를 누르기 어려웠다. 그는 전신이 떨릴 정도로 웃었다. 그의 몸 아래에 깔린 기왓장이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지?”

처마 아래에서 여울이 그를 불렀다. 자드락은 몸을 굴려 엎드린 채 처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울이네. 배부른 후배 놈아.”

“…….”

“너 진짜 싫어.”

자드락은 행복해 보일 정도로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여울은 가만 눈을 내리깔았다. 자드락이 손짓했다.

“네 마니는 뭐 하냐?”

“……잠드셨다.”

대답까지 긴 간격이 있었다. 자드락은 여울의 얼굴에서 미약한 흔들림을 찾아냈다. 열기가 느껴졌다. 연심이 깊어 제대로 감추지도 못하고 흘러넘친다.

자드락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이놈 봐라.

“점점 더 싫어지네.”

“상관없다.”

“난 네가 죽든 말든 관심 없어. 내가 너흴 도운 건, 마니 때문이야.”

“알고 있다.”

“네가 부러워서 돌아 버릴 것 같아.”

차분하게 답하던 여울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자드락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기왓장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계속 웃기만 하자 여울이 돌아섰다. 돌아서는 발걸음 소리에 자드락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야, 잠깐만. 이리 와 봐.”

여울이 멈췄다. 자드락이 팔을 늘어뜨렸다. 관리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처마 아래로 늘어진 꼴이 귀신같았다. 그는 히죽거리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오늘 알게 된 것들.”

여울은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서란의 눈물로 젖은 자국이 남아 있다. 그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진실보다 그것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무기가 어떻게 태어났든 상관없었다. 자기 자신이 반쪽짜리든, 다른 것이든 알 바가 아니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제 안의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세상을 보는 기준이 변했다.

그는 자드락의 물음을 무시하고 되레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자드락이 고개를 모로 꼬더니 훌쩍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여울에게로 다가왔다.

“억울하다고 생각해. 왜 몰랐을까.”

“정작 중요한 내용은 없지 않나.”

“그래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달라.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울의 앞에 선 자드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드락은 여울보다 약간 작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물어뜯을 듯이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가 보였다.

“그래서 결말을 보고 싶지 않아.”

“무슨 뜻이지?”

“너는 이제 어쩔 건데?”

“보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왜, 바다로 고이 모셔 가서, 걔 심장 파먹고 용 되려고? 좋겠네, 넌.”

여울의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움직인 손이 자드락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자드락은 실실 웃었다.

여울은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한 기세로 그를 노려보다가, 느리게 손을 놓았다. 자드락이 구겨진 옷깃을 탁탁 쳐서 폈다.

“너, 결계 넘을 때 뭐든 하겠다고 했지.”

“……그래.”

“그럼 부탁 하나 하지.”

자드락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만약 네가, 마니의 심장을 받아 용이 된다면.”

그 가정 자체가 여울의 심기를 거슬렀다. 여울은 이를 악물었다. 자드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승천하기 전에 헤살을 죽여 줘.”

“뭐라고?”

“아니, 죽일 필요까진 없나? 여의주만 뺏어도 돼. 어, 용한테서 여의주를 뺏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거랑 똑같나? 모르겠다. 해 봤어야 알지.”

자드락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같은 용이니까, 그 정돈 가능할 거 아냐? 헤살은 뭐, 마니식으로 용이 된 거니까 너보다 약할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그거 뺏어서 나 줘.”

황당한 요구였다. 여울은 무어라 반박하려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멈췄다.

자드락은 전대 마니의 교룡이었다. 전대 마니의 심장은 현 왕의 교룡인 헤살을 용으로 만드는 데 쓰였다.

만약 느루가 서란의 심장으로 용이 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은 견딜 수 있을까?

일그러지는 여울의 표정을 지켜보던 자드락이 픽 웃었다.

“진지하게 듣기는.”

자드락은 여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제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울이 그 등에 대고 물었다.

“방금, 진심이 아니었나?”

어둠에 반쯤 묻힌 등이 가볍게 흔들렸다. 웃음소리가 났다.

“난 거짓말 잘해.”

자드락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서란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빛이 창호지 너머로 비쳤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단단하게 목에 감겨 있는 붕대는 밤 사이 한 번 새 것으로 갈았던 모양인지 깨끗했다. 정갈한 매듭에서 여울이 느껴졌다.

침상 밖으로 다리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일어서 보았다. 어지러워 잠깐 침상을 잡고 기다렸다. 핑 돌던 시야가 차츰 안정되었다. 어제보다는 확연히 상태가 나았다.

그녀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문틀에 진이 그려져 있었고 부적도 붙어 있었다. 서란은 의아하게 그것을 보았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한 걸음 나가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지 마.”

자드락이었다. 멀쩡한 의자는 내버려 두고 그 아래 바닥에 반쯤 널브러져 있었다.

“너, 여의주 향 풀풀 나. 그 방에만 주술로 막아 둔 거야. 나오면 샌다.”

서란은 흠칫 멈춘 후에 뒤로 물러났다. 문틀의 부적을 다시 살폈다. 자드락이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기다려.”

그는 품을 뒤져 부적을 몇 장 꺼내더니 대강 접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갑 위에 괴황지 더미와 같이 놓여 있는 향낭이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든 자드락이 그 안에 부적을 넣고 매듭을 지었다. 그는 옆에 있는 경면주사를 집으려다 입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고개를 젓더니 엄지 끝을 물어뜯어 피를 내었다.

세필(細筆)을 들고 거기에 제 피를 적셔 향낭 뒤편에 섬세한 진을 그렸다.

자드락은 그것을 후후 불어 피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난 후, 그녀에게로 들고 왔다.

“자. 이제 나와도 돼. 이 별관 안에서는 주술이 유지될 테니 괜찮아.”

서란의 손에 향낭을 떨어뜨린 그가 물러났다. 서란은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고 그것을 단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자드락의 손에 가 닿았다. 방금 상처를 낸 엄지 외에도 그 손에는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서란은 몰랐지만 자드락이 그녀의 재액을 잡아 뜯다 생긴 것이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자드락이 제 손을 흘깃 보았다.

“왜, 신경 쓰여?”

자드락이 빙긋 웃었다. 서란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게 꽤 답답했다. 그녀가 방 안을 훑었다. 탁자 위에 지필묵이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간 그녀가 붓을 들었다. 자드락이 졸졸 따라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어쩌다 다쳤느냐?]

그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목덜미에서 그의 숨이 느껴졌다. 그녀는 움찔 떨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너 살리려고. 나 꽤 고생했다?”

[미안하구나. 정말로, 고맙다.]

글씨가 약간 흔들렸다. 자드락이 갑자기 고개를 틀더니 붕대가 둘러진 그녀의 목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당황스러워 그녀가 앞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자연스럽게 다가온 자드락의 팔이 허리를 감아 저 있는 쪽으로 당겼다. 서란은 기겁해 그 팔을 움켜쥐었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으.”

“소리 내지 말고. 목 상한다니까?”

자드락은 그대로 한참 냄새를 들이켰다. 그사이 어슴푸레하던 사위가 완전히 밝아졌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서란을 놓아주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향, 좋아. 계속 맡고 싶을 정도로.”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서란은 난감하게 웃었다. 자드락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감아올렸다. 코끝에 그것을 대고 킁킁거렸다.

“네 목숨값으로 머리카락 좀 줘.”

[전에는 피를 달라 하더니, 이번엔 머리카락이냐? 고작 이런 걸로 목숨값이라니.]

“왜, 다음엔 살을 베어 달라 할까 봐?”

그녀가 쓴 것을 본 자드락이 킬킬댔다. 서란은 조용히 그를 보다가 붓을 움직였다.

[이리 유배지 밖에 있어도 괜찮으냐?]

“네 피 마시면 괜찮아. 내친 김에 피도 좀 더 줘.”

[내 피에 그런 효과가 있었느냐?]

“여의주가 만들어 낸 피잖아. 너희 심장은 여의주니까. 마시면 흐려진 영성을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있지. 몸에 좋아.”

자드락이 입맛을 다셨다. 아침 햇살이 비친 눈은 세로로 길쭉한 동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묘한 섬뜩함이 있었다. 그녀의 붓이 정지한 채 머물렀다. 종이에 먹물이 번져갔다.

“번진다.”

자드락이 툭 말하며 붓을 쥔 그녀의 손을 겹쳐 쥐고 종이에서 떼어 냈다. 그러곤 새 종이를 꺼내 깔아 주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서란은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가져가렴.]

“지금은 안 돼. 살려 놓고 도로 죽이는 취미는 없거든. 너 좀 낫고 나서 줘.”

[당장 필요한 게 아니냐?]

“저번에 네 목에서 받아 둔 게 많아서 한동안은 괜찮아.”

자드락이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뱀의 눈이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그가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서란은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붓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체력이 더 약해졌는지, 그것 좀 서 있었다고 피곤했다.

앉느라 의자 등받이에 걸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자드락이 팔을 뻗어 정돈해 주었다. 웃음기가 없는 그의 얼굴은 그녀보다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서란은 망설이다 글을 썼다.

[내가 희명옹주와 닮았느냐?]

“어떻게 할 거냐니깐 대답도 안 하고 엉뚱한 걸 묻네.”

자드락이 비실 웃었다. 그가 탁자 위로 끌어올린 무릎에 턱을 괴었다.

“하나도 안 닮았어. 성격도, 생긴 것도. 향은 비슷해. 농도는 네가 더 짙고, 달기는 내 보주가 더 달았지만. 그거 말곤 정말 달라.”

자드락이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담담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큰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란이 의문스럽게 쳐다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대답이나 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니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새파란 빛깔이 눈꺼풀 안쪽에 머문다. 문득 그녀가 제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눈을 떴다. 붓을 들었다.

[바다로 갈 것이니라.]

“어제 그런 얘기를 듣고도 변한 게 없네?”

[내게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 진실들을 가지고 어떻게 할지는 오라버니가 결정할 일이다.]

“너는 하고 싶은 게 없어?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고 사방에 퍼뜨리고 싶진 않아?”

[내가 그러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란다. 혼란만 야기할 뿐이니.]

“뭐가 무책임하단 거야?”

[예락의 왕실을 지탱하는 권위를 무너뜨려 놓고, 뒷수습을 하지 않는 짓이니까. 왕실이 무너지면 안 그래도 지나치게 힘이 실려 있던 공신들에게 권력을 보태기만 하는 일이다.]

“되게 냉정하네.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 억울하지 않아?”

붓의 움직임이 멎었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검은 늪, 그 독기는 여전히 그녀의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원망하고 있기에는 하고 싶은 다른 것이 많았다.

서란은 꽉 찬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꺼냈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니라. 그냥 그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괜찮다.]

“정말로?”

자드락이 그녀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란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정말 괜찮단 말이야? 그 놈을 용으로 만들고, 너는 죽고? 그런 결말이?”

[가장 나은 결말이니까.]

“틀려. 더 나은 결말도 있잖아.”

[가능한 것 중에서.]

“나는 싫어. 전부 다.”

아이의 투정 같은 말이었다. 자드락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목에 감긴 붕대를 손끝으로 쓸었다. 지나치게 가까워 숨결이 섞였다.

“두 번 볼 자신이 없어.”

서란이 그를 피하듯 턱을 틀었다. 정적이 흘렀다. 자드락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탁자 아래로 늘어뜨려진 다리가 일정한 박자로 흔들렸다.

“좋아, 결정했다.”

자드락이 탁자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마니의 이름은 알고 싶지 않다더니.]

서란이 느리게 붓을 놀렸다. 문장의 마무리를 짓자마자 자드락이 그 종이를 빼앗았다. 그는 그것을 제멋대로 구겨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종이 탓에 탁자에 그대로 그어진 붓이 먹물로 나무를 물들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 종이를 깔아 주며 재차 물었다.

“이름, 뭐냐고.”

서란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제 이름 넉 자를 썼다.

[유리서란(流理曙蘭).]

“서란.”

자드락이 외우듯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이름 예쁘네.”

그는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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