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까마득한 늪, 푸른 바다2016.07.10.
“그게 뭐지?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인가?”
여울이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야.”
“그럼 뭔데?”
자드락이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산은 두 이무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턱 아래를 쓸며 망설였다. 기다리던 자드락의 눈매가 서서히 사나워지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뜸을 들이려는 게 아니라. 이건 솔직히 좀 더 충격적이라. 이해하기도 어렵고.”
“일단 줘 봐.”
벌떡 일어난 자드락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산은 다시금 여울 쪽에 시선을 주었다. 덤덤한 친구의 얼굴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그가 망설이며 한 두루마리를 집었다.
그는 서란이 여울에게 기대앉아 있는 침상 위에 그것을 펼쳤다. 자드락이 달라붙었다.
“이건 저자인 강승문이 덧붙인 말이다.”
나는 그 역천의 땅에서 살아남아 진저리를 치며 예락을 떠난 어느 이무기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만난 이무기는 갈빛 피부에 곱슬한 검은 머리, 뱀의 눈동자를 가진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본디 이무기란 자연의 기가 모이는 깨끗하고 신성한 곳에서 뱀이 심신을 가다듬고 100년의 도를 닦아 태어나는 것일진대, 여의주로 급작스레 성장한 예락의 그것들은 반쪽짜리 이무기에 불과하다 하였다.
내가 그래도 예락의 교룡들은 용이 되어 승천하니 아무 문제가 없지 않느냐, 하고 물으니 그녀가 비웃어 가로되,
‘이무기는 미완의 존재가 아니다.’, ‘천륜을 어기고 피를 묻힌 여의주로 진정 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라 하였다.
내가 자세히 알려 달라 하자 하늘의 일이니 더는 말할 수 없다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길지 않은 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은 그들 모두가, 제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뭐야. 이건!”
자드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산은 양손을 든 채 눈썹만 꿈틀거렸다.
“반쪽짜리 이무기라니? 천륜을 어긴 여의주라고? 저 말들은 뭔데!”
“내가 알 리가 있나. 나도 몰라.”
서란은 정물처럼 두루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은 제 멱살을 잡은 자드락의 손을 떼어 냈다. 여울은 무표정하여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도 두루마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창으로부터 알아낸 것들이다.”
그 말에 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목의 부상을 떠올리고 멈췄다. 그녀가 붓을 쥐었다.
[정리해 보면.]
첫 문장을 써 놓고 그녀는 길게 침묵했다. 목을 졸리고 있는 것처럼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결심한 듯 붓을 움직였다.
[추락한 용으로부터 여의주를 얻은 태조가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것이 예락에서 왕의 자격을 판단하는 시험이 되었군요. 자신의 교룡을 용으로 만든 왕족이 ‘마니’가 되어,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붓이 종이 위로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서란은 쉼 없이 써내려 갔다.
[그러나 중조가 반역하며 그 방법이 실전되고, 대신 형제자매 중 하나를 제물로 선택해 세자의 교룡을 용으로 만드는 ‘마니식’이 생겨났다…….]
빠르게 움직이던 붓끝이 가늘게 떨렸다.
자드락이 의자를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졌다. 자드락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잠시 그 쪽에 머물렀다가 금세 떨어져 나왔다.
서란은 이어서 글을 썼다.
[허나 그 방법으로, 그러니까 지금까지 마니식으로 만들어졌던 왕의 용들은 모두 제대로 된 용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천륜을 어겼기 때문에?]
“강승문이 들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무기는 거짓말도 못하는 생물인데, 혈육을 죽이고 피를 묻힌 여의주로 용이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산이 허탈하게 대꾸했다. 서란이 꽉 찬 종이를 치우고 직접 새 종이를 꺼냈다.
[하지만 헤살은 용이 맞잖습니까. 흑룡제 때마다 그의 본체를 보았습니다.]
흑룡제는 예락의 건국을 기념하는 제례다. 태조가 마파람을 용으로 만들었다는 날에, 태조의 능 앞에서 치러지는 예락 최대의 국가 행사였다. 마니인 서란이 궐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때이기도 했다.
흑룡제의 긴 행사 도중에 왕의 용이 하늘을 나는 것이 있다. 예락의 백성들은 오로지 그것을 보기 위해 예경에 몰려들곤 했다.
서란은 그때마다 왕의 용인 헤살의 본체를 보았었다. 태조의 능 위 하늘을 날던, 검은 비늘과 검은 갈기의 용.
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가출하기 전까지는 몇 번이고 봤었지. 겉보기엔 용이 맞아. 제대로 된 용과 그렇지 않은 용이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반쪽짜리 이무기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미완의 존재가 아니라니, 이건 마치…….]
지금의 이무기들은 미완성이란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서란은 뒷말은 차마 쓰지 못했다.
“그건 더더욱, 짐작도 가질 않아. 도를 닦는 과정을 거친 이무기와 여의주로 태어난 이무기에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그걸 구별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의문만 늘어났지.”
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굳어 있는 자드락과 표정이 없는 여울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 사이에 복잡한 정적이 고였다.
서란의 붓이 종이 위를 가로질렀다.
[이외에는, 알아내신 것이 없나요?]
“아까 말했다시피, 여기까지야. 오래된 일인데다, 예락은 창 입장에서는 타국이니까.”
[그럼, 결국,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녀의 붓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문장의 중간에서 맴돌았다. 산이 시선을 피한 채 답했다.
“있는 건 확실해. 문헌을 살펴보면 교룡과 보주 간의 신뢰와 관계된 시험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정작 그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숨을 죄는 긴장 속에서 산은 천천히 두루마리들을 정리했다.
“그건 예락의 왕족들에게만 전해지는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비밀이었다. 왕의 자격과 관련된 일이니까. 중조가 역사를 지우면서 우리는 그 ‘정상적’인 길을 잃어버린 거지.”
두루마리들을 품에 안은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산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너희가 결계 밖으로 나온 걸 교룡들이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이 기회에 무리하지 말고, 몸조리 잘 해. 앞으로 어떡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산이 방을 나갔다. 서란은 붓을 내려놓았다. 붓에서 떨어진 먹물 방울이 그녀의 손끝과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자드락이 힐끗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일렁이는 검은 눈이 그녀를 분해할 것처럼 샅샅이 훑었다. 자드락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서란과 여울만이 남았다. 서란은 제 뒤에서 자신을 받치고 있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놓았던 붓을 다시 쥐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글을 썼다.
[너도 쉬렴.]
그녀의 앞에 그가 다가왔다. 그린 듯이 반듯한 얼굴이 그녀를 응시했다.
서란은 살짝 웃어 주었다.
여울이 그녀의 무릎 위에 있던 서판과 지필묵을 들어 탁자로 치웠다. 시종처럼 정중하게 침상을 정돈하더니 수건에 물을 적셔 그녀의 손에 번진 먹을 닦아 주었다. 서란은 다소곳이 앉은 채 그것을 보고 있었다.
여울이 물러나며 읍했다. 서란이 눈인사를 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섰다.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저는 둔하여서 잘 모르지만.”
여울이 대뜸 말했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눈가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후, 시선은 목의 붕대에 닿아 어둡게 젖어들었다.
“보주께서는.”
여울은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그가 그녀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서란이 입술을 움직였다. 여울이 그 움직임을 읽었다.
‘왜 그러느냐?’
그는 다가와 침상에 반쯤 걸터앉았다. 한쪽에 개켜져 있던 얇은 홑이불을 당겨 그녀의 위에 덮어 씌웠다. 그녀의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어깨를 당겨 제 품에 기대게 했다.
그녀가 머리를 약간 움직였다. 의문을 품은 몸짓이었다. 그가 말했다.
“저를 내보내고, 홀로 울려 하시잖습니까.”
그녀의 위를 덮은 홑이불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드러난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이불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흰 천에 가려진 가느다란 몸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울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떨고 있는 하얀 손에 제 손을 얽었다. 맞닿은 몸에서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서로의 귀에 가 닿았다.
그의 가슴께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서란의 손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결국 없었다.
창의 기록에도 해답은 없었다.
자라났던 희망이, 자란 만큼 그대로 독이 되어 내부를 할퀴었다. 기대하지 말자고 해 놓고서 기대했다.
기적처럼 정답이 제 앞에 나타나리라 희망했다. 발갛게 물든 꽃잎 색의 꿈을 꾸었었다. 이리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이면의 역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저 진실의 무게가 예락에 끼칠 영향 같은 것을 생각할 틈은 없다.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을지라도 이 순간 그녀의 진심은 그러했다.
그녀가 알고 싶었던 건, 그녀가 살아남을 방법이었다. 심장을 뽑지 않고도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얻길 원했다. 그 기대는 또다시 무너졌다.
긴 체념으로 다져 왔던 마음이 파헤쳐져 적나라한 속살이 드러났다.
살고 싶었다.
사랑을 하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을 하고, 미래를 꿈꾸고, 때론 실패하고, 그래도 웃으며,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그 소망을 다 버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억울했다. 왜 이런 운명이 주어졌는지. 왜 그녀는, 늘, 포기해야만 하는지. 추하게 발버둥 쳐서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득도한 선인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잘 참을 뿐이었다.
서란은 벽미향이 여울에게 쏟아 냈던 새카만 감정을 오롯이 이해했다. 목 끝에서 더럽고 끈적거리는 늪이 일렁거린다.
분노와 원망과 증오가 응어리진 것을 토해 내고 싶었다. 넘실거리는 절망이 눈앞을 까맣게 적셨다. 멍울진 속에서 갈라진 상처가 늪을 토해 냈다. 원념을 퍼붓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받치고 있는 그의 품에 갈퀴처럼 손가락을 세운 채 몸을 떨었다.
여울은 전부 받아 줄 것이다. 그녀가 무엇을 토해 내건 간에. 그녀를 배신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의 교룡이므로. 그녀를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를 연모하고 있으므로.
신음과 울음의 중간쯤 되는 소리가 상처 입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듯이.
그 말에 그의 옷을 구겨질 정도로 쥐고 있던 서란의 손에서 움찔 힘이 빠져나갔다. 제 안으로 침잠하던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을 안고 있는 그를 재차 의식했다.
여울.
그가 보내 왔던 서간들. 그녀가 접할 수 있었던 바깥. 바다.
탁 트이는 수평선 위로 흰 구름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비릿하게 느껴졌던 내음이 이제는 그립습니다.
하얀 물거품이 이끼 낀 바위 주위에 휘도는 것이 장식처럼 보입니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모래사장에는 물결에 다듬어진 조개껍질과 자갈이 별처럼 박혀 있습니다.
여울이 썼던 문장들로 그녀가 만들어 낸 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릿속으로만 그려 본 풍경. 상상이기에 더 강렬하고 아름다운 광경.
파랗고 하얀 빛이 뇌리를 잠식해 들어온다. 차오른 검은 늪 위를 그 빛이 압도한다. 턱까지 닿았던 독이 푸른 파도에 쓸려 흐려진다.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했었잖아. 변한 건 없어.’
아이를 어르듯 스스로를 달랬다. 일렁이는 것들을 모조리 삼키고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자를 인식했다. 무너지는 정신을 추슬렀다.
감내할 수 있었다. 다른 이에게 전가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녀의 긍지였다.
문득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란은 눈물로 젖은 눈을 떴다.
빛이 어렴풋이 투과되는 홑이불 속에서 보이는 건 제 눈물로 젖은 여울의 앞섶뿐이었다.
그 너머에서 두근두근 박동하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소리. 그녀의 빈손에 남은 유일한 존재. 좋았다. 그녀는 무심코 그 품에 뺨을 비볐다.
그 움직임에 여울이 얼어붙었다. 바짝 힘이 들어가 단단해진 근육을 느낀 서란은 약하게 웃었다. 한바탕 뒤집어진 머릿속이 태풍이 쓸고 난 후의 공기처럼 청명했다.
정말 그가 소중하긴 해? 그랬으면 계속 놓아뒀어야지. 혼자 죽었어야지. 왜 그를 네게 끌어들였어? 왜?
얼마 전에 스스로에게 추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명료하게 떠오른다. 이기적인 진심.
‘좋아하니까. 그래서 함께 있고 싶었어.’
언제부터?
어쩌면 처음부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시선을 피하던 그 공동 안에서, 똑바로 자신을 보며 다가오던 이무기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니면 그의 첫 서간을, 서툰 그 문장을 보았을 때부터. 그의 서간을 통해 세상을 그려 보던 시절부터.
혹은 11년 만에 돌아온 그가 완연한 사내의 모습으로 마니전 앞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을 때부터.
그녀의 발을 당겨 씻겨 주었을 때. 접문했을 때. 웃었을 때. 그가 그녀에게, 당신을 잊어버리기엔 이미 늦었노라고 답했을 때. 그녀를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열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볼 때.
언제나처럼 홀로 울고 추스르려던 순간에,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바로 지금. 그녀의 곁에 남아 준 그가, 너무나도, 애틋해서.
언제부터 피었는지 모를 감정이 온 마음을 물들였다. 어쩌면 어느 순간에 피었다기보다는 그저 계속해서 쌓아 올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있었던 것을 이제야 돌아본 것일 수도 있다.
까마득하던 늪이 푸른 바다로 물들었다.
끝은 정해져 있었다. 더 이상은 희망을 품지 않겠다. 체념은 익숙했다. 오랜 예전에 했던 결심을 되살렸다. 마지막 미련을 버리자 홀가분해졌다.
남은 시간은 좋아하는 일만 하기에도 촉박하니까.
‘한 달? 한 달도 되지 않으려나.’
정해진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다. 그녀는 한 가지 고집을 부리기로 했다. 마음을 다듬었다. 무엇을 할지 정했다.
하늘이 그녀를 보고 있다면, 이 고집은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 하늘보다는 여울에게 더 미안한 일이었다. 그를 위한다면 놓아주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서란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그 안에 감추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 그를 부르듯 옷깃을 당겼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목이 아파서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그 움직임을 느낀 여울이 그녀의 위를 덮고 있던 홑이불을 젖혔다. 서란이 그를 올려다보며 울어서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앞섶을 쥐고 아래로 당겼다. 여울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서란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눌렀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꾹 누르고 떨어졌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그녀는 또 웃었다.
“……보주?”
유난히 화사한 그녀의 미소와, 그저 닿기만 한 입맞춤에 여울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가 제 입가를 가린 채 망연히 그녀를 불렀다.
서란은 여울의 가슴팍을 약간 밀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눈이 곱게 휘었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여울은 그 소리 없는 언어를 읽었다.
‘네가 좋다.’
언어로 만들지 않고 외면하던 마음을 풀어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목이 졸리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행복했다.
그에게 답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내내 홀로 껴안고만 있었던 답서를 그에게 직접 내미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의 말을 읽어 낸 여울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지금, 제가.”
잘못 본 것인지. 자신이 읽어 낸 문장이 사실인지. 그의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서란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말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달아 충격을 받았으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긴 했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덜컥 몸이 무너져 내렸다.
여울은 기겁하여 그녀를 받쳤다. 가장 먼저 목의 붕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피가 배어 나오진 않았다.
“보주?”
서란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엔 희미한 공포가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숨을 확인하고 맥을 재었다. 그녀가 그저 지쳐 정신을 잃었을 뿐이라는 걸 확신하고서야 안도했다.
여울은 조심스럽게 서란을 자리에 눕혔다. 그러다 움찔 놀랐다. 그녀의 손끝이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그는 절대 그 손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여울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손끝을 더듬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둥근 손톱. 시선은 팔을 타고 올라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저 입술이 조금 전에 움직이며 만들어 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잘못 본 게 아닐까.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게는 반쪽짜리 이무기니, 어쩌니 하는 말들보다 그녀의 한마디가 더 충격적이었다. 다시, 말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여울은 제 옷자락을 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쥐었다. 그러곤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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