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37화 (37/70)

37. 이면의 역사2016.07.07.

서란은 만 하루를 더 잠들어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 앞에 보인 것은 자드락의 얼굴이었다. 갸름한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야, 얘 일어났다.”

늪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일어나려 움직이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어깨를 받쳐 주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입 안은 바싹 말라 괴로웠다. 목은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탱한 손에 의지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가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푹신한 것이 머리와 목 아래를 받쳤다. 곧이어 그녀의 상태를 잘 아는 것처럼 물이 담긴 잔이 코앞에 내밀려 왔다.

서란은 몇 차례 눈을 깜박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잔을 쥐고 있는 손등에 익숙한 흉터가 보였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려 하자 목 안쪽을 바늘로 긁어내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질어질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내밀린 잔은 흔들림 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한참 이마를 짚고 있던 그녀가 겨우 물을 머금었다. 물을 삼키는 과정이 낱낱이 고통이었다. 식은땀이 약간 맺혔다. 다가온 수건이 그것을 훔쳐 냈다.

그래도 물을 삼키자 조금 더 정신이 선명해졌다. 서란은 목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붕대가 만져졌다.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여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고 떼어 냈다. 서란이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여울은 무표정 위에 얇은 고통을 덮은 채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심하게 베였습니다. 당분간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뭐, 무사히 낫기만 하면 말하는 덴 별 문제 없을 거야.”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란은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드락이 팔짱을 끼고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

서란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을 읽은 자드락이 으쓱였다.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네가 비늘 썼잖아. 그 비늘에 축지술을 새겨 놨었거든. 탁월한 선택이었어. 네가 그때 부순 비늘이 여울 거였으면 넌 이미 죽었을걸. 운이 엄청 좋았지.”

자드락이 낄낄거렸다. 여울이 그녀로부터 멀어지더니 무언가를 챙겨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무릎 위에 서판과 지필묵을 올려 주었다. 그리곤 곁에서 조용히 먹을 갈았다.

서란은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자드락이 홀로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제웅 알지? 너 그거에 당했어. 야로라는 꼬마 교룡이 네 머리카락을 넣은 제웅 목을 벴어. 무능한 네 교룡은 눈앞에서 그걸 뻔히 보면서도 못 막았고 말이야.”

제웅?

서란은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갑자기 갈라졌던 목. 서란은 그제야 아무 일도 없이 생겼던 상처의 이유를 알았다. 조금씩 또렷해지는 의식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넌 그대로 삼도천 건너려다 날 불러 낸 덕에 살아남은 거지. 결계도 내가 없었으면 못 벗어났어. 저놈은 힘쓰는 거 말고는 쓸 데가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저거 버리고 날 교룡으로 삼는 건 어때?”

자드락은 앉은 채로 아이처럼 다리를 흔들었다. 천진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자드락의 말에 재차 난도질당하면서도 여울은 그저 그녀가 필담을 할 수 있도록 먹을 간 벼루를 내려놓을 뿐이었다.

서란은 푹신한 베개에 목을 받친 채 제 앞에 벼루를 놓는 그를 보았다. 그의 입매가 단단했다.

그녀는 그가 건네주는 붓을 받아 들었다. 느리게 움직인 붓이 종이에 글을 써내려 갔다. 손목에 힘이 빠져 가늘게 떨리는 필체였다.

[목숨 빚을 졌구나. 고맙다.]

“그래. 고마워해. 목숨 값으로 나중에 부탁 하나 할 테니 그거 들어줘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자드락이 눈을 휘며 미소했다. 일견 달콤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이었다.

여울은 그녀의 침상에 딱 붙어 서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서란은 그를 보기 위해 목을 틀다가 끔찍한 통증에 낮게 신음했다.

그녀가 신음하자 여울의 손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도는 손의 움직임에서 그가 허둥거리는 게 느껴져서, 서란은 조금 웃었다. 그녀가 붓을 들었다.

[네 탓이 아니다.]

“제 실책입니다.”

그녀가 문장의 마무리를 하기도 전에 여울이 말을 토해 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자드락이 그들 너머에서 이죽거렸다.

“쟤 탓 맞지, 뭘.”

[교룡들이 부러 내 목숨을 노릴 리가 없잖느냐. 최소한 찾아낸 후에 죽여야 여의주를 건질 텐데. 무언가 일이 꼬인 게 틀림없으니 그를 탓할 일이 아니다.]

“얼씨구.”

자드락은 픽 웃음을 흘리며 꼰 다리에 턱을 괴었다. 여울은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쓴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서판에 올렸다. 그것을 받아 든 서란이 붓을 놀렸다.

[결계는 어떻게 벗어난 것이냐? 지금 교룡들은 뭘 하고 있지? 여기까진 어떻게 왔느냐?]

여울이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보고했다. 듣기 좋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목을 틀지 못하는 서란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 목소리만 귓가에 담았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의 옆얼굴에 닿는 여울의 시선이 절절히 끓었다.

자드락은 그 시선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서란의 입술을 번갈아 보다가 미간을 구겼다. 기묘하게 속이 쓰렸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아직 여물지 못한 감정이 지독하게 부러웠다.

“절씨구.”

그는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며 사지를 쭉 펴고 의자에 늘어졌다. 여울이 결계를 벗어나 산의 호위무사인 박철호와 만난 데까지 이야기하는 와중에 문풍지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문 좀 열어 봐.”

산이었다. 자드락은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울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산은 양손에 두루마리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탁자 위에 그것을 쏟아 놓았다. 과장스럽게 손을 탁탁 턴 그가 서란을 돌아보았다.

“이야,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네, 동생아.”

서란은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산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어때? 얼추 돌아가는 상황은 알겠어?”

[여울에게 대강 들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날아갈 듯 써지는 글자들을 빤히 보고 있던 산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자들을 눈으로 쭉 훑고는 다시 서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죽다 살아나서 파리해진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지금 들을래, 아니면 쉬었다 들을래?”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창으로부터 알아낸 것.”

공기가 팽팽해졌다. 자드락이 상체를 일으켰고 여울의 턱이 굳었다. 서란은 고요했다. 하얀 얼굴에는 그려 넣은 것 같은 미소만 걸려 있었다. 산은 그 미소의 뒷면에 무슨 표정이 있을지 추리하다가 그만두었다.

붓을 쥐고 있던 여린 손이 움직인다. 종이 위에 검은 먹이 미끄러지며 한 자 한 자 써내려 갔다.

[지금 듣겠습니다.]

그녀의 글을 본 산은 부러 사무적인 얼굴을 했다.

“자, 그럼 건국 신화부터 시작해 볼까.”

그는 탁자 위에 쌓아 둔 두루마리 중에서 하나를 들어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산이 펼친 것은 급하게 옮겨 적어 삐뚤빼뚤한 문서였다.

“예락에서는 태조 유리하가 창 황실의 방계로, 하늘에서 왕으로 선택하여 무지개를 내렸다고 하지. 그 무지개를 받음으로써 그녀가 여의주를 심장에 품게 되었다고들 알고 있고. 하지만 말이야,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워.”

창신 2년 1월 16일, 뇌우가 몰아치고 하늘이 갈라지다. 은돌산에 용이 추락했다는 소문이 돌다.

1월 17일, 은돌산 근처에서 초목이 시들고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리다. 황제가 어사를 보내어 상황을 파악토록 하다.

1월 21일, 어사가 장계를 올리다. 천계에서 추방당한 용이 은돌산 자락에서 몸부림치며 피와 독을 내뿜는지라, 산 것은 전부 달아나거나 죽었음을 고하다. 황제가 은돌산 부근을 금역으로 지정하다.

1월 22일, 황제가 금역에 친림하여 용의 상세를 살피기로 하다.

산의 손에 들린 문서를 읽은 자드락이 인상을 썼다.

“이게 뭔데?”

“창의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의 일이지. 용이 왜 천계에서 추방됐는지, 죄를 지은 건지, 아니면 사고인지, 그런 건 우리가 알 방법이 없어. 확실한 건 용이 창의 은돌산 기슭에 떨어져 죽었다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산이 기이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문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돌산 기슭에는 당시 유가촌이라는 마을이 있었어. 유가촌은 이름 그대로, 유씨 성을 가진 창의 황손들이 살았지. 선대의 반역으로 유배당한 창 황족의 후손들 말이야. 그리고 그중에 어린 유리하도 있었다.”

긴장이 침묵과 함께 흘렀다. 산은 다른 두루마리를 잡아 잘 보이도록 펼쳤다. 서란의 눈이 빠르게 그 글자들을 따라 읽었다.

1월 28일, 용이 죽다. 시체는 썩어 부스러져 바람에 날아갔으며, 대지에 독기가 창궐하다. 땅이 오염되어 살아남은 것이 없다. 유가촌의 여아(女兒) 하나가 홀로 발견되다.

1월 29일, 황제가 은돌산에 친림하다. 천벌을 홀로 피한 여아를 살피다. 여아는 추락한 용의 여의주를 삼킨지라, 그 힘으로 독기를 피해 살아남았으리라 추정된다.

여의주는 여아의 심장에 뿌리를 내렸다. 황제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아이를 가두다.

1월 31일, 가두었던 여아가 사라지매 황제가 노하여 병졸들을 문책하고…….

문서는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서란의 손이 종이 위를 급하게 가로질렀다. 먹이 몇 방울 튀었다.

[저 아이가, 태조였습니까?]

“정황상 거의 확실해. 무지개의 계시? 그런 게 아니야. 죽어 가는 용이 내뿜는 독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삼킨 여의주가 그녀의 몸에 자리를 잡은 거다. 이게 유리 왕실의 시작이지. 어떤 의미로는 하늘에서 무지개가 떨어졌다는 것보다 더 기적적이군.”

“그 말은 곧.”

여울이 입을 열었다. 그는 힘들게 한 호흡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태조의 시대에, 유리하 외에는 여의주를 가진 자가 없었다는 뜻인가?”

“바로 그거야. 어디서 또 용이 떨어져 죽고 운 좋게 여의주를 먹고 살아남은 인간이 있지 않는 한은. 여의주가 그렇게 아무 데나 굴러다닐 물건은 아니잖아?”

산이 문서를 내려놓았다.

“유리하는 저때 창에서 도망하여 천년호에서 이무기 마파람을 만났지. 태조의 치세는 약 40여년. 그녀는 살아서 마파람을 용으로 만들고 예락을 세워 다스렸다. 결론은 분명해.”

“심장을 뽑지 않고도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 방법이 있다.”

자드락이 홀린 듯이 말했다. 기묘한 열기가 방 안을 채웠다.

서란은 붓을 든 손을 그대로 멈추고 있었다. 먹이 하얀 종이에 까맣게 번졌다. 여울이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산은 두루마리 더미를 뒤적였다.

“그래, 란아가 짐작한 대로야. 그런 방법이 있었어. 중조 이전의 시대에만 해도 당연했던 방법이지. 이걸 봐.”

두루마리의 앞에는 ‘창원지리지(昌原地理志), 남이(南夷) 예락편’에서 발췌되었다는 표제가 적혀 있었다.

창원지리지는 창의 입장에서의 지리와 세외의 국가, 민족들을 망라한 지리지로, 적어도 400년은 묵은 오래된 서책이었다.

천년 제국이라 불리는 창이지만, 역사 내에 굴곡이 없을 수는 없어 동서로 분할되어 내전을 치르던 시기도 있었다. 창의 내전기는 곧 예락의 건국 시기이기도 했다. 내전은 예락이 완전히 자리 잡은 후에나 마무리되었다.

창원지리지는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때의 서책들은 대체로 창이 안정되고 번영한 후대에 나온 서책들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산이 서란의 서판 위에 그 두루마리를 올려 주었다. 여울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자드락은 그녀의 왼쪽에 붙어 글을 들여다보았다.

남쪽의 예락은 창 황실의 방계 유리하를 시조로 하는 왕국이다.

예부터 온난한 기후에 산지와 평야가 적당하여 살기 좋은 땅이었으나 요마가 들끓어 버려져 있었다. 이를 유리하가 용 마파람을 앞세워 정벌하고……(중략)……

이 나라에는 이무기가 살며, 왕족들은 심장에 여의주를 품고 태어난다.

이무기들은 예락의 왕족 중 몇과 계약을 맺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무기가 왕족을 모시는 것을 보아 여의주를 주고 충성을 받는 내용으로 짐작된다. 이리 계약을 맺은 이무기를 교룡(蛟龍)이라 한다.

예락의 왕은 용을 거느림으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따라서 왕의 자녀들 중에서 제 교룡을 용으로 만드는 자가 다음 대의 왕이 된다. 이것은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을 증명하는 시험으로 기능한다.

용을 탄생시킴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한 후계자를 마니(摩尼)라 부른다. 이는 용의 여의주이자 교룡의 진정한 주인이 된 자를 일컫는 말이며, 예락의 왕세자를 부르는 칭호이기도 하다.

한 대에 마니가 둘이 넘을 경우 먼저 마니가 된 자를 우선하며, 신기하게도 이들 간의 계승 다툼은 발생하지 않는다……(후략)…….

두루마리를 쥐고 있던 서란의 손에 힘이 빠졌다. 서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침상 위로 구르려는 것을 여울이 붙들었다. 자드락이 주춤 물러섰다.

조용한 경악이 방 안에 깔렸다. 산은 여울이 주운 두루마리를 받아 들어 탁자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두루마리의 축이 탁자에 부딪쳐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니 마니식이란 말이 안 나올 법도 하지. 안 그래?”

“도대체, 큭.”

갈라진 바람소리 같은 말이 튀어나오다 신음에 가로막혔다. 서란은 고통으로 온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꺼낸 말이 목을 마구 긁었다. 입을 막은 손에 피가 묻어났다.

여울이 대경하여 그녀의 입가를 닦았다.

“당장 의원을…….”

“됐어, 내가 보면 돼.”

산이 당황한 얼굴로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자드락이 붙잡았다. 그는 침통을 꺼내 들고 서란에게 다가왔다.

자드락이 여울의 팔을 밀어내고 서란의 목덜미를 젖히더니 성의 없는 손놀림으로 침을 툭, 툭 꽂아 넣었다. 그녀의 호흡이 차차 안정되었다.

“평생 벙어리로 살고 싶으면 계속 이래라. 너 중상이야. 목 잘릴 뻔했다고.”

자드락이 혀를 찼다. 서란은 지친 얼굴로 늘어졌다. 얼결에 침상 위에 올라와 있던 여울이 그녀를 거의 받쳐 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자드락은 침을 회수하고 마뜩찮은 눈으로 그 꼴을 훑어보다 눈을 돌렸다. 산이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듣는 게 낫지 않겠어?”

서란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여울이 그 손에 붓을 쥐여 주었다.

[계속 듣겠습니다. 초기의 마니가 그런 뜻이었다면, 언제부터 제물로 탈바꿈된 건가요? 중조 때입니까?]

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다른 문건을 꺼냈다.

“이건 예락의 왕이 바뀌었음을 고하기 위해 사신이 창에 방문했을 때의 기록이다.”

숭무 15년 7월 26일, 예락의 사신이 오다. 형선군이 왕위에 등극했음을 알리다. 황제가 마니 혜선대군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다. 사신이 답하여 이르기를, 혜선대군이 제 용의 신뢰를 저버려 마니의 자격을 잃었다 하였다.

형선군, 묘호로는 중조가 되는 자였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것을 확인하고 나자 산이 그 문건을 성의 없이 탁자에 던졌다.

“혜선대군이 ‘마니’의 자격을 잃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예락의 주장이자, 승자인 중조의 말이었지. 그럼 진실은 뭘까. 창에는 정사(正史)인 실록 외에 야사(野史) 중의 하나로 강승문의 ‘만국유사’가 있다.”

만국유사는 강승문이라 하는 자가 홀로 집필한 야사였다. 창의 주위 나라들을 떠돌며 그 나라들에 전해지는 민담과 설화 등을 모은 것이다.

그 분량의 방대함과 의외로 풍부한 사료로 창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책이었다.

산이 두루마리를 끄집어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만국유사, 기담 편에서 발췌한 것이다.”

두루마리의 가장 위에는 예락 역천(逆天)이라 쓰여 있었다.

남쪽의 예락에서 있었던 일이다.

형제처럼 사이좋은 마니와 용이 있었다. 마니는 소년이었으나 벌써 제 교룡을 용으로 만들 정도로 교룡과 신뢰가 두터웠다.

맏이가 이를 질투하여 홀로 있던 아우를 돌로 쳐 죽이고 그 심장을 뽑아 제 교룡에게 주었다.

마니를 잃은 용은 제 마니를 먹은 맏이의 용에게 쫓기어 천년호까지 도망했다가, 저주와 절망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비명처럼 벼락이 치고 울음처럼 폭우가 내렸다고 전해진다.

천년호에서 도를 닦던 뱀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생물들이 마니를 빼앗긴 용이 죽으며 쏟아 낸 독기에 모조리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무기들도 모두 이 참사에 놀라 떠나갔다.

이무기가 하나도 남지 않자 맏이는 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맏이는 천년호를 정화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이에 시름하던 차에 꿈에서 새가 나타나 말하기를, 우애를 저버렸으니 천륜까지 저버리라 하였다.

맏이는 그길로 아비를 죽이고 미쳐 날뛰는 아비의 용마저 죽인 후에, 제 아비의 여의주를 천년호에 바치며 주술을 썼다.

여의주가 그 물을 정화하여 간신히 남아 있던 뱀의 알 몇을 일깨우니, 그 뱀들은 도를 닦지 않고도 곧바로 이무기가 되었다. 맏이는 크게 기뻐하며 갓 태어난 이무기들을 제 용이 가르치도록 했다.

이후 맏이는 장자를 후계로 세우고, 아우의 아들을 죽여 그 심장을 장자의 교룡에게 주었음이라. 그는 아우의 아들을 제 아들의 마니라 불렀다.

그 뒤부터 마니가 용의 여의주이자 후계자를 일컫는 말에서 세자를 위한 제물로 뜻이 바뀌었다 한다.

산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도 저것을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었다. 그는 묵묵히 말했다.

“어디까지나 야사이며, 민담집에 실린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놀랍도록 적절한 설명이지.”

하얗게 질린 서란의 얼굴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붓을 들었다. 흔들리는 필체가 급하게 쓰였다.

[저 이야기 속의 마니가 혜선대군, 맏이가 훗날의 중조가 되는 형선군인 건가요?]

“아마도? 뭐, 돌로 쳐 죽였다기보다는 암살이거나 교룡을 이용한 정변이었겠지만. 정확한 사실은 몰라도 대략적인 얼개는 저게 진실에 가깝지 않겠어? 왜 중조 대에 마니식이 생겼으며, 역사의 단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전통들이 예락에 존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드락이 팔다리를 늘어뜨리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서란은 창백한 얼굴로 산이 제시한 정보들을 곱씹었다.

그녀가 막 붓을 움직이려는 찰나에 산이 손을 들어 보였다.

“사실, 그 예락 역천 이야기 뒤에 내용이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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