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전야2016.07.03.
서란은 서간집 위를 어루만졌다. 그 위로 결국 넘쳐흐른 눈물이 툭 떨어졌다.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서간집이 젖을까 봐 얼른 들어올렸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당의 앞섶과 치맛자락에만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멈출 생각도 없었다. 한참을 흐느꼈다.
기댈 사람도,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함께 울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혼자 감정을 추슬렀다.
서란은 그녀의 머릿속처럼 엉망이 된 침전 안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왕족의 처소인 만큼 넓고 잘 꾸며진 침전이었다. 그런데도 문득 제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마니전에 갇힌 채 그녀는 무력하게 그것을 보고 있다.
그 전에, 단 한 번만이라 해도 좋았다. 밖으로 나가 보고 싶었다.
서란이 서간집을 넘겼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바깥은 이 안에, 여울의 서간들 속에 있었다. 외울 정도로 보았던 것을 또다시 보았다. 그가 보았을 풍경을 그가 쓴 문장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가장 많은 문장이 쓰인 곳은, 바다.
어떤 모습일까. 시야의 한계까지 펼쳐져 있다는 물은 어떤 색일까. 하늘과 맞닿았다는 수평선은 어떨까. 바다 냄새는? 파도는? 모래사장은? 바다는 짜다는데, 무슨 맛이 나지?
그녀는 여울이 쓴 글씨들 위를 손으로 쓸었다. 그녀에겐 아직 내릴 수 있는 명령이 남아 있었다. 무너진 기대들 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을 품었다.
아무에게도 닿지 못할 가느다란 혼잣말이었다. 추스르지 못한 울음이 묻어 있었다.
그날, 서란은 두 번째 명령을 정했다. 눈물에 흐려진 시야에 서간집의 표지가 이지러졌다.
쩡, 하고 그 시야에 금이 갔다. 부서져 내린 풍경 너머로 보이는 건 눈꺼풀 안쪽의 어둠이었다. 과거를 부유하던 정신은 갑작스레 추락했다.
서란은 눈을 떴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 너머로 서까래가 보였다. 천장이라니. 분명 동굴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목이 홧홧했다. 머리는 멍하고 무거웠다. 무언가 긴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온몸이 아래로 깊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손가락 끝부터 힘을 주었다. 간신히 손끝을 까닥이는 순간 서늘한 체온이 손을 얽어 왔다.
“누워 계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울?’이라고 되물으려 입을 열던 서란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온몸을 떨었다. 목에서 시작된 고통이 불처럼 전신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소리 없이 움츠리자 여울이 초조하게 말했다.
“한동안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여울이 목이 메는 것처럼 낮게 기침을 했다. 서란은 겨우 눈만 굴려 옆을 보았다. 무복을 걸친 넓은 가슴과 목만 보였다.
이제야 조금씩 머리가 맑아진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비늘을 부쉈던 것이 기억났다. 여울의 것이었나?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돌아온 걸까? 여기는 어디지?
온갖 의문이 떠오르는 사이로, 그녀는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을 묻기로 했다.
서란이 목소리를 내는 대신 입만 뻐끔거렸다. 그 입술의 움직임을 뚫어질 듯 보고 있던 여울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 냈다.
‘어디 다치진 않았느냐?’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어쩐지 화를 내고 싶었다.
제가 막지 못해서 당신은 죽을 뻔했는데, 이 와중에 제 걱정이 드십니까.
그러나 화를 낼 자격도 없었다. 그리, 지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서, 그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게 면구스러울 지경이었다. 여울은 간신히 대꾸했다.
“저는 멀쩡합니다. 다친 건 보주시지요.”
서란이 조금 웃었다. 그녀가 다시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하얗게 껍질이 일어난 파리한 입술이었다.
‘여기는 어디냐?’
그 입술이 움직인다는 게 너무나 감사했다. 그는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임천의 호명객잔입니다. 결계를 벗어났으니 한동안은 안전합니다. 설명은 나중에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서란은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여울이 그녀의 눈 위에 제 손을 올려 덮었다.
“좀 더 주무십시오.”
그의 손 아래에서 그녀의 입술이 설핏 미소를 띤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여울은 입 안쪽 살을 힘주어 깨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손을 떼자 얌전히 눈을 감은 그녀가 보였다.
그는 이불을 끌어당겨 잘 여며 주었다. 그녀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 숨결을 확인했다. 요 며칠 사이 반쯤 습관이 되어 버린 동작이었다. 규칙적인 숨이 가느다랗게 와 닿았다.
여울은 서란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무서웠다. 그는 문살을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나오든가, 들어가든가. 하나만 하지?”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울은 힘겹게 눈길을 돌리고 문을 닫았다.
자드락이 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산이 퀭한 얼굴로 서류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울이 나오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란아, 일어났어?”
“잠깐. 도로 잠드셨다.”
“란아는 무슨. 가식 떨기는.”
자드락이 픽 웃었다. 산이 그를 쳐다보았다. 자드락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아, 미안. 내가 이무기라 거짓말을 못해서. 진심이 그냥 튀어나오네?”
“그런 말은 소서촌에 도로 기어들어가고 나서 하지?”
“싫은데? 맨날 보주 내버려 두고 돌아다니는 교룡 놈이나, 평생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오라비처럼 구는, 자기 친구 살리기 바쁜 놈 사이에 마니를 두자니 불안해서 말이야.”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산은 인상을 쓴 채 물었다.
“그런 네놈은 란아와 무슨 상관인데? 너 내 여동생 이름도 모른다며?”
“마니 이름 따위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마니면 됐지.”
“너.”
산이 으득 이를 갈았다. 자신이 서란을 그저 마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에 자드락의 말이 더 뼈아팠다.
자드락은 킬킬 웃어 댔다. 파랗게 날이 서는 둘 사이에 여울이 앉았다. 그는 둘의 신경전을 무시하고 산에게 물었다.
“새로 들어온 소식이 있나?”
“아니, 딱히. 교룡들은 여전히 부상 치료 중이고, 병사들은 결계 안쪽만 샅샅이 뒤지고 있고. 너희가 빠져나온 건 아직 안 들켰어. 당분간은 모를걸.”
산의 시선이 여전히 웃고 있는 자드락에게 가 닿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에 서렸다.
“저 녀석 덕분이긴 해. 비늘에 축지를 새긴 것도, 결계를 넘은 것도. 대단한 주술 실력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네 인정 따위 없어도 내가 천재인 건 잘 알아. 네가 알아야 할 건 다른 거지.”
“……?”
“내가 너희 둘 다 엄청, 무지, 끔찍하게 맘에 안 들어 한다는 거.”
자드락이 대뜸 말했다. 생긋 웃는 얼굴과 말의 내용이 어울리지 않아 이질적이었다. 여울이 조용히 답했다.
“알고 있다.”
“왜인지도 알아?”
“마니를 제대로 못 지켜서겠지.”
끼어든 산이 투덜거리며 서류를 팔락 넘겼다. 자드락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이러니까 더 짜증 나는 거야.”
여울과 산의 시선이 동시에 자드락에게 가 닿았다. 자드락은 늘어져 있던 몸을 세우더니 탁자에 팔을 괴었다. 명랑한 어조가 튀어나왔다.
“아득바득 달려드는데 결국 실패할 게 뻔해서, 그게 꼭 누구 같아서 꼴 보기 싫어.”
“누가 실패한다고?”
“부나방처럼 퍼덕거리다, 불에 타 버리겠지. 재만 남을 거야. 그 추한 발악을 두 번이나 보라고. 내 팔자가 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말고 그냥 하고, 욕할 거면 대놓고 해. 너랑 수다 떨 시간은 없다, 희명교룡.”
산이 쏘아붙였다. 자드락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칭호, 너희한테 듣기 싫으니까 자드락이라고 불러.”
“잡소리 그만하고 할 말만 깔끔하게 하면. 나 바쁘다.”
산은 진심으로 지친 태도로 말했다. 그의 앞에 뒹구는 서류와 두루마리들을 흘깃 본 자드락이 팔을 뻗었다. 산이 보고 있던 서류 위를 갈색 손이 탁 소리를 내며 짚었다.
“마니가 바다에 가려는 이유는 알아. 근데 넌 뭐에 걸었기에 걔를 돕고 있는 거야? 갑자기 여동생으로 보였다는 헛소리를 할 거면 그만둬. 너희 왕족들이 마니를 어떻게 보는지 제일 잘 아는 건 나일 테니까.”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까맣게 일렁이는 자드락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 여동생으로 보여서이긴 한데. 반 정도는.”
“이야, 반씩이나. 그럼 나머지는? 이것들 때문이지? 이게 도대체 뭔데? 마니를 살릴 방법이라도 돼?”
피식거리는 자드락의 말과 동시에 여울의 시선도 산에게 향했다. 자드락의 마지막 질문이 그가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산은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그가 힐끔 여울을 보았다.
“나가 있으라고 하면.”
“들어야겠다.”
여울이 덤덤하게 답했다. 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묵묵히 두루마리를 정리했다. 고어와 탁본이 뒤섞인 것을 쌓아 올렸다. 그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란아가 예락의 역사는 중조 대에 무언가 수정되었다고, 그때부터 마니식이 생겼을 거라 추측한 건 알고 있겠지.”
여울은 끄덕였고 자드락은 눈을 치떴다. 서류를 짚고 있던 자드락의 손이 우그러지며 종이가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뭐야, 아무것도 몰랐어? 란아가 왜 바다에 가려 하는지 안다며?”
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드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건, 걔가…… 태조가 마파람을 용으로 만든 게 바다니까, 도박하려는 심정으로 가는 거라고. 도박에 실패하면 거기서 여울을 용으로 만들 거라고 했어. 죽기 전에 바다를 보고 싶다고.”
이번에 동요한 건 여울이었다. 여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거칠게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서란이 누워 있는 방으로 가려던 그의 옷깃을 자드락이 잡아챘다. 자드락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앉아.”
“…….”
“아예 짐작 못했던 건 아닐 거 아냐?”
그들이 하는 꼴을 본 산이 두루마리를 팽개치고 머리를 싸쥐었다. 그는 괴상한 신음을 내고 일어나더니 문가로 다가갔다.
호명객잔 별관은 본관과 따로 떨어져 담을 두른 기와집이었다. 문 밖은 대청마루였다. 산이 문을 열고 고개만 쭉 빼서 외쳤다.
“청화야!”
마루 너머 다른 방에서 일을 하고 있던 청화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네에, 대행수. 왜요?”
“주안상 좀 내와라. 술, 많이. 왕창. 화주로 가져와.”
“대낮부터 무슨 술이에요?”
“맨정신으로는 대화가 안 될 거 같거든.”
산이 씹어 뱉듯 말했다. 뒤에서 자드락이 쾌활하게 덧붙였다.
“난 송로주.”
산은 인상을 쓴 채 뒤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어느새 풀어져서는 실실 웃고 있었다. 산이 몹시 내키지 않는 태도로 밖을 향해 말했다.
“……송로주도 한 병 챙겨 와라.”
“두 병.”
“……손놈께서 두 병이랍신다.”
“어휴, 술병 환자들이야.”
청화가 투덜거리며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쾅 닫은 산이 성큼성큼 걸어와 제자리에 앉았다.
여울은 멀거니 굳어 있었다. 자드락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발랄한 흥얼거림만 공간을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문 좀 열어 줘요.”
청화의 말에 일어난 산이 문을 열었다. 그녀가 들어와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기이한 방 분위기에 약간 당황한 듯했다.
‘분위기 왜 이래요?’
‘그러게 말이다.’
청화의 눈빛에 산은 어깨만 으쓱였다. 청화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산이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자드락은 솔잎 무늬의 옥색 병을 냉큼 집었다. 뚜껑을 따고 킁킁 냄새를 맡은 그가 씩 웃었다.
“제법 잘 나가는 상단 대행수라더니, 이거 질이 좋은데?”
“먹고 떨어져라.”
투덜거린 산이 화주를 땄다. 여울도 제 쪽으로 화주를 한 병 당기더니 말없이 잔에 술을 따랐다. 산은 넘치도록 잔을 채우고 한 번에 들이키다가 자드락을 보고는 푸욱, 술을 내뿜었다.
“너, 너, 뭐 하냐?”
“눈이 있으면 보일 거 아냐?”
자드락은 호리병에 담긴 서란의 피에 송로주를 붓고 있었다. 호리병 뚜껑을 닫은 그가 병을 마구 흔들어 피와 술을 섞었다.
산이 기가 찬 듯이 그를 보았다. 여울은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포기한 듯 제 술만 꿀꺽꿀꺽 마셨다. 피 섞인 송로주를 자드락이 쭉 들이키더니 끄윽, 트림을 했다.
“이제 좀 정신이 맑아지네.”
자드락이 낄낄 웃으며 새 병을 열었다. 산은 입을 딱 벌린 채 그를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한동안 조용히 술 들이켜는 소리만 났다. 약속한 듯이 아무도 안주에는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았다.
몇 잔이 돌고 나자 자드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던 얘기나 계속 해 보지? 마니식이 중조 대에 생겼다는 건 뭔 소리야?”
“예락의 역사에는 단절이 있다. 잘 찾아보면 나온다지만, 사실 나도 란아한테 듣기 전엔 몰랐지.”
“무슨 단절?”
“중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기존의 체계를 무너뜨린 흔적.”
“원래는 마니식 같은 게 없었단 소리야?”
“아마도, 확실히.”
자드락은 생기 없는 얼굴로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줄줄 마셔 댄 그는 가라앉은 얼굴로 산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란아가 그 의문을 제시했고, 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었지. 그 결과물이 이거고.”
산이 엄지로 한쪽에 밀어 놓은 두루마리 무더기를 가리켰다. 자드락은 숨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뭔데?”
“창의 기록.”
자드락이 그대로 굳었다. 관계없는 사람처럼 술잔만 기울이던 여울이 눈을 들었다.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홍평에서 너와 보주가 나눈 대화가 그것이었나? 그녀에게 투자하겠다는 것이?”
“그래.”
“그걸 내게 숨긴 이유는…….”
“이건 시험 문제가 아니야. 해답이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게다가 쟤는.”
산이 흘깃 닫힌 문 쪽을 보았다.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답을 찾지 못하면 너를 용으로 만들고 죽을 생각인데. 그걸 어떻게 너한테 말하겠냐.”
잔을 쥔 여울의 손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산은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화주를 잔에 채웠다. 잔 밖으로 술이 넘쳤다. 자드락은 넋이 나가 있었다. 그는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욕설 같았다.
길게 침묵하던 여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창의 기록에서 네가 찾아낸 건 뭐지? 답은 있었나?”
“그건 아직 정리 중이야. 얼마 안 남았으니까 끝나면 알려 줄게.”
산이 시선을 피했다. 자드락이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에 탁자가 덜컹거리며 술들이 잔 밖으로 튀었다. 자드락은 물어뜯을 듯이 산에게 바싹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제대로 말해. 답이 있는 거야? 마니를 살릴 방법이 있어?”
“글쎄.”
산은 손끝으로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물처럼 맑은 술에 제 얼굴이 비쳤다. 이지러지는 물결 속에서는 자신의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가 되도록 태연하게 보이길 바랐다.
“문제를 제기할 순 있지만, 대책은 없어.”
“그게 무슨 뜻이지?”
“마니식이 중조 대에 생긴 비정상적인 제도임은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야.”
산이 쓰게 웃었다.
“대안이 없으니까.”
말이 묵직하게 깔렸다. 자드락이 천천히 제 자리에 앉았다. 여울은 잔을 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이 들여다보고 있던 잔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가 두루마리 뭉치를 주섬주섬 챙기고 일어났다.
“마무리할 게 좀 더 있거든. 다 정리되면 알려 줄 테니까 기다려.”
그는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드락은 휘청거리는 손으로 술병을 쥐었다. 술잔 밖으로 넘치는 술이 더 많았다. 연거푸 몇 잔이나 들이켠 후에 그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여울은 계속 석상처럼 있었다. 자드락이 발끝으로 그를 툭 쳤다.
“야.”
여울이 흘깃 그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배시시 웃었다.
“너, 내 술 상대 좀 해라. 너도 술 당기지?”
“…….”
“따라 봐.”
자드락이 빈 술잔을 내밀었다. 여울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묵묵히 송로주 병을 쥐었다. 병은 텅 비어 있었다. 그새 다 마신 모양이었다.
그는 제가 마시던 화주를 들어 자드락의 잔에 따라 주었다. 자드락이 키득거리며 술을 마셨다.
“마니식이, 비정상적인 제도면.”
웃음 사이로 비틀린 말이 더듬더듬 흘렀다. 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드락의 머리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진작 알았으면. 아니, 아예 모르는 게 나았을까. 알아도 바꿀 방법이 없는 거면? 야, 말 좀 해 봐. 네 친구란 저놈이 알아낸 게 뭐야, 응?”
“너, 소서촌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나.”
여울은 자드락의 소매 사이로 보이는 비늘을 주시했다. 자드락이 그의 시선을 따라 그것을 보더니 으쓱이고는 호리병을 꺼내 피를 마셨다.
“너라면 지금 돌아가겠냐?”
“아니.”
“그래, 안 가. 아니, 못 가지.”
자드락이 벙싯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여울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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