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유리서란(3)2016.06.30.
잠드는 것이 무서웠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어둠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으며,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서란은 열네 살의 자신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죽어 있는 표정이 소름 끼쳤다. 그녀 안, 깊은 늪에 있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는 현음당이 앉아 있었다.
곱게 주름 진 노인의 얼굴에 엄한 기색이 어렸다. 서란이 천천히 답했다.
앳된 목소리에 새카만 심연이 있었다. 현음당은 펼치고 있던 책을 덮었다. 서안을 옆으로 밀어내고 서란에게 다가앉았다.
현음당은 서란이 왜 그러는지 뻔히 알면서 시침을 떼고 물었다. 서란은 눈을 내리깐 채 꼼짝도 하지 않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현음당이 태연히 되물었다. 숙인 서란의 가는 목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현음당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란이 머뭇거렸다.
주름 진 손이 다가와 치마폭에 숨어 있던 서란의 손을 찾아 쥐었다. 현음당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서란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현음당은 간혹 이렇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긋하게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현음당이 물었다. 서란은 답하지 않았다. 현음당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아홉 살에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이미 깨달았었다. 죽어 버릴 너를 사랑하는 게 힘이 든다고 했으면서 그녀가 먼저 죽어 버렸다.
서란은 고집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현음당이 무엄하게도 그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녀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가 손짓했다. 서란은 반사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현음당이 귓가에 속삭였다.
서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현음당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서란은 멍하니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현음당이 단언했다.
스물한 살의 서란은 그녀의 태도를 바꿔 놓은 순간을 보고 있었다. 저 말을 통해 삶을 버틸 방법을 찾아냈었다. 열네 살의 서란이 망연히 물었다.
현음당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밀쳐 낸 서안을 도로 당겨 오며 말을 이었다.
현음당이 조용히 웃었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주홍색 눈이 의문을 담고 현음당을 보았다. 현음당의 자글자글한 눈매 속에서 눈동자가 아이처럼 빛났다.
서란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어린 제자를 향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소녀다운 얼굴로 서란이 울상을 지어 보였다. 드리워 있던 어둠은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현음당은 은근한 미소를 띤 채 책을 펼쳤다.
이날 이후, 서란은 마음가짐을 바꿨다. 매순간을 즐겼다. 정확히는 즐기려고 노력했다. 어둠에 적응했다.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았다.
노력은 소득을 거두어 그녀는 점차 밝아졌다. 시간이 흐르자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버텨 나갔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러,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여울의 서간이 오지 않았다.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처음에는 그저 조금 늦어지는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지나자, 더럭 겁이 났다.
그가 일부러 안 보냈을 리는 없다. 무슨 사고가 난 걸까. 혹여 다쳤다거나, 아니면, 설마…….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서란은 정신을 반쯤 빼 놓고 다녔다. 멍하니 있거나,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거나 사소한 실수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가 그렇게 넋이 나간 듯 굴어도 나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것은 현음당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답할 듯 벌어졌던 서란의 입술이 닫혔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짧은 대답만을 내어 놓았다.
현음당이 책을 덮었다. 그녀가 서안 너머로 서란을 파헤칠 듯 바라보았다. 서란은 시선을 피했다.
간신히 운을 떼고도 서란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녀의 손이 치맛자락을 구겨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이리 갑작스레 소식이 끊기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처럼 뒤늦게 부고만 들려올지도 모른다. 여울마저 그리 된다면.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현음당은 뜬금없는 질문에 왜 그러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제자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확신을 담은 어조로 말해 주었다.
핏기 없던 서란의 얼굴에 겨우 일말의 안도가 찾아왔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 다물기를 반복하다가, 물기 어린 눈으로 속삭였다.
현음당은 곧바로 답해 주었다. 서란이 매달리고 싶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러했듯이, 서란은 그녀에게 매달리지는 못했다. 대신 나붓이 예를 취했다.
현음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음당이 있었기에 서란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이성이 돌아왔다. 그녀는 간신히 생각을 정리했다.
여울은 이무기이며, 그녀의 교룡이다. 교룡인 그가 그녀의 명령을 일부러 거부할 리는 없다.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깜박 잊은 것뿐이거나, 서간이 중간에 분실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무기를 해할 수 있을 만한 존재는 거의 없다. 그는 무사할 것이다. 무사할 것이다. 무사해야만 했다. 제발.
서란은 지필묵을 꺼내 서간을 썼다. 온 마음과 걱정을 쏟아 내자 순식간에 종이가 꽉 찼다. 당황하여 그것을 구겨 버리고 새 종이를 꺼냈다. 몇 번을 고치고 다시 쓴 끝에 간결한 세 줄의 답서가 완성되었다.
첫 서간을 받았을 때 했던 결심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그가 먼저 서간을 보내지 않았으니,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이었다. 별것 없는 내용이니까.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마음 한편에 약간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답서였다.
여울이 이것을 받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당황할까. 내내 답서 한 번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무슨 답서냐고 화를 낼까. 아니면 조금쯤은 기뻐할까.
온갖 생각이 맴돌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간에 미련처럼 구겨진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그것을 버린 다음 새 종이를 꺼냈다. 다시 깨끗하게, 아무런 흔적이나 잡념이 남지 않도록 새로 썼다. 곱게 접어 봉했다.
그녀가 보냈던 마음은 결국 그에게 닿지 못했다.
서란은 달포도 되지 않아 되돌아온, 수취인을 찾지 못한 답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참는 것에 능숙해졌다.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서간집에 그 답서를 정리해 넣었다. 흘러넘친 걱정과 녹아 버린 기대도 함께 정리해 넣었다.
가지런히 철해진 답서 위의 글자들이 흔들렸다. 먹으로 된 글씨는 허공으로 떠올라 어지럽게 휘돌았다. 제멋대로 뒤섞이더니 다른 문장을 이루었다.
[청천 원년 12월 9일, 마니 덕원군이 마니식을 치르다.]
‘아.’
스물한 살의 유리서란은 그 문장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청천은 중조의 연호였다. 청천 원년, 중조 즉위 직후의 기록. 예락의 역사에서 ‘마니식’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초(史草)였다.
막상 저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었다. 다른 것을 찾다가 스치듯 우연히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장은 그녀의 뇌리를 뒤덮어 버렸다. 마니를 사람이 뽑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심어진 의문이 그 문장을 만나 개화했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열여섯 살 때였지. 여울이 뒤늦게 서간을 보내 온 이후에.’
생각과 동시에 주위가 흔들렸다. 떠돌던 글자들이 낙엽처럼 내려앉았다. 글자들이 내려앉은 곳은 누런 책장이었다.
그녀의 침전 사방에 펼쳐진 책들이 널려 있었다. 위태롭게 쌓인 책더미, 펼쳐진 두루마리, 휘갈겨 쓴 종이뭉치.
탁자 위와 침상 위, 바닥까지 발 디딜 틈도 찾기 어려울 만큼 문서들이 나뒹굴었다. 먹 냄새와 오래 묵은 종이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란은 그 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은 열기를 담고 커졌다.
그녀가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소름이 돋았다.
스치듯 본 사초에서 출발하여, 의문을 품고, 석 달을 뒤졌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는 역사에 존재하는 단절을 찾아냈으며 마니식이 중조 대에 갑자기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집었다. 스스로 정리해 본 것을 다시 읽었다. 잘못된 것은 없는지, 희망에 눈멀어 만들어 낸 착각은 아닌지. 몇 번을 보아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이를 쥐고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가 가늘게 들썩였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니야. 그런 방법은, 없어.’
현재의 유리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부정은 과거의 자신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녀는 열여섯의 유리서란이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비틀린 역사는 균열을 남겼다. 그 흔적을 찾아내고 더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균열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스승에게 매달렸다.
강학을 마치고 차를 즐기던 와중이었다. 서란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찻잔을 내려놓던 현음당의 손이 찰나 멈추었다. 깊은 눈매가 서란을 향했다.
서란은 그녀가 가진 의문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음당을 믿지 않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그녀를 믿으면서도 상세한 내용은 꺼내기가 어려웠다.
서란은 현음당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긴 정적 끝에,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현음당이 오랜 시간 동안 침묵했다. 서란은 현음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바짝 힘이 들어간 손끝을 풍성한 당의자락에 감춘 채 그저 기다렸다.
어느새 차가 다 식었다. 그제야 현음당은 느릿하게 말했다.
현음당은 서란의 의문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음 시간에 ‘성학집요’를 가져왔다. 그것은 통치와 정치의 교과서이자 제왕의 학문이었다.
서란의 물음에 현음당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음당은 뛰어난 스승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서란의 적성에 맞았다. 강학 시간은 서란에게는 유일한 숨 쉴 틈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책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현음당이 미소지었다. 그 위로 하얗게 무언가가 번져 갔다. 그 미소가 흐릿해졌다. 그녀의 모습까지 지워졌다. 이윽고 현음당의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안개 같은 흐릿한 것이 사방을 메웠다. 그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흘렀다.
냉담한 음성은 상궁의 것이었다.
즐겁지가, 않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란은 항변할 수 없었다. 현음당이 직접 남긴 말임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녀와 현음당 단둘이서 나누었던 대화였다.
스승을 잃었다. 서란이 열일곱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이가 찼으므로 새로운 여사는 오지 않았다. 서란은 홀로 남았다. 그녀는 또다시 체념을 배워야 했다.
현음당의 부재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현음당이 가르치던 것을 독학하면서, 미친 듯이 역사를 뒤졌다.
국가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 오례의, 각 부의 업무를 기록한 일기들, 이미 편찬된 선왕들의 왕조실록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초까지도.
원본은 볼 수 없으나 사본은 볼 수 있었다. 이름뿐이라 해도 왕족이라는 신분이며, 누구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마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서란은 주의를 기울였다. 마니전을 나가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서고에서 책과 기록을 가져다주는 궁녀들이 세자의 눈과 귀인 것을 잊지 않았다.
다른 책과 섞어서, 때론 문득 생각난 듯이, 혹은 ‘찾기도 어렵고, 왔다 갔다 하기도 번거로울 테니 비슷한 제목인 것들을 그냥 한 번에 다 가져오렴’ 하는 식으로.
길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서란은 쉬지 않고 집중했다. 모든 시간을 거기에 쏟아 부었다. 그 외엔 할 것이 없어서. 유일하고 가느다란 희망이라서.
‘다음 기록에는 있겠지.’
그녀가 손닿는 모든 기록을 뒤지는 데에는 2년여가 걸렸다.
‘다른 책에는 있을 거야. 사소한 단서라도 좋으니까, 제발.’
기대는 매번 무너졌다. 쌓아 올린 체념들 위에 마지막 절망이 내려앉았다.
시야를 뒤덮은 안개 사이로 문진이 날아왔다. 내던져진 문진이 안개를 걷었다. 문진은 장식되어 있던 화병에 부딪쳤다.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집어던진 건 열아홉의 서란이었다.
서란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잣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더니 탁자 위를 마구잡이로 휩쓸어 버렸다. 종이가 분분히 허공을 날고 연적이 떨어져 깨졌다. 먹이 사방에 튀었다.
탁자에 남은 건 무거운 벼루뿐이었다. 서란이 그것마저 집어 들어 내던졌다. 바닥에 던져진 벼루는 박살이 나며 파편을 튀겼다. 담겨있던 먹이 쏟아져 새카맣게 발치를 적셨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갑 쪽으로 향했다. 책장과 문갑에 정리되어 있던 서책을 되는대로 뽑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쌓여 있던 책더미를 무너뜨리고 두루마리를 집어 던졌다.
침전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잡히는 대로 쥐고 던지던 그녀의 손이 돌연 멈췄다. 비단으로 감싼 표지. 여울의 서간집이었다.
서란은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힘주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손안에서 책이 우그러졌다. 그녀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녀는 서간집을 던질 듯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치켜 올린 팔이 떨렸다. 울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친 호흡을 따라 온몸이 들썩였다.
이것만은 던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느리게 팔을 내렸다. 서간집을 쥔 채 그 자리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바닥에 흐른 먹물이 치마를 적셨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릎 위에 서간집을 올려놓았다. 서란은 망연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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