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34화 (34/70)

34. 유리서란(2)2016.06.26.

여울이 떠나고 서란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생활 자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는 맹약식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나날이었다. 기다릴 것이 있다는 사실은 흐르는 모든 순간들을 반짝이게 했다.

지금쯤이면 예경을 벗어났겠지. 예경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거진 도하를 거치니까, 도하에 들렸으려나. 흑룡강을 보았을까. 흑룡강은 바다처럼 넓고 밤처럼 검다던데, 어떤 모습일까. 그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몸은 마니전에 갇혀 있어도 마음은 홀로 날아 담을 넘었다. 하루하루 손꼽아 서간을 기다렸다. 시간이 어찌나 느린지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서간이 왔다.

서란은 궁녀를 모조리 물리고 서간을 쥔 채 침전에 홀로 앉았다. 서간의 겉봉에는 단정한 글씨로 ‘화예옹주 유리서란 친전’이라 쓰여 있었다.

서란은 봉투를 뜯지 못하고 그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서간. 온전히 그녀를 위해 쓰인 글.

붓을 들어 이것을 썼을 여울을 상상했다. 고작 반나절 마주했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했다. 속에서 무언가가 간질간질 피어올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그의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정이 잘 되질 않아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었다.

서간은 길지 않았다. 그다지 상세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너무 좋아서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침전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까지 했다. 마니라는 것을 잊고 열 살짜리 소녀로 돌아가 뺨을 붉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탁자 앞에 앉았다. 종이를 꺼내고 붓을 들었다. 반듯하게 펼친 그의 서간을 옆에 놓았다. 서란은 답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붓이 나는 듯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빠르게 답서가 채워졌다. 금세 종이가 꽉 찼다. 할 말을 반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그녀는 붓을 쥔 채 자신이 쓴 답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러다 멈칫 굳었다.

사막이라니, 끝없이 모래가 펼쳐져 있다는데 어떤 곳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구나.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란은 자신이 쓴 문장을 입 속으로 읽었다.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불가능하다. 그녀는 영원히 사막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들떠 있던 기분이 무너졌다. 현실이 머리끝에서부터 찬물처럼 쏟아진다. 서란은 붓으로 그 문장을 뭉개 버렸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우는 소리가 나면 침전 밖을 지키고 있는 나인들이 들여다볼 것이다. 미미한 짜증을 보이며 달래려 하겠지. 그 다음엔 세자에게 보고할 것이다. 보모상궁이 바뀐 이후로 그녀 근처 나인들이란 대부분 그러했다.

그녀는 붓을 놓고 제 입을 막았다. 꾹꾹 울음을 눌러 삼켰다. 굵은 눈물방울이 치맛자락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혼자서 감정을 추슬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익숙해져 가는 일이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서란이 제가 쓴 답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내려놓고 여울의 서간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용미에 있을 예정입니다. 관아에 행적을 알려 두겠습니다. 답서는 그리로 주시면 됩니다.

말미에 쓰여 있는 문장들을 읽었다. 그는 답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란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의 서간을 받았을 때 얼마나 설레고 들떴는지, 방금 전 제 기분을 떠올려 보았다. 여울도 답서를 받으면 나처럼 좋아할까? 나처럼 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럼 안 되는데.’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올해는 건평 10년, 그녀는 열 살이었다. 건평 22년, 그녀가 스물두 살이 되면 마니식이 행해진다. 12년 남았다. 12년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다.

아홉 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고통을 떠올렸다. 지금도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란아라고 부르던 음성. 입 안에 쏙 들어오던 하얀 다식. 따뜻한 품.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유품이 하나도 없는데도, 생생했다. 그 기억이 괴로웠다. 알고 있어서 너무나 그리웠다.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한데 그녀의 손은 늘 비어 있었다. 그 허전함이 사무쳤다.

교룡들은 대체로 주인과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 관계는 우애일 수도 있고, 친애일 수도 있으며, 충심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정이 들었다. 어지간하면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사이다. 허나 여울과 서란은 떨어져 지내는데다 그가 담담해 보였으니 좀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답서를 남기고, 그것이 쌓이면, 나중에 힘들지 않을까. 이무기들은 기억력도 좋은데.

서란은 여울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해 둔 마지막 명령만 해도 괴로울 텐데, 더 괴로울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녀는 그의 긴 삶에서 짧게 스쳐 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정이 드는 것은 좋지 않다.

맹약식 후에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을 떠올렸다. 무심했었다. 그대로 변하지 않으면 헤어질 때도 괜찮겠지.

‘보내지 말자.’

처음부터 아무것도 쌓지 않으면, 쉽사리 잊을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그게 낫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명치가 아팠다. 쿡쿡 쑤셔 온다. 또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참았다. 이번에는 참기가 조금 어려웠다.

네게 이 답서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너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은, 보내고 싶단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붓이 답서 말미에 문장을 덧붙였다. 서란은 그것을 보다가 무표정하게 붓을 움직였다. 보내지 않을 답서임에도 속내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진심은 먹 아래에서 뭉개졌다.

뭉개진 자국을 들여다보던 서란이 붓을 내팽개쳤다. 먹이 몇 방울 튀었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 갔다. 검은 얼룩이 점점 커지더니 사방을 뒤덮었다.

얼룩은 암흑이 되었다. 새카만 암흑 속에 남은 것은 열 살의 유리서란이 아니라 스물한 살, 현재의 유리서란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왜 내가 이런 곳에 있지?

그녀는 흐릿한 정신을 더듬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동굴 안에 있었다. 그의 비늘과 자드락의 비늘을 나란히 놓고 보다가…….

갑자기 목이 뜨거워졌다. 놀라 내려다보자 이글거리는 불이 목을 조이고 있었다. 아팠다. 비명을 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란은 통증을 잊기 위해 그것에 집중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언제였는지 안다. 열두 살 때였다. 그것을 떠올리자 어둠이 휩쓸려 사라진다. 목을 감고 있던 불도 사라졌다.

서란은 열두 살이 되어 마니전 마당에 서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쨍한 햇빛이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주름 진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굽혔다. 우아한 동작이었다. 서란은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앳된 목소리가 서늘했다. 대뜸 나온 하대는 아직 현음당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현음당은 순순히 답했다.

서란은 쪽진 머리와 쌍가락지를 흘깃 본 후에 물었다. 쌍가락지는 기혼자만이 낄 수 있었다. 현음당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동림 안씨는 현 중전을 배출한 공신 가문이었다. 세자 유리천응의 외가였다. 문산 최씨 또한 이름난 공신 가문이었다.

마니를 다른 왕족들이 다니는 종학에 보낼 수는 없다. 옹주에게 교육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르칠 이를 보낸다 했다.

아무나 들일 수는 없으니 세자의 사람들 중에 적당한 이를 보냈겠지. 그러니까, 저 여사(女師)는 그런 맥락에서 세자의 손을 거쳐 보내진, 세자의 사람이란 뜻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서란은 무표정하게 말을 던진 다음 걸음을 옮겼다.

서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주위에서 나인들이 헛바람을 들이키고 고개를 돌렸다. 현음당은 태연했다.

서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벌써부터 기를 잡겠다는 건가. 순순히 굽혀 줄 수도 있으나 그럴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키지 않는데도 굽힌다는 것은 무언가 노릴 것이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서란은 바라는 것이 없었다.

현음당은 앳된 얼굴에 떠오르는 조소를 응시했다. 그녀가 차분히 답했다.

서란이 당황하여 현음당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나 때우다 갈, 형식적인 여사일 거라 짐작했다. 새로운 감시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현음당은 진심으로 서란을 가르칠 작정으로 보였다.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서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반항적으로 말했다.

현음당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흔들리던 서란의 눈에 중심이 잡혔다. 또, 마니란 말이지. 서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현음당도 깊이 생각하고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으로 나온 대꾸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란에게는 일상적인 말이 아니었다.

서란은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뒤에서 현음당의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서란의 앞에서 보모상궁이 강학이 이루어질 내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마루에 올라섰을 때, 현음당이 나직하게 말했다.

서란이 걸음을 멈췄다. 보모상궁이 대경하여 돌아보았다.

서란이 날카롭게 그녀를 불렀다. 보모상궁이 움찔했다. 선명한 눈으로 상궁을 보던 서란이 갑자기 화사하게 웃었다.

서란은 웃으며 상궁의 말을 끊었다. 보모상궁이 입을 다물고 제 가슴께에 닿을까 말까 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또박또박 명령했다.

웃고 있는 소녀의 기백이 범상치 않았다. 상궁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서란에게 힘이 없다지만 여기서 반발하면 왕족에 대한 능멸이 된다.

서란은 나인들을 돌아보며 명했다. 보모상궁이 못마땅한 낯을 감추지도 않은 채 나인과 함께 물러났다. 현음당은 그 일련의 과정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보모상궁과 나인들이 완전히 멀어지자 서란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익숙하게 내실로 접어들었다.

서란이 손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현음당이 문을 닫자마자 그녀가 휙 돌아섰다. 그 서슬에 치맛자락이 나부낄 정도였다.

그녀는 절박하게 물었다. 사리분별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마니였다. 그런 운명이라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운명인 줄 알았다.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서란은 현음당의 주름 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음당이 입술을 떼기까지 천 년이 흐르는 듯했다.

현음당이 이런 거짓말을 하여 얻을 만한 이득이 없었다. 조금 전 상궁의 태도까지 고려해 보면, 손해에 가깝다. 사실일 것이다. 서란은 벼락을 맞은 듯이 굳었다.

당연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최초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현음당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듯도 하고, 가여운 듯도 했으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도 한. 그녀가 말했다.

서란이 다급히 대꾸했다. 그녀는 매달릴 듯 현음당에게 붙어 섰다. 차마 매달리지는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길 잃은 아이 같은 소녀를 굽어보며 현음당이 속삭였다.

이상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에 예민하다. 서란은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얼떨떨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거를 틈도 없이 속내가 튀어 나갔다. 잔뜩 경계하는 어조에 현음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시선을 낮추어 어린 서란과 눈을 마주한다. 그녀가 주름진 손으로 서란의 양손을 잡았다. 서란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서란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의 손을 감싸쥔 감촉이 선명했다. 궁녀들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체온인지.

어머니가, 떠올랐다. 머리가 멍해졌다. 더운 날씨 탓이다. 그리 우겨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이 그리웠다.

서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손을 빼내려 했다. 어쩐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음당이 꼼질거리는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현음당이 빙긋 웃더니 그제야 서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란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경계하며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현음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되어 있던 서안 앞으로 가서 앉았다.

현음당이 서책을 펼치고 읽어 내려갔다.

그것을 지켜보며 스물한 살의 유리서란은 기억을 되새겼다. 그녀가 현음당에게 말을 높이고 스승님이라 부르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운 음성. 서안 앞에 앉은, 꼿꼿한 여인의 등. 열일곱 이후로 보지 못했던 스승의 모습. 보고 싶었다. 그리움처럼 현음당의 등을 덮은 감색 저고리가 커졌다. 감색 어둠이 밀려와 사방을 적셨다.

어둠이 물처럼 흔들렸다. 그 수면 같은 흐름 위로 잎사귀처럼 기억들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중 유난히 새카만 것이 있었다. 서란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닿는 순간 손끝이 아렸다. 그리고 삽시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서란은 열네 살의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열네 살의 유리서란은 밀랍 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 겹겹이 드리운 호화로운 당의가 작은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주홍빛 눈동자는 불에 그슬린 것처럼 어두웠다.

마니식까지 남은 시간이 8년. 잠들지 못했던 시기. 불면증이 찾아왔었다. 매일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발자국처럼 느껴졌던 때다. 이 무렵 얻었던 불면증은 몇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이쯤 그녀는 초경을 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여인이 되셨다고.

월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혼자 침전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여인? 아이를 낳을 준비가 된 거라고? 그녀는 제 몸을 비웃었다. 그녀에겐 미래가 없는데 그녀의 몸뚱이는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 혼잣말을 하고서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그래, 무의미했다. 그녀의 모든 삶이. 그녀 자체가.

‘왜 사는 거지, 나는?’

서란은 문득 문갑 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 안 깊숙한 곳에 여울이 보내 온 서간을 모아 둔 서간집이 있었다. 보내지 못한 답서도 함께 정리해 두었다.

열 살에 결심했던 마지막 명령. 그 때에는 활기를 주었던 결심이, 지금은 지독하게 허무했다. 그걸 위해 앞으로 8년을 더 살아야 해? 이 의미 없는 삶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날들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