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유리서란(1)2016.06.23.
벚꽃이 피던 봄이었다. 엷고 푸른 하늘에 흰색에 가까운 분홍색 꽃이 그렁한 가지가 뻗어 있었다. 그 아래로 고운 여인의 얼굴이 유리서란을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이 또렷하다. 아마 그녀는 누워 있었던 것 같다. 몇 살 때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려다보던 이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눈가 여린 피부가 파르르 떨렸다. 따뜻한 손이 이마를 쓸어 주었다. 그녀가 속삭인다.
죽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막연히 알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어렸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델 것처럼 뜨거운 무언가를 생으로 삼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가만가만 그녀를 쓰다듬었다.
벚꽃이 휘몰아쳤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이 흐려졌다. 꽃잎이 뭉쳐 사방을 휘돌았다. 그것은 봉숭아 꽃잎으로 변해 그릇 안에 소복이 쌓였다.
아직 어린 아기나인들이 봉숭아 그릇을 놓고 다투었다. 신경전을 벌이는 듯하더니 곧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곱 살에서 열두 살 남짓한 아이들이 서로의 손가락에 찧은 꽃잎을 얹고 헝겊으로 둘러 실을 매 주었다. 벌써 조그만 손톱을 다홍색으로 물들인 아기나인도 있었다.
서란은 이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을 지켜보며 망설였었다. 내가 끼어도 될까?
제일 어린 아기나인이 발칵 화를 냈다. 이내 다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란은 그들의 다홍색 손톱이 부러웠다. 그녀도 물들이고 싶었다.
사실 가장 부러운 건 스스럼없이 노는 아기나인들의 관계였다. 같이 어울리고 싶었다. 마침 체통을 지키라 잔소리하던 보모상궁은 그녀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살짝 나섰다.
그녀가 꺼낸 말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기나인이 황급히 일어나 절을 했다.
아기나인들이 분분히 일어나 절을 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합창처럼 사죄가 울렸다. 그 서슬에 봉숭아 꽃잎이 들어 있던 그릇이 넘어져 굴렀다.
언니라 불렸던 아기나인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앞장서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가 눈짓을 했다. 다른 아기나인들이 얼른 물건들을 치우고 숨겼다. 어린 아기나인은 그것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서란은 멍하니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이의 얼굴과, 엎어져 버린 봉숭아 그릇을 보았다. 부드럽던 분위기가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걸었다. 등 뒤에서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란은 멈칫했던 걸음을 계속 옮겼다.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니 아렸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며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울먹이며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차오르는 눈물로 풍경이 흐려졌다. 안개가 차오르듯 부옇게 덮이다가 바람에 쓸려 나가듯 깨끗해졌다. 풍경이 변했다.
하얀 그릇. 조청에 절인 색색의 다식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연한 분홍, 짙은 초록, 하얀색과 개나리색.
마니는 계절마다 하늘에 제를 올렸다. 물론 마니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식이었다. 그 다식은 제례 상에 올라갔던 것이었다.
제례를 위해 차려입은 원삼은 무겁고 불편했다. 제단에 절을 하며 서란은 그릇 위의 다식을 내내 바라보았다. 참 예뻤다.
제가 끝나고 원삼을 벗었다. 나인들이 원삼을 내갔다. 그녀가 당의를 입는 것을 도와주던 어머니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뽀얀 다식이었다. 새겨져 있는 복(福) 자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벌어진 입 안에 다식이 쏙 들어왔다. 작은 다식은 어린 그녀에게도 한입거리였다.
오물거리던 서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았다. 그녀는 다식을 처음 먹어 보았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제례에만 쓰이는 줄 알았다.
어머니가 속삭였다. 서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니의 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됐다. 과자도 허락되지 않았다. ‘입에 단 것은 여의주를 흐리게 만듭니다’라고 상궁은 엄하게 말하곤 했다.
달콤한 다식, 따뜻한 품. 서란은 수줍게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엷은 분홍색의 다식이 입 안에 쏙 들어왔다. 문 너머에서 원삼을 치운 나인들이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우물거리며 그것을 얼른 삼켰다. 그녀는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렸다.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흐려진다. 나인들이 들어오는 대신 그 문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한 점 없는 하늘. 그 하늘 위로 꼬리를 단 연들이 날았다.
정월 보름이었다. 서란은 보모상궁과 마주 앉아 수를 놓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흑룡궁에서도 정월의 연날리기는 거르지 않았다. 왕족들이 후원에 모여 액막이연을 날려 보내고 연싸움을 했다. 상대적으로 궐의 외곽에 있는 마니전에서는 그 연들이 잘 보였다.
색색으로 하늘을 수놓는 연들. 높다란 담장 너머로 그것들이 자꾸 시선을 잡아끌었다.
보모상궁이 낮게 질책했다. 서란은 쥐고 있던 수틀을 내려다보았다. 지루했다.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보모상궁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서란이 가리킨 것은 오색으로 화려하게 칠한 방패연이었다. 어린아이의 것인 듯 값비싸 보이면서도 유난히 알록달록했다. 상궁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서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급히 물었다.
대강대강 대꾸하던 보모상궁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서란을 외면했다.
보모상궁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서란은 수틀을 아예 내려놓고 조르듯 말했다.
서란이 고개를 떨궜다. 보모상궁은 측은한 눈으로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서란은 여덟 살이었다.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을 먼저 배우고 있는.
서란이 화들짝 놀랐다. 보모상궁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녀가 꽃이 피듯 웃었다.
서란은 그늘 속에서 환하게 웃는 어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보모상궁이 슬며시 마주 웃었다. 그녀는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결국 연은 만들지 못했으며, 보모상궁은 바뀌었다.
왕은 마니전에 세세하게 신경을 쓸 만큼 부지런한 이가 아니었다. 세자가 손을 썼으리라. 사라진 보모상궁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새로 온 보모상궁은 절대로 그녀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꿈은 그녀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감아도 어둠이 오지 않았다. 풍경이 제멋대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아홉 살, 입춘을 앞둔 겨울이었다. 그 무렵 역병이 기승을 부렸다. 역병에 걸린 사람은 궐에 머물 수 없었다. 전염의 위험 탓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인들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서란은 보모상궁을 붙잡고 캐물었다.
상궁은 어물거리며 답을 피했다. 보통의 왕족이 상대였다면 경을 칠 태도였으나 서란은 마니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답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세자 유리천응 덕분이었다.
세자는 그녀의 생일마다 꼬박꼬박 방문했다. 그녀의 생일은 2월 초, 봄의 시작이라는 입춘이지만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시기였다.
그 해에도 세자는 마니전에 들렀다. 그녀보다 여섯 살 많은 그는 올해로 열다섯이었다. 그의 뒤에는 교룡 느루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세자는 눈대중으로 그녀의 키를 보며 말했다. 서란은 그 눈빛이 싫었다. 그녀의 심장을 가지기로 예정된 자가 그녀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섬뜩한 느낌이었다.
세자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서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세자는 한가롭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자가 턱짓을 했다. 뒤에 서 있던 느루가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꾸러미를 서란의 앞에 내려놓았다.
열어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안다. 매년 비슷한 물건이었다. 달고 호화로운 간식일 것이다. 여의주에 좋지 않다며 단 것을 금지하던 궁녀들도 세자가 준 간식은 허용했다.
더 어릴 때는 세자의 생일 선물이 마냥 좋았으나 그 의미를 아는 지금은 반갑지 않다.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모시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세자다. 형식상 마니전의 주인인 그녀나 마니에 대한 법도보다 세자가 위에 있었다. 그 달콤한 간식거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녀가 세자의 ‘물건’이기 때문에. 마니가 세자를 위한 여의주이기 때문에.
서란은 내키지 않는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다섯 살 때 서란은 저 말에 마니전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고 했었다. 나가 보고 싶다 졸랐다. 열한 살의 세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답했었다.
그가 발음하는 ‘마니’란 단어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서란은 그 후로 저 질문에 답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세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보모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세자의 귓가에 무언가를 길게 속삭였다. 세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란이 똑바로 세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도로 물러나 있던 보모상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세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세자의 주홍빛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아직 소년인 그의 입가에 잔혹한 흥미가 매달렸다. 세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보모상궁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차마 낯을 들지 못했다. 서란은 망연히 되물었다.
세자는 미약한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그녀를 관찰했다. 서란은 밀랍처럼 창백해진 채 굳어 있었다. 그녀가 꼼짝도 하질 않자 세자의 흥미가 식었다.
그가 더 볼일이 없다는 듯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서란은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다 못한 보모상궁이 억지로 일으켜 세울 때까지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과 수용뿐이었다.
새까맣게, 차오르던 절망.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죽음의 의미. 상실감. 그녀를 기다리는 미래에 대한 깨달음.
그녀에게 아홉 살은 그런 나이였다.
눈앞이 까맣게 차올랐다. 서란은 눈을 깜박였다. 정확히는 깜박였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밀물처럼 몰려오며 아득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보다는 앳된 목소리. 여울의 음성이다. 그것을 자각하자 어둠 속에서 확 하고 횃불이 타올랐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그녀는 공동 안에 서 있었다. 다른 기억.
열 살. 교룡을 택하러 왔던 날.
까만 이무기들이 멀찍이서 그녀를 보고 있다. 저마다 다른 생김의 그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눈빛만은 똑같았다. 저 마니가 나를 선택하지 않기를.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소년이 대답한다.
소년은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다. 거부하지 않았다. 마니인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입 안에서 그의 이름을 굴려 본다. 여울. 부드러운 어감. 굽이쳐 흐르는 물과 같이 혀끝을 구르는 발음.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다. 소년은 스스로 그녀의 것이 되겠다고 나선 이무기였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서란은 환하게 웃었다.
너에게 내 심장을 주겠다.
마니의 심장은 세자의 교룡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삶도, 그녀의 존재도 세자를 위해 쓰일 예정이었다. 서란은 그 운명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어디에 쓸지 결정했다.
맹약식을 마치고 마니전으로 되돌아왔다. 서란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의 기척에 온 신경이 쏠렸다.
‘내 교룡이다.’
세자와 마니의 법도도 어찌할 수 없는 그녀의 것이다. 기분이 들떴다. 함께 있고 싶었다. 같이 있으면 이 답답한 마니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을 했다. 세 번의 명령 외에는 자유를 주기로.
그것은 교룡을 고를 때가 다가오며 오래 고심한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무력한 서란으로서는 마니의 교룡이 되길 감수하는 이무기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자유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무기들은 보통 여의주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여울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서란은 그 눈을 보는 순간 그의 대답을 예감했다.
헛된 희망이었구나.
괜찮다. 다홍빛 봉숭아부터, 연을 거쳐,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꿈꿨던 것을 얻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녀의 삶은 늘 그녀에게 포기를 강요했다. 그녀는 이미 체념을 배웠다.
원한다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진심을 꿀꺽 삼켰다.
친해지고 싶었던 아기나인들도, 그나마 그녀를 측은하게 보았던 전 보모상궁도,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곁에 있으면 슬퍼지기만 하겠지. 그러니까.
상궁을 불러 그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라 일렀다. 그녀는 홀로 남아 생각을 했다. 세 번의 명령 중에, 마지막 것은 정해 두었다. 두 개가 남았다. 어떻게 써야 할까.
서란은 여울이 간 곳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는 떠날 것이다. 그녀도 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이 떠나고 싶었다.
마니전 밖의 세상. 그는 볼 수 있지만 그녀는 평생 보지 못할 세상. 혼이라도 그를 따라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보는 것을 그녀도 볼 수 있다면…….
시선 끝이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종이 뭉치에 닿았다. 그녀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가 보는 것을 그녀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이 첫 번째 명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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