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32화 (32/70)

32. 탈출2016.06.19.

기절하듯 자던 희나리는 몇 시진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폭우에 가까워진 빗소리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오가더니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결계’ 어쩌고 하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희나리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으나 다리 탓에 나가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야로 쪽을 흘깃 보았다. 소년은 기절했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희나리, 움직일 수 있나?”

막사의 천을 걷으며 고개를 들이민 온이 외쳤다. 열린 틈으로 비가 들이쳤다. 희나리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무리야, 당장은.”

“역시 그런가.”

흠뻑 젖은 온이 밖을 돌아보았다. 무척 당황한 모양새였다.

희나리는 침상 밖으로 다리를 빼내 일어나려 시도해 보았다. 허벅지의 상처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포기하고 도로 앉으며 온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여울이 쳐들어오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조금 전에 결계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고 주술사들이 보고했다.”

“뭐? 부서졌대?”

“아니, 부서지진 않았어. 그저 흔들렸을 뿐이야.”

“그럼 상관없잖아.”

“순간적으로 결계가 약해져서 축지술 같은 걸로 뚫릴 위험이 있으니 확인을 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

“여울은 그런 거 못 쓰잖아. 쓸 수 있었으면 도하 때 썼겠지. 걔가 주술까지 잘 쓰면 사기야.”

“그렇다면 왜 결계를…….”

“그냥 홧김에 부숴 보려다 실패한 거 아니야?”

희나리가 툴툴거렸다. 그녀의 말에 납득한 온이 약간 침착해졌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쪽으로 병사들 더 보내서 확인해 보라고 해.”

“가 봤자 이미 여울은 안 보일 것 같다만.”

온이 쓴웃음을 띠며 말했다. 희나리는 어깨를 으쓱이고 도로 드러누웠다.

“괜히 긴장했잖아. 난 다시 잘래. 너도 무리하지 마.”

“알았다.”

막사에서 나온 온은 찝찝한 기분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저 근처에서 강한 물리적 충격이 결계를 흔들었다고 했다.

부서지진 않았으니 희나리의 말대로 여울이 벗어났을 리는 없었다. 아마 시도만 해 보고 달아났으리라. 합리적인 추측이었지만 묘하게 불안했다.

새까만 새벽이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쏟아지는 비가 미묘하게 신경 쓰였다. 이무기가 불러들인 게 아닌, 자연적인 비인 건 확실한데도.

온은 여울이 손잡이로 후려치는 바람에 상처가 난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눌렀다.

“……기분 탓이겠지.”

그는 서쪽에서 시선을 떼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한 후 제 침상으로 돌아갔다.

*

비가 오는 것은 천운이었다. 그들이 남길 모든 흔적을 비가 쓸어 버릴 터였다. 직접 도술로 비를 불러들이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랬다간 교룡들이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

여울은 불안한 눈으로 서란을 내려다보았다. 자드락이 콧방귀를 꼈다.

“괜찮을 리가 있냐.”

서란은 장옷과 모포로 단단히 싸매진 채 자드락의 품에 안겨 있었다. 최대한 목이 움직이지 않도록 안고 있으나 이동하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흔들릴 터였다.

“바늘이 없어서 꿰매지도 못했잖아. 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열악하다, 열악해. 그러니까 난 절대 못 뛰어.”

“뛸 일은 없을 거다.”

“제발 그러길 빈다.”

탈출이라는 목표만 놓고 보면 천운인 비도 그녀의 상태를 고려하면 최악이었다. 겹겹이 둘러 놨어도 젖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체온이 떨어지거나 목에 충격을 주었다간 서란은 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산 속을 지나는 와중에 그녀의 숨이 끊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자드락과 여울, 둘 다 의도적으로 그 경우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드락은 느리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늘어뜨려진 서란의 팔이 조금씩 흔들렸다. 장승처럼 서 있는 여울을 지나친 그가 턱짓했다.

“이대로 있으면 더 안 괜찮아질 테니까, 별수 없지. 야, 빨리 앞장서.”

여울은 간신히 그녀에게서 눈을 뗐다. 그는 검을 쥔 채 동굴 입구로 다가가 가려진 넝쿨을 살짝 젖혔다. 기를 펼치고 사방을 훑었다. 돌아다니는 기척을 감지했다.

비가 내리치는 밤이라 인간이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둠 너머 먼 곳에서 가물가물 약한 빛들이 오갔다. 수색하는 병사들이 들고 있을 등불 빛이었다.

여울은 밖을 살피며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결정했다. 그가 자드락을 돌아보았다.

“잘 따라와라.”

“너나 잘해, 안 걸리게. 격하게 움직였다간 네 보주 목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니까.”

자드락이 농처럼 가벼이 대꾸했다. 여울은 전신에 차오르는 불안을 누르며 낮게 말했다.

“……가지.”

자드락은 유배지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라 무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서란을 안고 움직이고, 깔려 있는 병사들 사이로 길을 뚫는 것은 여울이 하기로 했다.

동굴을 나왔다. 검을 쥔 여울이 자드락을 흘깃 돌아보더니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뒷모습은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자드락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비에 금세 전신이 흠뻑 젖어들었다. 빗물이 서란의 얼굴에 몇 방울씩 들이쳤다. 그는 낮게 혀를 찼다.

“크윽…….”

“헉.”

억눌린 비명들이 풀숲 사이로 조금씩 들려왔다. 이무기 정도의 청력이 아니라면 비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소리였다.

비명 하나가 들릴 때마다 먼 곳의 등불이 흔들리거나 꺼졌다. 그 등은 잠시 후에 도로 켜져 다른 방향에 걸렸다.

자드락은 주위 상황에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만 움직였다. 서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만도 벅찼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여울이 소리 없이 나타나 한쪽을 가리켰다.

“이리로.”

“병사들, 죽였냐?”

“기절시켰다.”

“깨어나면 시끄럽겠군.”

“어차피 결계가 흔들리면 들킬 일이다.”

교룡들은 자드락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결계가 흔들려도 그들이 탈출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들이 알아챈다 해도 도리가 없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여울은 불길할 정도로 흰 서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다시 움직이는 그의 등에 대고 자드락이 물었다.

“등불은 뭐야? 왜 다시 켜?”

“불빛이 자꾸 줄어들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 나무에 걸어 두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네.”

여울은 대꾸 없이 사라졌다. 그에게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절박하겠지.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아는 자드락은 픽 웃고는 그가 가리켰던 쪽으로 움직였다.

숨이 흐려져 가는 마니를 안고 축축한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은 묘했다.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자드락은 간간이 멈춰 서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여울은 자드락과 서란을 계속 시야에 둔 채 어둠 속을 떠돌았다. 자드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모든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는 혼자였고 돌아다니는 병사는 여럿이라 쉴 틈이 없었다.

예상보다 이동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산 하나를 타넘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여울은 최대한 지름길로 자드락을 인도했다. 돌아갈 시간이 부족하다. 길이 아닌 산은 험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려 미끄럽기까지 했다.

“길이 뭐 이따위야.”

자드락이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암반이 그대로 드러난 내리막길이 보였다. 잡을 거라고는 중간에 비스듬히 솟은 바윗돌이나 나무줄기뿐이다.

그냥 뛰어내리면 쉬울 일이나, 그랬다간 서란에게 충격이 갈 터다. 그는 서란을 한 손으로 고쳐 안았다. 흔들리지 않도록 목을 고정했다.

자드락은 느리고 조심스럽게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이미 비에 젖은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발에 차인 돌조각이 굴러 떨어졌다.

간신히 바위를 돌아 내려가 다시 서란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드락의 미간에 금이 갔다. 목덜미의 붕대가 시뻘겋게 젖어들어 있었다. 내려오는 와중에 별수 없이 흔들려서 상처가 벌어진 듯했다.

자드락의 걸음이 조급해졌다. 그때 수풀 너머에서 별안간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쇼?”

“방금 달그락거리는 소리 못 들었소? 이쪽에서 났는데.”

병사 두엇이 우장(雨裝)을 걸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장대에 매단 등불이 불쑥 나무 사이로 들이밀어졌다. 어둠을 어룽어룽 밀어내는 빛이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자드락은 입 속으로 욕을 주워섬기며 뒤로 물러났다.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주술을 준비했다. 호흡을 죽였다.

‘무리하는 건 둘째 쳐도, 주술의 흔적을 남기는 건 좋지 않은데. 여울 이 자식은 어디 갔어?’

여울 외의 다른 자가 있었던 흔적이 남으면 탈출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릴 것이다. 기껏 결계를 벗어나자마자 잡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빗물이 찡그린 눈매를 타고 식은땀처럼 흘렀다.

“보쇼, 낙엽이 흐트러진 게 누가 지나간 것 같은데.”

등불을 들이민 병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짓했다. 동료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 딴 짓 말고, 이리 와 보라니깐!”

병사들은 밤중에 비를 맞으며 산을 헤매느라 지쳐 있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놀라 벌어진 입이 신음을 뱉어 내기 전에 검은 것이 그를 덮쳤다.

검은 그림자는 병사의 뒷목을 검집으로 쳐 기절시키고 손에서 미끄러지는 등불을 떨어지기 직전에 잡아챘다. 흔들리는 불빛 속에 여울의 모습이 설핏 드러났다.

그가 몰아쉬는 숨이 부옇게 허공에 흩어졌다. 젖은 머리칼이 엉망으로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성의 없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자드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곧바로 모포에 파묻힌 서란에게 꽂혔다.

“……무사한가?”

“일단은. 간 떨어질 뻔했잖아. 제대로 안 해?”

자드락이 안도하며 투덜거렸다. 여울은 등불을 근처 나무에 아무렇게나 걸며 물었다.

“결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쪽이 나은가?”

“저쪽. 기의 흐름이 약해.”

결계의 끄트머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울이 자드락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다.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보주께서는…….”

“안 좋으니까 빨리 움직여.”

자드락이 시큰둥하게 말을 끊었다. 여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사라졌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밤이 끝나 가고 새벽이 오고 있는데도 사위는 새카맣기만 했다. 젖은 낙엽이 진흙과 뒤섞여 펄처럼 발을 붙잡았다.

온몸은 젖었지만 반대로 입 안은 바싹 말랐다. 아득하게 긴 밤이었다. 마침내 결계 근처에 도착했을 때엔 모두가 몹시 지쳐 있었다.

“좋아, 여기로 하자. 이 근처 싹 치우고 와.”

결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의 그늘, 비교적 덜 젖은 곳에 자드락이 서란을 내려놓았다. 그가 나뭇가지를 꺾어들고 바닥에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울은 근방의 병사들을 하나하나 기절시키고 등불의 위치를 조정하여 나무들 사이에 걸었다. 돌아오자 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되었나?”

“그래. 이제 네 차례다.”

자드락이 뒷목을 주무르며 답했다. 그가 진 안에 선 채 서란의 맥을 잡아 보았다. 다행히 아직 괜찮았다. 그는 얕게 한숨을 쉬고 미리 챙겨 온 붕대로 만든 부적을 끄집어냈다.

자드락이 서란의 목에 그것을 다시 붙이고 붕대를 갈았다. 여울은 막막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무리를 한 자드락이 그에게 손짓했다.

“저리 가서 해. 여파 안 튀게.”

“축지 발동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발동 자체는 즉시 가능해. 결계 때리고 바로 와라.”

서란을 추슬러 안은 자드락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늦으면 버리고 간다.”

“……고맙다.”

여울이 돌아서며 말했다. 자드락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너한테 감사받으려고 하는 짓 아니니까 닥치고 해.”

여울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어둠 너머로 멀어졌다. 자드락은 흘깃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들이치는 비에 진은 벌써 흐려지고 있었다. 해가 뜰 때쯤이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둑한 새벽을 가르며 이질적인 바람이 불었다.

약간 떨어진 곳, 나무와 수풀 너머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기가 모이는 것에 휩쓸린 공기가 바람이 되고 있었다.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사선으로 휘었다.

“기 한번 무식하네.”

자드락은 중얼거리며 그쪽을 응시했다. 여울이 그 중심에 정자세로 서 있었다.

반듯하게 겨눈 검에 비가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투명하게 일렁이던 기가 과하게 밀집되며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달무리처럼 은은한 백색.

그가 반쯤 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결계와의 거리는 다섯 걸음 정도. 머리를 흠뻑 적신 빗물이 흘러내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긴 호흡이 젖은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소리는 없었다. 뱀은 본디 울부짖지 않는 짐승이다.

여울이 느리게 검을 움직였다. 흰 빛이 새카만 비 사이로 떠오른다. 간결한 선이 그어졌다. 하늘에서 대지로, 결코 빠르지 않은 동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닿은 하얀 빛이 번개처럼 명멸했다.

공기가 진동했다. 그 끄트머리가 할퀴고 지나간 대지가 갈라졌다. 빗물이 파문을 그리며 달아났다. 결계는 후려쳐진 북처럼 흔들렸다.

그 찰나를, 자드락은 놓치지 않았다.

종이를 접듯 땅을 접었다. 보이지 않는 공간과 공간을 접어 맞닿게 했다.

그대로 넘어가는 대신 딱 반 호흡을 기다렸다. 검을 긋자마자 결과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온 여울이 진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억지로 잡아매고 있던 거리를 놓아주었다. 주위 풍경이 먹이 번지듯 길게 늘어났다가 삽시간에 바뀌었다.

결계를 넘었다. 도착한 곳은 임천 방향 웅래산 중턱이었다.

자드락이 휘청거렸다. 그의 팔에서 미끄러지는 서란을 여울이 급히 받아 안았다.

자드락은 여울의 어깨를 짚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가 허리춤을 뒤적여 꺼낸 호리병을 열어 피를 벌컥 들이켰다. 쏟아지는 폭우가 입으로 함께 들어왔다.

유배지 밖에서 무리한 탓에 속이 뒤집혔다. 자드락이 잇새로 씹어 뱉은 욕이 빗소리에 묻혔다. 멀찍이서 천둥이 우르릉 울었다.

여울은 품에 안은 서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움찔 굳었다.

“달릴 수 있겠나?”

여울이 급히 물었다. 자드락이 미간을 구긴 채 무어라 말하려다 멈췄다. 장옷 속에 파묻혀 있는 서란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방금 갈았던 목의 붕대가 벌써 벌겋게 젖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 위로 차가운 빗물이 흘러내렸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미친. 역시 축지가 몸에 무리를 줬나.”

자드락이 이를 간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빗소리에 파묻힐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여울은 그것을 들었다.

서란의 상태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던 그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한 팔로 그녀를 고쳐 안는 것과 검을 뽑아 드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새파란 날이 빗줄기를 가르며 수풀을 겨누었다.

“저, 접니다요!”

기겁한 말이 들려왔다.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갓을 씌운 등불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울은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는 얼굴. 산의 호위무사인 박철호였다. 칼끝이 아래로 살짝 쳐졌다.

철호는 그것을 보고 긴장을 풀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오랜만입니다. 진짜 여기로 나왔구먼요. 도련님 용하네. 마차를 준비해 놨으니 이리 오시요.”

여울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서슴없이 철호를 따라가려는 그의 앞을 자드락의 팔이 막아섰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철호를 보았다.

“쟤 누구야? 왜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 있어?”

“아는 자다.”

“안다고 해서 믿을 수 있어? 배신할 위험은?”

여울이 그를 돌아보았다. 자드락은 실실 웃는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여울은 진중하게 답했다.

“내…… 벗의 사람이다.”

여태껏 산을 신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서란이 그에게 이것을 지적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망설임 없이 산의 사람을 믿는다. 흑룡강에서 산이 던진 밧줄을 잡았던 것처럼. 그러니 그녀의 말대로, 산은 그의 벗이었다. 여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드락은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으나 오래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서란의 상태가 급박한 건 그도 잘 알았다. 제 몸도 정상이 아닌 판이다.

자드락이 한숨을 내쉬고 비켜섰다. 눈치를 보고 있던 철호가 다가와 그들을 안내했다.

“이쪽입니다요.”

새까만 옻칠을 한 마차가 나무의 그늘에 숨어 있었다. 먼저 달려간 철호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빗물이 고여 철퍽해진 바닥을 가로질러 그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번개가 쳤다. 사위가 잠시 하얗게 빛났다. 그새 마부석에 앉은 철호가 고삐를 당겼다. 마차는 비를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부서질 듯 요란한 천둥소리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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