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살2016.06.09.
여울은 검을 놓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교룡들과 마주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니를 해쳐서는 안 되는 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자가 허락했어. 피치 못할 상황이면 마니를 죽여도 된다고. 대신 느루의 비늘을 줬거든. 그걸 부수면 느루가 와서 마니의 심장을 가질 거야.”
“그녀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여기서 제웅을 찌르면, 네가 당황해서 마니에게로 돌아가겠지. 우린 그냥 그걸 따라가면 그만이야.”
야로의 말이 이어질수록 여울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온과 희나리는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야로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이 판국에 뭘 어떻게 말려.’
희나리는 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궐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민가에서도 정월이면 액막이용 제웅을 만들어 땅에 묻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살이 주술사에게 되돌아가 상처를 입힌다. 액막이가 없다 해도 남을 저주한 업보로 주술사에게 반동이 온다.
그 탓에 누가 살을 쏘았는지 알아내기도 쉬웠다. 제웅은 단순하고 쉬운 저주라 이런 점이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 오히려 잘 쓰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마니가 숨어 있는 곳에 액막이가 있을 리 없으니 저주는 성공할 확률이 높긴 했다. 하지만 액막이 없이 성공하면 더 문제다.
마니의 여의주를 잃을 위험이 있다. 주인 없는 여의주는 불순한 환경에 있으면 오염되어 쓸 수 없게 된다.
마니를 저주해 죽이더라도 그 시체를 빠르게 회수하지 않으면 여의주가 오염되어 버린다. 여울이 마니의 위치를 끝까지 숨기면 기껏 지금까지 추적한 보람도 없이 그들의 보주가 마니가 되는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야로가 만약 제웅을 쓰겠다고 미리 말했다면 온이건 희나리건 뜯어말렸을 터였다. 그러나 여울이 보고 있는 지금은 제웅을 쓰지 말라고 지적할 수도 없다.
어쨌건 야로가 저것을 꺼낸 덕에 내내 달아나기만 하던 여울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온은 제발 야로가 위협하는 데서 그치기만을 빌었다.
여울 역시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이무기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므로 저 안에 서란의 머리카락이 있다는 건 사실이겠으나, 저주하겠다는 것은 자신을 잡아 두려는 공갈일 뿐이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진짜 살을 쏠 리가 없다. 그러니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주 본 야로의 눈빛이 불길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상치 않다.
야로가 단검을 들었다. 소년은 제 팔뚝을 단검으로 그었다. 제대로 저주를 하려면 진을 그리고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약식이라면 주술사의 피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
심지어 이무기의 피였다. 제물로 치자면 최상급이었다. 이무기의 피로 저주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야로 자신도 몰랐다.
살을 쏠 준비는 끝났다. 피를 머금은 칼날이 제웅의 목에 가 닿았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여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번개처럼 달려드는 그를 온이 급하게 가로막았다. 쾅 소리가 났다. 뒤로 밀린 온의 발이 땅을 긁으며 두 줄의 흔적을 남겼다. 낙엽이 물결치듯 밀려났다.
희나리가 진각을 밟았다. 그 서슬에 단풍이 물보라처럼 솟았다. 내디딘 땅에 깊숙한 발자국을 남기고 온몸의 힘을 실어 창을 찔렀다. 창은 기를 휘감고 화살처럼 쏘아졌다.
여울은 순간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온을 밀치고 물러나며 희나리의 창을 피했다. 다시 거리가 벌어졌다.
야로가 이를 악물더니 단검을 그었다. 제웅의 목이 약간 베였다. 피 묻은 지푸라기가 몇 가닥 허공에 흩날렸다.
소년은 악을 썼다.
“검을 놔! 안 그러면 진짜 벨 거야!”
검을 늘어뜨린 여울의 주위에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제멋대로 휘말려 공중을 떠돌았다. 흘러넘친 기가 침묵하는 주인을 대신해 맹수처럼 으르렁대며 사방을 긁었다.
야로는 단검을 쥔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제 딴에는 이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서로를 해치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여울을 살릴 방법.
피로 물든 단검이 제웅의 목을 조금씩 파고들었다. 여울의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그 순간 온과 희나리가 여울에게 달려들었다. 급작스레 몰아치는 기운에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낙엽이 쌓인 바닥을 뚫고 물줄기가 솟구쳤다. 그것은 야로의 손을 노리고 있었다. 여울이 끌어올린 지하수였다.
짐작도 하지 못했던 공격에 야로는 완전히 당황했다. 통제된 물줄기가 날카롭게 야로의 손등을 꿰뚫었다.
“아악!”
“야로!”
기겁한 희나리가 소년을 불렀다.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야로는 그 자리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단검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제웅을 쥔 손은 무사했다. 공격받은 건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그사이 여울은 온과 희나리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는 창이, 가까운 곳에서는 검이 맞물리며 조여들었다.
여울은 턱을 젖혀 목을 찌르는 검을 피한 후 허리로 들어오는 창을 검으로 내리쳤다. 아래로 푹 꺼지는 창대를 발로 밟아 고정하고 희나리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희나리는 창을 빼내려 했으나 힘에 부쳤다. 검에 베이지 않기 위해서 창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빈손의 그녀에게 여울의 칼날이 이를 드러냈다.
온이 희나리를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여울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검에 기가 어려 이글거렸다.
비스듬하게 맞붙은 검은 온의 검을 잘라냈고 여세를 몰아 그의 어깨까지 베었다. 반 토막 난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나무에 가 박혔다.
전부, 한 호흡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울은 희나리의 창을 밟고 선 채 피가 쏟아지는 어깨를 쥐고 주저앉은 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물러난 희나리가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온을 구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것을 감지한 여울이 눈만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새까만 눈.
살기가 저릿하게 피부를 타고 올랐다.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인다고 말은 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교룡들 중에 사람을 베어 본 것은 여울뿐이었다.
모두가 소룡전에서 자라나 보주 곁만 지키던 이들이었다. 살의를 느껴 본 적도 없었다. 인간보다 뛰어난 몸으로 압도적인 무공을 사용하지만 해 본 것은 대련이나 요마 처치 정도였다.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는 자의 살기는 희나리로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섬뜩함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리에 스륵 주저앉았다.
“제웅을 버려라.”
여울이 고른 호흡으로 말했다.
웅크려 신음하던 야로가 고개를 들었다. 꿰뚫린 손바닥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의 피로 뺨과 옷을 적신 채, 여울이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리가 내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야로는 이런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앳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배신감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런 감정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야로는 진심이었다.
손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자신을 이토록 아프게 만든 게 여울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마니가 뭐라고. 알고 선택했잖아. 곁에 머문 적도 없잖아. 버렸었잖아! 그런데 그깟 계집애가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중해? 네가 나를 진짜 공격한 거야?
그런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떠올랐다. 제웅을 쥔 소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싫어! 네가 버려!”
소년의 외침에 바닥이 들썩였다. 지하수가 다시금 터져 흘렀다. 여울의 도술이었다.
솟구쳐 야로의 손을 노리는 물을 희나리가 정신을 차리고 흩어 놓았다. 젖은 낙엽이 물방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았다.
“윽.”
주저앉은 채 팔을 든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도술로 시야에 보이지도 않는 깊은 곳의 물을 통제하기엔 부족했다. 여울의 공격을 방해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온이 반 토막 난 검을 치켜들었다. 여울이 곧바로 그것을 쳐냈다. 기가 실린 검이 맞부딪치는 힘에 온의 손아귀가 터져 나갔다.
피 묻은 검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바위에 부딪쳤다. 짜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아무도 그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터져 흐른 지하수를 놓고 여울과 통제권 다툼을 하던 희나리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도하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무공 자체나 도술도 더 뛰어난 판에 경험의 차이도 압도적이었다.
여울이 그들을 죽이려 들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마니를 지킨다는 제약이 없으니 그 정도의 차이가 났다.
여울은 여전히 야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입술을 뗐다.
“야로.”
담담한 부름이었다. 그 안에 담긴 마지막 경고를 모두가 알아차렸다.
여울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햇빛을 튕겨 내며 하얗게 빛나는 날이 피투성이가 된 온을 겨누었다. 칼날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온의 목젖에 닿아 고였다.
말 대신 그 행동이 선언하고 있었다. 제웅을 버리지 않으면 온을 죽이겠다고.
팽팽한 긴장이 공기를 죄었다.
야로는 물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여울이 자신을 다치게 한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온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가 싫었다. 저건 야로가 알던 여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게 마니 때문이었다. 여울은 분명 이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여자가, 여울을 부추긴 거다. 그 여자가 여울을 바꿨다. 그 여자가 있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야로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물이 흘러 질퍽해진 바닥을 더듬어 낙엽 속에 반쯤 묻혀 있던 단검을 도로 쥐었다.
불길한 예감에 여울이 물을 움직였다. 희나리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흩어 놓았다. 바닥에 흐르는 지하수를 그녀가 유도하여 온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여울의 정신이 그리 쏠린 틈에 온이 여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의 자세가 찰나 흐트러졌다.
그 짧은 순간에 온은 여울의 발아래에 깔려 있던 희나리의 창을 밀쳐 내는 데 성공했다. 제멋대로 날아가는 창을 희나리가 뛰어올라 잡아챘다.
여울이 검 손잡이로 온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온이 무너져 내렸다.
희나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착지하며 창날로 떠내듯 바닥을 긁었다. 젖은 낙엽이 공중에 흩날렸다. 시야가 가려졌다.
흩뿌려진 낙엽 사이로 창이 기를 담고 찔러 들어왔다. 여울이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기와 기가 격돌하며 요란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었다. 낙엽이 부스러지며 휩쓸려 나갔다.
시야를 가리던 것들이 사라지자, 창을 든 희나리의 어깨 너머로 야로가 보였다.
야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헐겁게 쥐고 있었다. 손에 뚫린 상처에서 흐른 피가 단검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붉은 칼날이 제웅의 목에 닿았다. 날은 너무나 쉽게 지푸라기를 갈랐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년의 손에서 제웅이 미끄러졌다. 인형의 잘린 목이 함께 떨어져 나뒹굴었다. 야로는 휘청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 순간 여울은 강렬하게 소망했다. 차라리 저 살이 자신에게 오기를.
그리고 그를 마주하고 있던 희나리는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주홍빛을 보았다.
*
서란은 깊은 동굴 속에 있었다.
여울이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내부에 지하수가 솟아 샘을 이룬 동굴이었다. 그녀는 서툰 손놀림으로 불을 피우고 가죽과 모포로 만들어진 자리에 앉았다.
여울이 솥에 고깃국을 끓여 두고 갔다. 첫날에는 그것을 모닥불에 데워 먹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배를 채워야 했기에 억지로 삼켰다. 그와 함께 먹었을 때는 그토록 맛있었는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후에는 건량으로 식사를 했다.
그저 숨어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동굴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지 사흘째였다.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웠다. 배가 고픈 것으로 겨우 시간을 쟀다.
멍하니 불을 지켜보며 여울이 수통에 담아 둔 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 있자니 요마나 짐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갖 불길한 생각만 떠돌았다. 무력감과 자괴감이 번갈아 차올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관심을 돌릴 게 필요했다.
서란은 하릴없이 가진 짐을 뒤적였다. 서간집과 은자 주머니, 지도 따위를 늘어놓다 보니 검은 비늘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건…….”
여울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것은 그녀가 내내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비늘에 그녀의 체온이 옮아 따스해질 정도로.
떨어진 것은, 자드락이 주었던 비늘이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여울의 비늘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여울의 것은 선이 날렵하고 먹처럼 검었다. 자드락의 것은 상대적으로 둥글었고 흑갈색에 가까웠다. 만져 보면 자드락의 것이 좀 더 유연하고 얇았으며 여울의 것이 단단한 편이었다.
‘같은 이무기라도 조금씩 다르구나.’
서란은 자드락의 비늘을 눈가로 들어 올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불빛에 비추어 보니 촘촘하게 새겨진 어떤 문양이 보였다.
자드락이 그것에 주술을 걸어 놨다고 했었다. 문외한인 그녀는 이게 무슨 주술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드락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가 제 보주의 것이라며 내미는 면사에 정신이 팔려 묻는 것을 잊어버렸다. 포기하고 비늘을 내려놓는데 돌연 목덜미가 뜨끔했다.
미미하던 고통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통증이 되었다. 불에 덴 듯이 화끈한 열이 통증과 함께 퍼져 나갔다.
서란은 당황하여 목을 더듬었다. 축축한 것이 묻어났다. 손을 펼쳐보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줄줄 흘렀다.
‘갑자기, 왜?’
이유 없이 생긴 상처였다. 그녀는 저절로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이렇게 큰 상처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 두렵다. 그녀는 부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프다.
시선이 저절로 여울의 비늘에 가 닿았다.
그를 부를까.
그녀는 다시 목을 매만졌다. 뜨끔한 통증과 함께 길게 갈라진 상처가 느껴졌지만 그리 깊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그냥 좀 심하게 베인 상처일 뿐이다. 그를 번거롭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 판단한 서란은 짐 꾸러미를 뒤졌다. 거친 손놀림에 그릇이 튕겨 나가 데구루루 구르다가 엎어졌다. 그녀는 간신히 약초와 붕대를 찾아냈다. 여울의 부상을 치료하는 데 쓰던 것이었다.
고약을 대충 떠서 목에 발랐다. 그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가 더 깊어졌다. 쓰라리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혀를 물고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혔다.
서란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통증이 머리를 요란하게 울렸다.
그 와중에 여울이 상처를 치료할 때 미동도 하지 않던 게 떠올랐다. 그의 부상은 이것보다 훨씬 심했는데, 그는 어떻게 이런 고통을 참은 건지.
“흐으…….”
더운 숨이 짧게 끊어져 튀어나왔다. 시간이 약간 흐른 후에야 겨우 참을 만해졌다. 정확히는, 통증에 익숙해졌다.
붕대를 쥐었다.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붕대로 상처를 압박하여 둘둘 감았다. 목이라 잘 보이지 않는데다 덜덜 떠는 손으로 매자니 자꾸 붕대가 미끄러졌다.
그녀는 악전고투 끝에 어설프게나마 응급 처치를 마쳤다. 들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축 늘어졌다.
손에 묻어난 피 때문에 고약이니 붕대니 전부 벌건 자국이 남았다. 온몸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그대로 한참 호흡을 고르자 간신히 생각할 만한 이성이 돌아왔다.
‘왜 갑자기 상처가 생긴 거지?’
그녀는 동굴 안에서 나간 적도 없다. 제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문득 한기가 들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전신에 얼음물이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시야가 점멸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곧이어 끔찍한 격통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지금까지는 전조에 불과했다는 듯 강렬했다.
“아.”
짧은 신음을 타고 핏물이 올라왔다. 목을 타고 올라온 핏물은 입술 밖으로 새어 넘쳤다.
더 이상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들어오는 공기가 칼날처럼 목을 후벼 팠다.
더운 피가 울컥 터져 나와 붕대를 적시고 가슴팍으로 쏟아졌다. 피가 빠져나가는 만큼 급속도로 몸이 식기 시작했다.
“컥, 컥” 하는 목 막힌 소리가 핏물과 함께 솟구쳤다. 심장이 부서질 듯 뛰었다. 저절로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서란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상태면 얼마 가지 않아 숨이 끊어질 것이다.
그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더듬더듬 피 묻은 손이 바닥을 훑었다. 손에 얇고 단단한 것이 잡혔다. 조금 전에 꺼내 놓았던 비늘. 그것이 누구의 비늘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이성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검고 하얀 얼룩 같은 것들이 눈앞을 물들였다. 머리가 통증과 막힌 호흡 탓에 핑핑 돌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력을 다해 비늘을 움켜쥐었다. 비늘에 힘을 주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득하게 길었다.
‘제발.’
영원처럼 늘어난 순간 속에서 톡, 미세한 소리가 났다.
손 안에서 비늘이 바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서란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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